지난 4일 제1야당 민주당은 김한길 의원을 새 대표로 선출했다. 김 대표는 소설가, 방송인 출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문화부장관을 지낸 4선 의원이다. 김 대표를 얘기할 때 그의 부친 얘기를 빠트릴 수 없다. 김 대표의 선친 김철씨는 혁신정당 당수로 유명한 인물이다. 실제 김 대표 자신도 경선과정에서 “선친처럼 박정희 대통령의 딸과 맞붙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김 대표가 선출되는 날 하루를 앞두고, 문성근 전 대표는 탈당했다. 문 전 대표는 잘 알려진 대로 종교인이자, 통일운동가인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다. 문 전 대표는 “당 대표 경선과정에서 국민참여가 퇴행했다”고 탈당 이유를 들었다. 


개인의 정치적 선택이야 자유이지만 대선 패배이후, 고통의 기간을 거쳐 나름 수습책을 마련해 가는 제1야당의 입장에서 전 대표의 탈당은 의외의 소식이다. 정치권 관측통은 벌써부터 야당 분열 즉 ‘정계개편’의 신호탄 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사진은 1970년대 중반, 유신체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보인다. 김 대표의 부친인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맨 오른쪽)가 문익환 목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함께 문 목사의 부친인 문재린(1896~1985)-김신묵(1895~1990) 부부(사진 오른쪽 3번째, 4번째)를 찾아 인사드릴 때 모습이다. 치열했던 시절,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철제 장롱앞에서 사진을 찍는 표정에서 일면 ‘천진함’을 읽을 수 있다.


사진속 인물의 행적만 따져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를 대부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큰 족적을 남겼다. 문 목사의 부친인 문재린-김신묵 선생은 일제시대 독립·교육·종교운동을 했으며, 유신시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대원로이다. 그의 아들 문익환 목사 역시 종교인이지만 우리의 민주화·통일운동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다.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 역시 1961년 민족일보 논설위원 등 진보언론 활동과 함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등 어려운 시기, 진보정당의 불씨를 지킨 인물이다. 71년 진보정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기도 했다. 당시 보수야당인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김대중 후보였다. 


1971년 8월 23일 김철 당수는 “북한을 사실상의 정권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기자회견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북한을 ‘괴뢰’로 부르던 시기에 그의 이런 용기는 지금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보다 훨씬 선도적이었다. 공당 당수의 기자회견을 문제삼아 구속했으니 말이다.


한참 후인 1989년 문익환 목사도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에서 “난 그들(북한)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라고 같은 주장을 했다. 무엇보다 문 목사는 1989년 3월 25일~4월 3일 북한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2차례나 회담을 가지는 대사건을 만든 주인공이다. 문 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당시 이 방북을 주선한 이재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현 새누리당 의원)도 같이 구속됐다. 사실 1980년대 문 목사는 종교인보다 통일운동가로 더 유명했다.


사진속 암울했던 유신시기,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민주회복 국민선언’ ‘3·1 민주구국선언’ 등을 통해 이땅에서 꺼져가는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불씨를 지켜냈다. 한참 뒤 진실화해위가 발굴한 당시 중앙정보부 문서에 의하면 장준하·윤보선·김영삼·김대중·김철·함석헌·문익환·백기완 등의 인물은 특별관리 대상자였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두 민주화·통일운동의 거목은 세상을 떠났고, 그 자식들이 정계에 입문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앞서니 뒷서니 제1야당 대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대표가 되기 직전, 다른 한 사람이 탈당하는 모습은 두 사람의 부친이 걸었던 길에 비추어 ‘의외’이다. 더구나 두 사람의 부친이 힘을 합해 저항했던 사람의 딸이 다시 최고 권력자에 오른 상황에서 말이다. 


일시적으로 감정이 상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인’(黨人)의 분열은 예나 지금이나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