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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46년전과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

엇그제,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선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대선 과정에 문제가 됐던 국정원 댓글과 NLL 관련 의혹으로 여전히 혼란과 반목이 거듭되고 있어 유감”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선이 끝난지 6개월이 됐지만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급기야 국방부가 가세하고 인신공격성 성명이 난무한다. 



고등학생까지 가세한 시국선언은 암울한 권위주의 시절(우리가 권위주의 시절이라는 구분은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까지로 본다-이는 민주화보상 관련 특별법에서 내린 유권해석이다) 지성인들이 양심을 일깨우는 용기로 인식됐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이 시국선언을 매우 두려워했다.



시국선언과 함께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촛불시위도 다시 등장했다. 시국선언이 지성인의 양심에 바탕한 용기라고 한다면 촛불시위는 보통사람의 비폭력 시위의 상징이다. 이 보통사람의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촛불시위는 지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심지어 대학생의 가두시위까지 나타나는 기류이다.



이런 선거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여야 원내대표 등이 서로 러브샷을 했다. 물론 힘들게 회기를 마치고 여야 의원들이 술한잔 하는 것에 뭐라고 할까.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46년전 1967년 11월 20일 당시 공화당 김재순 대변인(오른쪽)과 신민당 박영록 대변인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김재순 대변인이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과격하게’ 따르는 술을 받는 박영록 대변인은 싫지 않은 표정이다. 양주병은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여 폭탄주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이날 두 대변인은 큰 합의문을 발표했다. 196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7대 국회의원 선거인 6·8 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어진 3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원내 개헌선 확보를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다. 야당은 등원 거부투쟁에 돌입했고, 전국적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선거 후유증은 6개월이나 계속됐다. 



원구성이 안되면서, 국회없는 정부가 6개월이나 계속됐다. 결국 여야는 국회정상화를 위한 15일간 마라톤 협상끝에 13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당시 합의문을 보면 부정선거 특별조사위에 강제 수사권을 둔다, 정보기관 정치사찰 금지를 입법화 한다, 경찰관과 공무원의 선거간여 행위를 가중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등의 내용이다.



요즘 국정원 선거개입 국정조사와, 정보기관의 정치사찰 및 공무원(국정원)선거 관여, 게다가 경찰의 수사 방해와 폭로 무마 등의 사안은 46년이 지난 지금 논란과 일면 비슷하다. 게다가 ‘관영·민영방송을 여야 균등히 이용한다’는 합의사항을 보면 당시에도 편파방송 문제가 중요한 이슈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그런 6개월간의 선거 후유증을 마무리하는 합의문을 발표한 여야 대변인이 한잔 하는 모습이다. 6개월간 투쟁을 마치고 합의문을 발표한 후 시원한 맥주를 한 잔하는 것, 누가 나무라겠나. 그런데 지금은 합의는커녕 전면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러브샷을 했으니 욕을 먹는 것이다. 



물론 46년전 여당인 공화당은 이 합의조차 지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3선개헌을 단행했고, 심지어 헌법까지 위반하는 1972년 유신까지 자행했다. 이 합의문을 지키지 않은 유신정권은 1979년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참담한 것은 46년 전 선거후유증이 6개월간 계속된 것이나, 당시 선거후유증을 불러 일으킨 쟁점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46년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46년 전 비슷한 정치적 홍역을 지금 다시 겪고 있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