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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8장 조용수 죽음 이후

 

제 8 장

조용수 죽음 이후





1. 복권된 민족일보 관련자들


  5·16 쿠데타가 나고 조용수가 구속되면서 신문은 19일자를 끝으로 나오지 못했다. 공보처 장관은 5월 27일 민족일보의 정식 폐간을 통보했다. 신문사 간부는 모두 구속됐고, 기자를 비롯한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민족일보 간부의 구속이후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 도피해야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무배 전 민족일보 기자 증언>

  조용수의 사형 집행과 함께 민족일보는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조용수 가족은 당시 모두 감옥에 있는 주식회사 민족일보사 이사들의 도장을 일일이 받아 62년 2월 12일 주식회사 해산신청서를 냈다. 이것으로 민족일보는 법적으로도 완전히 사라졌다.

  신문사의 모든 자산은 압수됐다. 사실 민족일보의 자산이라야 지프 두 대, 책걸상 몇 개와 전화기, 그리고 얼마의 현금과 통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가족의 전 재산까지 몰수했다. 물론 이것은 판결에도 없는 불법이었다.

  당시 조용수의 가족은 각계에 진정을 벌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자체 감사를 벌여 이런 내용의 회신을 했다.

  “동 사건에 압수되었던 증거품은 몰수판결이 없다는 이유로 대검찰청에서는 62년 8월10일자 치안국에 압수품 인도지시한 바 있고 당부에서는 그 증거품의 출처를 구명한 결과, 일본 동경도 이하 불상지에 도피중인 이영근이가 전시 민족일보사에 제공한 범증을 포착, 이를 확인 입건 수사하였으나 피의자 이영근은 해외 도피중인자로 검거치 못하고 별첨목록의 물품을 입수하여 62년 10월 24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 압수품 첨부사건을 송치하였던바 동 군법회의는 62년 12월11일자 피의자 이영근 체포까지 기소중지 처분하고 압수금품중 제 2호 내지 제 28호는 피의자가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국가보안법 제 12조 제 2항에 의거 국고귀속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여기서 압수금품목록 제2호에서 제28호는 사무실 집기와 현금, 예금통장 등이다)

  이에 가족은 재산반환을 위해 눈물나는 싸움을 했다. 당시 가족이 낸 청원 일부를 보면 중앙정보부의 불법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 귀하

  본인은 5·16 군사혁명 후 소위 민족일보사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을 당한 조용수의 부친이오며 현재 민족일보사의 청산에 대한 법정 대리인입니다.그 당시에 자식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잃어버리고 겹쳐서 전 재산을 치안국에 압수당하였던바 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범죄자는 처형하였더라도 그 재산만은 환부하라는 발표도 있었고, 또 1962년 2월 중순경에 검찰청장으로부터 재산은 몰수치 않으며 법정대리인을 선정하여 동 재산 압수 환부신청을 제출하라는 통고에 의하여 변호사 조병진씨를 법정 대리인으로 선정하여 신청서를 제출하였던 바, 동년 8월 10일부로 대검찰청에서 별지첨부서류 사진과 같이 치안국장에게 그 재산의 환부하라는 지시명령서를 발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산을 5·16 혁명 직후부터 사실상 중앙정보부 유순하(劉淳夏)대위가 강압 몰수하여 그 재산 중 2대의 승용 짚차를 비롯하여 압수물 일체를 사용해 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치안국은 부득이 검찰청 지시 명령서의 뜻을 중앙정보부에 통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 중앙정보부에서는 치안국에 대하여 그 지시명령서를 자기들에게 넘기면 자기들이 즉시 환부하겠다는 회답이 있기에 치안국에서는 그에 응하여 해당서류 일체를 중앙정보부에게 이첩한 모양입니다.

그 후 동년 8월 24일에 중앙정보부 경리계장인 이 대위라는 분이 법정대리인 이병진씨를 즉각 방문하여 구구한 말을 하면서 동년 9월말까지 시간적 여유를 주면 꼭 환부하겠다고 하여 부득이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동 기간이 경과하도록 그 약속을 이행치 않기에 다시 독촉통고를 한 즉, 그 이 대위가 다시 방문하여 동년 10월말까지 한번 더 연기하여주길 간청하기에 부득이 다시 수락하였더니 뜻밖에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재산을 압수, 처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혁명검찰청에서 이미 원판결에 의하여 당 피난자인 조용수는 이미 범형 당하였고 기타 피난자들도 중형을 받게 되었으나 그 재산은 별지첨부 대검찰청의 환부지시명령서와 같이 그 재산을 압수할 법적 조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재산을 여하한 사유 없이 압수해 소모하였으므로 이에 환부가 불가능한 국면을 호도하려는 불법적 처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이 재산이 과연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압수되었던 것이며 또는 지금까지 국고에 보관되어 있는지 혹은 개인이 사용, 착복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하여 4년간 갖은 고통을 인내하며 중앙정보부에 서면진정도 수차 하였고, 간접교섭도 하였으나 금일까지 여하한 선처가 없기에 부득이 본의가 아닌지 알면서 1965년 3월 10일경 법무부를 상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던 바 재판진행상 중앙정보부의 압수이유서 기록을 등본하여 첨부 제출할 필요가 있으므로 검찰청에 등본신청을 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언사를 좌우하면서 당 기록을 제시하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재판이 진행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법치국가인 이 나라의 사법기관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을 이다지도 사정없이 짓밟으매…(이하 중략)

  서기 1966년   진정인 조판상

  별지 첨부서류

  1. 재산목록서

  2. 검찰청 재산환부 지시명령서

  3. 법정청산 대리인증

  4. 유순하의 발부 영수증


  그러나 이런 가족의 주장은 군사정부 중앙정보부의 개인 비리로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정식으로 압수한 것이 아니라 정보부 직원 개인이 중간에서 착복해 버린 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 없고, 중앙정보부 직원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했다. 아무튼 나중에 재산반환소송을 했는데 정보부의 회유와 협박이 심했다. 어떤 때는 나보고 사업을 하면 후견인으로 봐주겠다고까지 했다. 결국 1심에서 이겼는데 2심 과정에서 일부만 돌려받고 재판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조용수 동생 조용준 증언>

  조용수의 처 강씨는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국제 저널리스트상 수상상금 처리여부로 한번 편지를 보내고 소식이 끊겨졌다. 그 후 강씨는 재가해 일본에 살았다.

  망우리에 있던 조용수의 무덤은 1963년, 박진목에 의해 경기도로 옮겨졌고 조용수와 민족일보는 뭇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조용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 받았던 송지영은 67년 국제사면위(엠네스티)에 의해 동북아권 인사로는 처음으로 사면후원자로 선정됐다. 그리고 네 차례의 감형을 받아 69년 출감했다.

  그 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문예진흥원장과 통일원 고문,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광복회부회장을 거쳐 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고(82년) 이로 인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역시 사형을 선고받은 안신규는 그 후 민족통일촉진 중앙회 최고위원 등 민간 통일운동을 하다가 91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민족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양수정은 출감 후 야인으로 묻혀 흙과 술과 더불어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이민간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수 죽음의 고리역할을 했던 이영근은 그 후,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물론 오랜 낭인생활 끝에 서울에 오기도 했다. 이영근은 특히 김종필과 손을 잡고 북한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주는 등 박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통일일보 서울지사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영근은 1990년 5월 14일 동경 국립 암센터에서 별세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5월 24일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국민훈장 5단계 품격 중 최고 권위로 일반 국민에게 주는 훈장 중 최고의 훈장이다.

이영근의 상훈기록명부에 기재된 공적 요지는 다음과 같다.

“훈기번호 0000447 소속 통일일보, 훈종/훈격 국민훈장 무궁과장, 수여일자 1990년 5월24일 공적요지 민족지 통일일보를 창간, 대 조총련 투쟁과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향상에 기여(사망)

<행정자치부, 상훈기록 명부>


북한 간첩으로 조용수에게 돈을 지원해 민족일보를 만들었다고 사형을 선고한 우리 정부는 바로 그 간첩에게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을 추서한 것이다. 조총련 신문이라던 통일일보(통일조선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이후 제호)는 오히려 조총련 투쟁지로, 또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공헌한 신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똑같은 사건, 아니 실제적 주범격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았고, 종범격인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단지 29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한 나라에서, 그것도 국가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다음은 조용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인간 조용수를 평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김 철(전 사회민주당 위원장)

  “그의 일본에서 활동은 탁월했다”

  박진목(통일운동가)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나라걱정을 했다. 미국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친소주의자도 아니다. 단지 그는 조국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갈망했던 청년이다”

  송남헌(김규식 박사 비서,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 민족통일촉진회 대표최고위원)

  “임화수와 이정재는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 쳐가며 맹수처럼 울부짖어 처절한 느낌마저 주었다. 이들과 반대로 조용수는 아무런 반항도, 한마디의 말도 없이 조용히 교도관을 따라 형장으로 들어갔다.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처럼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평안해 보였다. 그의 걸음, 한 발짝 한 발짝에 무게가 실려 삶에 대한 경외감마저 자아내게 하는 숙연한 순간이었다. 나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신규(전 민족일보 상임감사)

  “훌륭한 구국의 이념을 가지고 명석한 머리를 가진 유능한 청년이다”

  안준표(통사당 사건관련으로 조용수와 같이 수감)

  “조용수는 1심 사형언도를 받고 나오는 데 나는 막 법정에 입정할 때 였다. 자신은 사형을 받았다고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이런 정치재판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방에 송지영씨가 있었는데 무척 초조한 표정이었다. 송지영씨는 밀수범과 잡범과 같이 지내면서 애써 초조함을 피하기 위해 책을 많이 봤다. 조용수와 평소에 알고 지냈는데 그는 그릇이 크고 보스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살아 있었으면 큰 역할을 했을 사람이다.

  오소백(전 민족일보 부국장. 전 중부일보 주필)

  “조용수는 순결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살아서 한국의 사회적 풍토는 잘 몰랐지만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다. 노래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사람으로서 그만큼 좋은 사람도 드물다”

  윤길중(민족일보 취체역, 국회부의장)

  “아까운 사람이다. 사람이 똑똑하고 신언서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또 패기도 있었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젊은이였다. 박정희가 그런 인재를 죽인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이강훈(전 광복회회장)

  “민단 도치키현 지부장이었다. 죽산 조봉암 구명운동으로 재일교포 22만명의 서명을 받는 데 앞장서서 일했고, 서명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조총련 돈을 받았다고 박정희가 죽였지만 원래는 나를 죽이려다가 조용수를 죽인 것이다. 부지런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불쌍한 사람이었다”

  이만섭(대구 대륜고 동기동창, 전 국회의장)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친구였다. 그의 죽음은 박정희 장군이 본인의 사상적 문제를 의식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아까운 인재였다”

  이회창(혁명재판소 심판관, 대법관, 국무총리, 대통령후보)

  “법정에서 그의 태도는 분명하고 차분했다. 용모도 준수하고 사형을 선고받기에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무배(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민족의 평화통일주의자였다. 개인적 성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싸우다 간 것이다”



2. 사라진 재판관계 기록


  조용수가 죽은 후  민족일보에 근무했던 사람과 민족일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일년에 한번 12월 그의 기일 남한산성 조용수 묘소에 모여 조용수를 추모하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들은 1987년쯤 민족일보에 대한 조그만 기록이라도 남기자며 소사(少史)를 만들고, 민족일보에 대한 연구모임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88년 언론에 대한 재갈이 풀어지자 점차 민족일보 복간문제까지 논의하는 수준이 됐다. 복간을 위한 구체적인 자금문제까지 거론됐지만 신문제작과 경영을 모르는 상태에서 의욕만 앞선 채 무산되고 말았다. <전무배 증언>

  이들은 우선 민족일보 영인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령 92호에 불과한 민족일보가 한곳에 온전히 보관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 민족일보 영인간행위원회가 만들어져 여러 해 동안 노력 끝에 민족일보의 ‘잔해’를 추스렸다. 당시 영인간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강만길(고려대 교수) 고 은(시인) 김금수(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 김낙중(민족통일촉진회 정책의장)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 김진균(서울대 교수·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 박태순(작가·민족문학 작가회의 이사) 박현채(조선대 교수) 송건호(한겨레신문사 사장) 양수정(전 민족일보 편집국장) 이상희(서울대 교수) 전무배(전 민족일보 기자) 전원중(전 민족일보 조사부장) 정동익(민주언론운동 협의회 의장) 조용준(전 민족일보 기획실장) 하일민(부산대 교수·4월혁명연구소 소장) 황 건(4월혁명연구소 연구위원)

  그리고 90년 9월13일, 여러 도서관에 나뉘어 보관 중이던 민족일보 지령 92호를 모은 영인본이 만들어졌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 선 후, 조용수의 가족은 민족일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다시 가리기 위해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진정서를 보냈다

  신한국 창조에 매진하고 있는 대통령 각하.

  본인은 지난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단죄됐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의 친동생 조용준(趙鏞俊)이라고 합니다.

  1961년 2월 창간된 민족일보는 장면 정권에서 인쇄중지라는 결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으로 계셨던 각하께서는 “이승만 정권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언론탄압이다. 민족일보가 장 총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인쇄중지 결정을 내린 것은 이승만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폐간했던 경향신문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민주적 언론관의 의지를 보여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민족일보 관계자는 5·16 쿠데타 후에 만들어진 혁명검찰부에 구속돼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민족일보 관계자중 유일하게 저의 형 조용수만 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때 같이 관계됐던 일부 인사는 그 후 고위직을 하는 등 정부로부터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미 30여년이 지난 지금, 저의 형에 대하여 새로운 주장을 한다고 해도 죽은 형이 살아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가문은 30여년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왔고, 또 연로하신 아버님은 가장 기대했던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아직까지 고생하고 계십니다.

  저희 집안은 경남 함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저희 외삼촌이 2, 3, 4대 민의원을 지냈던 하만복(河萬僕)씨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문민시대를 맞아, 동생인 저를 비롯한 집안에서는 형 조용수의 삶을 정리해 우리 가문의 명예를 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중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관계 서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정부기록보존소를 비롯한 각종 기관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재판관련 자료를 수소문해 본 결과, 그 서류는 영구보관 문서로 분류되어 서울지방 검찰청 자료관리실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혁명검찰부 보존기록내역: 순위1, 형호 1,권수 9 별1,보전질호 11 1-2)

  그러나 서울지방 검찰청 자료관리과에서는 이미 30년이 지난 재판관계 서류이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당사자는 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에 없는 상태이고, 그 가족이 그 자료의 열람 및 등사를 요청해도 불가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30여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그 민족일보 사건은  저희 가족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이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저희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진정서를 올립니다. 부디 서울지방 검찰청 자료관리과에서 그 당시의 기록을 열람, 등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진정인: 조용준 올림


  이 진정은 대통령과 서울지검장에 각각 보냈다. 그러나 청와대로부터는 민원을 서울지검에 보냈다는 회신만 왔을 뿐이고, 서울지검에서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나중에 서울지검은 민족일보 재판 관련 자료를 서고에서 확인한 결과, 당시 혁명재판소에서 판결한 모든 기록이 보관돼 있지만 유독 민족일보 사건 기록만 없다고 확인했다.

서울지검은 외부로 대출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출관계 서류가 없어 어디로 대출됐는지, 아니면 폐기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문서 담당자는 원래 규정대로라면 영구보관문서로 보관되어야 했을 문서라고 밝혔다.

민족일보사건 기록만 사라진 것이다. 누가 언제, 또 무엇 때문문에 민족일보 기록만 빼돌린 것인가.

  1995년 민족일보와 조용수 관련 자료를 발굴해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이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간행됐다. 이 책은 조용수에 관한 최초의 종합 연구서로 조용수가 언론사(言論史) 혹은 정치사에 재평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3. 국내 첫 공식 추도식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한 것으로 평가됐던 이회창 후보가 낙선하고 야당인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이것은 우리 헌정사상 투표에 의해 이뤄진 첫 정권교체였다. 그동안 반정부 운동 혹은 소위 혁신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에겐 정말 꿈이 이뤄진 것이다.

  특히 새 정부는 과거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재검토, 명예회복과 보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민족일보와 관련된 인사들은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보다 적극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관계자들은 우선 공식 추도식을 갖는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공식 추도식은 조 사장 사후 62년 일본에서 열렸을 뿐 정작 국내에선 한번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추도식은 한국기자협회, 한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후원하도록 해 적어도 언론분야만큼은 그의 복권을 알렸다.

  그해 ‘한국기자협회보’와 언론노동조합연맹 기관지인 ‘미디어오늘’에 민족일보 사건 조용수 사장 추도식 및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식 알림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1961년 5·16이후 소위 혁명재판소에서 처리된 민족일보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언론 필화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불법. 탈법적 재판을 통해 사실이 조작된 만큼 이 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위원회 준비위를 구성했습니다. 아울러 이 사건으로 희생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추도식이 열립니다. 진상규명위 발족은 추도식 장소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준비위원장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민족화합운동연합 상임공동의장) 준비위원 강신옥(변호사) 김금수(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병걸(한국지도자육성재단 이사장) 김봉우(민족문제연구소장) 김삼웅(대한매일신보 주필) 심재택(전 말지 사장) 전무배(전 민족일보기자) 전창일(민화련 상임공동위원장) 조용준(유족 대표) 최자웅(성공회 신촌성당 주임신부). 후원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기자협회보’ 및 ‘미디어 오늘’ 1998.12.21>


  1998년 12월 20일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중턱에 있는 조용수 묘소에선 공식 추도식이 처음으로 열렸다.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마련한 이 추도식은 그동안 숨다시피 하며 가져왔던 조 사장의 추도식이 비로소 공개되는 자리였다. 또 이 자리는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본격 출범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조 사장에 대한 약력 발표 이후 김자동 위원장은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조 사장의 묘소에 모인 것은 조 사장에 대한 역사적 존재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하지만 민주화명예회복 대상을 1969년 3선 개헌 이후 것만 다루기로 했는데 이것은 연립정부라는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사실 8·15이후 것을 다뤄야 하지만 최소한 4·19이후부터 지금까지 재심이 이뤄지는 특별법이 통과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12월 의문사규명 특별법과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에 관한 특별법을 각각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 제정 당시 국무총리가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5·16쿠데타세력의 핵심일 뿐 아니라 바로 민족일보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이끈 핵심 인사였다. 당초 이 법은 5·16쿠데타 이후 사건부터 적용하도록 돼 있었지만 총리직에 있던 김종필은 이 특별법 시한을 자신이 총리에서 물러난 1969년 8월7일 소위 3선 개헌 발의일 이후 사건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법안은 김종필씨의 의도대로 만들어져 1961년 5·16이후 1969년까지 9년간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예회복의 공백기가 됐다. 원희복, 몰(沒)역사적 시대구분, 정동탑, 경향신문 2002년 12월19일자 참조>


  나이가 가장 많아 제일 먼저 추도사를 하게 됐다는 신창균 선생(범민련 상임고문)은 차분한 어조로 추도의 말을 이어 나갔다.

  “조 선생은 통일을 위해 민주, 자주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 불행히도 군사 쿠데타 무리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남북분열과 민족분단의 이승만이 학생 4·19혁명에 축출된 후 4·19세력이 기필코 집권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과거 돈 많은 기득권 세력이 집권했다. 내 걱정은 현 자민련과 국민회의 연정은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연정으로 민주개혁과 자주통일을 완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장면 정권에서 데모규제법은 저지했지만 그 사람들이 집권하자 오히려 더 탄압했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자주민주통일 세력을 간첩이라는 멍에로 몽땅 잡아갔다.

  조용수 동지가 민족일보를 창간할 때 유명 인사는 물론, 훌륭한 기자도 많아 민족일보는 민주 자주 통일세력의 공동의 신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박정희가 조용수를 때려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미국 사람 성미에 맞추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인사를 체포했고, 최백근씨와 조용수 동지는 나라를 위해 통일을 위해 제물로 바쳐졌다.

  조 동지가 무엇을 원했나. 민주, 자주, 통일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 7천만이 원하는 자주, 민주, 통일을 제단에 받쳐진 것이다. 바라 건데 추모하고 공적을 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용수 동지의 영혼이 가장 기뻐하는 것, 이 자리에서 새롭게 민주 통일 자주를 위해 실천을 결심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하면 조용수 동지는 껄껄 웃을 것이다. 그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조 사장과 일본에서 같이 활동하던 윤수길은 37년 만에 조용수를 만났다. 그는 차디찬 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흐느끼며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저 영광스런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였습니다. 조 사장께서는 민족일보를 창간하시어 민족통일의 기치를 놀이 치켜들었습니다. 한국의 반민주, 반민족세력이 궁지에 몰리자 박정희 일파는 5·16쿠데타를 감행하였으며 조 사장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의 가당치도 않는 누명을 씌워 국내의 민주유지와 IPI, 국제 PEN 등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조 사장을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조 사장의 영전에 굳게 맹세 드립니다. 첫째 조 사장에게 씌워진 부당한 누명을 말끔히 씻어 버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둘째 조 사장이 못다 이룬 민족통일의 과업을 위하여 굳건한 바탕을 마련하도록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광범위한 민주시민세력과 연대를 모색하여 나가겠습니다. 조용수 사장의 고위한 영혼이시어 그러면 고이 잠드소서. 1998.12. 20. 친구를 대표하여 윤수길 올림”


  강신옥 변호사도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했다.

  “쿠데타 이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판결문, 특히 조 사장의 판결문을 검토해 봤지만 증거 없이 사법살인 했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큰 분노를 느낀다. 이 사건은 조작됐고 재심절차를 밟아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문제는 당시 수사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조 사장이 애국자이며 나라와 통일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정사에 남기기 위해 노력하자”

  공식 추도식을 마친 참석자는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식을 가졌다. 진상규명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표위원장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민화련 공동의장) 공동위원장 전무배(전 민족일보 기자·새누리 출판사장) 공동위원장 이완덕(민화련 이사) 공동위원장 진병호(민화련 공동의장) 대외협력위원장 도광호(4·19 혁명회 상임의장) 법률위원장 강신옥(변호사) 홍보위원장 원희복(경향신문 기자) 사무·재무위원장 조용준(유족 대표)

  <고문> 김병걸(한국지도자육성재단 이사장) 김삼웅(대한매일신보 주필) 김병태(중앙대 교수) 김상근(민주개혁국민연합 상임대표) 민숙례(이종률 교수 미망인) 박진목(통일운동가) 박용길(통일운동가) 리영희(언론인·한양대 명예교수) 서인석(전 국회의원) 신창균(범민련 명예회장) 오소백(서울언론인클럽 회장·전 민족일보 사회부장) 오정수(전 언론인) 윤길중(전 국회부의장) 윤수길(재일교포 출신 자유업) 이기형(시인·민족운동가) 이만섭(전 국회의장) 이건호(전 고려대 교수·전 민족일보 논설위원) 이종린(범민련 상임부의장) 이해동(한우리교회 목사) 전창일(민화련 상임공동의장) 정규근(전 민족일보 전무) 조규진(전 민족일보기획실 근무) 조동필(전 민족일보 논설위원) 조만재(삼균학회 회장)

  <지도위원> 강만길(고려대 교수) 곽태영(사회운동가) 김금수(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봉우(민족문제연구소장) 김정태(중국문제연구소장) 김재성(대한매일 부장) 김한길(국회의원) 박현서(한양대 교수) 서경원(전 국회의원) 서준식(인권운동가)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석규관(사회운동가) 안용수(고 안신규 장남) 연현배(민화련 사무총장) 이만열(숙명여대 교수) 이창복(민화련 감사) 이흥록(변호사) 장석진(전 민족일보 기자) 장영달(국회의원) 전기호(경희대 교수) 정운현(대한매일 기자) 최자웅(성공회 신부) 추영현(전 언론인·민화련 공동의장)

  진상규명위원회는 1999년 2월5일 재심청구를 위해 강신옥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위임하는 등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재판관계 서류가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당초 판결을 뒤집을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2001년 12월 8일 진상규명위원회는 조용수 40주기를 맞아 관련 학술대회를 마련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원희복 경향신문 기자의 조용수에 대한 약력 발표에 이어 홍석률 박사는 “당시 민족일보가 주도한 통일논의나 2대 악법투쟁은 당시로선 일반민 중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중적 주제로 이를 용공으로 몬 것은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홍 박사는 또 조용수가 용공혐의를 받게 된 빌미가 됐던 ‘혁신세력’이란 용어와 관련, “수구 보수 세력과 대칭된 개념이었을 뿐 다양한 세력이 망라된 집단이었다”며 “쿠데타 세력이 조 사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상범 동국대 교수는 “민족일보사건은 쿠데타 세력이 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소위 사법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재심청구를 통해 명예를 회복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 교수는 “조 사장 처형은 전형적인 빨갱이몰이의 결과”라며 “당시 민족일보사건 재판에 심판관으로 참석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촉구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철호 교수(여수공대·법학)는 “당시 조용수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판결이 뚜렷한 증거 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재심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사학)도 “현대사 교육이 크게 부족해 현재 젊은 세대들은 민족일보는 물론 조용수 사장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언론이 이런 문제를 여론화하긴커녕 묵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성유보 신문개혁국민행동 본부장은 “현역 언론인들이 참석하지 않아 유감”이라며 “바로 이런 상황이기에 독자와 시청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언론개혁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학술대회는 권재현, ‘부활하는 민족언론인 조용수’ 민족일보 진상위학술회의 재조명작업, 경향신문 2001.12.12자에 자세히 보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