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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3·15 부정선거’에서 ‘구로구청 사태’까지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0)

’3·15 부정선거’와 ‘구로구청 사태’의 교훈


드디어 ‘최악의 단어’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 바로 ‘3·15 부정선거’라는 단어이다. 3·15 부정선거란 1960년 3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이 4선 장기집권을 위해 자행한 불법선거를 말한다. 결국 이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쫒겨갔다. 선거관리 책임자였던 내무부 장관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런 사상초유의 부정선거를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 비유했으니 새누리당과 청와대가 발끈 한 것이다.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은 23일 흥분한 표정으로 “민주당은 금도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말했고,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도 “지난 대선을 3·15 부정선거와 비교한 것은 대국민 흑색선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청와대에 공개서한을 전달한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3·15 부정선거’라고 규정한 것도 아니고, ‘3·15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기 바란다’는 데 되새기기 싫은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대통령 선거 후유증은 ‘3·15 부정선거’ 말고도 여러번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도 관권 선거가 횡횡했다. 아예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마저 박탈해 버렸다.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이후부터이다. 


16년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는 이 선거는 야당의 선거무효 선언과 폭력 진압과 대규모 사법처리라는 큰 후유증을 낳았다. 사진은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일 밤 학생·시민의 모습이다. 지금처럼 촛불을 들지는 않았지만 ‘구로주민 똘똘뭉쳐 부정선거 박살내자’는 구호가 선명하다.


흔히 ‘구로구청 사태’로 기록하고 있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유증도 관권선거에서 비롯됐다. 구로구청 사태는 구로을 선거구에서 우편 투표함이 부당하게 반출되는 것을 시민이 발견, 이를 사수하면서 시작됐다. 인터넷은 물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없던 시절, ‘자신의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소문이 이어지면서 시민·학생들이 구로구청에 몰려와 2박3일간 농성을 계속했다.


결국 정부는 헬기와 무술경찰을 동원, 대대적인 폭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이 구청 옥상에서 떨어져 반신불구가 되고, 구청 지하에는 구타당한 학생들의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강제 진압과정에서 6~7명이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구로구청 사태는 학생 620명, 시민 414명이 연행되고, 208명이 구속되는 후유증을 남기고 끝났다.


이후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관리에 대한 불법 논란은 별로 없었다. 사진속 구로구청 사태는 아마 마지막 관권선거 논란 사례가 아닌가 한다. 특히 정보기관·경찰의 선거개입 논란은 거의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들어 선관위 홈페이지를 디도스 공격하는 전대미문의 선거관리 부정논란이 벌어졌지만 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야당을 비난하는 인터넷 댓글공작을 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경찰 고위층이 이 사실을 수사하는 경찰에게 축소·은폐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진 속 구로구청 사태를 야기한 ‘선관위 투표함 규정외 반출 논란’보다 훨씬 조직적이며 은폐된 선거범죄이다. 


이에 국민의 분노가 커지면서 촛불집회는 8차, 9차로 이어지고 점점 그 참가인원은 늘어나고 있다. 대학교수, 성직자, 그리고 언론인, 문인까지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촛불집회와 차원이 다르다. 그 때는 쇠고기 수입, 대미 통상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국민의 기본권, 민주주의가 침해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앞에는 국회의원의 단식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나와는 무관한 일’로 무시하고, 정치권은 정쟁만 난무하고 있다. 26년전 구로구청 사태처럼 천여명이 연행되고 수백명이 구속돼야 풀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