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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25년 전 보도자료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3)

25년 전 보도자료

 

기자에게 보도자료는 하루를 일용할 양식이다. 하지만 보도를 필요로 하는 측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대부분실적을 부풀리고, 문제점을 숨기는 속성이 있다. 게으른 기자에게 보도자료는 급식과 같지만 부지런한 기자에게는 허탈한 일이다. 그래서 유능한 기자는 보도자료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보도자료에는 반드시 몇월 몇일 몇시부터 보도될 수 있도록 협조바랍니다라는 엠바고 해제시점이 표시돼 있다. 실시간 보도되는 인터넷 매체가 많은 탓도 있지만, 대부분 제공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타이밍, 즉 홍보는 시점이 지나면 가치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제공>


위 사진은 1989124, 민가협(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람 가족의 모임) 회원들이 당시 야당 평민당사에서 농성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조작된 간첩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식과 남편에 대해 야당이 국회차원에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추운 겨울, 난방이 꺼진 사무실에서 농성하는 어머니, 누님들의 모습이 눈물겹다.


그리고 다음 사진은 당시 민가협 회원들이 농성에 들어가면 당시 기자들에게 배부한 보도자료이다.(당시 기자가 받아 보관하던 자료집 안에 보도자료가 있더군요) 자료는 ‘5공 청산은 간첩조작도 청산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타자기도 아닌, 손으로 써 복사한 것이다.



 

엉성한 이 보도자료는 당시 복역 중인 장기 구금(7년 이상) 양심수 216명의 사건별 유형과 연도별 통계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진짜 간첩은 50~60년대 남파 공작원이고. 70년대 이후에 남파 공작원은 사라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난 간첩들, 이를테면 납북어부 사건이나 재일동포 간첩사건 등은 대부분 조작된 가짜 간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만들어 같이 배포된 자료가 바로 민가협 산하 장기수가족협의회가 만든 간첩은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라는 자료집이다.



 

이 자료집에는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수감된 사람들이 어떻게 연행돼 고문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내역이 빼곡히 적혀있다. 공소장과 판결문의 허구와 가족들의 호소문과 탄원서, 편지글, 재판에서 진술 및 상고이유서 등이 실려 있다.


이 보도자료의 결론은 ‘70년대 이후 간첩은 대부분 혹독한 고문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임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확신은 이후 진실화해위원회나, 재심 등을 통해 옳았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낸 세금인 국가예비비(법무부 혹은 국방부)로 그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있다.


이 자료는 또 왜 간첩이 조작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반공을 위해 자유도 민주도, 인권도 희생돼야 한다는 경직된 반공 지상주의, 북으로부터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궁지에 벗어나기 위해 많은 간첩사건을 필요로 하는 정권의 부도덕성, 수사관들의 포상욕과 진급욕, 이런 것들이 간첩조작이 자행되는 이유하라고 분석했다. 사실 이 대목은 영화 <변호인>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그리고 아래 책은 국정원이 자신이 간첩을 조작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 참회록을 무려 6권의 전집으로 남긴 기록이다. 조작한 기관 스스로 이렇게 방대한 참회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간첩조작은 누구도 부인못할 진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25년 전 이 엉성한 보도자료와 자료집은 매우 정확하고 신뢰성 높은 보도자료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유력언론은 이 보도자료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자는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된 세련되게 포장된 경찰과 검찰, 안기부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썼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결정적 증거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증거로 제출된 사진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중국의 출입국 증명서를 조작해 충격을 주고 있다. 조작 사실이 폭로되자 검찰은 국가정보원에 책임을 돌리고, 국정원은 외교부 탓을 하는 등 총체적 국가기관이 조작에 개입된 사건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 사건은 25년 전 민가협 보도자료 처럼 간첩이 만들어지는 것임이 여전히 진행 중인 사안임을 보여준다. 솔직히 지금 벌어진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남매간 혈육의 정을 유린하고, 타국의 공문서까지 위조해 외교문제까지 야기한 사건이다. 이 사안은 25년 전 자료집에도 나오지 않는 훨씬 악의적이며, 훨씬 국제적으로 진화된 조작사건이다.


엠바고 표시 없는 25년 전 엉성한 보도자료가 지금에도 유효한 자료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기자들은 누가 제공한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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