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이 있다. 판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고 구구한 변명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판결은 선배 법관에 의해 검증되고 또 변경된다. 거꾸로 후배들에 의해 검증되는 경우도 많다. 권위주의 시절 자행된 시국·정치재판은 요즘 후배들에 의해 대부분 무죄로 뒤바뀌고 있다.

또 법관의 판결은 사회적으로 계속 검증되고 역사적으로 평결된다. 특히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국·정치사건 판결은 더욱 그렇다. 1959년 진보당 조봉암 당수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김갑수 판사(후에 대법관까지 지냄)는 죽기 직전까지 40여년 전 자신의 판결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1961년 혁명재판소에 차출돼 배석 심판관으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판결문에 ‘서명’만 했던 이회창 판사(후에 대법관을 지냄)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대선 선거전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논란이 됐다. 결국 이회창 대선후보는 “생애 가장 안타까운 판결”이라고 40년 전 자신이 내린 판결이 오판임을 시인했다.

정치적 판결을 끊임없이 검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 조봉암의 진보당 판결이나 조용수의 민족일보 사건 모두 후배 판사에 의해 판결이 뒤바뀌었다. 정치적 판결에 대해 끈질긴 검증을 거쳐 역사적 평결을 내리는 작업은 언론이나 학자, 역사가의 임무이기도 하다.

9월 11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판결에 항의해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 시민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법학자들 반응 냉담, 각종 패러디 유행

최근 서울중앙지법이 내린 판결을 놓고 정치·사회적으로 치열한 논란이 일고 있다. 9월 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1부 이범균 부장판사(이보형·오대석 배석판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은 무죄,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서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문제는 국정원 직원의 정치개입을 금지시킨 ‘국정원법은 위반했지만, 선거법은 무죄’라는 판결이다.

이 재판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여부를 가리는, 다시 말해 정권의 정통성이 걸린 매우 정치적인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초기부터 검찰의 특별수사팀이 수사 도중 공중분해되고, 검찰총장 찍어내기가 벌어지는가 하면 법무부 장관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던 것만 봐도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부장판사 역시 이 재판의 정치적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부장판사는 ▲국정원의 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이 자행한 특정 정책에 대한 지지·반대활동이 공직선거법에 의한 ‘선거운동’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이 평상시에도 계속·반복적으로 실시했으면 선거운동이 아니다 ▲선거운동이라는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는데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공직선거법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인 법학자는 거의 없다. “박근혜 정부가 탄생한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됐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팽개친 판결이다.”(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원이 공직선거법 위반의 무죄와 국정원법의 유죄, 그 유죄와 집행유예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책을 세우고 그에 맞는 논리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정승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5년간 국정원에서 강의를 했던 김계동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교수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치와 선거를 분리해서 볼 수 없다”면서 “민주주의 원리를 모르는 재판관은 정치가 무엇인지부터 공부를 새로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조롱 수준의 패러디가 유행하고 있다.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든가, ‘성폭행을 하면서 ‘사랑해’라고 얘기했으니 강간은 아니다’ ’(축구선수가) 상대의 귀를 깨물었는데 반칙은 아니다’ ‘돈봉투는 받았는데 비리는 아니다’ 등의 ‘~는 했지만 ~는 아니다’라는 패러디가 이어지고 있다.

급기야 동료 법관까지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는 사법부 내부 전산망 코트넷에 올린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에서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궤변이다”라고 비난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범균 판사의 원세훈 판결은 정의를 위한 판결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인가”라고 묻고서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고 일갈했다.


진보적 판결로 ‘디딤돌 판결’ 선정도
대법원은 이 글을 삭제하고 김 판사를 징계할 움직임이다. 이에 또 다른 현직 판사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징계를 비난하고 나서 사법파동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과연 이범균 판사는 승진에 목을 매고 정권에 정당성을 안겨준 ‘소시민 판사’인가, 아니면 법과 양심에 따른 소신판결을 한 것인가.

그는 서울 출신이다. 경성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사법시험 31회.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강기중 변호사(28기), 김우진 서울고법 부장판사(29기)보다 고시는 늦었다. 그는 사법연수원 21기를 수료하고 1995년 부산지법에서 판사를 시작했다. 2005∼2007년 양승태 대법관(현 대법원장)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여주지원장이라는 법원 행정경험도 잠깐 쌓았다. 지난해 2월 선거전담 재판부로 매우 정치적인 자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를 맡았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이범균 판사는) 동기 중 선두주자는 아니지만 나름 법리가 정확하고 재판능력이 있는 정통 판사로 분류된다”면서 “조직을 이끈 여주지원장을 했지만 특별히 정치적 감각은 없는 판사”라고 평가했다. 그의 과거 판결을 보면 약간 보수적 성향이지만 특별히 여권에 편향되거나 논란이 된 적은 별로 없다.(상자기사 참조) 특히 선거전담 재판부로서 ‘무죄’를 많이 선고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특정 사건에서 매우 진보적 판결을 한 경우도 있다. 이 판사는 지난해 10월 1일 팝아티스트 이병하씨의 대선후보 풍자 포스터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대선 때 백설공주 옷을 입은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사과를 들고 있는 포스터를 부산 시내에 붙였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이 판사는 “해당 포스터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예술적 창작물로 보인다”면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도 없었다고 보인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그해 <주간경향>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의해 올해의 ‘디딤돌 판결’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판사는 지난해 8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 이른바 유우성 간첩사건에서도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사건을 변론했던 장경욱 변호사는 “이의신청을 수없이 하는 등 재판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면서 “의외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유우성씨 여동생에 대한 합동신문센터의 가혹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등 썩 만족할 만한 판결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판 진행이야 어찌됐든 이 판사는 국정원이 제출한 증거를 배척하는 용기를 보였다.

대선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9월 11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선거법 무죄, 국정원법 위반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고등부장판사 승진 진력해야 하는 시기
하지만 이 판사의 판결은 올해 들어 달라지는 기류를 보인다. 이 판사는 올 2월 6일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의 국정원 댓글 은폐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 역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과 한 패키지로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 변론을 맡았던 김용민 변호사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폭로한 권은희 수사과장의 증언보다 다수의 반대증언을 어처구니없는 다수결 논리로 판단한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이 판사의 판결성향이 바뀌었다는 주장은 같은 판사 출신의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제기하고 있다. 당의 법률위원장으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 사건에 관여했던 박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김용판 전 청장과 원세훈 전 원장 등이 관련된 재판에서 (이 판사의) 재판 초기와 중·후기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면서 “그 시점이 지난해 10월 25일 황찬현 서울중앙지법원장이 감사원장으로 간 직후였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 판사의 직속상관이 감사원장으로 간 이후 재판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판사는 양승태 대법관(현 대법원장)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전속 재판연구관은 대법관과 영혼을 공유하는 사이일 정도로 가깝다. 그 양승태 대법원장은 바로 김기춘 비서실장의 각별한 경남고 후배이다. 이러한 연결고리가 이 판사의 재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야권의 일방적 주장, 추론이고, 심증일 뿐이다.
이 판사의 판결성향이 달라진 변곡점에 대한 또 하나의 추론은 바로 법원의 정기인사이다. 이 부장판사를 정면으로 비판한 김동진 판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내린 판결’이라고 비난했다. 사실 사법연수원 21기인 그는 지난 2월 정기인사에서 승진 하마평에 올랐지만 승진하지 못했다.

법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고등 부장판사 승진은 기수별로 10명을 시킨다고 할 경우 첫해 선두급 3명, 두 번째 해에 6명, 그리고 마지막 해에 1명을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3년에 걸쳐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내년 2월 고등 부장으로 승진을 못하면 후년인 2016년 이른바 마지막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판사가 내년 2월 승진에 진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법부가 완전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판사에게 정치사건은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다. 판사도 한 조직인으로 빠른 승진과 좋은 보직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이 사건은 애당초 법정에 오지 말았어야 할 사건”이라며 “일개 지방법원 부장판사 정도로서는 단순한 법률적 자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당초 법정에 오지 말았어야 할 사건’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는 이런 후진적 사건은 발생할 수도, 또 발생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책임은 전적으로 이 사건을 만든 정치권에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사과는커녕 최소한의 반성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소시민’ 이범균 판사에게 법과 양심을 강요하는 것은 그래서 가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최후의 인권 보루’를 자부하는 사법부의 소임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