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드리 헵번이라는 영화배우 이름이 인터넷 포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됐다. 이미 타계한 1950~1960년대 서양 영화배우가 뜬금없이 화제 인물로 등장한 이유는 바로 이인호 KBS 이사장 때문이다. 그는 9월 23일 전경련 주최 ‘우리 역사 바로보기’ 강연회에서 “해방 직후 박헌영의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 때문”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친일청산 문제에 색깔을 들이댄 ‘새로운 이론’이어서 논란이 컸다. SNS 상에서는 “그러면 친일파 등용은 미국 지령이었냐?” “보수주의자 드골이 나치 부역자 처벌한 것도 소련의 지령이었나?” “이인호 이사장 임명은 아베의 지령에 의한 것인가?” 등등 각종 패러디와 비아냥이 넘쳐났다. 다른 한쪽에서는 친일파 조부 때문에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는 것은 현대판 연좌제라는 반박도 이어졌다.

이인호 KBS 이사장이 2013년 5월 31일 서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는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자 전우용씨가 결정적 어퍼컷을 날렸다. 전씨는 9월 25일 “오드리 헵번은 나치당원이었던 아버지 대신 속죄하기 위해 평생 봉사하며 살았습니다”라며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역사가 고결한 사람을 낳고, 부끄러움을 덮는 역사가 파렴치한을 낳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전씨는 특히 “오드리 헵번이 나치당원이던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치를 두둔했다면, 그의 가문은 치욕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며 “죄 지은 조상을 두둔하는 건,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가문 전체에 대대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할아버지 이명세, 친일파인명사전에
여기서 이 이사장의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 이명세(李明世·일본식 이름 春山明世·1893~1972)는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종3품 관리였다. 고종은 1887년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94년 아예 폐지했다. 그러나 일제는 1911년 일왕의 하사금으로 경학원을 부활시켰다. 목적은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일제는 조선 유림의 연합체인 조선유도연합회라는 관변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케 했다.

이명세는 바로 이 경학원의 사성(司成·관리)과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를 지냈다. 특히 이명세는 1942년 일제가 조선에서 시행한 징병제를 찬양하는 한시와 글을 발표하고, 강연을 다니는 등 매우 적극적인 친일행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파 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이명세는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하는 등 단죄되기는커녕 영화를 누렸다.(이인호 이사장의 외가쪽 할아버지 이범세는 구한말 규장각 부제학을 지내고 한일병합 후인 1911년 경기 양평으로 낙향해 살았다)

역사학자로서 해방 후 친일청산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이 이사장이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는 말을 하자 같은 역사학자인 전용호씨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비유해 비난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이사장을 조선시대 ‘간신 유자광’에 비유하며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25일 성명을 내고 “명색이 학자 출신인데 최소한의 양식마저 저버린 저 노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며 “마치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켜 숱한 무고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간신 유자광의 현신을 보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간신 유자광에 비유한 이유로 ‘역사를 악용했다는 점, 권력에 유착했다는 점, 반대세력을 무고했다는 점’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소련역사 연구로 하버드 박사 취득
이 이사장은 1936년생으로 올해 만 78세다. 은퇴시기도 한참 지난 나이에 다시 주요 공직을 맡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이사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학과를 다니다 미국 웰슬리대로 유학한 뒤 하버드대에서 ‘소련 18세기 사상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최초의 한인 여성박사다. 그가 미국에서 소련 역사를 공부할 당시인 1950~60년대는 냉전적 분위기가 극심할 때로 한 시사평론가는 “이인호씨가 이때 미국에서 소련 역사로 박사학위를 딴 것은 1970년대 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에서 한국 역사로 박사학위를 딴 것과 비슷하다”고 비꼬았다.

이 이사장은 1967년부터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겸임교수를 하다 1972년 귀국, 고려대에서 강의했다.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79년이다. 그는 서울대 교수 시절 나름 진보적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이 시기 러시아 혁명과 인텔리겐차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영국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의 초청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특히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만들어질 때는 강만길, 이만열 등 진보적 역사학자들과 함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으로 나타났고, 이런 인연으로 1996년 2월 핀란드 대사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핀란드 대사 시절이던 1998년 1월 그는 남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제자 황인욱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3월 그를 러시아 대사에 지명했다. 당시 그의 러시아 대사 지명에 대해 다양한 우려가 제기됐다. 거친 러시아 외교무대에서 여성이 버틸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문제지만 1950년대 냉전시기에 반공지도자를 양성했던 하버드대에서 소련사를 전공한 인물이라는 점이 논란이 된 것이다.(실제 자신도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고 훗날 실토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던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러시아 대사로 임명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와 언론시민단체 회원들이 9월 30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 이인호 이사장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이 대사는 부임 후 3개월도 안 돼 한·러 외교관계에서 최악의 갈등국면을 초래했다. 그해 7월 러시아는 스파이 활동을 이유로 한국의 조성우 참사관을 추방했고, 한국도 주한 러시아 참사관을 맞추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이 대사는 국정원과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해 참사관의 추방 이유도 몰랐고, 게다가 러시아 외교부에 불려갔을 때도 러시아의 모욕적인 언사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시류에 따라 자신의 행동 부정하기도
당시 외교부 관계자는 “외교마찰은 기본적으로 우리 측이 러시아의 최근 기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 판단된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부임 3개월 만에 이 대사의 경질이 거론됐지만, 김 대통령은 박정수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첫 번째 외교적 패배이며, 국제적 망신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인호 대사는 이후 1년여 동안 더 대사직을 수행했다.

2000년 공직에서 물러난 이 이사장은 이후 특별한 활동이나 튀는 발언은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역사 바로세우기, 즉 친일청산 운동이 불거지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사장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할아버지 이명세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자, 본격적인 뉴라이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도 ‘유혈사태’로 폄훼하고,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역사문제연구소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대한민국 전복행위’로 규정했다. 특히 러시아 대사를 지냈음에도 대북문제에 대해 냉전적 입장으로 돌아서고, 자신을 공직에 임명했던 김대중 정권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상자기사 참조)

이러한 변신 끝에 그는 자신의 경력과 무관한 KBS 이사장이 됐다. 이 이사장은 취임하자마자 방송법에 따라 공개하도록 돼 있는 이사회 속기록 공개를 거부하고, 이사회가 프로그램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송계에서는 이를 방송 통제와 역사왜곡에 나서려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이사장의 행보에 대해 “한때 진보 역사학계를 기웃거렸던 그가 뉴라이트의 대부로 화려하게 변신하며 역사왜곡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면서 “문민정부에서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양지만을 찾아 다녔다”고 평가했다. 역사를 전공한 이 이사장의 인생사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다. 무엇보다 이 이사장은 자신이 한 행동도 시류에 따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의 변신 과정을 보면 친일파 할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오드리 헵번이 훌륭히 극복하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던 바로 그길을 가지 못하고 거꾸로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평생 드넓은 세계사를 조망했지만 정작 좁디좁은 집안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한 ‘불운한 역사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방송매체가 정부에 장악됐다”(이인호 어록)


“지금 다시 조명되는 제주 4·3사태라든가, 여수·순천 사건이라든가 그런 것이 공산당의 체제전복 시도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명명백백 역사에 다 나오는 사실이다.”(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주최 강연·2006.1.19)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끝나야 할 분이다. 살아 생전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한민국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건국6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 인터뷰·2007)

“식민지 시기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그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건국의 기준은 나라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 건국의 기원을 상해 임시정부까지 올리는 것은 정신사적에서만 유효하다.”(한국일보·2008.7.6)

“KBS의 ‘이승만 2부작’(2008년 8월 방송)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긍정적인 측면은 묵살하고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거대한 역사왜곡을 감행했다.”(동아일보·2008.9.8)

“언제부터인가 우리 언론은 방송매체가 정부에 장악되고 좌파정권의 도구가 되고 신문과 방송이 갈라지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불상사를 나타내고 있다.”(‘좌파정권 재등장 반드시 막아야 한다’ 대한언론인회 이인호-송복 특별대담·2009.12.11)

“한강의 기적은 이승만 시대의 유산을 활용한 덕분이다. 4·19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라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훼손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승만과 4·19는 같은 세력이다.”(중앙선데이·2011.4.17)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청와대 원로 오찬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2013.3.13)

“역사청산위원회라는 것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을 모두 했다. 제주 4·3사건, 광주사건, 모든 것을 정부가 잘못했고 정부에 항거해서 일어난 소위 민(民)이 국민이고 그쪽이 헌법기관이다, 이따위 식의 조사보고서나 재판 결과들이 나왔다, 대한민국 전복은 이미 그때부터 공공연하게 시작됐고, 정부가 앞장을 서고 돈을 댔던 것이다.”(한반도선진화재단 주최 강연·2013.10.29)

“(문창극 총리 내정자의) 교회 강연을 보고 감동받았다. (문씨가) 낙마한다면… 저는 솔직하게 이 나라를 떠날 때라고 강하게 느낄 것이다.”(TV조선 ‘시사기획 판’에 출연·2014.6.19)

“이승만 박사가 박헌영을 만나 ‘소련과 손을 끊고 나와 손을 잡고 하자’고 제의했으나 박헌영이 거절했다. 그때 박헌영이 ‘친일파 청산부터 해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그건 결국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 때문이다.”(전경련 주최 ‘우리 역사 바로보기-진짜 대한민국을 말하다’ 강연·2014.9.23)

“방송은 독립성·공공성을 보장해야 되기 때문에 이사들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논평도 비평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KBS 첫 이사회 발언·2014.9.17)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