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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의 인물탐구

피고인석에 선 변호인 권영국 ‘노무현 스타일’ 닮은 거리의 변호사

지난 10월 20일 서울중앙지법 제29형사부(재판장 윤승은 부장판사) 법정. 보통 4~5명에 불과한 변호인석이 이날따라 변호사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일부 변호사는 서 있고, 그것도 모자라 방청석에까지 변호사들로 넘쳐났다. 이날 법정에 나온 변호사는 모두 38명, 공동변호인 선임계를 낸 변호인은 모두 85명이었다.(공동변호인 선임계는 계속 늘어 29일 현재 100명이 넘었다)

피고인석에는 흰머리에 다소 왜소한 한 남자가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집시법 위반, 교통방해죄 등으로 기소된 권영국 피고인(변호사)이었다.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부림사건으로 기소된 노무현 변호사를 변론하기 위해 나온 99명의 공동변호인단 이름이 한 명 한 명 호명되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이뤘다.

권영국 변호사는 민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 위원장직도 맡고 있다. 지난 29일 저녁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 이상훈 선임기자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 당해 법정에
변호인 측은 영화처럼 공동변호인 이름을 일일이 호명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이유로 거절해 영화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은 재연되지 못했다. 이날 권영국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집회의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경찰력의 남용으로 인해 집회금지 장소가 되어버린 화단 옆과 앞의 장소도 집회의 자유가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의 자유로운 공간임을 확인하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은) 경찰과 물리적 충돌 여부를 따지는 협소한 송사가 아니라 국가가 공공복리와 질서유지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는 재판이 되길 바랍니다.”

이 재판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해 4월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인도에 설치된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와 농성장을 기습적으로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단을 만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인도에 화단을 설치한 것이나, 문화재청 허가 없이 문화재(덕수궁) 인근에서 공사를 벌인 것도 불법이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화단 설치를 집회 방해행위로 인정하고 긴급구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쌍용차대책위가 이 화단 앞에서 집회를 열자 집회 허가지역이 아니라며 집시법 위반죄를, 이에 항의하는 사람에게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해 연행했다. 연행자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변호인 접견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던 권 변호사마저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했다.(검찰은 지난 10월 30일 이 과정에서 4명의 민변 변호사를 추가로 기소했다)

대학 때 노동야학 참여한 주변운동권
시국사건과 관련해 변호인을 사법처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면서 또 시사적이다. 1970년대 유신 시절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에서 학생을 변론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정구속된 전례가 있고, 1987년 노무현·이상수 변호사가 노조활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노동법 3자개입 금지 위반으로 사법처리된 사례가 있다. 이후 시국사건과 관련해 변호인을 사법처리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변호사를 사법처리하기 어려운 이유는 워낙 변호사가 법에 ‘빠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변호사를 사법처리하는 것은 인권 후진국임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2009년 쌍용차 평택공장 앞 시위현장에서 비슷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도 권 변호사에게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권 변호사는 불법연행에 항의해 전경 중대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맞고소했다. 재판 결과 1·2심에서 권 변호사는 모두 무죄, 전경 중대장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6개월, 자격정지 1년이 나왔다. 최종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지만, 전경 중대장의 유죄가 확정되면 직업경찰인 중대장은 공무원 신분을 잃는다. 그만큼 변호사의 사법처리는 어렵고, 그런 면에서 권 변호사는 경찰에게 골치 아픈 존재로 기피대상 1호이다.

권 변호사는 ‘거리의 변호사’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법정이나 사무실보다 시위 현장, 철야농성 현장에 더 얼굴이 알려져 있다. 그는 “악다구니를 써야 하고 몸싸움도 해야 하는 현장은 사실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변호사의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면서 “하지만 현장은 우리의 인권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위를 하다 노동자·시민들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보장받기 어려웠던 변호인 접견권을 정착시켰다. 이것은 ‘지켜지지 않은 매우 중요한 국민의 기본권’이었다.

2013년 11월 28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열린 노동자 촛불문화제에 권영국 변호사가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권 변호사는 1963년생이다. 집이 가난해 동생 공부시키기 위해 포철공고에 진학했다. 포철공고는 포항제철 취업이 가능해 가난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이 진학했다. 제철과에서 쇳물을 다루는 공부를 하다 대학에 가고 싶어 진학반에 들어가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합격했다. 그는 공대생이었지만 곧바로 사회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운동권 언더서클에 들어갈 배포도 없던 주류 핵심운동권이 아니었다”면서 “노동야학에 참여한 주변 운동권이었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풍산금속에 취업해서 노조를 만들려다가 발각돼 인사조치됐다. 1988년 회사 공장 폭발사고로 직원이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이다 결국 해고됐다. 전국해고자복직위원회 선전국장이라는 이력은 그래서 있다. 그는 복직투쟁 과정에서 수배-구속-복역을 반복하며 4년을 보냈다. ‘지독히 처절한 노동투쟁’ 기간이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 고민스러운 기간이었다. 장사를 할까 고민하다 공부를 해보라는 아내의 권유로 뒤늦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만에 합격했다.

작업복 익숙한 변호사 자격 가진 노동자
2001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오라는 제안을 마다하고 민주노총에 법률원을 만들어 초대 원장을 맡았다. 그때까지 법을 모르고 강행하는 쟁의행위는 백이면 백 노조가 질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도 법으로 대응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그는 민주노총 법률원장으로 민주노총 쟁의현장 어디든 달려갔다. 해고노동자였던 그의 경력에 비추어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시위현장에서 집회자들에게 미란다 원칙을 알려주고, 경찰의 부당한 연행에 변호인 선임권을 요구하는 현장의 변호사다. 2008년 주위에서 그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장에 추천했다. 그는 노동위원장을 두 번이나 연임했다.(그의 능력이 출중해서라기보다, 거칠고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고를 졸업하고, 공대를 나온 ‘공돌이’에서 해고노동자로, 다시 ‘노동전문 변호인’으로 늘 ‘노동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자 변호사’라기보다 ‘변호사 자격을 가진 노동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실습복과 작업복에 익숙한 그는 변호사가 된 지금도 양복보다 활동복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는 ‘변호사 품격을 떨어뜨리는 변호사’ ‘공돌이 변호사’라는 비아냥도 듣는다. 그도 스스로 비주류 변호사라고 말한다. 공권력 앞에서는 지옥에서 온 야차 같은 강성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강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드럽다 못해 오히려 연약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앞서 영화 <변호인> 얘기를 했지만 권 변호사는 노무현 변호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림사건으로 세상의 눈을 뜨고 1985년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어 노동문제를 파고들었다. 권영국 변호사도 변호사 자격을 따자마자 민주노총 초대 법률원장, 민변 노동위원장 등 노동문제에 매달렸다. 노무현 변호사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고를 나온 것이나, 권 변호사가 공고를 나온 것이나 배경은 비슷하다. 변호사 시절 법정이나 변호사 사무실보다 거리에서 행동으로 변호하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노무현 변호사가 대우중공업 노사문제에 개입해 구속된 것이나, 권 변호사가 쌍용차 노사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기소된 것도 그렇다. 권 변호사를 보면서 ‘리틀 노무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노동자 시절이던 1987년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현대중공업에서 강연을 들었는데 ‘악법은 어겨서 고치는 것이다, 깨뜨려 고치는 것이다, 당당하게 맞서 싸우라’는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동료를 칭찬하는 데 인색한 직업이 바로 변호사들이다. 김용민 변호사는 “변호사는 불의를 보면 참지 말아야 하고,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전문지식을 활용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길 수도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권영국 변호사는 진정한 변호사”라고 평가했다.



“인권침해 현장이 변호인 있을 자리다”


지난 20일 법정에 참석한 38명의 변호인단을 보고 느낀 감회는.

“선임계 낸 변호인이 100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늘고 있다고 한다. 노무현 변호사 공동선임계는 99명이 냈다고 하는데….”(허허~ 그는 좀 계면쩍다는 듯 웃었다)

집시법·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일반 교통방해죄 등 검찰의 기소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한문 앞 화단 주변을 경찰이 24시간 점거하다시피 했고, 주변 집회를 금지시켰다. 대한민국 영토에서 법적 금지구역도 아닌데 경찰이 임의적 판단으로 집회 금지구역으로 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

그래서 모두진술에서 “이 재판은 민주주의와 기본권의 위기상황을 확인하는 재판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한 것인가.
“그렇다.”

최근 사법부 판결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법정의가 살아 있다고 보는가.
“회의하고 있다. 특히 올해 김용판·원세훈 판결에서 보여준 사법부 판결 태도는 정권의 정통성에 면죄부를 주는, 합리화를 위한 판결로 보인다. 사법부가 정말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믿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노동전문 변호사로 우리 노동자의 권리수준은 어떤가. 경제규모에 걸맞는다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노동 기본권 수준은 OECD 국가 중에 거의 최하위라고 보면 된다. 헌법에 노동3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단결권을 부정하는 나라는 없다. 파업하면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유일한 나라다. 2011년 이것을 제한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는데 최근 예외를 인정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시대착오적이고 전원합의제 판결을 소부에서 뒤집는 위법한 것이다.”

우리 노동법 수준은 어느 정도 돼야 한다고 보나.
“노동법원이 생겨 노동문제를 전담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민사법 원리에 따라 노동쟁의를 바라보고, 범죄시하려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대부분 어려운 노동자 변론으로는 수임료도 별로 없을 텐데 가정생활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재정적 부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수임료 받는다.”

생활에는 어렵지 않다는 말인가.
“(허허허) 생활은… 집사람이 불만이 있긴 하다. 재정적 어려움이 닥칠 때도 종종 있긴 하다.”(자신감이 넘치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 약간 어눌해졌다)

몸싸움도 마다않는 권 변호사에게 ‘변호사의 품위를 해친다’는 시선을 가진 변호사도 있다.
“그건 개인의 가치관이나 성격으로 활동양태가 다를 수 있다. 변호사가 인권침해에 대응할 때 꼭 법정이나 사무실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인권이 침해되는 곳이면 가장 필요한 쪽에 있어야 한다. 변호사의 임무는 인권옹호이지 비즈니스가 아니다.”

정치를 하기 위한 수순 아닌가.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입법부나 행정부의 권한은 매우 크다. 정말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을 출세를 위한 통로로 접근하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