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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

[광복 70주년 역사르포](4) ‘사법 살인’ 현장-구 대법원 청사 ‘오욕의 역사’ 미술로 감춰질까

“주목되던 ‘진보당 사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27일 밀려든 방청객들로 말미암은 법정 혼란으로 예정보다 늦게 오후 12시5분 개정했다. 김세완 재판장의 판결문 낭독으로 판결 이유 설명이 있은 후 오후 1시45분 최종 언도가 있었다. 이날 대법원 판결은 원심을 완전히 뒤집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서 ‘진보당’에 관한 본질적인 사건에는 무죄를 언도했다. 그러나 조봉암 피고에게는 ‘간첩’ 및 ‘간첩 방조죄’를 적용해 양명산 피고와 함께 사형을 언도했다. 이날 대법원 판결 이유 요지는 (1)평화통일론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 (2)헌법에 ‘단체활동의 자유’가 인정돼 있으며 진보당 강령은 헌법 위배가 아니다 (3)이북 괴뢰집단과 진보당이 직접 상통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경향신문> 1959년 2월 27일자·문장을 현재 어법으로 정리)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3층 대법정에서 정치적 경쟁자를 법의 이름으로 살해하는 사법살인(법살)이 처음 자행됐다. 해방 후 김구, 여운형, 장덕수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암살’로 사라졌다. 미군정 시절에도 경찰이 존재했지만 법보다 총이 앞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후 암살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하지만 정적 제거의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수단으로 ‘법’이 동원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67년간 이 땅의 최고재판소로서 사법부의 영욕을 간직한 구 대법원 청사는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조봉암 진보당 당수에 사형 언도
법살을 통한 정적 살해의 첫 희생자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었다.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 핵심 요인으로 가열차게 광복운동을 한 인물이다. 해방 후 공개적으로 공산당과 결별하고 정부 수립 후 첫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그 후 국회부의장을 거치며 진보당을 창당해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맞서 평화통일을 외치고, 약자를 보듬는 진보적 정책을 주장했다. 조봉암은 1956년 5·15 선거에서 200만표가 넘는 득표를 하며 이승만의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했다.

1958년 1월 12일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간첩과 접선했고,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북한과 내통한 혐의가 있다며 진보당 간부를 대거 검거했다. 그리고 2월 20일 육군 특무부대는 권총을 가진 간첩을 검거했는데,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이 간첩과 접선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정부는 진보당을 용공정당이라는 이유로 해산했다.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이 간첩과 내통하고, 그가 창당한 정당이 용공정당이었다는 정부의 주장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유병진 판사는 가벼운 형량만 선고했다.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괴청년들이 법원에 난입해 “용공판사 물러가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고 행패를 부렸다. 결국 항고심에서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됐다. 당시에도 나름 선진화된 사법제도가 있었으나 사법살인을 막지 못했다. 심지어 경찰청장으로 좌익 검거의 총책임자였던 장택상이 “조봉암은 간첩이 아니다”라면서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결국 조봉암은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면회를 온 가족에게 “나는 만 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사건 관련자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고 있다. 사진은 당시 상황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과 서울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조봉암.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재심을 통해 조작된 사건으로 드러나
이념이 다르다고 상대를 말살하는, 그것도 ‘법’의 이름으로 사법살인하는 우리 정치사의 비극적 전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례를 꼽아보면,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1년 10월 31일 대법원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해 말 사형을 집행했다. 1974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른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상고기각 판결을 내려 8명이 억울하게 숨졌다. 이 인혁당 사건 판결이 있은 4월 8일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리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해 상고기각으로 사형을 확정했다.

여기에 든 ‘사법살인’의 예는 모두 재심을 통해 고문과 거짓으로 조작된 사건임이 드러난 것이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진보당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진보당은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반한 정당은 아니었다”며 “진보당을 통해 국가 변란을 모의했다는 부분은 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특히 조봉암의 간첩행위에 대해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고, 공소사실 자체도 간첩행위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참 허망한 결론이다. 사법부 스스로 사법살인임을 인정했지만 진보당 조봉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인혁당 사건의 8명 등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 박선하 간사는 “민주화 투쟁을 하다 사망한 인사 619위의 영정에 대해 매년 6월 추모식을 갖는다”면서 “이 중 사법살인으로 희생된 분은 진보당 조봉암 선생 이후 117명”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했으나, 뒤늦게 감형된 사람까지 포함하면 사법부의 오욕은 더욱 크다.

하지만 대법원은 물론 정부도 공식적이고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조봉암의 아들 조규호씨는 “이승만이나 친일 군인, 동원된 정치 법관 등 가해자 무리들은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지금도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때 손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 무려 6년간 신의주 감옥에서 투쟁했지만 지금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조규호씨는 “선친에 대한 보훈심사에서 이유도 없이 탈락된다”면서 “재심은 마지못해 해준 것일 뿐 진실한 평가는 아직도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일보 조용수기념사업회 조성재 사무총장은 “정부가 법살을 자행한 후 한 것이라고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추도식 때 조화 하나 보내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권위주의 정권이 끝나고 ‘사법살인’ ‘사법부 오욕’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몇몇 판결에서 ‘사법부 오욕’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YTN 기자 해고를 정당화하는 판결,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판결,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판결 등이 그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57년 전 발생한 진보당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TV로 보면서 이제 다시 1958년 진보당 시절 혹은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이재화 변호사 역시 “1958년 이승만 정권에서 행정처분으로 조봉암의 진보당을 해산시켰는데, 이번 통합진보당 해산에서도 헌법의 이름만 차용했지 행정처분으로 해산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주장했다.(<통합진보당 해산결정 무엇이 문제인가>(도서출판 말) 중에서)

그래도 당시 법원은 진보당 사건에 대해 형사사건 최종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행정소송을 연기하는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다.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서둘러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지금 헌법재판소의 성급한 태도와는 달랐다.

 

숱한 역사적 판결이 내려졌던 3층 대법정 자리는 프로젝트 갤러리로 바뀌어 ‘떠도는 몸들’이라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3층 대법정 자리엔 갤러리들 들어서
사법부 오욕의 역사를 간직한 서소문 대법원 청사(중구 덕수궁길 67, 37번지)는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꾸며져 있다. 원래 이곳은 조선 말 재판소 격인 평리원이 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경성재판소, 지금의 건물이 세워졌다. 이후 이곳은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면서 67년간 이 땅의 사법부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그 영욕의 역사를 잊으려 했는지 2002년 건물 리모델링 과정에서 대부분 헐렸다.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는 “미술관 건물 입구에 있는 파사드(아치형 현관)가 옛 대법원 건물의 유일한 흔적”이라며 “실내에도 과거 대법원 시절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건물 양옆에 유리와 흰 대리석으로 증축한 관리실과 카페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237호라는 것이 무색하다. 그나마 지난해 미술관 입구에 이곳이 과거 대법원 자리였음을 알리는 조그만 현판이 세워졌다.

옛 대법원 건물의 파사드와 외벽을 보존하려는 생각을 했다면, 내부에 대법정 혹은 단 한 곳의 법정이라도 보존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미술관 측은 “미술관 개조공사를 하던 중 구조적으로 약한 부분이 많아 정면의 벽판만 보존하고 나머지는 철거했다”면서 “이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의 보존방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역사적 판결이 자주 열렸던 3층 대법정 자리에는 크리스탈 갤러리, 프로젝트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2015년 3월 10일 대법원 대법정이 있던 프로젝트 갤러리에서는 ‘떠도는 몸들’이라는 주제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디아스포라(이주) 한인들의 이야기인데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떠도는 영혼들’과 맥이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석도 채 안 되는 객석에는 아무도 없다. 휑한 객석은 이곳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