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한강과 함께 600년간 수도 서울을 내려다보며 한민족의 질곡과 함께한 존재다. 불과 해발 262m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남산은 나라의 제사를 올리는 성스러운 산이자 성곽과 봉수대가 있어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근세 들어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애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남산’이라는 고유명사는 시골사람들에게는 ‘서울’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 들어 남산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었다. 이 시기 남산은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정치공작과 고문을 떠올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이렇게 된 배경은 바로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일제 통감 관저 자리에 정보기관 들어서
4·19 학생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정부는 정보기관이 필요했다. 더 이상 군과 경찰 정보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미국 CIA와 일본 내각조사처 같은 정보기관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군과 경찰 정보국의 견제가 심했다. 그래서 입법도 안 된 상황에서 예산 배정도 없이 총리실 예산으로 만든 것이 바로 중앙정보연구위원회다. 장면 총리는 1961년 1월 이후락 육군 소장을 예편시켜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책임자인 연구실장에 임명했다. 사무실은 중구 예장동 4번지 일대로, 원래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후 줄곧 통신부대가 있던 곳이다. 통신을 장악해야 정보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 주변에는 과거 조선총독부 통감 관저가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테라우치와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맺은 곳이다. 무소불위 일제 총독 관저 자리에 무소불위 최고 정보기관이 들어선 것도 ‘운명적’이다.

이후락 연구실장은 대령급 정보장교 몇 명과 대학을 갓 졸업한 20여명의 요원으로 정보업무를 시작했다. 물론 5·16 쿠데타의 진상을 파악하는 임무도 맡았다. 이후락 실장은 5·16 당일 아침 “청량리, 미아리, 무악재, 용산 등 서울과 외곽을 잇는 주요 간선에 인원을 배치하라”면서 “외부로부터 진입하는 쿠데타군 규모와 그들 트럭 지프의 부대마크를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락은 바쁘게 상황을 챙겼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이었으므로 이 실장은 미국대사관이나 미8군과 연락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남산의 부장들>

악명 높던 ‘남산의 지하실’(6국 조사실)은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로 탈바꿈해 서울시민의 안전 컨트롤타워 기능을 하고 있다.

 


5월 18일 이 정보기관에 군인과 김종필(JP) 중령이 나타났다. 책임자 이후락 실장은 반혁명행위로 체포됐다.(하지만 불과 두 달 뒤 이후락은 대한공론사 이사장이 되고,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되는 등 쿠데타 세력에 가담해 승승장구했다)

이틀 후인 5월 20일 중앙정보연구위원회는 간판을 중앙정보부(중정)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로 편입됐다. 부장에는 JP가 취임했고 동기들인 육사 8기들이 국장을 나눠 맡았다. 매우 신속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 위원장을 지낸 가톨릭대 안병욱 교수는 “김종필 중령은 쿠데타가 성사된 5월 16일 아침 10시, 최우선적으로 중앙정보기구에 관한 복안을 제시한 후 곧바로 설치작업에 착수했다”고 증언했다.

이것이 ‘남산의 부장들’ 즉 중정의 시작이다. 중정은 처음에는 5·16 쿠데타 후의 수사와 경찰·검찰 지휘를 맡다가 점차 대공 및 정보 수집으로 업무를 확장했다. 그리고 1963년 민정이양 이후 중정은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첩보·수사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중정부장 관저에서 본관으로 향하는 언덕에 설치된 세계인권선언문. 하지만 이곳이 과거 중앙정보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공포의 고문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무소불위의 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우는 애도 정보부장이 온다고 하면 뚝 그친다’는 비유도 이때부터 나왔다. JP는 최근 신문에 연재하는 회고록에서 중정의 창설 이유로 “혁명과업을 뒷받침하려면 무서운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중앙일보 2015·4·3> 중정이 강력한 공포정치의 도구로 활용됐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중앙정보부의 최대 무기는 폭력 사용의 무한대 보장, 행정력 동원의 무한대 보장, 자금력 동원의 무한대 보장이었다”고 평가했다.<현대사 산책, 1960년대 2권>

JP는 또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유명한 중정 부훈(部訓)을 지었다. 성경에서 인용한 미국 CIA 표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에서 차용한 것이다. 1997년까지 사용된 이 부훈석은 현재 내곡동 국가정보원에 보존돼 있다.

현재 개방된 남산 옛 중앙정보부 자리를 가보면 그 위세를 실감할 수 있다. 중정은 명동에서 남산을 오르는 요지에 자리를 잡았다. 명산에 터널까지 뚫으며 다소 무질서하게 건물이 들어서 있다. 대로변 입구에는 중정 감찰실과 서울지부 사무실, 그리고 부장 관저를 지나면 중정 본부 건물,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체육관, 터널을 거쳐 더 가면 중정 수사국 건물이 나온다. 남산을 머리에 비유하면 마치 머리 중간중간을 파먹은 모습이다. 그린벨트이며 수도 서울의 명산에 이렇게 무질서하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권력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70년대 중정 창설 기념파티에 모인 역대 중정부장들. 왼쪽부터 김형욱(4대), 김용순(2대), 김계원(5대), 김종필(초대), 김재춘(3대)

 


이 막강한 중정 건물들은 지금 교통방송(감찰실), 서울소방방재본부(중정 서울시지부 및 유치장), 유스호스텔(중정 본부), 서울종합방재센터(6국 조사실), 서울시균형발전본부(중정 6국), 서울시청 별관(수사국), 문학의 집(부장 관저) 등으로 탈바꿈돼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 유스호스텔 직원인 박경서씨는 “이곳은 그린벨트라 일체의 건물 증·개축을 할 수 없어(안전기획부로부터) 물려받은 건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지하는 미로라고 하는 얘기만 들었을 뿐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모두 폐쇄돼 지하 구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과거 지하 고문실의 오명을 지우려 했던 것인가. 유일하게 지하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바로 서울종합방재센터이다. 서울종합방재센터는 입구만 삐죽 나와 있을 뿐 3층의 지하공간 전모는 공개되지 않는다. 과거 지하벙커와 조사실로 썼던, 이른바 ‘남산의 지하실’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을 지키던 청원경찰은 “국가중요시설로, 들어갈 수 없다”며 출입을 통제한다.

1994년 안전기획부(중정)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을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모두 철거하자는 의견에 대해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아시아평화인권센터로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역사 관련 단체는 옛 통감 관저까지 복원해 일본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의 상흔을 치료하는 장소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서울시의 산하기관이 들쭉날쭉 들어서 있다.

그나마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이 옛 중정부장이 생활하던 관저다. 2층 양옥인 부장 관저는 현재 ‘문학의 집·서울’이라는 이름의 문인들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과거 군부정권 시절 고문과 정치공작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리는 종합적인 안내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유스호스텔 앞의 조그만 표석과 건물 정초에 새겨진 과거 중정부장의 이름만이 이곳이 과거 중정 자리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사실 중정이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정권 안보를 위해 정치에 개입한 것이 문제였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민주공화당 창당의 모태는 중정”이라며 “만약 중정의 자금조달이 없었다면 군사정권은 채 6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다.<현대사 산책>

 

과거 중정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바뀌었지만, 지하로 통하는 통로는 모두 봉쇄돼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중정부장 관저는 문인들의 공간으로
하지만 중정을 통해 18년간 견디던 체제는 중정부장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남산의 부장들>을 쓴 김충식은 이를 “정보 만능으로 유지되던 박정희 정권은 결국 정보 중독증상으로 무너져 버렸다”고 표현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 18년은 중정으로 시작해 중정에 의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몇 차례 변신이 있었다. 이름도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바뀌고, 정권교체도 있었다. 최고책임자가 자해하고 구속되기도 했다. 결국 2010년 10월 국정원은 <과거와의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반성문’을 냈다.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은 이 책 서문에 “우리가 만들어낸 과거에 대한 쓰라린 성찰 없이는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국정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정원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김 국정원장은 “진실을 밝히고 잘못된 고해성사가 선행돼야 한다”면서 “국민들이 다시는 공권력으로부터 아픔을 겪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이 ‘반성문’은 관련자들의 증언과 현장방문, 기록 검토 등을 통해 과거 중정의 정치공작을 낱낱이 밝혔다. 무려 6권 3315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통해 <경향신문> 매각, 인혁당 사건 등 간첩조작사건, 야당 지도자 납치·살해 정치공작의 진실이 밝혀졌다. 특히 영원한 미스터리로 묻힐 뻔한 남산의 부장 김형욱 살해과정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최근 국정원은 가혹행위를 통해 간첩을 조작하고,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다시 물의를 빚고 있다. 남산 중정부장 관저에서 본관으로 올라가는 언덕 축대에 쓰여진 세계인권선언 제30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정원장이 한 번쯤 이 길을 걸으며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