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맞는 봄비는 싱그럽다. 마로니에는 프랑스어로 ‘달고 큰 밤나무’라는 뜻이다. 지중해가 원산지로 7개 잎에 밤과 비슷한 열매를 맺는데 ‘천재’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이곳 마로니에 공원은 1924년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학에서 시작됐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 한쪽에는 1931년 준공된 경성제국대학 본관 건물이 이곳의 과거를 증명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적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이 건물은 해방 후 서울대 본관을 거쳐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거행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수령이 200년 가까이 된 마로니에 나무가 몇 그루 있다.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이름도 이 나무에서 비롯됐다. 경성제국대학 시절 심어진 마로니에 나무는 서울대가 1975년 1월 관악산 계곡으로 이전한 뒤에도 이곳을 지켰다. 이 마로니에 나무는 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 이 땅의 ‘저항하는 젊은 지성의 역사’를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꼭 51년 전 이맘때다. 5·16 쿠데타를 성사시킨 세력은 은밀히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일본의 자본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1963년 12월 17일 취임식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초부터 한·일 교섭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64년 2월 28일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이라는 초스피드 한·일협정 타결계획을 밝혔다.

마로니에 공원의 200년 가까이 된 마로니에 나무는 이곳 현대사의 현장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옛 서울대학교 터라는 설명과 당시 교사 배치 모형이 남아 있다.

 


일제 36년 수탈을 불과 3억 달러 보상으로 끝낸다는 정부의 계획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우리 어민들의 어업을 보장하는 해상 경계선 ‘평화선’을 포기한 것은 어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협정이었다. 야당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한·일협정 체결 저지에 나섰다. 특히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사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은 5·16 쿠데타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박정희 체제의 민주공화당이 내건 정치이념 ‘민족적 민주주의’도 애매모호했다. 한국의 현실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민주주의를 내용적으로 제한하자는 의미로 통용됐지만 분명한 실체도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점차 쿠데타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박종열 전 간행물윤리위 심의실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혁신계와 학생운동권에서 불확실한 첩보에 현혹된 일부 세력이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조직책이었고, 김종필(JP)도 서울사범대에서 운동을 했다는 것이었어요. 박 정권의 진보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군사파쇼가 자기 은폐를 하기 위한 지능적 연극이다’라는 걸 만천하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극적으로….”(신동호, ‘6·3세력의 뿌리’)

3월 24일 서울·고려·연세대 학생들이 5·16 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교별로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학생시위는 대학들이 서로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규모도 열기도 확대됐다. 5월 20일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이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모였다. 삼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검은 관을 멘 대학생들이 바로 이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당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강행, 군정의 기만정치 규탄’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현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6·3 사태의 정점이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쿠데타 이후 다시 대학에 진입한 군인들
“대일굴욕외교반대전국학생총연합 주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는 20일 하오 2시경 당국의 강력한 반대 및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강행됐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에서 열린 이 성토대회에서 4천여명(학생 3천, 일반 1천명)의 군중들은 현 정부를 군사정부의 변신으로 규정하면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경찰기동대가 학교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단행된 이 대회는 개회사 선언문 낭독에 이어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장시키는 조사 낭독 등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그동안 군사정권이 기만정치를 해왔다고 비난했다.”(경향신문 1964년 5월 20일)

이 장례식에서 읽힌 조사(弔辭)는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시인 김지하가 썼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 놓았다… 박 의장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여! 너의 본질은 곧 안개다!”로 된 이 조사는 매우 유명한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김지하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 정권을 아예 초장부터 시체요, 썩어가는 송장으로 단정해 일단 죽이고 들어갔다”면서 “이 노골성이 그들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박 정권의 고위층까지도 ‘이런 죽일 놈!’ 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이 앞에 섰고, 검은 관을 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다. 경찰기동대의 최루탄이 발사되고, 학교로 쫓겨 들어온 학생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시위에서 투석전이 벌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시위는 4·19 학생혁명 이후 사실상 첫 대규모 시위로 이후 무수히 많은 대학생 시위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5월 27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 40여명이 이곳에 있던 4월 학생혁명기념탑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6월 3일 서울에서만 5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시위에 돌입했다. 시위 구호도 ‘굴욕적인 한·일회담 결사반대’에서 ‘박정희 정권 퇴진’으로 바뀌었다. 밤 9시40분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5·16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다시 군인이 대학 캠퍼스에 진주한 이른바 ‘6·3 사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주도한 JP를 6월 5일 공화당 의장직에서 사퇴시키고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보냈다. 하지만 군인이 대학에 진주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시위는 이어졌다. 정부는 2학기가 개강하자 계엄령보다 한 단계 낮은 위수령을 발령해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 6·3 시위를 주도한 세력을 보통 ‘6·3 세대’라고 부른다. 6·3 세대는 1960년 4·19 학생혁명을 주도한 4·19 세대와 함께 우리 정치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마로니에 공원에는 1931년 건축된 옛 경성제국대학 본관 건물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공연장과 미술관 즐비한 문화의 거리로
당시 정부는 왜 무리하게 한·일회담을 추진했을까. 당시 한·일회담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처음부터 실무를 맡고 나중에 민정 이양 이후에도 공화당 당의장으로 계속 이어서 추진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신문에 회고록을 연재 중인 JP는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對日) 청구권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회담 추진 이유를 밝혔다.(중앙일보 2015년 4월 29일)

일제 36년의 침략에 대한 보상금을 받아 경제개발에 투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물론 이 대일청구권 3억 달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에 쓰였고, 근대화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이다. JP는 야당과 시민·학생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밀어붙인 이유도 밝혔다. 그는 당시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에 비유되기도 했다. JP는 “그래, 내가 하자. 혁명에 목숨까지 바친 놈인데 무슨 비난을 받든 뭐가 두려운가. 욕을 할 테면 해라.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움직인다. 내가 길을 뚫겠다. 용기도, 배짱도, 발상도 새로 내겠다고 결심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중앙일보)

하지만 한·일회담의 기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추진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1961년 6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과 일본 이케다 총리 회담, 곧이어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즉 한·일회담은 단순히 한·일 사이의 국교정상화 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3국의 문제였던 것이다.

미 국무부는 1962년 7월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훈령에서 “한국 정부에 청구권에 구애되지 말고 일본의 경제원조를 받아들이라고 전하고, 만약 응하지 않으면 미국의 원조를 다시 고려하겠다고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한·일회담은 단지 경제개발을 위한 자원조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면서 “박정희가 간절히 원했던 5·16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낸 조건 중의 하나였다”고 말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6·3 사태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엿볼 수 있듯이 4·19 학생혁명에서 요구한 민주주의에 민족주의(굴욕적인 대일 및 대미외교)가 결합된 이데올로기였다. 마로니에 공원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6·3 사태의 발원지라는 어떠한 표지도 없다. 단지 서울대학교 터라는 표지(유지기념비)와 당시 캠퍼스 모형만 있을 뿐이다. 서울대를 이전할 때 도심 학생시위의 온상을 관악산 골짜기에 몰아넣어 정권에 저항하는 젊은 지성을 잠재우려 한다는 반대도 많았다.

 


이곳 서울대 문리대 터는 민족·민주주의 의미보다 예술의 거리로 바뀌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하고, 1985년 이 일대를 ‘대학로’라고 이름 붙이면서부터다. 모두 천재가 되라는 의미로 대학 교정에 심었던 마로니에 나무는 이제 ‘낭만’의 상징으로 변했다. 최근에는 자본력이 약한 공연장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곳엔 공연장과 미술관이 즐비하다. 51년 전 6월 젊은 지성의 함성을 지켜본 이 마로니에 나무는 2015년 5월에도 일곱 개 잎을 푸르게 물들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