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깃발 드높이 들고,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어, 우정의 다리를 월남에 놓고… 우리는 비둘기 대한의 용사.”

1965년 2월 9일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1984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뀜)에서 출발한 비둘기부대 파병용사들은 종로를 거쳐 시청앞까지 행진했다. 길가 빌딩 옥상에서는 꽃종이가 뿌려지고, 유명 영화배우들은 행진하는 군인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줬다. 이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감격적이고 선동적인 멘트를 쏟아낸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많이 보던 장면이다. 특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으로 이어지는 ‘맹호는 간다’라는 노래는 방송은 물론 극장·마을 스피커에서까지 울려퍼졌다.

 

근현대사와 함께한 동대문운동장은 모두 헐리고 그자리에는 공원과 역사관,

그리고 한국 디자인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멋진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300년 만의 해외파병, 한국이 먼저 제의
베트남 파병은 해방 이후, 아니 조선 효종 때 청나라의 요구로 후금 근거지인 흑룡강에 조선 조총수 수백명을 파병한 이래 근 300년 만의 해외파병이었다. 이후 1991년 1월 쿠웨이트에 의료지원단과 공군수송단이 참전하고, 소말리아, 앙골라,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등의 해외파병으로 이어졌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현 한국군 해외파병은 총 16개국 17개 지역에 1436명의 부대와 장병”이라며 “대표적으로 필리핀 아라우부대, 레바논 동명부대, 소말리아 청해부대 등 6개 부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무려 8년 동안 한국군만 연인원 32만명이 파병돼 전사 5099명, 부상자 1만962명의 피해를 낸 대규모 전쟁이었다. 미군 측으로 봐서도 미군은 한국전에서 3만여명이 죽었지만, 베트남전에서는 5만여명이 전사했다.

지금까지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우리가 참전한 것으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 공개된 각종 기밀문서와 연구에 의하면 베트남 파병은 우리가 먼저 미국에 제안한 것으로 돼 있다. 첫 언급은 5·16 쿠데타 직후 11월 13~17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해 가진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비공식 정상회담에서다.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수 있으며 만약 정규군의 파병이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지원자들을 모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국가기록원, 박정희 정부 정상외교) 하지만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깊숙이 개입하기 전이어서 한국 측 제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박 의장이 미국에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5·16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미 박 의장은 극비리에 장교를 베트남에 파견, 한국군 파병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KBS <역사스페셜>이 발굴한 ‘M-21 파월단 대월남 정부 건의서’라는 당시 2급 비밀문건에 따르면 의료진과 공병부대로 시작하는 파병의 구체적인 계획이 만들어졌고, 군 고위층과 정치권 설득 계획까지 짜여져 있었다.

1965년 2월 9일 동대문운동장에서 3만여명의 국민들이 비둘기부대의 베트남 파병을 축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미 치밀한 사전계획이 서 있던 우리는 신속히 파병을 추진했다. 1차 파병은 1964년 9월 11일 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비전투요원이었다. 2차 파병은 사진처럼 1965년 비둘기부대가 서울운동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3월 10일 인천항에서 월남으로 출발했다. 미국이 점점 베트남전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미국의 파병 요청은 늘어났고 결국 전투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1965년 8월 13일 전투부대 파병안이 여당인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파병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이며, 자유 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수 있다”고 파병의 당위성을 독려했다. 야당의 파병 반대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 <사상계> 사장 정도가 반대했을 뿐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통하는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은 “베트남 파병은 굉장히 큰 사건인데도 반대가 많지 않았다”면서 “한·일 문제하고 또 달라서, 반대하고 싶어도 반공주의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미국의 젊은이들이 ‘가열차게’ 반전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한국 젊은이들은 ‘자랑스럽게’ 베트남 정글로 들어갔다. 맹호부대(보병수도사단)가 65년 10월 16일, 백마부대(보병9사단)가 66년 9월 22일, 청룡부대(해병2여단)가 67년 12월 12일 계속 파병됐다. 도미노 이론(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이웃 나라도 연이어 공산화된다는 이론)에서 베트남에 이어 일차적 공산화 대상으로 꼽히던 필리핀마저 1969년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우리 해병대 용사들은 베트남으로 떠났다.

전쟁의 참상은 말해 무엇할까. 한 무명 청룡부대 병사는 이렇게 시를 썼다. ‘조명탄이 눈부시고 포(砲) 소리는 이어진다/어디서 날아온 적탄이 전우를 앗아가면/이를 갈며 분노에 몸부림친다/선혈 얼룩진 임자 잃은 철모/병사의 체취도 가시지 않은 탄띠가 주인을 절규한다… 전우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분노에 떨며/사나이의 눈물을 뿌린다/이역(異域)의 화약내 나는 밤하늘 아래서.’

 

동대문운동장 역사관에서 자원봉사자가 관객에게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와 현재를 설명하고 있다.

 


‘라이따이한’ 문제 풀어야 할 과제
당시 베트남 파병에 반대가 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돈 벌러 간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점도 있다. 실제 장교들은 베트남에 먼저 가려고 로비를 할 정도였다. 이렇게 베트남으로 간 군인과 기술자들이 송금한 돈은 한국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이런 여러 부문의 총수입이 10억3600만 달러로 나온다”면서 “일본에서 들어온 청구권 자금(이 중 이른바 무상) 3억 달러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돈”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정확히 그 액수를 따지기 어렵지만 미국이 지원한 저금리의 공공·상업차관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것을 모두 합해 참전으로 얻은 경제적 이득이 23억 달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찌 됐든 이 자금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발전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투자됐다.

하지만 역사학자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베트남전이 한국 경제 중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박태균은 “베트남 파병 군인들과 기술자들의 월급으로 국내 저축이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기업이 속출하고, 1972년에 가서는 급기야 8·3 조치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효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라며 “군인과 기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그것도 한푼 한푼 아껴서 보낸 돈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한겨레신문 2015년 4월 17일자)

베트남 파병은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 참전 대가로 얻은 10억 달러는 이 땅의 젊은이 5099명이 숨지고, 1만962명이 부상한 대가다. 이 밖에 8만여명에 이르는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도 발생했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던 파월 제대군인들은 1992년 9월 26일 경부고속도로 상·하행선을 점거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겨우 1993년 고엽제 피해보상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이 역시 우리가 부담해야 할 부정적 유산이다.

게다가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한동안 비동맹 제3세력으로부터 외교적으로 고립됐으며, 미국의 용병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 당시 한국군과 한인 기술자들이 베트남 여성과 사이에 낳은 2세 ‘라이따이한’ 문제와 전투 중 민간인 학살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다.

DDP는 디자인 박물관·전시관·둘레길·놀이터 등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것을 한번에 볼 수 있다.

 

 


훈련도감 자리, 지금은 디자인 메카로
전쟁을 벌인 우리와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대사급 국교를 수립했다. 베트남에서 대사관이 철수한 1974년 4월 29일 이후 18년 만이었다. 그리고 2001년 8월 23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베트남전을 평가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진보적 역사학자 서중석도 베트남전에 대해 “아마 한국 현대사 중에서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면서 “경제적인 면으로 혜택이 너무나 컸는데, 그렇다고 ‘베트남에 가기를 잘했다’고 가르치기도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평가했다.(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당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베트남으로 떠나는 비둘기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용사들의 장도를 축하하는 장소였고, 또 이들이 무사히 귀국해 환영식이 열린 안도의 장소이기도 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종로길을 거쳐 시청앞으로 이어지는 시가행진 길은 국민을 동원하는 상징적 통로였다. 그때 서울운동장과 야구장 등은 모두 헐리고 과거 흔적은 2개만 보존돼 전광판과 성화대 정도만 남았다. 그 자리에는 2013년 11월 이라크 출신 건축 디자이너가 설계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섰다. 지하 3층, 지상 4층의 이 건물은 우리 풍경화처럼 단절되지 않고 흘러가는 ‘환유의 풍경’이라는 주제로 설계됐다고 한다. 패션, 공연, 영화 등 이곳은 대한민국 디자인의 메카로 통하고 있다.

다행히 이곳 역사를 보존하는 조그만 전시관이 남아 있다. 동대문운동장 역사관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하는 조승한씨(73)는 “원래 이곳은 조선조 이성계가 훈련도감을 두었던 자리로 1925년 일제가 경성운동장으로 만들었다”며 “최초의 근대식 축구경기는 물론 1949년 7월 5일 백범 김구 국민장 등이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설명했다. 이 역사관 한편에는 ‘역사의 무대가 된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제목으로 스스로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1950~1970년대 서울운동장은 국가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각종 행사가 열렸다. …4·19혁명 1주년 기념식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렸고, 1년 뒤에는 5·16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베트남 참전용사 귀국 환영행사와 KAL기 피격 희생자의 합동 위령제도 열렸다. 동대문운동장은 근현대사의 중요한 마디마디와 함께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