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

[광복 70주년 역사르포](13) 장기집권 서막-국회 제3별관… 시의원 명단보다 더 중요한 ‘날치기 교훈’




서울의 한복판, 시청앞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길이 세종대로다. 옛날 주소로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4거리(세종대로 4거리)까지가 태평로, 여기서 광화문까지가 세종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길이다. 왼쪽으로 덕수궁, 오른쪽 시청으로 시작해 프레스센터, 서울시의회 건물, 파이낸스빌딩, 신문사 2곳, 세종문화회관, 교보문고, 미국대사관, 세종로 정부청사가 좌우로 들어서 있다.

그 중 서울시의회 건물과 프레스센터 앞을 잇는 세종대로 21길에는 ‘범상치 않은’ 지하도가 하나 있다. 덕수궁 지하도라고 불리는 이 지하도 입구는 화강암 기단에 계단 손잡이는 굵은 황동으로 보통 지하도와 달리 매우 고풍스럽다. 게다가 지하에 있는 계단 중앙에는 용의 부조물이 새겨진,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왕들이 밟고 지나가는 ‘답도’까지 만들어져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중앙정보부도 사용
이 지하도가 이렇게 고급스럽게 꾸며진 이유가 있다.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이 과거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고, 세종대로 건너편인 지금의 파이낸스빌딩 자리에는 국회 별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지하도는 국회 본관과 국회 별관으로 통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왕래하는 지하도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급스럽게 지은 것이다.

세종대로에서 광화문 쪽으로 왼편에 있는 서울시의회는 과거 국회 본관이, 오른쪽 파이낸스빌딩이 있던 곳이 제2·제3별관이 있던 자리다.

 


서울시의회 건물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서울시 등록문화재 11호인 구 국회의사당 건물은 1935년 부민관으로 당시 경성부민(서울시민)을 위해 세운 건물이었다. 부민관은 18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당과 중강당 등이 있어 연극이나 영화, 강연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다목적 건물이었다. 최첨단 음향과 냉난방 시설을 갖춰 지금으로 치면 세종문화회관이나 서초동 예술의전당쯤 된다. 건축학적으로도 모서리에 46.6m의 시계탑이 만들어져 당시로서는 위용과 간결함이 강조된 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일제 강점기 황민화를 선동하는 예술과 정치집회가 자주 열렸다. 친일 인사들의 식민화 연설과 전장으로 가라는 선동도 이곳에서 많이 이뤄졌다. 그래서 1945년 7월 24일, 조문기, 유만수 등 대한애국청년단 단원들이 친일 행사에 폭탄을 터뜨린 부민관 폭탄의거의 현장이기도 하다. 건물 한쪽 구석에 이를 알리는 조그만 표석이 있다.

이 건물은 6·25전쟁 이후인 1954년 6월 9일부터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발췌개헌과 한일협정 비준, 3선 개헌, 국보위 특별법 제정 등 숱한 현대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원래 입구는 도로쪽 동쪽에 있었지만 1980년 태평로(세종대로) 확장으로 입구가 남쪽으로 바뀌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30분, 3선 개헌안을 2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킨 공화당 의원들이 황급하게 제3별관을 빠져 나오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관심거리는 이 지하도로 이어진 건너편 국회 별관이다. 이 지하도를 건너 지금의 파이낸스빌딩 자리에 국회의사당 제2별관과 제3별관이 나란히 있었다. 그 중 특히 제3별관에는 유독 가슴 아픈 역사가 많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단행되고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곳에 자리잡았다. 또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정보기관, 즉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낸 첫 사무실이 이곳이다. JP는 최근 신문에 연재 중인 회고록에서 “5월 19일 혁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포함된 통치체제 안을 통과시킨 다음날 나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면서 “정보부 창설팀은 서울시내 여관을 옮겨다니며 일했다, 5월 23일 태평로 서울신문사 옆 국회 별관(지금의 파이낸스센터 빌딩)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열었다”고 회고했다.(중앙일보 2015.4.3)

3선 개헌안 새벽에 날치기로 처리
국회 제3별관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1969년 3선개헌 때문이다. 5·16 쿠데타로 출범한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3선 연임을 제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이 조항을 바꾸는 3선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개헌 작업은 일찍부터 치밀하게 추진됐다. 1967년 12월 17일 당시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면서 “이 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의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 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돼야 한다”고 운을 뗐다.

야당의 극렬한 반대는 당연했고,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조차 반대가 많았다. 여당 내 3선 반대의 핵심은 당의장이던 JP였다. ‘차기’를 노리던 JP로서는 일면 당연했다. JP계는 공화당 내 사조직을 통해 후계구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안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모두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보부장의 공작으로 JP는 당의장에서 물러나 부산 바닷가로 내려가며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JP를 후계로 준비하던 세력은 모두 제명됐다. 이 내용은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김경재 지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형욱은 ‘3선개헌은 유신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폭로했다.

서울시의회 한쪽 구석에 있는 부민관 폭탄의거 표석

 


하지만 JP세력은 ‘권오병 문교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에 동조하는 이른바 ‘4·8 항명파동’을 일으켰다. 다시 항명한 현역의원 5명을 비롯해 93명의 당직자가 제명되면서 사실상 JP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손발을 모두 잃은 JP는 박정희의 3선개헌에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JP는 최근 신문에 연재 중인 회고록에서 “1969년 3선개헌 정국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대의견을 전하자 자신의 손을 잡더니 ‘나와 같이 죽자고 혁명했지, 끝까지 나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야당의원까지 ‘매수’한 여당은 69년 8월 14일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여당의 강행처리와 이를 막으려는 야당의 처절한 사투가 이어졌다. 심지어 야당은 변절한 3명의 국회의원을 제명시키기 위해 당을 스스로 해산하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9월 13일 야당의원들은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국회 본회의장 앞에는 3000여명의 시민·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월요일인 15일 국회 본회의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떠났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은 일요일인 14일 새벽 2시30분 건너편에 있는 제3별관으로 모였다. 122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찬성 122, 반대 0으로 불과 2분 만에 개헌안은 날치기 처리됐다. 속기사 1명과 사전에 몰래 부른 기자 몇 명만 이 현장을 기록했다. 이때 유명한 것이 전등까지 끄고 의사봉이 없어 주전자 뚜껑으로 ‘땅땅땅’ 세 번 내리쳤다는 것이다.

 

지하도 입구에 있는 4·19혁명 중심지 표석

 


1985년 철거 후 파이낸스빌딩 들어서
이렇게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협박과 회유’ 분위기에서 국민투표에 회부됐다. ‘혼란이냐 안정이냐’는 협박선거와 밀가루와 현금을 뿌리는 금품선거였다. 이 때 공화당 조직을 통해 지구당별로 수십만 달러가 지급됐고, 개헌을 위해 정부가 1500만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 자금은 1968년~69년 도입된 상업차관에서 충당됐다는 주장도 있다.(김정원, 한국분단사)

이후 국회 제3별관은 장기집권을 위한 날치기 처리 단골 장소로 활용됐다. 이후 1971년 12월 27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가지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날치기 통과된 장소도 바로 여기다. 그리고 이는 곧이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는 유신체제로 가는 바탕이 됐다.

헌정사의 현장이던 국회는 1975년 9월 한강의 가운데 조그만 섬 여의도로 옮겨갔다. 태평로 정치시대가 끝나고 여의도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물은 서울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다가 1991년 지방자치 도입 이후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날치기와 장기집권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국회 별관은 1980년 일부가 철거됐다가, 1985년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한국 금융의 중심, 파이낸스빌딩이 들어서 있다.

정부는 최근 이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있는 국세청 남대문별관을 87년 만에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이 건물은 1937년 일제가 지어 조선총독부 체신국으로 쓰던 볼품 없는 건물이다. 정부는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슬픈 역사, 치욕의 역사도 복원되고 기록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도 날치기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장기집권의 말로가 어떠한지 교훈을 얻지 않을까. 하지만 서울시의회 건물 어디에도 이러한 정치사의 현장이라는 설명이 없다. 시의회 건물 앞에는 등록문화재로 언제 어떤 건축학적 의미가 있는지만 간단하게 설명한 플라스틱 안내문이 있을 뿐이다.

학생들도 견학 오고, 또 현대사 마케팅이 유행하는 요즘이지만 이곳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벌어진 현대 정치사의 갖가지 현장과 의미를 설명하는 최소한의 안내 팸플릿조차 갖춰지지 않았다. 화단에 있는 부민관 폭탄의거 현장이라는 표석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에 비해 서울시의회 건물 안 정면에는 역대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기록해야 할 역사, 교훈을 얻어야 할 역사는 없고, 엉뚱한 시의원들 이름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이곳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현대사의 중요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라는 의미가 중요한가, 아니면 저기 시의원 명단이 중요한가”라고 질문하자 시의회 공보실 관계자는 아무 말도 못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역사의 현장을 바로 복원한다며 수천억원짜리 건물까지 허물면서, 기존에 있는 역사의 현장은 최소한의 안내문도 없이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