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무엇일까. 물론 국민이나 애국심 같은 무형의 재산은 제외하고 실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말이다. 민간·국가를 합해 장부가액으로 가장 비싼 것은 바로 경부고속도로다. 서울에서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조8806억원이다.(2013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기준) 이는 대한민국 국유재산 총액 912조1000억원 중에서 단연 1위다. 건물로 가장 비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1·2단계를 모두 합해도 채 1조원이 안 된다는 점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재산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고속도로는 6조5618억원짜리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착공해 1970년 7월 준공돼 45년이나 된 낡고, 땜질투성이 도로이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비싼 재산가치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정 가운데 지점
철도도 마찬가지지만 경부고속도로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보다 1년여 빠른 1969년 4월 개통된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다. 경인고속도로는 23.4㎞에 불과해 경부고속도로 428㎞의 10분의 1도 안 되기 때문인지, 고속도로 하면 경부고속도로가 연상된다.

게다가 경부고속도로는 비단 금전적 가치뿐만 아니라, 산업의 대동맥이나 조국 근대화의 상징 등 온갖 수식어를 달고 60년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현대사 연구가 박태균 교수(서울대 국제대학원)는 경부고속도로를 ‘1960년대의 결정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 있는 준공 기념탑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와 칭송이 가득하다.

 


경부고속도로 정 가운데 지점이 바로 추풍령이다. 전체 길이 428㎞의 중간인 214㎞에 위치한 추풍령 휴게소 하행선에 ‘서울·부산 중심점’ 탑이 서 있다.(현재 경부고속도로는 굽은 도로를 곧게 펴는 선형개량 공사로 총연장이 416㎞로 준공 당시보다 12㎞ 짧아졌다) 조그만 소공원으로 꾸며진 개통기념 표석 안내판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한국 경제를 바꾼 가장 위대한 순간 1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처음 나왔다. 역시 한국 경제를 바꾼 위대한 순간은 선거라는 정치적 국면에서 나온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3선 개헌을 처음 언급한 공화당 윤치영 의장서리의 개헌 필요성 발언(1967년 12월 17일)과 이어진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정치적 논란이 많았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MB)의 4대강 운하사업처럼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67년 12월 1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 시작했지만, 설계도면이나 자금동원 계획 등 구체적 계획은 하나도 확정하지 못했다. 정부는 세계은행(IBRD)에서 자금을 빌리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대가로 얻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근시안적인’ 야당이 건설현장에 드러눕는 등 방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상징조작이다. 당시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야당 당수 유진오는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 건설이라는 데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추어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8.1.11)

 

추풍령 휴게소는 경부고속도로의 중앙으로 이곳에 조그만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야당이 반대한 이유는 자금지원을 요청받았던 IBRD와 같은 맥락이었다. IBRD가 자금지원을 거부한 이유는 “남·북 종단도로 건설보다 동·서 횡단도로 건설이 경제적으로 더 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3선 개헌 반대투쟁에서 야당은 ‘하이웨이 전술’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 정치적 의도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내세워 정부 실적 PR를 최대한 활용키로 한 것, 지난번 오산~천안 간 고속도로 개통식 때 많은 시민의 운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후 부상된 것” 등의 기사가 있다.(경향신문 1969.10.7)

이후 1971년 대선에서 야당 김대중 후보조차 “우선은 지방국도 포장, 2단계로 고속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등 도로 건설은 선거 때마다 여야 단골 공약이 됐다. 아마 크던 작던 선거 때만 되면 도로 기공식이 벌어지는 ‘씁쓸한 전통’도 이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대전인터체인지에서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을 하고 있다.

 

 


높이 30.8m 준공 기념탑 우뚝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68년 2월 1일 16개 건설업체가 일제히 공사에 돌입했다. 여기에는 3개 군 공병단도 가세해 마치 전투 치르듯 공사가 이뤄졌다. 주요 공사는 현대건설이 맡았다.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MB)은 나중에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인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 정주영 회장은 민간 출신의 사령관이었다”고 회고했다.(이명박, 신화는 없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가장 난공사는 옥천 당재터널 공사였다. 당시 공사에 참가했던 현대건설 공영진 부사장은 “지층이 절암토사로 된 퇴적지층이라 공사 진척이 되지 않았다. 해결방법은 보통 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흑자를 포기하는 결단이 요구됐다. 결국 이 공사는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면서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해 3개월 걸린다는 공사를 25일 만에 끝내 경부고속도로 개통 행사를 정시에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매일경제 1995.6.14)

드디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이 열렸다. 불과 3년 5개월 만에 428㎞ 길이 4차선 고속도로를 뚫은 것이다. 원래는 1971년 준공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1년이나 앞당겼다. 총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으로 1㎞당 1억원에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추풍령휴게소 상행선 방향에 웅장한 30.8m 높이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서 있다. 서울대 미대 송영수 교수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형상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이 탑의 정면에는 낯익은 서체(박정희 서체)의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라는 휘호가 써 있다. 이 탑의 하단에는 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기본사항이 적혀 있다. 폭 22.4m(4차선) 도로로 100m 이상 교량이 29개소, 100m 이하 교량 281개소, 터널 상하 12개 4008m, 시멘트 663만2000대, 철근 4만8700톤, 연인원 890만명이 165만대의 장비를 동원해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탑의 뒷면에는 당시 건설부 장관이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에 있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런 자랑이다”라고 써 있다. ‘역사적 영단’ ‘직접 지휘’ 등 찬사와 칭송으로 가득하다.



 

준공 기념탑이 높은 곳에서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반면에 77명의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멀리 떨어진 금강휴게소 한쪽 구석에 서 있다.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 남겨
시인 이은상이 지은 ‘고속도로의 노래’가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알았다. 그 중 “꿈에도 내 소원 조국의 번영/달려라 자주의 길/달려라 부강의 길/천리를 주름 잡는 고속도로/…달려라 자유의 길/달려라 평화의 길/세기를 앞당기는 고속도로/…달려라 승리의 길/달려라 통일의 길/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라는 대목이 인상 깊다. 기념탑 정면에 있는 박 대통령의 ‘통일의 길’이라는 대목과 노랫말에 등장하는 ‘자주·부강·자유·평화·승리·통일’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의외다.

솔직히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성과 효용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부정적 유산도 많이 남겼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념탑에 새겨진 세계 최단 기간 건설이라는 자랑은 ‘날림공사’ ‘부실공사’와 비슷한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1년 만에 전 구간을 다시 포장해 총건설비의 10%가 추가됐다. 건설비 절감을 위해 고속도로 안전에서 매우 중요한 중앙분리대를 설치하지 않은 채 개통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근원과도 연결된다.

무엇보다 부정적 유산은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과학자나 공학자들이 정치적으로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과학자와 공학자의 양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MB는 박정희 유산을 재연하려 했다. 4대강 운하가 바로 그것이었다. MB의 문제는 ‘댐’을 ‘보’라고 우기며 과학과 공학을 왜곡했다는 점이다. 그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에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MB는 과학과 공학을 정치논리에 함몰시킨 커다란 ‘우’를 범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한편에 조그만 위령탑이 있다.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다. 3년여라는 짧은 기간 ‘전투’ 같은 공사로 77명의 근로자가 사망했다. 도로공사는 매년 7월 7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연다고 한다. 이 위령탑은 그 순직자를 기리기 위한 탑으로 고속도로 준공과 함께 건립했다. 의문스러운 것은 기념탑과 위령탑을 왜 이렇게 각각의 장소에 건립했을까 하는 점이다. 찬양과 경축의 자리와 추모의 자리는 한곳에 있어선 안 된다는 발상이었을까. 기념탑이 추풍령 위에서 내려보듯 서 있다면 위령탑은 계곡 아래에서 자신이 만든 고속도로를 훔쳐보는 형국이다.


숨진 이들에게 주어진 ‘훈장’은 ‘산업전사’라는 호칭이었다. 이곳 위령탑에 시인 이은상은 이들을 ‘그들은 실로 조국근대화를 향한 민족행진의 산업전사’라고 헌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산업전사라는 훈장 하나로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예 훈장도 없이 숨지는 해고노동자도 적지 않다.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28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경부고속도로 준공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9만명, 하루 251명의 노동자들이 재해를 당하고 있다.(2015년 1월 노동부 통계) 이젠 ‘산업전사’라는 이름 하나로 그들을 위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