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00만명에 육박하는 경기도 성남시는 분당으로 알려진 신도시가 중심이지만, 과거에는 수정로 숫골사거리가 도심이었다. 아래층에 이마트 성남점, 위에는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신세계 쉐던주상복합 자리가 바로 옛 성남시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1964년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출장소가 들어선 이후 성남시청이 여수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지역행정의 중심이었다. 이 일대에 있는 성남 시민회관, 시립 도서관, 방송국 등이 이곳이 과거 도시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성남은 분당신도시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신도시로 계획된 도시다. 하지만 이곳 지형을 가만히 살펴보면 좀 이상하다. 과거 성남시청 자리에 들어선 신세계 쉐던주상복합은 가파른 언덕 중간에 들어서 있다. 바로 옆 블록은 연립주택 등이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이마트 앞쪽 신흥동 쪽도 역시 가파른 고개로 이어져 있다. 평평한 분지가 아닌, 구불구불한 언덕과 고개가 계속된 곳에 도시 중심이 들어선 것이다. 게다가 언덕 넘어 얼마 안 가서 바로 단대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현재 이 하천은 복개돼 있다).

비탈에 20평 단위로 규격화된 집이 빽빽히 들어서 있고, 골목도 대개 바둑판처럼 돼 있다는 점에서 이곳이 규격화된 신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문은 이렇게 꾸불꾸불한 언덕과 하천이 있는 곳에 어떻게 신도시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로 누적된 도시빈민 문제가 바로 이곳에서 폭발했다. 이곳은 1971년 8월 10일 이른바 ‘8·10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이란 경기도 광주시(현 성남시) 주민 5만여명이 시위에 가담, 무력으로 시청을 점령하고 방화한 사건을 말한다. 44년 전 성남시출장소 앞으로 돌아가 보자.

44년 전 광주대단지 사건 때 시위대에 의해 불탄 옛 경기도 성남시출장소 자리에는 지금 고급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주민 5만여명이 시위, 시청 점령
“10일 오전 9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주민들은 11시께 1만여명이 광장과 출장소 주변 빈터, 길 등을 메웠다. 20대 청년 등 30여명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주민들의 가슴에는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 반대한다’는 리본이 달렸으며, 수십개의 플래카드를 든 군중은 오전 11시 양(택상 서울) 시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전 11시 폭우 속에서 양 시장을 기다리던 주민들은 ‘우리를 또 속였다’ ‘시장이 시간을 어겼다’며 흥분, 10여명이 시 사업소로 몰려가자 수십명이 뒤따랐다. 몰려가던 군중의 일부가 출장소 앞에 세워둔… 지프를 부수어 개울에 쳐넣었다. 11시40분 난동자들은 다시 성남시출장소로 몰려가… 책상을 부수고 서류를 불태워 본관 내부가 몽땅 타버렸다. 난동자들은 또 성남출장소… 반트럭을 불태워 개울에 처박았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차 2대도 접근을 못하고 되돌아 갔으며, 경찰도 병력이 적어 손을 쓸 수 없었다.…”(경향신문 1971.8.11)

8·10 광주대단지 사건의 원인부터 따져보자. 급속한 공업·산업·도시화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 말부터 거대한 도시빈민 주거지가 생겨났다. 이들은 서울의 청계천변과 창신동, 용두동, 봉천동 등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면서 여러 도시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서울시는 이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킬 장소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350만평의 땅(광주대단지)을 마련했다. 그리고 1969년 9월 1일부터 20평의 땅을 분양해 이곳에 철거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신도시에 철거민을 이주시킬 계획이었으니 언덕이 많은 값싼 부지를 마련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철거민이 이주할 당시 이곳은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 공중화장실마저 변변하게 마련돼 있지 않았다. 철거민들은 대충 언덕배기에 천막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하지만 입주권 즉 딱지가 전매되고, 이 딱지를 얻기 위해 각지에서 단대천 주변에 천막을 치는 등 부동산 투기가 만연했다. 마침 19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개발붐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이 딱지를 사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였다. 이렇게 성남시에 몰린 인구는 1971년에 14만~16만명까지 늘었다.

 

당시 성남시민들이 시영버스를 빼앗아 시위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시 철거민들 강제 집단 이주
그동안 수수방관하던 정부는 입주권 위조, 철거비리 등이 만연하자 7월 14일 입주권 전매를 금지시키고, 토지 분양가를 2배로 인상했다. 불하한 토지에 취득세까지 부과했다. 입주한 주민들은 분노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곳에 48개 공장을 입주시켜 자족도시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공장 건설도 시들해져 버렸다. 몇몇 공장이 입주했지만 수십만명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다.

일거리를 찾지 못한 도시빈민들은 심각한 도시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대책위원장을 맡은 전성천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한 일의 중요한 부분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는 일인데, 하루에 몇 구의 시체를 치우기도 했다고 한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재개발의 그늘-철거, 2002.3.24)

이런 가운데 정부는 전매한 땅에 집을 짓지 않으면 불하를 무효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분양권 전매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철거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우선권이 무시되고, 외지인의 투기판이 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특히 일자리 등 약속했던 생계수단 마련 요구를 묵살한 것에 분노했다. 결국 8월 10일 성남출장소가 불에 타고 인근 파출소까지 파괴됐다.

광주대단지 사건 때 시위대에 의해 점령된 광주경찰서 성남지서는 현재 수정경찰서로 규모가 커져 있다.

경찰서 넘어 태평고개는 당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던 곳이다.

 

 


“낮 12시10분께 난동자 30여명이 성남지서에 몰려가 몽둥이로 유리창을 부순 후 지서 안에 있던 경찰차를 길로 끌어내 불태웠다. 오후 1시께 10대, 20대 청소년 50여명이 시영버스를 뺏어 타고 지붕에 올라가 탄리천길을 달려 ‘서울로 가자’며 수진리고개를 넘으려다 되돌아와 거리를 돌았다… 오후 3시반쯤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난동자들을 길에서 언덕 위로 몰자 500여명으로 줄어든 난동자들은 언덕 위에서 돌을 던지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5시반까지 대치했다.…”(경향신문 1971.8.11)

정부가 주민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이 소요사태는 6시간 만에 끝났다. 간간이 주민들의 시위가 이어졌지만 12일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다. 당시 김종필 총리는 “행정부에 전적으로 잘못이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면서 “주민에게 한 약속은 모두 이행토록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경찰과 주민 100여명이 부상했고, 주민 22명이 구속됐다.

‘선입주 후개발’ 무리한 정책 드러나
이 광주대단지 사건은 정부 수립 이후 최초, 당시로서는 최대의 소요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은 ‘난동’ ‘폭동’ 으로, 정부와 재판부는 ‘광주대단지 집단난동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봉기’, ‘항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재야에서는 정부가 신속히 사과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도시빈민의 승리’로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 당시 서울대 법대생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제 민중은 과거의 체념과 좌절을 딛고 민중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했다.(송건호전집 1, 한길사, 2002)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을 놓고 지금도 치열하게 학문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11년 8월 ‘8·10 광주대단지 사건’ 40주년을 맞아 성남지역 언론사대표자협의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 사건이 한국의 도시정책, 빈민운동, 지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면서 “그것은 2009년 1월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지난 40여년 동안 무허가 정착지의 철거·정비과정, 무분별한 도시 재개발정책 시행에 맞서 주거와 생활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도시주민들이 ‘저항의 첫 포문을 연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이 사건을 ‘8·10 광주대단지 항거’라고 표현했다.

 

언덕에 20평 주택이 빽빽히 들어선 형태의 성남 구도심은

과거 정부의 무능한 신도시 정책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임미리 박사는 이 사건의 투쟁 주체와 결과를 중심으로 이를 재평가한다. 임 박사는 “정권의 즉각적인 항복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붙여진 ‘성공’이라는 평가는 재평가돼야 한다”면서 “전매입주자 중에는 결코 도시하층민으로 분류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광주대단지 사건을 처음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은 도시빈민이 아니라, 부동산 전매업자였고, 정부의 혜택 역시 이들 전매업자에게 맞춰져 있을 뿐 도시빈민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해석’ 기억과 전망, 여름호, 2012)

실제 정부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투기꾼인 전매자들의 토지불하 가격 인하 요구만 수용됐을 뿐, 판자촌 세입자나 초기 철거민에 대한 일자리 등 생계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김동춘 교수도 “빈민 주거문제는 빈민 생활문제와 결부되어 있는데 후자 대책이 없는 ‘선입주 후개발’의 논리에 입각한 무리한 대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이런 지적에 공감했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해 학술적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이 사건은 도시빈민, 철거민, 도시 재개발, 부동산 투기 등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함 역시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문제는 지금도 그러한 정부의 무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성남 구도심은 많이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언덕과 고개, 좁은 골목에 20평으로 구획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구조는 아직 그대로이다. 정부의 무능과 투기꾼이 만들어놓은 ‘괴물 신도시’의 잔재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