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는 치욕의 역사를 숨기고 싶어한다. 자신 혹은 선대의 치부를 숨김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분명 역사다. 기억에서 잊혀진다고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권력자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에 있는 ‘대청황제공덕비’가 아닐까. 이른바 ‘삼전도비’라고 알려진 이 비석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결국 청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은 ‘치욕의 상징’이었다. 이 비석은 우리 민족이 왜적과 오랑캐에 처음 패배한 굴욕의 증거였다. 청일전쟁 이후 청조가 힘이 빠지자 고종은 이 비석을 한강물에 내버렸다. 그런데 일제시대 가뭄으로 한강물이 마르자 이 비석이 다시 드러냈다. 해방후 이승만은 이 비석을 아예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런데 1963년 홍수로 다시 비석이 드러났다. 이 비석은 공터에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도로가 나면서 다시 철거해야 했다. 결국 송파구는 2010년 ‘원래 위치를 고증하고 문화재 경관심의를 거쳐’ 복원했다. 이 비석이 원래 세워진 장소는 지금은 물이 찬 석촌호수 안이라고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삼전도비만큼이나 치욕적인 사건이 바로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이다. 이 사건은 경위야 어떻든 우리 현대사를 넘어 근·중세사까지 올려봐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였을까. 사건 발생 후 신군부는 그 역사적 현장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안전가옥) ‘나동’을 헐어버렸다. 2층 양옥으로 잘 지어진 이 건물은 워낙 비밀스런 존재였기 때문에 사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멀리 청와대 영빈관 옆에 있는 궁정동 안가는 모두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것이 바로 앞 청와대 경호실장 관저이다.

 

 


신군부 집권 후 궁정동 안가 ‘나동’ 철거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는 안가를 모두 헐어내고 공원(무궁화동산)으로 만들었다. 비록 10·26의 현장은 이미 지웠지만, 나머지 안가마저 기억하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공원 앞 표석에는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만 돼 있다. 안전가옥이 무엇이며, 이 안가에서 과연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공원에는 이곳에 우물이 있어 궁정동이라는 유래를 따 한자 우물정자의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이 있는 곳이 안가 나동의 연회장이 있던, 바로 그 역사적 현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물정자 모양의 화강암을 두르고 안의 검은색 돌에는 태극문양을 새겨넣은 것이 그런 추측을 더한다. 하지만 이 조형물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이곳 궁정동 일대에는 중앙정보부장 집무실을 포함해 안가 5채가 있었다. 부장 집무실 바로 동쪽 옆에 ‘구관’, 골목 건너 북쪽으로 ‘신관’이 있었다. 그 신관 남쪽의 2층 양옥집이 ‘나동’, 나동 남쪽에 한옥으로 새로 지은 ‘다동’이 있었다. 이 모두는 중정부장 집무실을 통해 연결돼 있었고, 1979년 10월 26일 문제의 사건은 바로 ‘나동’에서 일어났다.

박정희 시대 중정 안전가옥은 모두 12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궁정동에 6채. 청운동에 3채. 삼청동에 3채. 구기동과 한남동에도 있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거나 일부는 기관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관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경비하던 청와대 경호원들은 “사진촬영을 허용할 수 없다”고 제지한다.

당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72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유신체제는 시작됐다. 당시 신병치료차 일본에 있던 김대중(DJ)은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노리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라며 비난했다. 1973년 유신체제의 중정은 DJ를 납치해 살해하려 시도했다.

유신체제는 조용히 1년을 넘기지 못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11월 29일에는 한국기자협회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수호할 것’을 결의했다. 12월 23일 함석헌·장준하·천관우 등 각계 인사들이 서울 YMCA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촉하면서 재야가 결집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는 이에 긴급조치로 맞섰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그 자체만으로 영장 없이 군법회의에 처단한다는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1호에서 시작해 무려 9호까지 발동됐다. 이 긴급조치로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 대학생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기자와 문인을 구속해 펜을 꺾어버렸다. 강신옥, 이병린 등 인권변호사마저 줄줄이 구속했다. 노기남 신부 등 종교인마저 예외일 수 없었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이때 만들어졌다. 1975년 8월 15일에는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시인 양성우는 이 시기를 ‘겨울공화국’으로 표현했다.

 

 

10·26사건이 벌어진 궁정동 안가 ‘나동’ 모습(사진 왼쪽)과 1979년 11월 9일 김재규가

현장검증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모습.(사진 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신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는 외부에서도 가세했다. 1976년 10월 15일 <워싱턴 포스트> 1면 머리기사에는 ‘한국정부가 박동선을 통해 미 의원 20명 이상에게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뿌렸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의 시작이었다. 1977년 6월 5일

<뉴욕타임스>는 박동선이 중정에서 고용한 인물이라고 폭로했다. 여기에 6년 반이나 중정부장을 맡았던 김형욱이 은밀히 미국으로 망명해 유신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12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은 신직수 중정부장을 경질하고 새로 김재규 부장을 임명했다. 김재규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김재규는 김형욱 귀국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제3국의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1979년 10월 8일 당시 언론은 부인 인터뷰를 통해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돼 파리경시청이 직접 수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0월 17일) 그동안 숱한 의문과 억측을 불러왔던 김형욱 실종사건의 진실은 한참 후 밝혀졌다. 김형욱은 중정요원과 중정이 고용한 제3국 살인청부업자에 의해 프랑스 파리의 한 교외에서 살해돼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국정원 과거사위,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9년)

 

 

우물정자 조형물이 있는 이곳이 바로 안가 ‘나동’ 연회장이 있던 장소로 추측된다.


1976년 5월 22일 야당인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선명야당을 주창한 김영삼(YS)을 각목으로 내쫓고 이철승 체제로 바뀌었다.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이라는 어용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YS는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집권 공화당보다 1.1% 많은 득표율을 올렸다. 야당에 대한 공작이 시작됐다. “야당 총재 김영삼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민주회복, 양심수 석방, 헌법특위 설치, 사법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YS ‘생포작전’은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라는 소송으로 시작됐다. …이때부터 법은 공작의 도구가 되고, 정책 판단에는 광기마저 엿보였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012)

9월 10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정당 당수를 주식회사 사장과 동일시해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YS의 총재직을 박탈했다. YS는 9월 15일 미국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카터 정부는 독재자 박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이를 ‘사대주의 언동’이라며 10월 4일 YS를 국회의원에서 제명, 의원직마저 박탈했다. YS 제명은 그의 지역구인 부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10월 16일부터 부산대·영남대 학생들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18일 새벽 0시, 부산 일원에 계엄이 선포되고, 시위가 마산으로 확산되자 10월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됐다.

청와대와 남산, 궁정동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중정부장 김재규는 부산과 마산을 직접 답사한 후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보고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가 시민의 호응이 높은 민중봉기이므로 근본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자 각하는 화를 내시면서 ‘내가 직접 발포 명령하지, 나를 두고 사형이야 시키겠나’라고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병자호란 때 명분 주장하던 김상헌 생가터
하지만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고한 ‘김영삼의 사주를 받은 시위’라고 판단했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영삼이 선동해 그렇게 된 것(부마사태)이다. 대통령은 철두철미하게 그렇게 생각했다”면서 궁정동 사태의 발단은 “차지철은 ‘그렇다’는 입장이고, 김재규는 ‘아니다’라는 것이 근본적 문제였다”고 증언했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10.4.4)

10월 26일 저녁 7시40분 궁정동 안가 다동 연회장.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가수 심수봉이 노래하는 가운데 김재규는 “이 버러지 같은…”이라면서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을 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또 한 발을 발사했다. 이렇게 ‘유신시대’는 끝났다. 10·26이 정권 찬탈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란은 조금 더 역사의 평결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어떻게 그토록 완고하던 체제가 총 한 발로 무너질 수 있었을까. 박정희 연구가 전인권은 “유신체제는… 박정희 개인의 의지와 소수의 최측근 인사들의 권력욕이 빚어낸 체제였다. …이 체제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체제였다”고 평가했다.(전인권, 박정희 평전, 2006)

앞서 병자호란 때 명분을 강조하며 항복을 거부하던 인물이 김상헌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김상헌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궁정동 안가 자리다. 지금도 이곳에는 ‘김상헌 생가터’ 표석과 시비가 있다. 조선이 청에 굴복하고 김상헌은 중국 심양으로 압송됐다. 1640년 압송 도중 읊은 것이 유명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난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이다.

김상헌의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는 대목은 1979년 10·26 이후 안개정국과 올듯말듯한 민주화와 교묘히 겹쳐진다. 결국 10·26 이후 고국산천은 광주의 피를 먹고 1980년 신군부가 등장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김재규는 유신의 머리를 자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머리 잘린 유신이란 괴물에게 새로운 머리가 솟아났다. 박정희의 정치적 사생아 전두환이었다”고 평가했다.(한홍구, 유신, 2012)

375년 전 김상헌이 지은 시조는 ‘시절이 하수상한’ 2015년 6월 지금에도 ‘알듯 모를 듯한’ 무엇인가를 시사하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