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은 제53주년 4·19혁명일이다.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에 항거해 학생·시민들이 근대적 혁명을 일으킨 대사건이다. 4·19혁명의 발단은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중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사망한 김주열군의 사체가 발견된 것이고, 바로 전날인 4월18일 고려대 시위가 도화선이 됐다.


“친애하는 고대학생 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달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4·18 고려대 학생선언문은 지금 다시 읽어도 명문장이다. 53년전 4·19혁명의 주역이 바로 이기택 전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다. 그는 당시 고대학생위원장으로 4·18 시위의 주역이고, 1961년 곧장 민주청년회 경남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67년 불과 30세 나이에 7대 국회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4·19혁명의 주역으로 특혜를 받은 것이다.





사진은 이 의원이 원내에 들어가 1969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저지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던때 모습이다.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피’였던 이 의원은 야당의 굳은 일은 도맡아 했다. 이 의원은 날치기를 막기 위해 국회본회의장 의장석에 의자를 잔뜩 쌓아올린 ‘대공사’를 마친후 지친 표정으로 책상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그 앞에 선배 의원이 나란히 앉아있다. 왼쪽부터 박정희와 맞서다 의문사를 당하고 얼마전 다시 겨레장을 치른 장준하 의원, 의리에 강했던 김재광 의원(후에 국회부의장), 1987년 YS와 DJ가 분열했을 때 통합야당 아니면 정치를 하지 않겠다던 고흥문 의원(후에 국회부의장) 그리고 나중에 신민당 총재를 지낸 이민우 의원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의원이 의자를 잔뜩 쌓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안은 장소를 옮겨 9월14일 새벽 날치기로 통과되고 말았다. 사진속 이 의원의 표정을 보면 자신의 이런 노력이 무위에 그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허탈한 표정이다.


이 의원은 많은 4·19 주역이 유신에 참여하는 등 변절할 때 나름 ‘지조’를 지켰다. 그는 8·9·10대 연속 당선되고, 제1야당 신민당 사무총장, 부총재 등을 지내더니 1979년 급기야 김영삼(YS) 총재에 맞서 당권에 도전하는 등 야당의 재목으로 성장했다. 


사실 그는 양김씨인 YS와 DJ에 맞서다 ‘피를 본’ 대표적 정치인 중의 한명이다. 그래서 그에게 대권주자급인 YS나, DJ, MB 같은 영문 이니셜을 붙여줘 KT라 불렀다.(물론 본인이 기자들에게 KT로 표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하지만 그의 정치 말년은 학창시절 아니 사진속 초선의원 시절의 소신과 신념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가, 180도 돌아 노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후 대학 후배 이명박 대통령편에 섰다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지냈다. 민주평통은 대통령에게 평화통일 정책을 자문·건의하는 헌법기구로 수석부의장은 총리급과 부총리급 중간 정도로 매우 직위가 높다. 


이 전 부의장은 지난 4월15일 “4·19혁명은 남북대화가 금기시되던 시절에 평화통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평화통일론의 물꼬를 튼 4·19혁명의 주역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남북교류는 커녕, 서로 증오만 키웠던 이명박 정부의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서 무슨 역할을 했는가.


게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최첨단 스텔트 폭격기가 날라오고, 마지막 보루였던 개성공단도 폐쇄되는 남북긴장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유엔사무총장마저 북한에 평화적 대화를 호소하는 마당에 4.19혁명의 주역으로 평화통일론의 물꼬를 열었다고 자평하는 그는 도대체 뭘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 4.19혁명의 주역으로서 기본 직무를 유기내지,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4·19혁명의 근본 정신인 이성과 진리, 자유, 민주, 평화통일이라는 명제는 지금 대학에도, 정치에도, 남북관계에도 사라진 것 같다. 바로 4·19혁명의 주역인 KT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데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