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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진정한 과학자의 시대를 꿈꾸며

진정한 과학자의 시대를 꿈꾸며

 

이공계가 위기라는 사실은 이제 뉴스도 아닙니다. 하기야 이공계에 비해 인문학은 위기를 넘어 이미 사망해 백골이 진토됐겠지요. 이공계가 위기에 처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과학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과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과학, 영어로 사이언스라는 것은 바로 ‘예측’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시약 A 5그램과 시약 B 10그램을 혼합하면 C의 물체가 생성될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새로 합성된 결과물 C는 같은 조건하에서 언제나 C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게 아닙니다. 흔히 운전을 하다 보면 접촉사고가 납니다. 접촉사고는 순간적으로 벌어지지만 기계적 작동이기 때문에 전문가가 면밀히 따져보면 분명히 잘잘못을 규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우선 우기고 봅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분위기입니다. 논리와 과학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신청인은 천성산 일대 다수 분포하고 있는 생물로서… 공사로 인하여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생물로”로 시작하는 유명한 도롱뇽 소송도 그렇습니다. 지질·토목·환경 전문가가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내도 도통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언론)는 문제의 본질과 거리가 먼 ‘도롱뇽’과 한 스님의 단식에 관심을 가졌지 정작 중요한 과학자의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운하사업과 4대 강 정비사업도 꼭 그 꼴입니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하천의 유속과 통행하는 배와 그 선적량 등을 계산하면 운하의 경제성이 나옵니다. 그것은 과학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문가들이 경제성도 없고 오히려 환경을 파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해도 정치권은 “아니다, 경제성이 있다”고 우깁니다.

이것은 관점의 문제가 아닌, 같은 결과가 예측되는 과학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깁니다. 심지어 과학자적 관점에서 “이건 아니다”라고 얘기했더니 “너 큰 죄를 지었다”며 징계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떤 젊은이가 과학자의 길을 걷겠습니까. 정치판을 기웃거리며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출세하기 훨씬 빠른데 어떤 바보가 실험실에 처박혀 연구를 하겠습니까. 서울대 교수였던 황우석씨가 이런 풍토가 낳은 ‘기형아’ 아닙니까. 그럴듯한 말발과 정치·언론계 인맥이면 연구비가 펑펑 들어오는데 뭐하러 지루한 연구를 합니까. 데이터요? 적당히 조작하면 되지요.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후배가 감내하고 있지요. 황우석 사태 이후 우리 젊은 과학도가 외국 유명 학술지에 논문 하나 싣기 위해선 과거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 이 분야에 대한 투자와 연구도 시들해졌지요.

우리가 ‘우기기’에 몰두할 때 외국은 논리와 과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외국은 태아 성별은 물론, 머리 색깔 심지어 눈 색깔까지 고를 수 있는 수준까지 진보했습니다. 마치 음식점에서 자기 기호에 따라 음식을 주문하듯 주문형 아기가 태어날 무서운 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호 ‘Weekly 경향’은 과학계의 최근 현황과 문제점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진정한 과학자가 대접받는 시대를 꿈꿔 봅니다.

<원희복 편집장 wonhb@kyunghyang.com>

2009/03/31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