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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역사르포](10) 남산 중앙정보부…무소불위의 공작과 고문의 흔적 남산은 한강과 함께 600년간 수도 서울을 내려다보며 한민족의 질곡과 함께한 존재다. 불과 해발 262m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남산은 나라의 제사를 올리는 성스러운 산이자 성곽과 봉수대가 있어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근세 들어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애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남산’이라는 고유명사는 시골사람들에게는 ‘서울’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 들어 남산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었다. 이 시기 남산은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정치공작과 고문을 떠올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이렇게 된 배경은 바로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일제 통감 관저 자리에 정보기관 들어서.. 더보기
[광복 70주년 역사르포](9) 5·16쿠데타 첫 총격전-한강대교 남단…넘으려는 자, 막으려는 자 정반대의 군인상이 교차 김종필 전 총리(JP)는 2013년 12월 10일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기념사업회 창립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 국회를 찾은 적이 있다. 5년 10개월 만에 국회를 찾은 JP는 “국립묘지에 가지 않고 조상이 묻히고 형제들이 누워 있는 고향에 가서 눕겠다. 비석에 ‘영생의 반려자와 이곳에 함께 눕노라’라고 쓰겠다”면서 “회고록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JP는 최초의 중앙정보부장, 국회의원 아홉 번, 국무총리 두 번, 몇 번의 정당 대표를 지냈던 인물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그만큼 역사의 주요 순간을 함께한 인물도 드물다. 그런 인물이 회고록을 안 쓴다는 것은 ‘책임회피’는 물론 후대 역사가들에게 죄를 짓는 행위였다. JP는 생각을 바꿨는지 최근 한 신문에 자신의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 더보기
[광복 70년 역사르포](8)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창립-천도교 중앙대교당…4·19의 열망 ‘평화통일’로 승화 1961년 2월 2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대의원들이 의자도 없어 멍석 위에 앉았다. 단상 양쪽에는 ‘뭉치자 민족 주체세력’ ‘배격하자 외세 의존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 출신의 장건상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민족통일의 주체세력이 되는 이 대회는 역사적 모임이므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운동하자”고 개회사를 했다. 민주·자유·자주를 표방하는 민간통일단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결성 순간이다. 각계각층의 통일 열망 모아 결성 191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유학까지 마친 장건상은 상해임정 외무차장, 해방 직후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근로인민당 위원장 대리로 1948년 평양.. 더보기
[광복 70년 역사르포](7)대구 삼성상회 터-한국재벌의 탄생…정치권력을 넘어선 경제권력의 발원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지난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사장을 비롯해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재계인사 21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것이다. 청와대는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해 기업인을 격려하는 자리라고 했지만 주목되는 것은 이재용, 정의선, 조현상 등 재벌 3세들의 참석이었다. 이들이 메세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어 초청 명단에 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재벌 3세가 한꺼번에 청와대에 공식 초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지난 연말부터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재벌 3세의 .. 더보기
[광복 70주년 역사르포](6) 김창룡 암살현장-원효로 1가…이승만 독재 하수인을 응징하다 59년 전 3면에 한 사건의 약도가 실렸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으니 현장 약도까지 실었을 것이다. 위치는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21번지, 자혜병원 앞이다. 약도에는 120m 언덕 위 자택에서 점선으로 내려오는 표시가 있다가 자혜병원과 미장미장원 중간에 엑스표, 즉 ‘사건 현장’이 표시돼 있다. 지금은 그 자택도, 자혜병원도, 또 미장미장원도 없다. 그러나 2015년 3월 59년 전 신문의 약도를 들고 다시 찾은 현장의 골목은 신문에 실린 약도 그대로이다. 단지 자혜병원은 용산경찰서로, 미장미장원은 ‘OK전산’이라는 컴퓨터 복사기 매장과 고시텔로, 자택은 빌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범인이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좁은 골목과 숨은 전봇대까지 그대로이다(물론 전봇대는 콘크리트로 바뀌어 당시 전봇대는.. 더보기
[광복 70년 역사르포](5) 김주열 시신 발견된 마산항 중앙부두…4월 혁명의 횃불이 솟아오른 곳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지금의 창원)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시신이 떠올랐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민의 시위를 경찰은 최루탄과 총격으로 강경진압했다. 주춤하는가 했던 시위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4·19 학생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이 이 시신이었다. 김주열군의 어머니 권찬주씨는 27일 동안 아들을 찾아 헤매다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아들 앞에서 오열했다. 김주열 열사와 학교 동기생인 정순구씨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얼굴에 못이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는 소문이 마산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 고기잡이 배로 건져올린 김 열사의 주검이 누워 있던 장소는 지금의 합포구청과 창원지검 마산지청 사이에 있던 작은 연못 부근이.. 더보기
[광복 70주년 역사르포](4) ‘사법 살인’ 현장-구 대법원 청사 ‘오욕의 역사’ 미술로 감춰질까 “주목되던 ‘진보당 사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27일 밀려든 방청객들로 말미암은 법정 혼란으로 예정보다 늦게 오후 12시5분 개정했다. 김세완 재판장의 판결문 낭독으로 판결 이유 설명이 있은 후 오후 1시45분 최종 언도가 있었다. 이날 대법원 판결은 원심을 완전히 뒤집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서 ‘진보당’에 관한 본질적인 사건에는 무죄를 언도했다. 그러나 조봉암 피고에게는 ‘간첩’ 및 ‘간첩 방조죄’를 적용해 양명산 피고와 함께 사형을 언도했다. 이날 대법원 판결 이유 요지는 (1)평화통일론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 (2)헌법에 ‘단체활동의 자유’가 인정돼 있으며 진보당 강령은 헌법 위배가 아니다 (3)이북 괴뢰집단과 진보당이.. 더보기
[광복 70주년 역사르포](3) 임시수도 부산…한국정치 파동의 출발역, ‘복고 마케팅’ 한창 “여느 때보다 일찍 찾아든 초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52년 5월 26일 임시수도 부산의 아침이었다. 동래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집총 헌병들의 검문을 받았다. 26일 0시를 기해 발동된 계엄령 아래선 어떤 차량도 일단 검문을 받아야 한다는 헌병들의 주장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에 끌려가 몇몇은 국제공산당 음모사건 피의자로 구속됐고, 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골수 야당의원 30명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한여름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장기집권 위한 첫 번째 개헌의 현장 이로부터 꼭 39일 만인 7월 4일 야.. 더보기
[광복 70주년 역사르포](2) 남북을 동강 낸 38선…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없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8월 15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가 발표됐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에서는 미군, 북에서는 소련군이 일본의 무장해제를 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38선 분할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많은 논란과 연구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미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에서 근무하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대령이 8월 10일 자정 무렵 30분 만에 선을 그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딘 러스크가 회고록에서 ‘자랑’하면서 드러났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38선을 미군의 영관급 장교 두 명이 30분 만에 획정했다는 사실은 38선이 미국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그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운명을 이렇게 손쉽게 정할 수 있겠느냐는 의.. 더보기
[광복 70주년 역사르포](1) 서대문형무소 나라 빼앗긴 참담함과 해방의 환희가 서린 곳1945년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일본은 사실상 패전국 준비에 들어갔다. 조선총독 아베(阿部新行)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조선에서 일본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흥분한 조선인이 일본인에 대해 보복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베는 송진우를 만나 치안 유지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상황이 급해진 아베는 15일 오전 여운형에게 같은 제안을 해 겨우 승낙받았다. 그때 여운형은 5개 조건을 요구했는데, 그 첫 번째가 전국에 수감된 정치·경제 사범의 석방이었다. 8월 15일 해방 당일 조선 전역은 의외로 조용했다. 경성에서조차 해방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역사학자 최영희 교수가 사실관계 위주로 정리한 은 8월 15일 분위기를 “갑작스런 국내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