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 21일 이른바 10월 유신이 헌법을 유린한 정치적 쿠데타였다면, 이보다 조금 앞선 8·3조치는 초헌법적 경제적 쿠데타였다. 8·3 사채동결 조치란 개인 재산권과 시장경제 원칙을 무시하고 대통령이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부실기업의 사채를 동결시킨 조치이다. 위헌논란을 무릅쓰고 재벌의 요구들 들어준 것이다.
바로 이 8·3조치와 관련해 최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가 의미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8·3 조치와 산업합리화 정책-유신체제의 경제적 토대 구축과정-’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8·3 조치가 재벌탄생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초헌법적 조치로 권력에 순종하는 재벌을 만들고, 결국 유신체제를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기업들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정부 정책에 순응토록 한 조치가 바로 8·3 조치”라며 “문제는 이 조치가 기업의 방만한 경영에는 면죄부를 주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부과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바로 이 8·3 사채 동결조치를 입안, 실시한 사람이 바로 김용환 당시 청와대 외자담당비서관(현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다.
사진은 바로 이 8·3조치를 단행하고 승진, 국회에서 답변하는 김용환 상공부 차관의 모습이다. 단상을 움켜쥐고 답변하는 만 40세 실세 차관의 모습에서 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초헌법적’ 조치를 단행한 그의 결기어린 모습이 옅보인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기업체 자금 문제는 경제논리에 의해 풀어야 한다며 이 조치에 반대했지만 전경련의 강력한 로비에 밀렸다.
나중에 김 고문이 회고록에서 밝힌 것이지만 “보안유지가 관건으로 생각해 평창동 호텔에서 비밀리에 작업했다”며 “최종안에 대해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관 등도 아무말 없이 결재했다”고 회고했다. 사진을 보면 국무총리석에 앉은 김종필 총리도 위헌적 논란을 일으키는 이 조치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이 40대 실세차관은 이후 상공부, 재무부장관을 지내는 등 관료로서 성공했다. 그리고 정치에 입문해 사진의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 사무총장, 수석부총재를 지내고, 지금은 집권당인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다.
그런데 40년전 실세였던 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실세’라는 소문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인 이른바 ‘7인회’의 좌장으로 꼽힌다. 그와 최병렬, 김용갑, 현경대 전 의원과 언론인 출신 안병훈씨 등이 7인회 멤버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에게 자문을 넘어 상당히 고위직 인사까지 직접 추천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인수위 고용복지분과 위원을 지낸 안상훈 서울대 교수는 김 고문의 사위이기도 하다.
새누리당은 대선 직전 김종인 전 교수를 국민행복추진위원회장으로 영입, 재벌 해체가 요지인 경제민주화를 주창했다. 김 전 교수는 1972년 당시에도 이 8·3조치에 반대했다. 김 전 교수는 당시 ‘60년대 경제성장은 근로자들이 참고 견딘 결과로 기업은 일부를 근로자들한테 줘야 한다, 이 조치는 부실기업이 국민에게 부실을 떼 넘기는 것이다’ 등의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재벌을 탄생시킨 김용환 고문과 재벌해체·경제민주화를 주창한 김종인 위원장, 정반대 경제철학을 가진 사람에게 경제자문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지금 경제민주화는 빌공자 공약으로 끝나는 분위기이다. 김종인 전 교수의 경제민주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요즘 별로 없다. 상대적으로 재벌을 만든 김용환 상임고문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실세로 행세하고 있다.
김종인의 몰락과 김용환의 부상, 재벌을 놓고 막전막후 벌어지는 두 사람의 부침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르켜 주는 바로미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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