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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

[광복 70주년 역사르포](15) 전태일 분신 평화시장… 한국 노동운동의 순교자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다




역사에서 기원전과 기원후를 구분을 하는 A.D.와 B.C.는 ‘예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의미한다.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세계 역사가 크게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요즘 안전과 관련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표현으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시대구분을 할 만한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전태일 분신사건 이전과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평화시장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제출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평화시장 사업주 대표들과 노동시간,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있으나 마나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날 평화시장 주변에는 사업주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시위대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시장을 에워쌌다. 시위대는 몇 번 구호를 외쳤지만 이내 플래카드를 경찰에 빼앗겼다. 결국 시위는 흐지부지 끝나는가 싶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 1시30분 젊은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휘발유를 뿌린 그의 몸에 라이터가 켜지더니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전태일은 불타는 몸으로 몇 걸음 뛰어나가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타는 전태일의 몸을 향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전태일은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2005년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전태일 동상은 일어서려는 모습으로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전태일과 함께 불타버린 근로기준법
전태일 분신사건은 내외에 큰 충격을 줬다. 서울대 법대생은 전태일 유해를 인수해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나섰고, 상대 학생 400여명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대학가에서는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는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탄생했고, 이후 1970년대에만 2500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전태일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계기가 됐다. 전태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지 10년째, 무리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여러 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노동자들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전태일 개인의 사건이기에 앞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이 응집되어 폭발한 하나의 민중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안병무-시대와 민중의 증언자)

전태일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 이소선 여사.

이 사진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봉제업자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업에 망하자 가족은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로 파고다공원 인근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동대문시장에서 리어카 뒤밀이를 하며 생활했다. 당시 짐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서울역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뒤에서 밀어주면 30원을 받았다.

전태일은 1964년 봉제공장 미싱 보조로 평화시장에 발을 들인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지만 월급은 형편 없었다. 당시 이들의 근로조건은 다음과 같이 경향신문에 폭로됐다.(1970년 10월 7일)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정도…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고… 이런 환경에서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 옷감에서 나온 먼지가 가득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노동청에서는 건강진단을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종업원 2~3명만 진단받게 한 후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

 

5월 29일 전태일 분신 4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알리는 포스터.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 기념동상
공장 친목회 모임은 노조 결성을 위한 결의체로 바뀌면서 전태일은 문제의 근본을 따져봤다. 그 결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수없이 진정하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육신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됐는데 사실상 유서였다. 이 편지는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라고 시작해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라고 적었다.

전태일 분신을 기리는 사업은 꾸준히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다. 1980년대 전태일은 ‘노동운동가’로 재평가되고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1985년에는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져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고, 그가 분신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0년 전태일 분신 30주기를 맞아 평화시장 앞 보행로에 표석이 설치됐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분신 현장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난 후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에 전태일 기념동상을 세웠다. 국민 모금으로만 4억원가량이 모였다. 동상 앞 보도에는 성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글귀를 새긴 동판 4000여장이 설치됐다. 동판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것도 있다. 노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김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이라고 썼다. 상반신 동상은 동쪽을 보며 땅을 짚고 하늘을 향하는 모습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지 않은 인물의 기념상을 세운 사례가 없다”며 동상 건립에 반대했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이를 밀어붙였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은 2014년 3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다. 그렇게 죽은 지 35년 만에 전태일은 재평가됐고, 또 새롭게 태어났다. 많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그 어떤 민주화 열사보다 단연 앞선 것이다. 그만큼 전태일의 분신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리라.

전태일 분신 45년이 지난 평화시장 그 자리는 여전히 번화하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274번지 평화시장 A·B동 사이가 바로 분신의 현장이다. 평화시장은 도매시장으로 주로 야간에 성시를 이루지만, 주변은 낮에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태일이 리어카를 밀며 30원을 벌었던 이곳은 지금도 물건을 운반하는 노무자들로 붐빈다. 단지 운반수단이 리어카에서 오토바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미싱기를 돌리던 봉제공장은 모두 사라졌다. 봉제공장은 동남아로 떠나고 일부는 종로구 창신동 등으로 옮겨갔다. 남평화시장 김용민 관리사무소장은 “현재 이곳 남평화시장에만 도매상 700여개가 있고 과거 봉제공장은 한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바로 옆에 있는 동평화시장 도매상가는 이곳보다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요즘 이 일대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로 변모했다. 특히 동대문 일대는 한국을 찾는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로 넘쳐난다. 하지만 도매시장으로 밤에 주로 영업하는 평화시장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동대문시장은 매출에서 온도 차이가 크다.

상인들은 평화시장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민 관리소장은 “중국인 관광객 대부분은 동대문시장의 밀레오레나 두타 등에서 쇼핑하지 이곳 평화시장을 이용하지 않는다”면서 “국내 경기가 워낙 불황이어서 폐업까지는 아니지만 이점(점포를 옮기는 것)과 공점포(빈 점포)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은 내수침체와 온라인 쇼핑몰로 인해 예전처럼 평화시장이 활기차지 않다고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연말 전태일 분신 현장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미래유산이란 100년 후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보물’을 말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장소, 음악도 포함된다. 서울시는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로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신호탄이 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므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태일 분신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좌절은 이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양적 발전은 이뤄졌지만 질적 변화는 없다는 주장도 많다. 마침 5월 29일 참연구소(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부설 연구소)가 주최하고 전태일 재단이 후원하는 ‘전태일 열사 45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는 ‘상징의 재해석; 2015년 전태일’이다.

이날 노동분야의 주제발표를 맡은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는 “전태일을 이해하는 흐름에는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라는 자유주의자들과 1980년대에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변혁을 요구한 ‘노동해방의 요구’가 있다”면서 “하지만 진정한 전태일의 생각과 주장은 이것을 뛰어넘는 ‘인간해방’이다”라고 설명했다. 전태일의 분신 아니 노동의 가치는 계속 재해석, 진화되는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