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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탑

이회창판사의 오판

흔히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法諺)이 있다. 이것은 법관 판결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판결에 대한 실제적 혹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이 법언이 늘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판결이 사회.정치.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그 판결을 내린 사람이 국민으로부터 검증받는 위치에 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1959년 진보당사건 상고심 주심판사였던 고(故) 김갑수(金甲洙) 대법관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는 대법관을 지내고 정계에 뛰어들어 정당의 총재를 지냈다. 아마 대법관까지 지내고 정당 총재가 된 사례는 김대법관과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두 사람뿐일 것이다.

공교롭게 두 사람은 법관시절, 자신의 판결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고 또 겪고 있다. 고 김대법관은 자유당 때 일명 진보당 사건 주심판사로 진보당 당수 죽산(竹山) 조봉암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그의 판결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 제거됐고, 우리 정당사에서 최초의 진보정당이 사라졌다.

그후 이 진보당 사건 판결에 대해 언론은 끊임없는 오판의 문제점을 제기했고, 김대법관은 이를 해명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판결한 지 30년이 지나서도 계속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진보당 판결은 오판이었나' '진보당 사건과 나' 등의 글로 하나하나 해명했다. 스스로 "진보당 사건 판결 논란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교롭게 같은 대법관 출신으로 총재를 거쳐 두번이나 대통령후보가 된 이후보도 엇비슷한 성격의 판결을 했다. 이후보는 초임 법관시절인 61년, 5.16 쿠데타 후에 생긴 혁명재판소 심판관으로 차출돼 민족일보사건 사형 판결에 참여했다. 민족일보 사건이란 신문사 발행인 조용수 사장이 사형당한 한국 언론사의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사건이다.

일부에서 "재판에는 참여하지 않고 법률적 도움만 줬다"고 하지만 분명 이후보는 61년 8월28일 '사형'이라고 돼 있는 민족일보 사건 1심 판결문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후보는 김대법관과 달리 민족일보 사건과 관련해 공식적이고 진솔한 해명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사형을 내리기)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회한만 표시했을 뿐이다. 또 이후보의 판결에 대해 근본적인 검증은 한번도 없었다. 이후보는 그 해박하고 전향적인 법이론으로 뛰어난 판결을 많이 해 대법관까지 됐다. 과연 이심판관의 당시 판결은 올바른 것이었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심판관의 당시 판결은 분명 오판이다. 민족일보사건에 적용된 법은 쿠데타후 제정된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였다. 3년이나 소급적용한 이 법 6조에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선동 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주식회사인 신문사를 사회단체로 봐 이 법을 적용한 것은 분명 무리였다. 이심판관이 참여한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인정됐으나 상고심은 신문사를 사회단체로 볼 수 없다며 법적용 착오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같은 상고심은 아무런 당직을 갖고 있지 않은 조사장에게 주요 정당 간부로 유죄를 선고하는 또다른 오판을 내렸다. 이심판관이 참여한 판결은 당시로도 이미 오판을 내린 것이 증명됐던 것이다.

정계에 뛰어들었던 김대법관은 그후 진보당과 궤를 같이하는 혁신정당 신정당을 만들어 총재가 됐다. 그리고 '민족애에 신념을 둔 평화통일, 농어민을 위한 정책'을 주창했다. 그가 진보정당을 만든 것은 자신의 판결로 사라진 진보당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면 오판을 내린 이후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원희복 / 지방자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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