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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탑

기술직 우대, 행자부 부터

얼마전 한 대기업 회장이 5천억원 규모의 장학재단을 만든다고 해 화제가 됐다. 일반인은 5천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재단 규모에 놀랐겠지만 정책결정권자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장학금의 주 수혜대상을 이공계로 했다는 점이다. 얼마나 이공계 지원자가 줄어 앞으로 기업 운영이 우려됐으면 민간에서 그런 고육책을 내놨겠는가.이공계 혹은 기술직 우대 얘기는 아마 1960∼70년대 '기술입국'을 외치던 시절부터 계속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요즘에는 '이공계 위기론'까지 나오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정부의 기술직에 대한 홀대도 적잖은 요인이다.

행정자치부는 공무원을 임용하고 교육하며, 또 배치하는 기관이다. 공무원 인사에서 수범을 보여야 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행자부에서조차 기술직 공무원은 영 찬밥 신세다. 행자부에는 태풍이나 지진, 홍수 같은 재난에 대비하는 분야에 기술직 공무원이 있다. 또 특정직 공무원으로 분류되는 소방공무원도 사실 기술직에 가깝다.

그런데 전국의 재해를 예방하고 복구하는 책임을 진 기술직 공무원이 최고로 승진해야 방재관이다. 기술이사관이지만 정식 국장도 아닌 국장직급일 뿐이다. 게다가 방재관은 1년여 하면 명예퇴직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후배가 있기 때문이다.

소방직도 마찬가지다. 1급 상당인 소방국장은 2만4천여 소방공무원 중 가장 높은 직급이다. 급증하는 구조.구급 등 소방수요를 정부가 굳이 외면하더라도 국민들은 소방직의 기능을 정부의 행정서비스 중 최고로 꼽고 있다. 그러나 소방국장은 같은 1급 행정직인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의 지휘를 받게 돼 있고, 이 자리 역시 1년여 하고 퇴직하는 것이 불문율로 돼 있다.

새정부들어 수십억원을 들여 민간에게 전면적인 정부조직 진단을 의뢰한 적이 있다. 당시 정부는 "해방후 처음으로 정부조직을 민간으로 하여금 평가 받게 하는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 보고서의 행자부 부분에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업무를 하는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을 일반직 1급 혹은 소방총감(소방국장)으로 임명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시행은커녕 쉬쉬하면서 창고에 처박아 놨다.

재해와 재난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1차적 책임을 가진 그들이지만 우대는커녕 홀대 받고 있는 것이 공무원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 인사정책을 수립하는 중앙인사위원회는 얼마전 공무원 중 기술직 공무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24.7%이지만, 3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 비율은 21.6%에 불과하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기술직이 고위직으로 갈수록 홀대 받고 있다는 내용이지만 이 역시 현실을 교묘히 축소하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 집계는 8만8천여명의 일반직만 대상으로 했을 뿐 엄연한 국가 공무원인 15만명에 이르는 기능직은 아예 빼놓고 있다. 철도.체신 등 기능직 공무원의 상당수가 실제 기술 업무에 종사하고, 이들 중 고위직이 없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실제 기술직 홀대는 훨씬 심각한 것이다.

기술직 공무원이 전체 공무원의 25%나 된다고 하면서(정확히는 이보다 훨씬 많다) 이들의 고충을 들어줄 소청심사위원회에 기술직 한 명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한 자치단체가 부구청장에 기술직을 임명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실 태풍, 홍수 등 재난이 빈발하거나 난개발 지역은 기술직이 부단체장인 것이 적격이라는 평가도 많다.

이들은 "한창 일할 나이에 명예퇴직을 준비하는 선배를 보면서 정부의 기술직 우대 발표를 듣는 후배들은 분노까지 치민다"고 토로하고 있다. 기술직 우대는 정부가 먼저, 그 중에서 행자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원희복 / 지방자치부 차장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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