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28)
정치인은 좀처럼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눈물은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고, 이는 곧 정치생명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고 싶을 때 혼자 산속에 들어가 실컷 울고 나온다고 고백하는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은 당장 저녁쌀이 떨어져도, 차비가 없어 걸어가더라도 여유를 부린다. 구속될 것이 뻔한데도 웃으며 검찰청사에 들어가는 사람이 정치인이다.
특이하지만 얼마전 정계를 은퇴한 ‘왕바보’ 김정길 전 행자부장관은 ‘눈물’로 첫 금배지를 단 경우다. 김 전 장관은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부산 영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계속 낙선했다. 그러자 그는 타이탄 화물트럭 뒤에 혼자 올라 아무 말도 없이 ‘엉엉’ 울면서 지역구인 자갈치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젊고 귀공자 티나는 김정길의 이 ‘통곡 낙선사례’는 자갈치 시장 아주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다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요즘 정치인의 울음이 화제가 되고 있다.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민주당 간사인 정청래 의원은 지난 7월 30일 기자 간담회에서 “지금까지 (새누리당을) 달래고 붙잡아오고 설득하고 부탁하고 양보했던 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아쉬움이…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쉽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본인은 나중에 “눈물이 나는 것을 참느라 혼났다”며 울지 않았음을 강변했지만 분명 그는 울었다.
여성 의원인 민주당 김현 의원과 진선미 의원도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위원을 사퇴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렸다.
사진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그 유명한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된 직후의 모습이다. 이 3선 개헌안 저지에 실패한 신민당 김영삼 원내총무(YS)가 울면서 국회를 나서고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이 의사당을 점거하자 별관에서 날치기 처리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가린 YS를 정치 대선배인 박병배 의원(왼쪽)이 팔을 잡고, 오른쪽에는 박기출 의원이 위로하고 있다. YS 뒤를 따르는 같은 원내총무단 김상현 의원도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YS가 흘리는 이 눈물에는 원내총무로 날치기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물론, 참담하게 유린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통분이 얽혀 있으리라.
사실 이 3선 개헌 날치기는 여당인 공화당(김종필 당의장)조차 반대해 지금의 국정원격인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추진했던 작업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장기집권의 서곡을 알리는 것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을 의미하는 것이며, 박 대통령 개인사적 비극도 여기에서 잉태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YS는 생명을 건 단식도 하고, 3당 합당도 했지만 눈물을 보였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YS는 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을지 모른다. 결국 YS는 이 땅에 장기집권을 끝내고 군정종식을 이룬 첫 대통령이 됐다. YS가 대통령이 돼 얼마나 한국 민주주의를 신장시켰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 김대중 대통령(DJ)도 후보 시절인 1997년 TV에서 사별한 첫 부인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2002년 대선전에서 노무현 후보가 부인 문제와 관련해 눈물을 흘리는 광고로 ‘여심표’를 잡았다는 얘기도 있다. YS도 그렇고, DJ도, 고 노무현 대통령도 눈물을 보였다는 점에서 ‘정치인은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격언이 ‘울어야 대통령 된다’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부인에 대한 애뜻한 감정의 눈물보다, 무너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통분은 차원이 다르다.
요즘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이를 수사하던 경찰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민주주의의 근본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에서 그랬던 국가정보기관의 정치 관여가 44년이 지난 지금 재연되는 것은 비극이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해직되고, 투옥되고, 심지어 분신까지 하며 이뤄낸 한국 민주주의가 훼손된다면 정치인들은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정청래 의원의 눈물이 각별해 보이는 것은 그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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