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29)
‘예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본적 미덕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예의 없다’는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의 됨됨이는 판정 끝이다. 그러나 예의에도 중용의 도가 있다. 예의가 지나치면 오히려 실례라는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얼마전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김재원 의원으로부터 받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화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김무성 의원은 90도 절하는 김재원 의원의 어깨를 두드리는 사진을 놓고, ‘예의이냐 굴종이냐’ 논란에서부터 ‘조직폭력배 같다’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새누리당 비공개 간부회의에서 김무성 의원이 지난 대선 부산유세에서 노무현-김정일 NLL회의록을 줄줄 읽었다고 발언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김무성 의원이 곤란해졌다. 이에 새누리당은 회의내용을 언론에 흘린 발설자 색출에 나섰고, 유력한 ‘용의자’로 김재원 의원이 지목된 것이다. 이에 김재원 의원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핸드폰 문자를 보냈고, 김무성 의원이 그 문자를 읽다가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찍힌 것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형님 김재원입니다…답답한 마음에 먼저 문자 메세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발설자로 제가 의심받는 다는 소문…맹세코 저는 아닙니다…어떻게든 형님 잘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이었는데…앞으로도 형님 잘모셔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생각입니다…”
이 문자를 서울대 법대를 나온 검사 출신으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보낸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형님’ ‘발설자’ ‘의심’ ‘맹세코’ ‘잘모셔’ ‘시키는 대로’ 등의 용어로 보면 암흑가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배신과 충성 등이 연상된다. 소설가 공지영은 트위터에서 ‘조폭 아님?’이라고 비꼬았다.
게다가 김무성 의원이 90도 절하는 김재원 의원의 어깨를 두드리는 사진까지 보도되면서 ‘국회에서 서방파·양은이파 보스놀이’라는 조롱까지 이어졌다. 김 의원의 이 행동을 ‘예의’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굴종’으로, 혹은 ‘조폭’으로 평가하고 있다. 과공비례였던 것이다. 어찌됐든 이 문자 메시지를 찍어 공개한 사진기자는 ‘이달의 보도사진상’을 받았다.
사진은 1967년 12월 김종필(JP)공화당 의장이 유진오 신민당 총재에게 담배를 권하는 모습이다. JP의 태도가 예의를 갖춘 모습이다. 하기야 당시 JP는 마흔을 갓 넘겼고 유 총재는 환갑을 넘긴 나이였으니 거의 ‘아버지 뻘’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공화당은 대대적인 6·8부정선거를 자행, 선거무효 논란이 일었다. 2년후인 1969년 영구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위해서였다. 당시 신민당 유 총재는 6개월이 넘는 등원거부 투쟁을 지휘했다. 사진은 여당 대표인 JP가 야당 총재를 만나 국회정상화를 요청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JP의 이 예의는 일종의 ‘과하지욕(誇下之辱)’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하지욕이란 초한지에서 한신이 시정잡배 가랑이 밑을 기어간 것에 유래한 고사성어로 내일의 반전을 위해 현재의 치욕을 참는다는 말이다. JP는 자신도 3선 개헌에 반대했다고 주장하나 ‘자의반 타의반’ 동조했다. 유 총재는 “당의 운명을 걸고 3선개헌을 저지하겠다”며 저지투쟁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뇌동맥경련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결국 사진속 JP의 예의는 국회정상화, 나아가 3선 개헌을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과하지욕’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학을 전공한 대학총장(고대)출신의 유 총재로선 전혀 예상못했을 것이다. 사실 어제의 적이 오늘 동지가 되고, 나의 출세를 위해 선배의 목(공천권)을 짜르는 냉엄한 정치판에서 예의와 아부, 그리고 ‘과하지욕’은 흔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저러나 예의가 아닌, 굴종에 조폭 소리까지 들은 김재원 의원은 다음 선거 때 지역 유권자에게 무슨 말을 하며 표를 달라고 할까 궁금하다. 혹 김재원 의원은 이날의 굴종을 ‘과하지욕’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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