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69)
공국진의 마지막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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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옷 벗을 각오로 이 공판정에서 진실을 증언해 왔다. 마지막 기회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육군은 단 한 사람에 의하여(참모총장) 통솔되어야 하며, 어떠한 자라도 이것을 문란하게 할 수는 없다.”
1957년 2월 20일 군법재판소에서 열린 김창룡 암살사건 피고인 최후 진술이다. 김창룡 암살사건이란 1956년 1월 30일 아침 서울 한 복판에서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던 김창룡 특무대장(요즘 보안사령관과 정보사령관 겸직)이 5발의 총탄에 사살된 사건이다. 이승만의 엄명으로 수사한 결과 허태영 대령, 이진용 대령을 비롯한 몇몇 군인과 민간인 등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김창룡은 누구인가. 김창룡은 일본 헌병대 군속을 거쳐 만주 독립군을 고문하던 악질 관동군 헌병 출신이다. 최근 SNS상에서 돌고 있는 검으로 독립군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끔찍한 사진의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악행이 워낙 극심해 해방이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고향(함경도) 근처에 숨어 살았다. 하지만 김창룡은 결국 소련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원산으로 압송되던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김창룡은 국방경비대를 거쳐 육사(3기생)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중 승진을 거듭, 1953년 군 정보와 보안을 총괄하는 특무대장이 됐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육군 참모총장도 손을 대지 못하는 절대자로 군림했다.
나중이지만 김창룡은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인물임이 드러났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백범을 제거해야 한다고 김창용 특무대장이 세뇌시켰다“고 증언했다. 김창룡은 전형적인 수법인 '빨갱이 조작'은 물론 암살까지 동원하는 방법으로 이승만의 정치적 행동대장으로 행세했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김창룡은 군 인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물론, 군수품을 부정으로 빼돌리고 심지어 밀수까지 손을 대 무려 20억원이 넘는 거액을 치부를 했다. 앞서 공국진의 최후진술처럼 참모총장도 그를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를 암살한 배후로 검거된 사람이 바로 공국진 헌병사령관과 강문봉 2군 사령관 등이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까지 사건에 관련돼 있었지만 이승만은 파장을 우려, 여기까지만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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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김창룡 암살사건 직전 이진용 대령, 공국진 준장, 허태영 대령(왼쪽부터) 세 사람이 서울 비원에 놀러가 찍은 사진이다. 이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잔인한 일제 관동군 헌병’ ‘용공조작, 정치테러 군인’ ‘군 하극상의 핵’ ‘부정축재 군인’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넘치는 것 같다. 실제 암살을 실행한 허태영 대령은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에 비교하기도 했다.
여기서 공국진은 어떤 사람인가. 공국진 역시 일본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훈련소 사격조교를 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국방경비대(군번 2번)와 육사(2기)를 거쳐 1951년 1군단 작전참모가 됐다. 이때 군단장이 역시 일제 관동군 출신 백선엽이었다. 백선엽은 무자비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유명했다. 이에 공국진 대령은 “지금 8로군 토벌하는 것이냐? 양민과 적을 가려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이견은 지리산 주민을 광주포로수용소로 옮겨 수감하는 작전을 놓고 극에 달했다. 백선엽은 주민 모두 포로수용소로 이전하는 작전을 지시했고, 공국진 작전참모는 난방과 급식준비도 안돼 위험한 작전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백선엽은 공국진을 작전참모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백선엽은 이 작전을 감행했고, 4만5000~4만8000명에 이르는 광주포로수용소 수감자 절반이 추위와 기아로 사망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린아이와 부녀자, 노약자들이었다.
헌병사령관이 된 공국진은 같은 수사권한을 가진 김창룡 특무대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공국진 헌병사령관이 김창룡의 군수물자 비리를 수사하자, 김창용이 오히려 이승만을 움직여 공국진을 헌병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결국 공국진을 비롯한 강문봉 장군, 허태영 대령은 김창용 암살을 구체화 한다. 아마 김창룡 암살사건은 ‘악질 친일파 군인’ ‘극우 정치 테러리스트’ ‘위계를 문란케 한 정치군인’ ‘부정부패 군인’을 ‘이(耳)에는 이(耳’)로 단죄한 최초의 사건이 아닌가 한다.
공국진 헌병사령관은 이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됐으나 확인과정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수감 도중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그 역시 형집행 정지로 출감했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이며, 정일권 군맥으로 알려진 그는 몇 차례 공직과 정계진출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강등된 이등병에서 원래 계급인 준장으로 복권된 것은 노태우 정권에서였다.
그 공국진 장군이 최근 병원에서 그의 마지막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94세이니 정말 마지막 투쟁일 것이다. 요즘도 여전한 ‘친일 극우 정치 테러리스트’를 보면서 공국진 장군의 마지막 투병에 성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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