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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

[광복 70주년 역사르포](6) 김창룡 암살현장-원효로 1가…이승만 독재 하수인을 응징하다

59년 전 <경향신문> 3면에 한 사건의 약도가 실렸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으니 현장 약도까지 실었을 것이다. 위치는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21번지, 자혜병원 앞이다. 약도에는 120m 언덕 위 자택에서 점선으로 내려오는 표시가 있다가 자혜병원과 미장미장원 중간에 엑스표, 즉 ‘사건 현장’이 표시돼 있다.

지금은 그 자택도, 자혜병원도, 또 미장미장원도 없다. 그러나 2015년 3월 59년 전 신문의 약도를 들고 다시 찾은 현장의 골목은 신문에 실린 약도 그대로이다. 단지 자혜병원은 용산경찰서로, 미장미장원은 ‘OK전산’이라는 컴퓨터 복사기 매장과 고시텔로, 자택은 빌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범인이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좁은 골목과 숨은 전봇대까지 그대로이다(물론 전봇대는 콘크리트로 바뀌어 당시 전봇대는 아닐 것이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된 현장. 지금은 용산경찰서 민원실 앞으로 당시 왼쪽 좁은 골목과 전봇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일본 헌병에서 국군 정보군인으로 변신
하지만 이곳에서 과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현대사에서 무슨 의미를 가진 현장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한다. 무심히 사람만 오갈 뿐, 용산경찰서 정문에 서 있는 전경도 이곳이 어떤 사연을 간직한 곳인지 모른다. 이곳은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암살된 현장이다. 김창룡 암살사건은 단편적인 육군 내부의 파워게임에 의한 일개 육군 소장의 죽음을 넘어서 현대사에서 적잖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김창룡 암살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알기 위해선 먼저 그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김창룡은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만주국 정보요원을 하다가 관동군 헌병으로 특채된다. 워낙 악랄한 방법으로 일제 항일투사를 소탕한 공로로 헌병 오장(하사급)까지 진급했다. 해방이 되자 ‘전범’으로 지목된 그는 고향에 숨었지만 친척의 고발로 붙잡혔다. 북한 소련 군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그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남한으로 내려온다.

월남한 그는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오늘날 육사) 3기생으로 들어가 단기 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국군 제1연대 정보소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김창룡은 오직 ‘정보군인’으로 일관했다. 만주에서 광복군을 고문하고, 조직을 밝혀내던 자신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를 뒤에서 돌봐준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과 장기집권을 위해 정보군인·정치군인이 필요했고, 김창룡은 김창룡대로 자신의 친일 전력을 덮어줄 배경이 필요했다. 김창룡은 좌익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는 ‘공작’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단정 수립에 반대하는 백범을 제거해야 한다고 김창룡 특무대장이 세뇌시켰다”고 증언, 김창룡이 김구 암살에도 깊숙이 관여했음을 고백했다.

 

군과 경찰이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범을 검거,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창룡은 이러한 정치공작을 인정받아 1949년 소령, 1951년 육군 특무대장, 1953년 준장, 1955년 소장으로 초고속 진급을 거듭했다. 그의 권력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훨씬 계급이 높은 육군 참모총장도 그에게 절절맬 정도였다. 그런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아침 7시30분, 지프를 타고 당당하게 출근 길에 올랐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경향신문>을 보자.

“전신주 앞(피살 지점)에는 청색이 혼합된 녹색 지프가 서 있어 박 중사(김 소장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며 비키라고 신호하였으나 이 괴상한 지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돌연 전신주 뒤에 숨어 있던 괴한 1명과 뒷골목에 숨어 있던 괴한 1명이 지프 문을 열고 권총 3발을 김 소장에게 발사했다.”(어법을 현대식으로 수정)

이승만 반공 히스테리를 실천한 인물
3발의 총탄 중 2발은 김 소장의 가슴을 관통하고 1발은 턱에 명중됐다. 다른 2발은 운전사 박 중사가 맞았다. 김 소장은 즉시 적십자병원을 거쳐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그의 사망 소식에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적십자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중장으로 추서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전군에 외출 금지가 내려진 가운데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이승만은 장례식 조사에서 “충렬의 공을 세웠다”고 극찬했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그의 묘비에 ‘간첩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 5천 명’이라고 썼다.

신속한 수사 결과 같은 특무부대에 근무했던 허태영 대령의 지시로 송용고와 신초식이 암살을 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태영은 검거되는 순간, “내가 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내 책임이다. 송과 신은 상관인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므로 그들을 닦달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허태영은 재판 내내 정치군인·친일군인을 처단한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허태영은 재판 도중 <김창룡 저격 거사 동기>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김창룡이 만주의 악질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많은 애국지사를 고문하고,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창룡은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 장군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허위 날조하고, 침소봉대했다고 폭로했다. 나중에 재판과정에서 김창룡이 군수품을 빼돌린 것은 물론 밀수에 개입해 막대한 치부를 한 것이 드러났다.

허태영의 사형이 확정되자 그 부인이 배후를 탄원, 추가로 헌병사령관인 공국진 준장, 2군 사령관인 강문봉 중장, 그리고 그 윗선으로 정일권 참모총장까지 혐의점이 불거졌다. 하지만 이승만은 군부의 동요를 우려, 강문봉 중장까지만 기소했다. 그리고 군사법원은 강문봉,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강문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창룡 특무대장은 오전 7시30분 자택(왼쪽 골목 끝 흰색 8층 빌라)에서 출근, 오른쪽 언덕 아래 자혜병원 앞에서 암살됐다. 김창룡 자택은 지붕에 청기와를 올려 ‘청기와집’으로 불렸다.

 


허태영은 1957년 9월 24일 공범과 같이 총살형 집행대에 묶였다. 그 사형집행 현장을 지켜본 경향신문 기자는 “허태영은 사격수들이 방아쇠를 당길 찰나, ‘애국가를 부르자, 우리는 떳떳한 일을 했으니 저승에서도 떳떳하게 만날 수 있지 않느냐’면서 끝까지 군인답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한국현대사 산책>에서 ‘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1950년대가 보인다’면서 “1950년대 이승만 반공체제의 히스테리, 바로 그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실천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고 규정했다. 강 교수는 “이승만의 ‘빨갱이 사냥’은 늘 정치적이었고 정치와 연관되었다”면서 “이런 이승만의 정치적 빨갱이 사냥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하, 그게 바로 김창룡이었다”고 말했다.

김창룡 집 자리에 8층 빌라 들어서
비단 반공 히스테리만이 아니다. 일제 관동군 출신의 친일파 문제 역시 김창룡 암살에 깊숙이 내재해 있다. 당시 특무부대에는 일제 관동군 헌병 출신, 조선군 헌병 출신, 일제 고등형사 출신 등 세 부류가 치열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군 헌병 출신의 허태영은 관동군 헌병 출신의 김창룡을 ‘친일파’로 여겼다. 결국 김창룡은 친일파 척결 문제, 정보군인·부패군인·정치군인의 문제, 공작정치 특히 용공조작의 문제 등 우리 현대 정치사의 악성 DNA를 모두 이식한 상징적 존재였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반공·부패 군부세력이 연대해 권력을 형성하고 ‘갑’의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독주하던 시대였다. 반민특위 해체에서 시작해 김구·여운형 암살, 제주 4·3의 비극,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경향신문> 폐간까지 이승만 권력의 독주는 거칠 것이 없었다.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은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피해자 즉 ‘을’의 반격이었다. 그것도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의 하수인을 ‘눈에는 눈’ ‘총에는 총’으로 응징한 것이다.

당연히 그 ‘역사적 현장’에는 그 어떤 기념비도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 ‘역사적 현장’인 자혜병원 앞은 그 후 서울시립 남부병원을 거쳐 지금은 용산경찰서 앞으로 바뀌어 있다. 용산경찰서 정문 앞에서 남부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양모씨(74·여)는 “약국 앞에 있던 남부병원 옆 3·1교회 담벼락에 김창룡 사건 당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서 “용산경찰서가 들어서고 정문을 고치면서 그 총탄 자국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창룡 살해 지점에서 당시 출근길을 거슬러 올라 김창룡 자택이 있는 곳까지 120m는 옛 약도 그대로이다. 김창룡 자택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8층 빌라가 들어서 있다. 마침 골목 모서리에서 46년간 장사를 했다는 ‘하나수퍼’ 류모씨(81)는 친절하게 김창룡 집 약도까지 그려준다. 그리고 그 옆집이 장도영(5·16 쿠데타 당시 육군 참모총장으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나 나중에 숙청됐다)의 집, 앞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계원 장군의 집이라는 설명까지 더해준다.

류씨는 “김창룡 살해범이 튀어나온 좁은 골목과 전봇대도 바로 그 위치에 그대로 있다”면서 “옛날 이 일대는 일제 적산가옥이 즐비했는데 그때 김창룡 집은 청기와를 올려 청기와집이라 불렸다”고 말했다. 자신의 집에 청기와를 올릴 정도였다는 것은 그만큼 김창룡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연 그때 그 골목, 전봇대만 그대로일까. 김창룡은 59년 전 사라졌지만 김창룡이 이식한 악질 DNA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59년 전 친일군인의 문제는 지금도 친일청산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보·정치군인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졌다. 최근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방위산업 비리는 정치·부패군인 문제가 여전히 진행형임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정보기관을 동원한 정치공작의 문제는 최근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비리에서도 재연됐다. 59년 전과 지금, 비록 김창룡 개인은 사라졌지만 좁은 골목과 전봇대만 그대로인 것이 아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