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2월 2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대의원들이 의자도 없어 멍석 위에 앉았다. 단상 양쪽에는 ‘뭉치자 민족 주체세력’ ‘배격하자 외세 의존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 출신의 장건상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민족통일의 주체세력이 되는 이 대회는 역사적 모임이므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운동하자”고 개회사를 했다. 민주·자유·자주를 표방하는 민간통일단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결성 순간이다.
각계각층의 통일 열망 모아 결성
191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유학까지 마친 장건상은 상해임정 외무차장, 해방 직후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근로인민당 위원장 대리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민자통 의장은 성균관 대표인 김창숙이 맡았고, 민족종교 천도교도 참여했다. 여기에 혁신정당, 교원노조 등의 진보적 사회·노동·학생 등이 가세, 민자통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결합한 모양새였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이승만 체제는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치러진 7·29 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233명 중 175명(75.1%)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로 집권당이 됐다. 총리 장면, 대통령 윤보선 체제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하지만 집권 민주당은 초장부터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싸웠다.
1921년 준공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독립운동과 통일운동 행사가 자주 열리는 등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현장이다.
4월혁명의 주역인 학생 입장에서 민주당은 과거 자유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혁명으로 이승만은 쫓아냈지만 사회의 구조적 빈곤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실망을 딛고 새로운 탈출구로 등장한 것이 바로 ‘평화통일론’이다. 그동안 평화통일 세력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조봉암 처형으로 잠복한 상태였다.
잠복한 이것을 다시 일깨운 세력은 역시 대학생들이다. 1960년 10월 15일 서울대 민족통일전선에서 시작된 대학 통일운동 세력은 전국 대학으로 확대됐고, 다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련)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했다. 정치권에서도 혁신정당을 중심으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청년·사회단체도 이에 가세했다. 결국 정계·종교계·학계·청년계·지역대표 등 각계각층의 통일 열망을 모은 것이 바로 민자통이다.
민자통이 창립된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1860년 창도된 동학은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이름을 바꿔 중흥의 기회를 맞는다. 손병희는 신도들의 성금을 모아 1921년 2월 28일 이 중앙대교당을 준공했다. 당시 이 건물은 명동성당과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경성의 3대 건물로 손꼽혔다.
천도교 측 설명에 따르면 “일제시대 주요 민족적 집회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 독립지사들의 귀국인사, 강연 및 집회가 이곳에서 이뤄질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곳 대교당을 관리하는 김경규씨(73)는 “이곳이 독립선언서를 처음 배부한 곳이며, 개벽사(일제시대 최대 발행부수 잡지) 터가 있고,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며 “대교당은 문화재(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현장인 것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4·19혁명의 ‘공통의 욕구’인 민자통이 결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최근에는 천주교나 개신교 등이 남북문제와 통일에 관심이 많지만 당시 민족종교 천도교의 통일에 대한 역할은 컸다. 그 이유는 천도교의 ‘교정쌍전’ 교리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동학민족통일회 임형진 공동의장(경희대 교수)은 “교정쌍전은 종교와 정치가 대등한 입장에서 조화하는 것으로, 천도교는 현실정치를 매우 중시한다”며 “해방 이후 천도교가 다른 어느 종단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민족통일에 앞장서고 또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진력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1961년 2월 25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민간통일단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됐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도 성금으로 지은 경성의 3대 건물
1961년 4월 12일 유엔 정치위원회는 ‘한국문제 토의를 위해 투표권 없이 남한과 북한을 유엔에 초청한다’는 한국 통일에 관한 결의서를 가결했다. 유엔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장면 총리는 처음에 ‘북한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자찬했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서자 당황했다. 장면 총리는 “용공통일보다 분단 지속이 낫고 유엔 결의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원칙 없는 정부의 태도에 정치권과 민간이 반발했다. 당시 소장파였던 김영삼 의원(후에 대통령 역임)은 “이승만 독재도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분단상황 지속 운운은 용서 못할 망언이다”라면서 “국내외 정서를 거역하지 말고 공산당을 이겨내는 자체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YS의 55년 전 이 발언은 지금 곱씹어 보아도 의미가 있다.
55년 후인 현재의 중앙대교당 내부
정부의 통일방안이 무원칙하게 흔들릴 때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은 확산됐다. 민주·자유·자주적인 민자통의 통일운동은 각지로 파급됐다. 물론 민자통이 통일 논의를 모으는 과정에서 이탈하는 세력도 있었다. 민자통 창립을 코앞에 둔 2월 21일 일부 세력이 이탈해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을 발기한 것이다. 이유는 통일방안의 구체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란이었지만, 내부적으로 통일방안이 급진적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그 핵심이다. 사실 이 논란은 지금도 진보세력의 분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961년 4월 19일 정부의 4·19혁명 1주년 기념식과 달리 학생들은 별도 기념식을 열었다. 이들은 “조국의 자주통일을 방해하는 외압세력과 이에 결탁하는 사대주의 세력을 일절 배격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전국 대학교수 연합체인 한국교수협의회도 4월 25일 교수단 시위 1주년을 맞아 “다급해진 통일의 과업에 대해 우리들이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하고 흔쾌하게 생각한다”는 대북 메시지를 발표했다.
남한 사회는 온통 평화통일, 남북협상으로 물결쳤다. 5월 5일 북한은 서울 대학생들의 제의를 수용하면서 서울과 평양에서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논란은 더욱 격화됐다. 정부는 남북 학생회담을 불허하고, 대학생들은 강행하겠다고 맞섰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는 이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민자통을 비롯한 민간 통일세력은 정부에 학생회담 허용을 촉구했다.
1919년 3월 1일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가 이곳에서 시민에게 배부됐고, 인근 탑골공원에서 낭독됐다.
5·16 쿠데타로 통일 열기 깊은 동면에
양측이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는 가운데 1961년 5월 16일 새벽이 밝았다. 그리고 쿠데타 세력은 남북 학생회담을 추진한 대학생은 물론, 민자통을 주도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구속했다. 혁명검찰부라는 간판이 달리고, 영장도 없이 연행·구속이 이어졌다. 진보정당, 사회단체, 언론사 기자 모두 구속됐고, 이들 대부분은 혁명재판소에서 중형이 구형됐다. 그리고 진보세력의 평화통일론은 다시 깊은 동면에 들어갔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학생들의 무분별한 통일론이 5·16 쿠데타에 빌미를 줬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균관대 교수 서중석은 “쿠데타 세력은 훨씬 이전부터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점에서 이것 때문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면서 “(나중에) 좋은 핑곗거리를 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의 통일 열망은 혁명의 좌절에 따른 자연스러운 분출이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에서 “4월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도 그랬지만, 5·16 쿠데타가 나기까지의 13개월간 보상에 대한 기대욕구를 변화가 따르지 못함으로써 4월혁명의 주체들은 내내 좌절감을 맛보았다”면서 “5·16 쿠데타는 그 좌절감을 이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4월혁명은 5·16으로 인해 ‘빼앗긴 혁명’이 된다”고 평가했다.
4월 혁명 이후 13개월 공간에서 벌어졌던 통일 열기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잠깐 재연되기도 했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으나 야권의 분열로 문민정부 수립에 실패한 학생들의 좌절은 6월항쟁 1주기를 맞아 통일 열기로 분출됐다. 1988년 6월 10일 수만명의 대학생들은 27년 전 선배들이 외쳤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다시 외치며 임진각으로 향했다. 경찰의 저지로 회담 접촉은 무산됐지만 다음해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참석하면서 통일 열기는 재연됐다.
문민정부 들어 남북교류가 다시 활성화되고, 김대중 정부 들어 정부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정상회담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중단되고, 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는 경색됐다.
이러는 가운데 진보정치 세력과 평화통일 세력은 다시 고개를 들고 결집했다. 통합진보당을 만들어 나름 약진했지만 결국 갈라지고 말았다. 분당의 이유로 내부 경선문제를 내세우지만, 더 큰 원인은 통일방법을 놓고 벌이는 해묵은 논쟁이다. 분당으로 약해진 진보세력은 정권의 손쉬운 타깃이 됐고, 결국 해산되는 운명이 됐다. 지금 평화통일 논의는 ‘종북 논란’으로 다시 수면으로 잠복했다.
2012년 6월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김상환)는 민자통 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고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됐던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남북간 교류 증진 등 민자통의 주장이 북한이 제안하고 있었던 내용과 동일하지만,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이상 그 전제로서 남북교류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1961년 4월혁명의 열망을 모았던 평화통일 운동, 민자통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복권된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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