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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

[광복 70주년 역사르포](9) 5·16쿠데타 첫 총격전-한강대교 남단…넘으려는 자, 막으려는 자 정반대의 군인상이 교차

김종필 전 총리(JP)는 2013년 12월 10일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기념사업회 창립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 국회를 찾은 적이 있다. 5년 10개월 만에 국회를 찾은 JP는 “국립묘지에 가지 않고 조상이 묻히고 형제들이 누워 있는 고향에 가서 눕겠다. 비석에 ‘영생의 반려자와 이곳에 함께 눕노라’라고 쓰겠다”면서 “회고록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JP는 최초의 중앙정보부장, 국회의원 아홉 번, 국무총리 두 번, 몇 번의 정당 대표를 지냈던 인물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그만큼 역사의 주요 순간을 함께한 인물도 드물다. 그런 인물이 회고록을 안 쓴다는 것은 ‘책임회피’는 물론 후대 역사가들에게 죄를 짓는 행위였다. JP는 생각을 바꿨는지 최근 한 신문에 자신의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JP의 회고록 일부를 인용해보자.

“이날은 JP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거병은 비밀누설 속에 시작됐다. 출발은 불길했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긴장과 불안, 긴박감과 안도감이 팽팽하게 충돌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하루는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었다.”(<중앙일보> 2015년 3월 23일자)



1960년 5월 16일 새벽 4시15분, 해병대와 특전사 등 쿠데타 군을 지휘한 박정희 소장은 총알이 날아오는 이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쿠데타군과 다리에서 대치한 육본 헌병
바로 5·16 쿠데타 당일의 모습이다. 이날이 JP에게만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을까.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소장은 더욱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5·16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60만 군대 중 불과 3600여명에 불과했다. 주된 세력은 김포 해병대 1여단 1500여명과 역시 김포에 있던 공수특전단 600명이다. 경기 포천에 있는 포병대대는 사실 ‘전시용’이었다.

김윤근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대 1여단은 김포가도와 노량진을 거쳐 새벽 2시30분쯤 한강인도교(한강대교) 남단에 도착했다. 당시 한강다리는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 단 2개뿐이었다. 따라서 트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려면 한강인도교를 건너는 방법밖에 없었다. 공수특전단 역시 비슷한 시간, 한강인도교에 합류했다. 그런데 30예비사단에서 ‘거사계획’이 누설된 것이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육본 헌병대에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거사에 참가하기로 했던 이백일 작전참모(중령)는 야산으로 도주했다.

박정희 소장은 새벽 2시30분 한강인도교로 달려갔다. 육본 헌병들이 한강에 트럭 7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쿠데타군의 도심 진입을 막고 있었다. 박 소장은 용산에 있는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남산 KBS 방송국, 태평로 국회와 중앙청을 접수해야 했다. 시간은 흘렀다. 박 소장은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양측의 첫 총격전이 발생했다. 해병 6명과 헌병 3명이 부상했다. 쿠데타군은 트럭으로 막아놓은 바리케이드를 뚫었다. 하지만 쿠데타군은 한강인도교 중간에 친 바리케이드와 또 맞닥뜨렸다.

이 대목에서 JP는 회고록에서 “박 소장은 차에서 내렸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 소장은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다.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박 소장의 결의는 극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JP는 당시 상황을 매우 정밀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실은 JP는 당시 현장에 없었다. JP는 그 시간, 인사동 광명인쇄소에서 혁명공약을 인쇄하고 있었다. 따라서 JP의 기술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것이다. 아무튼 한강인도교를 건너 광명인쇄소로 달려온 박 소장은 JP에게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헌병들이 쏜 총알이 막 날아와. 나는 지프에서 내렸지,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지. 이쪽에서 응사하니까 잠시 후 헌병대가 싹 사라졌어”라고 말했다.

육본 헌병들이 총격에 겁을 먹고 도주하면서 한강인도교 방어선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새벽 4시15분 쿠데타군은 무사히 한강인도교를 돌파해 조용히 서울시내로 진입, 중앙청을 접수했다. 그리고 해병대 1개 소대는 남산, KBS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고 새벽 5시 이른바 혁명 취지문을 발표했다.

 

 


 

한강을 넘은 쿠데타군이 5월 16일 아침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을 장악, 교통을 통제하고 있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1년 5월 18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중령이 외신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총격전에 허무하게 무너진 방어선
결국 5·16 쿠데타 전개과정에서 부상자 9명만 나왔을 뿐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과거 여러 무신의 난을 보면 수십~수백명의 문신이나 신하가 죽임을 당했다. 또 한참 후 일어난 12·12 군사반란에서도 총격전으로 여러 군인이 전사한 사례에 비추어 5·16 쿠데타는 매우 이례적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당시 이곳에서 교전하던 헌병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방어했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5·16 쿠데타를 연구하는 학계의 관심 중 하나가 바로 쿠데타를 언제부터 모의했느냐는 ‘기원’에 대한 논란이다. 이번 회고록에서 JP는 1961년 2월 15일 정군운동을 주도하다 예편한 후 청파동 자신의 집에서 혁명을 결심하고, 2월 19일 대구에 있는 박 소장을 찾아가 “혁명을 해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중앙일보> 2015년 3월 9일) 거사 불과 3개월 전 쿠데타를 결의했다는 것이다. 과연 3개월 만에 국가를 전복하는 거사를 모의할 수 있었을까.

JP는 5·16 쿠데타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1961년 5월 18일 외신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군사혁명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1960년 3월부터였다”면서 “민간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심한 9명의 대령과 중령들의 핵심 그룹 가운데 자기도 끼여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육군 중령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 있던 JP는 “한국의 영관급 장교들은 독재자 이승만씨가 실각하기 한 달 전부터 군사혁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면서 “그러나 계획은 이 정권을 전복시킨 바 있는 역사적인 4·19 학생혁명 봉기 때문에 좌절됐었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961년 6월 5일자)

이는 JP의 지금 발언과 시차가 많다. 1960년 3월부터라면 쿠데타 준비기간이 1년 2개월로 주도면밀하게 준비됐다는 것이다. 제2공화국 장면 정권 출범(1960년 8월 23일) 불과 6개월 전이다. 5·16 쿠데타의 명분으로 드는 ‘장면 정권의 무능’을 검증하기에 6개월은 너무 짧은 기간이다. 또 쿠데타의 명분으로 드는 ‘무분별한 통일논의’는 4·19혁명 1주년을 맞아 본격적으로 제기됐다는 점에서도 쿠데타의 명분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5·16 주체세력의 쿠데타 논의는 훨씬 이전부터라는 주장과 연구도 많다. 성균관대 명예교수 서중석은 1960년 9월 10일 김종필을 비롯한 영관급 정군파들이 현석호 국방부 장관을 면담하러 갔다가 못 만나고 돌아온 그날 충무장에 김종필, 김형욱 등 9명이 모여 쿠데타를 결의했다고 밝혔다. 9월 10일이면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불과 18일 만이다. 김동하 장군은 회고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에서 “1959년 1월 2일 원주에 있는 박정희 소장을 만나 송요찬 1군 사령관을 설득해 거사하자”고 쿠데타를 논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5·16 당시 헌병의 2차 바리케이드가 있던 한강인도교 중지도(현 노들섬)에는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서 있다.


 


바리케이드 있던 자리는 지금의 노들섬
5·16 쿠데타의 시작이 중요한 것은 ‘장면 정권의 무능과 무분별한 혁신세력의 통일론’이라는 5·16 쿠데타 감행의 명분이 합당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JP의 최근 증언처럼 불과 3개월 전에 5·16 쿠데타를 결심했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는 별로 없다. JP 본인도 55년 전에는 1년 2개월 전이라고 말했다. 쿠데타 직후인 당시 기억이 훨씬 정확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 JP는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장면 정권이 아무리 혼란하고 무능했어도 쿠데타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신여대 교수 홍석률(한국사)은 <5·16 쿠데타의 원인과 한·미관계>라는 논문에서 “장면 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이 과연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를 완전히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면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은 민주주의적 틀 안에서 점진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서울에서 벌어진 첫 군사 쿠데타의 현장, 한강인도교는 지금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 한강인도교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준공됐다. 길이 840m, 폭 30m의 이 한강인도교는 일제 수탈과 해방, 한국전쟁 등 민족의 비원을 간직한 곳이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 한국군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어설픈 폭파로 많은 피란민이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당시 차량이 건널 수 있던 다리가 한 개뿐이었던 한강에는 지금 27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철교 4개까지 포함하면 31개다. 게다가 한강대교는 교통량이 많아 1981년 2월 하류 쪽에 똑같은 모양의 다리를 추가로 준공해 교통량을 두 배로 늘렸다.

육본 헌병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있던 당시 중지도는 지금 노들섬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노들이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란 의미로, 바로 노량진을 의미한다. 현재 서울지방항공청의 헬기 이·착륙장과 어린이 체험학습장 ‘노들텃밭’이 있다. 봄을 맞아 유치원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꽃과 채소를 심고 있다.

 

노들섬 중간에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있다. 1966년 2월 4일 공수특전단 낙하산 침투훈련 중 고장난 동료의 낙하산을 펴주고 자신은 그대로 추락, 순직한 그를 기리는 동상이다. 이원등 상사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살리는 군인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

그러나 바로 이 한강 바리케이드를 넘은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정권을 잡고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많은 ‘남’을 죽였다. 남을 위해 자신이 죽은 군인과,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인 군인이 이 한강대교 중간에서 극명하게 교차하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