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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7장 총에 꺾인 펜

 

제 7 장

총에 꺾인 펜





1. 5·16 1호 구속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령 1호를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포고령 2호 금융동결, 포고령 3호 공항 항만봉쇄···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졸지에 일어난 쿠데타 소식은 뜨겁던 초여름을 단번에 냉각시켰다. 각 신문 편집국은 쿠데타 주역이 누구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육군본부 출입기자의 전화가 날아 온 것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다.

  “쿠데타의 주동인물은 박정희 소장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7시40분 박정희 소장과 김동하 해병대 예비역 소장, 김윤근 해병대 제1여단장, 채명신 5사단장 등이 육군본부를 접수했답니다”

  즉각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오후에 들어 박정희에 관한 인물정보가 속속 들어왔다.

“경북 성주 출생으로 대구사범을 나와 만주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비교적 키가 작고 매서운 얼굴이다. 비교적 정직한 인물이다···한 때 좌익을 했다”

  조용수는 ‘한 때 좌익을 했다’는 대목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여순반란 사건 때 좌익을 했다. 그때는 좌익을 만들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이 인물은 혁신적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용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그리고 박진목에게 전화를 걸어 충무로 조희다방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이유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박진목은 대구출신으로 한때 남로당 등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충무로로 향했다. 다방에는 박진목이 먼저 나와 기다렸다.

  “선생님, 박정희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민족일보도 잘될 것 아닙니까. 이젠 해결됐습니다. 그간 고생이 헛되지 않은 것 갔습니다”

  조용수는 조금 흥분했다. 조용수는 박진목도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박진목은 신중했다.

  “나도 이야기를 들었네.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는 조금 알지. 그 형 박상희와 나는 잘 아는 사이였지. 내가 남로당에서 활동할 때 박상희는 구미 군책이었어. 내가 주동인물로 몰렸던 대구폭동 와중에서 그의 형은 경찰에 사살됐지”

  “그 박상희의 딸과 결혼한 김종필이라는 사람도 이번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데요. 김종필은 얼마전 군 하극상 사건으로 예편한 인물 아닙니까. 아무튼 이번 쿠데타는 우리 입장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성급히 결정을 내리기는 곤란해. 그동안 박정희가 어떻게 변해있을 줄도 모르고. 신중히 행동해야 할거야”

  조용수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인 송남헌을 통해 박정희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군에 안면이 많은 고정훈도 쿠데타의 주역들에 대하여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다. 조용수의 들뜬 감정은 신문 사설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끝으로 우방제국에게 일언을 부치노니, 이 군사혁명이 발생된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우호를 베풀어 주기를 진심으로 희구해 마지 않는다···우리들은 거듭 내치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민족일보 1961.5.17 사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검거소식이 들려 온 것이다. 사전 검열로 신문 납판이 군데군데 허옇게 깎이긴 했지만 신문은 예정대로 제작됐다.

  5월 18일 이른 아침. 신문사 숙직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님, 헌병 네다섯 명이 회사에 와서 편집국장을 찾고 난리를 치고 돌아갔어요. 무슨 이유냐고 물었지만 꼭 편집국장을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조금 있다가 다시 온다면서 갔습니다. 양 국장님에게도 이 사실을 막 알려드렸습니다”

  조용수는 양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 국장, 아침에 숙직직원의 전화 받았습니까. 지프차를 보낼테니 종로 희다방에서 만나 같이 출근합시다”

  조용수는 안신규 감사에게도 같은 전화를 하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군인들이 회사에 왔느냐는 문제를 놓고 한참을 상의했다. 양 국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편집국장을 찾는다면 기사 내용 때문 아니겠어요. 어제 민국일보 조동건 국장이 기사가 문제돼 불려갔다 왔다는데···우리야 문제된 기사도 없습니다”

  “민국일보에서 군인들이 육사를 접수했다는 기사를 썼기 때문이지요”

  조용수도 민국일보 기사가 큰 문제가 될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안신규 감사는 조금 우려에 섞인 말을 했다.

  “편집국장은 조사를 받고 풀려났지만 이혜복 사회부장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데요”

  “그러나 무슨 일이 있겠어요. 군인들이 육사교장의 허락도 없이 육사생도를 지지데모에 끌어들이려 한 것이나 접수했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조그만 어투의 차이뿐인데”

  양수정 국장은 크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 했다. 조용수는 자리에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것은 민국일보 문제이고 우리야 문제될 소지가 전혀 없지 않아요. 일단 출근하고 봅시다”

  세 사람은 나란히 출근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군인 소령이 온 것은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그것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신문제작에 들어갔다.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 박진목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잠깐 만나자는 거였다. 조용수는 박진목을 알파성다방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조용수가 느긋한 표정이고 오히려 박진목이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조 사장, 곧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거라구먼. 나는 전력이 있어서 일단 피하기로 했네. 가족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는데 나도 곧 따라갈 걸세”

  박진목의 갑작스런 피신 소식에 조용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선생님이 왜 피합니까. 오히려 좋은 시기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군인이 왔는데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아닐세. 나는 지금 이 군사정부가 심상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야. 나는 문제가 생기면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용의주도 한거야. 내 생각에는 조 사장도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가요?”

  “그래. 지금까지 쿠데타 주동자들이 거사 성공에 신경을 썼지만, 분명 조만간 군인들이 정치 사회적인 면에 손을 댈거야. 잠시 피해서 그 상황을 보자는 거야”

  “아니 신문사를 그냥 놔두고 제가 어디로 피합니까. 또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요”

  “조 사장, 어느 나라도 쿠데타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죄를 따져가면서 잡아들이나.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도 일부러 죄를 만들어 내는 게 쿠데타의 생리 아닌가”

  조용수는 박진목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잠시 회사를 비웠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가시면 어디로 가게요. 제 생각에는 마산쯤이 좋을 것 같아요. 만약 선생님의 경우 문제가 된다면 마산에서 일본가는 배를 구할 수 있어요”

  “나는 지금 곧장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아니 지금 당장이요?”

  “그래 이런 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아”

  “아 그래도 명색이 신문사 사장인데 회사도 모르게 혼자 도망칠 수 있어요? 잠시 어디를 다녀온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1시간 후 충무로 수다방에서 보세. 빨리 하던 회사일 정리하고 그곳에서 만나세”

  박진목과 헤어진 조용수는 회사로 올라오면서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피신을 해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편집국에는 권총을 찬 수사관들이 몰려들었다. 마침 자리에는 이상두 논설위원이 글을 쓰던 중이었다. 한 수사관이 구석진 한쪽 책상에 있는 이 논설위원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요”

  “나는 논설위원입니다”

  “논설위원? 이름이 뭐요”

  “이상두요”

  수사관은 체포자 명단을 들여다보며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마 원래 체포지시 명단에는 없던 모양이다. 그러나 ‘꿩대신 닭’격이었다.

  “아무튼 채우시오”

  이상두 논설위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바로 그 순간, 조용수 사장이 막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용수는 사무실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고 속으로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사무실로 들어 왔다. 한 수사관이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32세밖에 안된 그가 사장인줄은 수사관도 몰랐다.

  “사장이오”

  조용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사관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조용수의 손에도 수갑이 채워졌고, 얼마 후 들어 온 안신규 감사, 정규근 상무, 김영달 업무국장에게도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 하나로 두 사람씩 채웠다. 양수정 편집국장도 수갑을 찼다. 다른 직원들이나 기자들은 이 모습을 보며, 감히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상두, ‘옥중기-역사의 단애에 서서’ 월간 다리, 72년 7월호>


  바로 그 시간. 약속장소에서 한 시간 넘게 조용수를 기다리던 박진목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이명하의 딸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왔다.

  “선생님, 듣기만하세요. 지금 군인들이 몰려와 모두 끌어가고 있어요”

  박진목은 더 전화를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길로 박진목은 피신했다.

  민족일보 간부 9명은 지프에 태워졌다. 지프는 클랙션을 울리며 시내를 질주했다. 후덥지근한 지프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프는 그대로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유치장에는 윤길중 이명하 조규희 김기철 등 낮 익은 혁신계인사가 줄줄이 끌려들어 왔다. 그리고 대학교수, 변호사, 전직 국회의원까지 끌려 들어와 유치장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곳으로 끌려와야 하는지 몰랐다. 유치장안에 변호사까지 잡혀왔으니 자연히 즉석 법률자문이 이어졌다.

  “대관절 우리를 무슨 법으로 처벌할 것 같소?”

  영문도 모르고 끌려 온 사람의 계속된 질문에 변호사는 태연히 누워 말했다.

  “아무 법에도 저촉될게 없으니까 예비 검속으로 당분간 가두었다가 내보낼 것 아니겠소”

  당시 민자통 충남협의회 의장 김영수 증언.

  “내가 5·18 일체 검거 후 대전형무소에 들어 온 이튿날, 누가 출감을 정확하게 맞추는가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멀리 잡은 사람이 3주였고, 대개는 1주일쯤으로 생각했다”

  <김영수, ‘옥중기-붉은 담 안의 4년 7개월’ 자유시대사, 1993>


  대부분은 그런 생각으로 유치장에서 며칠을 보냈다. 조용수를 비롯한 혁신계 사람은 박정희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굳이 조용수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구분한다면 혁신계중에서도 약간 우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원룡 목사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나타난다.

  “···그해 여름 박정희에 대한 내 긍정적인 관심을 뒤집어 놓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것은 그의 전력과 공산주의와의 깊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상쩍은 눈초리로 봐서 그런지 의심 가는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내 주위만 둘러봐도 그랬다. 나와 친한 중간진영의 사람들 가운데서 이상하게 우파사람들이 주로 잡혀가는 것이었다. 중간우파이던 윤길중, 이명하, 조규희, 김기철 등은 이북은 적이라는 분명한 노선 하에 우익 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통일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잡혀갔는데 민자통을 결성해 따로 나간 좌파 사람들은 훨씬 친북적인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사한 것이었다” <강원룡, ‘정일권 이후락은 미국의 박정희 좌경화 방지용이었다’ 신동아 1993년 11월호>


  그러나 밖의 사정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5월 22일, 치안국은 ‘민족일보와 동사 사장 조용수 일당들의 죄상 및 그 배후관계’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조용수외 일당은 지난 91년(1958년)1월에 간첩 사건으로 병 보석 중 일본으로 도피한 바 있던 전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47,본적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동리)의 지령 하에 평화통일 방안을 주창하면서 혁신 지도자와 혁신계 정당 및 기관지 발간에 열중해 왔다. 전기 이영근은 일본 조총련계로부터 소위 정치자금 약 2억환을 국내에 도입하여 혁신계 지도자인 장건상 등에게 자금을 공급하여 괴뢰 집단에서 주창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밟도록 국내 혁신세력을 규합해 왔다. 특히 혁신정당 기관지인 민족일보사를 94년 2월 13일 발간하고 약 1억환의 불법 도입자금으로 전기 조용수와 안신규 등이 주동이 되어 국내 혁신계정당의 기관지 발간을 계획하고 민족일보사의 논설위원 000외 수명과 야합하여 괴뢰집단이 지향하는 목적수행에 적극 활약해왔다. 이들 일당 중 장건상과 조용수, 안신규 및 해성물산 사장 윤규성, 남방물산 전무 마영호 등은 이미 체포하고 나머지 미 체포된 자는 계속 체포에 노력할 것이다”


  치안국의 발표는 많은 사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계엄당국의 검열로 그 내용은 확인하기 불가능했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민족일보 관련자는 이런 사실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다. 한달 정도 경찰서 유치장 생활이 계속됐다.

  6월 23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굴러다니는 신문을 한 장 집어든 혁신계 인사 한 사람이 소리를 쳤다.

  “이것 봐. 군인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소급 입법을 했어. 뭐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고. 이 군인들이 정말 피를 보려고 하는 구나”

  “3년까지 소급 적용한다고?”

  혁신계 인사가 가장 우려한 조항은 이 법의 6조였다. 이 법의 6조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처벌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로서 국가보안법 제 1조에 규정된 반국가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선동 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 한다”

  이 신문 조각 하나는 온 유치장의 혁신계 인사의 여유 있던 표정을 일시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의식 있고 혁신적 성향인 군인들이 설마 우리를…”

  “아니야, 쿠데타는 할 때보다 성공하고 나서 피를 더 많이 보는 게 생리야”

  “한 2~3년 썩을 각오하지 뭐. 우리가 언제 한두 번 당합니까”

서로 위안을 건냈지만 내심 모두 긴장했다. 민족일보 관련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독 조용수는 여유 있어 보였다. 양수정 국장이 무슨 배경이라도 있나 싶어 물었다.

  “조 사장, 다들 걱정이 태산 같은데 조 사장만 왜 그리 여유요?”

  조용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군인들이 만든 특별법에는 분명히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고 되어 있잖아요. 공보부에 언론기관으로 등록된 신문사는 정당도, 사회단체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해당사항 없는 법이예요”

  설명을 들은 민족일보 관계자는 일단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말의 불안감은 숨기지 못했다.

  유치장 같은 방에 있던 민족통일당 최달희가 탈장인가 하는 병으로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자주 일으켰다. 그때면 항상 조용수는 최달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사를 맞고 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최달희를 업고 근처에 있는 병원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호송경관도 없었다. 그래도 조용수는 꼬박 경찰서 유치장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은 곧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후 민족일보 관계자들은 중부경찰서로 이송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민족일보, 교수협의회 관련자는 중부경찰서, 통사당 관련자는 종로경찰서, 교원노조 관련자는 용산경찰서 식으로 유사한 사건 관련자를 한데 모아놓았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조용수는 거의 매일 불려나가 취조를 받으면서 고문도 당했다. 그렇게 한 두달이 지나 7월이 됐다. 조용수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양 국장, 고생이 심하죠. 아무래도 경찰의 분위기로 보아 금방 나가긴 틀린 것 같습니다. 이건 도대체 말이 통해야지. 빨리 검찰에 송치하면 말하기도 나으련만”

  양 국장도 여러 요로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낌새를 잡으려 했지만 도무지 군인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유치장 밖에 있는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요직을 지낸 조용수 주변 사람들도 쿠데타 핵심부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용수의 삼촌 조경규는 마침 박정희가 좌익 경력으로 장군 진급을 하지 못할 때 당시 자유당 의원으로 박정희의 장군 진급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인연이 있었다. 따라서 조경규는 박정희가 자신의 조카 조용수를 겁만 주고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지 차마 처형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조용수가 사형에 처해지자 조경규는 이를 한탄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오길석 증언>

  또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 교수로 있던 조용수의 사촌형 조용삼이 조용수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귀국해 당시 쿠데타 주체세력과 가까운 김덕송 마사회회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친구로 지내던 사이였다.

  “이보게 덕송이, 내 조카 용수를 정말 죽일 작정인가. 사형이라니. 내 조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김덕송도 조용수를 친구의 똑똑한 조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염려 말아. 죽이기야 하겠나. 혁명이라는 게 그런 엄포가 있게 마련 아닌가. 감형으로 나올 거야. 최선을 다해 보겠네”

  <조용삼씨는 그 후 박정희 정권에서 상공장관까지 제의를 받았으나, 귀국을 앞두고 갑작스런 사고로 사망했다. 조용준씨 증언>


  7월 14일. 가슴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여름, 조용수와 민족일보 관계자는 1차로 혁명검찰부에 송치됐다. (혁명검찰부 형사사건부에는 7월 13일 형 제1호로 조용수가 혁명검찰부의 첫 번째, 안신규가 두 번째로 올라있다. 형사사건부, 혁명검찰부, 1961)

  “혁검 대기실에는 많은 사람이 와 있고, 우리 뒤에도 계속 들어와 백명 가까이 되었다. 줄을 풀고 수갑만 채운 채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아는 동지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민족일보의 조용수씨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지에게 손바닥으로 헛글씨를 써서 보이며 소식을 알리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도 자주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태도로 보아 걱정 말라는 내용의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김영수 옥중기)


  조용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리고 지루한 한여름의 서울형무소 생활을 시작했다.

  민족일보 관련자의 구속에 대해 국제 신문편집인협회(IPI), 국제펜클럽, 일본 등 해외에서 활발한 항의와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조용수에 대한 구명을 호소하는 곳은 없었다.

  조용수의 부친인 조상규는 관계기관에 아들 조용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보냈다. 일부 대목은 조용수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정서

  본  적  경상북도 대구시 동인동 409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120번지의 40

  피의자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단기 4263년 4월 20일생

  상기자는 좌익분자의 혐의를 받아 목하 신체구속을 받고 있는 바, 동 피의자 사실의 내용에 대하여 전연 아는 바 없으며 또 피의자의 아버지인 본인으로서 감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있어서 상기자의 행장으로 보아 상기자가 좌익분자라고 생각되지 아니하고, 만일 좌익분자들과 어떠한 관련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동 분자들의 유혹에 빠져 일시적으로 범한 죄과라고 생각됩니다.

  현명하신 사직당국에 참고하시라고 감히 몇 자로 본인 아들의 행장을 기록하여 올립니다.

  상기자는 4279년경 진주중학교 3학년 재학당시에는 학연간부로 활동을 하다가 동교 좌익학생들로부터 흉악한 협박을 받아 신변에 위험을 느껴 부득이 자퇴를 하고 대구 대륜중학에 입학을 하여 동교를 졸업한 후, 일시 연희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가 도일한 후 재일본 민주신문사, 국제타임스사 논설위원, 재일본 동경도 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총무부원으로서 소위 조련계열 등과 다년간 열렬한 투쟁을 하여왔으며 재일 교포권익옹호 위원장으로서 유태하의 추방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했습니다. 이 정권 당시 교포투쟁반대 투쟁 선두에 서서 일본 신주쿠(新瀉)에서 북송저지운동에 직접 행동으로 투쟁을 한 것이 현재 중앙공보부에 보관중인 뉴스사진에 의하여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행장을 가진 사람이 좌익분자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본인으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우니 상세히 심사하여 관대히 처분하여 주시길 앙망하면서 이에 진정합니다.

  단기 4294년 7월 진정인 피의자의 부  조상규(趙祥奎)


그러나 결과적으로 집안차원에서 이런 구명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2. 한여름의 혁명재판


  이른바 쿠데타 정권의 혁명재판은 7월 28일 혁명재판소 5개 법정에서 일제히 열렸다. 재판부와 검찰관은 법복을 입었지만 재판 절차는 군법회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7월 28일 9시, 혁재 2호 법정. 법정입구에는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해병 2명이 분위기를 압도했고, 법정 안에는 정복 경찰관이 자리를 지켰다. 좁은 법정은 가족과 내외신기자로 들끓었다. 기자에게 발부된 증만 1백32매, 일본 기자도 10여명에 달했다. 변호인도 법복에 노란색 출입증을 달고 입장했다.

  재판장은 김홍규 육군대령, 검찰관은 오재옥 중령이 맡았다.

  여기서 바로 이회창 심판관(후에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대통령후보)이 등장한다. 이 심판관은 민간인 판사 신분으로 차출된 2명중 한 명으로 1심 판결에 참여했다.

  “당시 나는 인천지방법원에 갓 임관한 상태였다. 그런데 혁재에서 판사 차출 지시가 내려왔다. 모두 가지 않으려 하니까 나이가 어린 순서대로 보내다 보니 내가 차출된 것이다” <1997년 이회창 회고>


  변호인단은 재판에 앞서 ‘변론준비를 위한 공판연기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사실심리에 들어 가기 앞서 이것을 받아들였다. 다음 공판을 8월 1일로 정한 후 10시 50분 폐정함으로써 1차 공판은 끝났다.

  8월 1일, 2회 공판. 오재옥 검찰관은 장문의 공소장을 읽어 나갔다.

  “피고인 조용수는 일본국 동경에서 조봉암의 구명 탄원서 서명위원회 대표자로 활약하고 있을 당시인 서기 1958년 8월 중순경… 일본에 밀항 도피한 공소 외 이영근과 수시 접촉하여 당시 국내정계의 혼란 무질서에 틈타… 혁신계 정당의 단합과 아울러 단합된 혁신계 대변지로서 일간신문사 민족일보를 창설키로 합의를 보고… 정치적 평화통일에 앞선 남북협상, 경제 서신 문화교류…”

  검찰관의 공소장 낭독이 끝나자 변호인단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재판관할에 관한 이의를 신청했다.

  “민족일보는 공보처에 등록된 것으로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므로 정당이 아님은 명백한 것이고, ‘사회단체’라 함은 광의로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 모든 인적 조직체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사회단체로 등록된 단체만을 의미하며… 때문에 특별법 제 6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검찰관측은 민족일보도 사회단체의 개념 속에 포함되며 변호인의 주장은 유죄무죄의 판정에 관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제출한 재판관할에 관한 이의신청을 검토하기 위해 10분간 휴정한 후 10시 40분 재판을 속개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결정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관할위반의 이의는 공소의 부적법을 다루는 것이나 이것은 심리결과 재판부가 판결로써 판단할 사항이다. 따라서 변호인측이 제출한 이의 신청을 각하한다”

  이미 재판이 시작되기 전인 7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별법 운용에 대한 최고회의 지침’을 재판부에 내려 보냈다. 이 지침은 특별법이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인 중대범죄를 엄중 처벌하는 데 취지가 있다면서, 특별법 6조에 규정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라는 점은 형식상의 지위에만 구애될 것이 아니라 그 사상, 직무, 행적에 비추어 실질적인 간부와 이와 공범관계에 있는 자로 반공 국시에 입각하여 용납할 수 없는 용공분자만 처벌하고 기타 용공분자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으로 입건,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한국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2권>


  두 번째 재판은 검찰의 공소장 낭독과 재판관할에 대한 공방으로 끝났다. 하지만 민족일보를 사회단체로 보아 특별법 6조의 적용을 받느냐 마느냐는 재판권 관할권 문제는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이 대목은 상고심에서 기각됐다.

교도소로 돌아오면서 조용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군인들이 민족일보를 문제 삼아 자신을 비롯한 간부를 처벌할 것인가. 법도 소급해서 만든 것이고, 게다가 주식회사인 신문사를 정당이나 사회단체로 보는 어이없는 재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처벌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동생 조용준이 면회를 왔다. 일본에 있는 아내가 무슨 문제인가 궁금해 한국에 나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 온 것이다. 조용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조금 있으면 나갈텐데 뭐하러 여기까지 오는가. 그냥 일본에 있으라고 해”

  그만큼 조용수는 자신의 구속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신문사를 만든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에 모아졌다. 또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조총련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조용수의 대답은 뻔했다.

  “이영근은 재일교포의 돈을 모금하는 데 중간역할을 했다. 일본에 있는 재일거류민단 고문인 배기호(裵基鎬) 이희원(李禧元) 박용구(朴容九) 정동필(鄭東弼) 등 다른 많은 인사가 도왔다. 한국에서는 친척, 동문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또 이영근은 민단계통의 통일조선신문을 운영했고, 한국에서 진보당 조봉암씨 비서를 지낸 혁신계 정치인 정도로만 알았다”

  재판에서 조용수가 민족일보 자금에 관해 해명한 내용은 정확히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이 조총련을 통해 자금을 댔다는 검찰의 공소장 내용만 일반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조용수가 민족일보의 설립자금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진술한 한 문서가 있다.

  설립자금의 관계

  조용수가 귀국직전에 일본 동경거주의 환일(丸一) 무역사 조 사장을 통하여 교환한 것임. 현재 조 사장은 시내 충정로 2가에 자택이 있고, 사업관계로 일본 본사와 왕래가 빈번함. 현 조선일보사 송지영씨의 소개로 희망사 사장 김종완(金宗完)씨에게 안신규가 약 2천만환으로 조판, 인쇄, 차가의 대금으로 계약이 성립되어 2월 11일자로 창간을 보게 됨.

기(記)

  가. 조 사장(丸一무역회사)으로부터 인수된 총 금액은 약 3천4백만환으로 추산되며, 이것의 전부가 신문사의 운영자금으로 충당되었음.

  나. 창간 이후로는 재정문제는 일절 안신규 감사가 관여함에 있어 일본과의 연락은 그때부터 조용수는 관여하지 않았음.

  다. 자금의 성질에 있어서는 부득이 본인(조용수)에게 물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에서 자금제공자의 수사를 의뢰, 판명되어야 하겠음.

  라. 이외 조용수의 개인적인 금액이 신문사에 다량 투입되어 있음.

  <이 서류는 조용수의 유품 중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마 변론관계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작성된 문건으로 보인다)


  그 후(98년 12월) 안신규는 민족일보의 자금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민족일보의 자금은 혁신계 인사들의 자금으로도 충당했다. 그 성금은 지국설치 보증금 형식을 통해 받았다. 당시 신문사 지국보증금은 많아야 1-2백만환 정도였다. 우리 신문은 부산지국에서만 근 1천만 환을 받았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중에 운영자금이 모자라 편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던 적은 있었다. 일명 ‘환 잡는다’는 방식인데, 일본과 국내 화폐의 환차익을 이용해 돈을 늘리는 방법이다. 당시 이런 방법은 한일간 국교가 없기 때문에 불법이었지만 웬만한 사업가는 이런 방법을 많이 썼다. 우리도 이런 방법으로 1천만 환을 만들려고 했는데 시도과정에서 5·16을 만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일관된 조용수의 진술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의 법정 분위기는 같이 재판을 받은 이상두의 회고록에서 나타난다.

  “경찰이나 검찰에서도 그러했으나 법정에서조차 분명한 사리와 합리적인 이야기가 거의 통하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발간된 신문에 글 쓴 일을 꼭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충분히 알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아랑곳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증거를 대라는 것이었다. 거증 책임은 피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고 측에 있는데도 증거를 내보이라니, 땅 팔 노릇 아닌가. 나아가 설사 그 정을 모르고 했다손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 논리의 비약과 견강부회가 너무 지나쳤다. (이상두, ‘옥창너머 푸른 하늘이’ 범우사, 1972)


  모든 수사와 재판이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법정에서나마 기대를 걸었던 조용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다음날 재판정에 나가는데 양 국장이 보였다. 조용수는 간수의 눈을 피해 양 국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 징역 살릴 작정인가요? 아니면 한 번 혼을 내려고 그러는가요? 어느 편인지 분간을 못하겠군요”

이런 질문에 양 국장의 입장도 난감했다. 그는 고개를 머뭇거리며 “글쎄요”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양 국장이야 곧 나갈 테지만 그까짓 징역을 주더라도 최하가 10년이라 했으니까 10년 이상 더 주겠소, 뭐”

  조용수는 차에 오르면서 애써 자위를 했다. 사실 조용수로서 징역 10년은 최대한으로 잡은 거였다.

  제3회 공판(8월 2일 9시)부터 사실심리가 진행됐다. 그러나 이 재판은 피고 전원이 함께 피고석에 앉아 진행하던 관례를 깨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한 사람씩 심문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다른 동료가 어떻게 진술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피고인끼리 서로 말을 맞출 기회도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 재판에 관한 기록은 모두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정확한 법정 진술을 밝히기는 어렵다. 다음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법정 진술을 요약한 것이다. 단 보도된 이 진술은 검열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진술내용을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종률 피고의 증언.

  “편집국장 하루 만에 그만 둔 것은 민족일보가 정치과다증에 걸려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일보 운영자금이 조용수의 장인에게서 나왔다고 들은 바 있다”

  이상두, 이건호, 조규철 3인 피고의 증인 심문.

  “우리들이 쓴 논설이나 사설을 사장인 조용수가 멋대로 삭제, 가필하여 때로는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했다”

  모든 실제적 책임은 조용수 앞으로 돌려졌다. 조용수는 동료들이 그렇게 진술하는 것도 몰랐다. 재판도중 면회도 일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언은 계속됐다. 상임 감사역 안신규의 증언.

  “지난(61년) 1월부터 3월까지 일본에 가 이영근과 만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업관계 때문에 만난 것이다”

  장윤근(일본에 있는 이영근의 처)의 증언.

  “남편으로부터 도합 2천6백80만환을 송금 받아 조용수와 안신규에게 각각 1백만환을 꾸어준 일이 있으나 조용수로부터 1할 이자를 끼워 원금까지 받았으며 안신규에게는 사무실을 낸다기에 빌려주었을 뿐이다”

  정규근의 증언.

  “민족일보에 1천9백만환을 투자한 것은 사장 조용수와 어릴 적부터 학교 친구였기 때문이며 다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중역으로 취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5회 공판(8월 4일 9시)에서 검찰관측 증인으로 윤길중, 조재천, 고정훈, 박진(민자통 사무총장) 이재춘(동 선전 위원장), 문용채(삼민당 당수) 윤식(서울대 민통련 중앙위의장)등 7명이 선정됐다.

  그러나 증인으로 채택되어 법정에서 보였어야 할 최근우 선생이 안보인 것이다. 조용수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의 하나인 최근우 선생이 바로 전날인 3일 오후 7시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근우에 대한 증인은 자연히 취소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재판정에서 윤길중 증언.

  “7·29 선거 전후, 1천7백만환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돈이 이영근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전혀 몰랐고, 민족일보 취체역으로 있었지만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윤식 증언.

  “조용수로부터 돈 10만환을 받았으나 그것은 소위 악법반대 자금이 아니라 ‘서울대 민족통일 연맹’ 연구자금이었다”

  고정훈 증언.

  “민족일보 자금은 조소수(趙小壽)씨가 ‘재일 경제협의회’로부터 받아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정에서 사람들이 진술을 하는 동안, 조용수는 대기실 벽에 기대어 온통 최근우 선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대한 관심은 없었다.

  “…일제하에서 3·1 운동의 불을 당긴 2·8 독립선언 10인 서명자의 한사람이었던 최근우 선생. 김구 선생보다 앞서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원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9년간이나 정치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해방된 조국에서 큰일을 꿈꾸던 그분이 죽다니. 그것도 해방된 조국에서, 죄인으로 몰려 돌아가시다니. 아 아.나를 친자식 이상 아껴주면서 나에게 중매까지 서려고 했던 그분이…”

  재판을 끝내고 형무소로 돌아 온 조용수는 밤새 울었다.

  6차 공판 (61.8.10)에서는 증인으로 이재항(李載沆 전 주일대표부 총영사, 청와대 비서실장)이 나왔다. 그는 일본에서 조용수와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 것으로 보도됐다.

  “조 피고를 공무관계로 알았으나 직접 만나 북송반대 관계협의를 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지방에서 올라온 민단 간부들과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시인한다. 조용수에 대한 사상관계를 대표부 사무실에서 논의한 사실이 있으며, 조봉암 구명운동에 서명 날인한 사람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가 북송반대운동의 선봉에 나섰더라도 ‘케스천 마크’를 붙이고 있었다”

  이재항 증인과 조용수와 대질심문이 있었다. 조용수는 분명한 어조로 이재항의 애매한 증언을 따졌다.

  “내가 북송반대 민중대회를 위해 대표부를 방문했을 때 구체적(물질적)으로 협조한 사실이 있는데 그걸 모르십니까”

분명 북송반대운동 과정에서 잘 알던 사이였지만, 이재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뺏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재항이 분명히 자신의 일본에서 행적을 밝혀주면 재판은 상당히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자주 만나 이야기했던 사람이 지금은 어렴풋이 알고만 있을 뿐이라는 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튼 이재항은 일본에서 북송반대 운동을 한 사실이 있다는 점만 확인했다.

  8월 10일, 논설위원 이건호 변호인은 유진오(兪鎭午) 고대총장 외 25명의 교수 진정서와 송지영 피고에 대한 조선일보의 만물상, 팔면봉 등 송지영의 글을 모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 재판부는 이건호 피고가 특별증인으로 신청한 이항녕(李恒寧)고대법대학장을 허가했다.

  7차 공판 (61.8.11)도 매한가지였다.  송지영 피고인 변호사 김병완(金炳琓)변호사는 송피고가 이영근을 안 것은 과거 그가 태양신문사 업무부장으로 있을 때부터였으며, 그로부터 정치자금이나 혁신계 통합의 지령을 받은 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변호했다.

  변호인단의 변론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족일보라는 법률상 주식회사는 상사법인으로 개인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지 어떻게 사회단체인가. 사회단체는 분명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에 규정돼있다.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일본으로 도피한 이영근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돈을 받은 증거도 없고, 또 이영근이 간첩이라는 증거도 없다. 민족일보의 자금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일본교포로부터 나온 것이다.

  민족일보가 무정견한 중립화 안이나 평화통일, 남북협상 남북교류 및 학생회담을 선전함으로 반국가 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고무 선동했다고 하지만, 민족일보에는 분명 북한을 비난하는 기사나 논설도 많고, 다른 신문들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나 논설도 많다. 정부를 비판한 것이 북한을 이롭게 했다면 신문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변호인단은 문제의 이영근이 61년 4월 28일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사히저널’이 주최한 남북통일의 모색이라는 좌담회에 참석, 대한민국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 조용수가 ‘신태양’ 58년 5월호에 게재한 ‘일본외교의 특질과 한일회담’이라는 논문, 또 조용수가 재일거류민단에서 교포북송을 반대하기 위해 니이가다까지 가서 머리띠를 두르고 결사적으로 북한의 태도를 비난하는 데모를 하는 화보사진 등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송지영, 이건호 등은 언론계나 학계에서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를 죽음으로 모는 시나리오는 착착 진행됐다. 혁명검찰부는 일본에 있는 이영근의 자금을 조용수에게 전달했다고 증언한 조소수를 불구속으로 석방했다. 그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 검찰측 주장대로라면 그는 상당히 중요한 증인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시 재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용수측에서는 수사당국이 일부러 조씨를 일본으로 도피시킨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드디어 8월 12일, 제 8차 공판에서 구형이 있었다. 당시 언론은 법정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날 처음 나온 장순영(張厚永) 변호사만 사복 차림이고 그 밖의 사람은 모두 법복을 입었다. 심판관과 검찰관도 모두 땀에 젖은 소매 자락을 자주 만졌고 손등과 목덜미에서 땀이 쉴새 없이 흘러 내렸다. 복중에 법복은 아무래도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변호인은 법복의 단추를 열어 셔츠가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2층 대기실에는 조재천 전 법무장관이 앉았고 그 옆에는 기자시절 견원지간으로 통했던 고정훈이 앉았다.  2호 법정은 한동안 증거채택을 두고 변호인단과 검찰측의 입씨름이 계속됐다.

  드디어 오후 1시30분, 땀에 젖은 목소리로 이재오 검찰관이 구형을 읽어 내려갔다.

  “민족일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용공사상을 부식시켜 국내를 교란했다. 신문사가 창간동기와 인적구성으로 보아 반국가적 혁신정당의 대변지임에 틀림이 없다. 민족일보 간부들이 괴뢰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 선동하여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

  조용수 사형, 안신규(상임감사) 사형, 송지영(전 한국통신사장) 사형, 양실근(유양호 선원) 사형, 이상두(논설위원) 징역 15년, 이종률(전 편집국장) 징역 5년, 정규근(상무) 징역 5년, 양수정(편집국장) 징역 5년, 김영달(업무국장)징역 5년, 전승택(총무부국장)징역 5년, 이건호(논설위원)징역 5년, 조규진(기획부 사원)징역 5년, 장윤근(이영근의 처)징역 5년. 민족일보 관계 전 재산은 몰수···”


  구형이 있은 후 60여명의 가족은 일제히 ‘엄마…’ ‘아버지’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며 취재기자 몇 사람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조용수는 냉냉한 표정을 지었다. 송지영은 쓴웃음을 지었고 이건호는 얼굴과 눈시울을 붉히며 “차라리 사기 절도죄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빨갱이란 웬말인가”며 안절부절했다.

조용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최후진술을 했다.

“저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극형을 받게되어···”

조용수는 자신이 사형을 구형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사형까지 받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8월 28일, 선고공판이 있은 날이다.

  오전 10시, 혁재 2심판부 김홍규 대령은 제1호 법정에서 개정된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민족일보가 평화통일, 남북협상 등 반국가 단체인 북한괴뢰에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주장에 고무, 동조했다. 민족일보는 정당, 사회단체가 아니나 특별법 제6조의 입법취지에 부합하는 광의의 사회단체라고 볼 수 있다. 조용수 사형, 안신규 사형, 송지영 사형…”

  약 40분간에 걸친 판결이유 낭독 끝에 연거푸 사형이 떨어지자 방청객은 일제히 웅성거렸고 몇몇 사람은 통곡을 하기도 했다. 법정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서 재판장의 형량낭독이 맨 앞자리인 기자석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사형을 선고받은 조용수 안신규는 태연했다. 오히려 송지영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재판장이 폐정을 선언하고 난 후 어떤 여인은 심판부석으로 뛰어 올라가려다 제지당했다.

  1심 선고에서 이종률 전승택 김영달 조규진 장윤근은 특별법 6조의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죄 선고를 받고, 양실근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양수정 국장, 이건호 논설위원은 구형보다 많은 10년형이 선고됐다.

  재판결과가 알려지자 국내외 여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송지영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국내 문인과 언론계 인사 104명의 진정서가 제출됐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신문편집인협회, 펜클럽 등에서 충격과 항의표시가 잇달았다.

  조용수는 자신에게 사형에 선고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말 불안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형무소 이발관에서 양수정 국장을 우연히 만났다.

  “양 국장, 암만해도 이 사람들 하는 일이 이상한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중부서 유치장에서 최달희씨를 업고 병원에 나갔을 때 어떻게 하는 건데. 사실 그때 도망치려면 넉넉히 그럴 수 있었거든요”

  양국장도 조 사장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보, 설마 세계 여론이 그렇게 비등한데 상소심에서 잘 안되겠소”

  “잘 되길 바라지만, 이거 참…”

  조용수는 찌는 듯한 8월의 더위 속에 감방생활을 한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조용수 변호인단은 문제가 된 민족일보의 기사와 다른 신문의 기사내용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유독 민족일보만 정부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는 점, 민족일보의 집필진이 혁신세력만 아니고 당시 저명한 학자였다는 점,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국내외 반응 등을 정리해 거의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재판부에 제출했지만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재일거류민단장 등 일본에서 조용수의 활동에 대해 증언 해줄 수 있는 증인신청도 모두 거부됐다.

  조용수는 9월 23일 변호사를 통해 장문의 상고이유서를 냈다.

  “원 판결은 본건 민족일보사가 정치활동에 관한 법률 제3조에 의하여 공보처에 등록된 것으로서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므로 정당이 아님은 명백한 것이고···이영근은 간첩이 아니다. 피고인이 북괴괴뢰집단과 내통하지 아니하였다. 민족일보에도 반공기사가 있고 타 신문에도 북괴와 동일논조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는 등…” <조용수 상고이유서>


  10월 31일, 상고심에서는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선고를 해버렸다. 전우영 재판장을 비롯, 문석해 선우주 정기순 양회경 이존웅 계철순 재판관이 배석했다. 전우영 재판장은 선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조용수 동 송지영 동 안신규 동 양실근의 상고와 피고인 조규진 동 양실근에 대한 상고는 이를 기각한다”


  조용수 포함 다섯 피고에게 상고 기각, 1심에서 무죄선고 받은 이종률은 2심에서 징역 10년의 유죄, 이상두는 15년에서 10년으로, 이건호와 양수정은 10년에서 5년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민족일보를 사회단체로 인정한 원심을 파기했다. 즉 민족일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고 조직에 있어서 개방성이 없는 상사 법인이므로 이를 사회단체로 본 것은 착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의 주요간부로 혁신정당의 대변지인 민족일보를 설립했고 송지영 등 다른 피고인은 조용수와 공동정범으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사회대중당의 공천으로 청송에서 한번 출마한 것 밖에 없고, 그 후 공식적으로 아무런 정당 상 직책이 없던 조용수가 졸지에 사회대중당 주요간부가 된 것이다.

  조용수는 생각했다.

  “주식회사인 신문사가 사회단체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고, 그러나 내가 사회대중당 주요 간부라고? 지난 총선 때 공천을 받아 한번 출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 나는 어느 정당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당원도 아닌 내가 주요간부라니. 또 현재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여러 혁신정당의 당수나 고위 간부 중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내가 정당 고위간부라고 사형을 선고 받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정에서 시종 웃음을 보였다. 사형을 선고받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숨김없이 말해 나는 최고로 구형되고 언도되는 자리에서 눈물은커녕, 마음의 평정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낮 익은 사진반 기자들이 카메라를 내게로 돌렸을 때 웃어준 기억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나도 돌아와 맨 먼저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식을 잘 아는 어버이로서는 도저히 진실을 수긍할 수 없는 일로 최고형이 언도됐을 때 6순을 훨씬 넘으신 어버이를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솟더군요”

  <송지영, ‘그리운 얼굴들’, 월간 신세계 63년 8월호>


  재판은 이것으로 끝났다.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일단락 된 것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조용수의 진주중학교 은사였다. 이병주는 조용수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소설 형태로 많이 남겼다.

두 사람은 서울형무소 면회 대기실에서 같은 죄수신분으로 만났다. 수갑을 찬 조용수는 이병주를 만나자 “이 선생님도 이곳에 와 있었습니까”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생님 마음 단단히 가지시고 몸조심 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면회실을 나갔다.

  이병주는 훗날 ‘어느 황제의 회상’이라는 소설에서 그때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썼다.

  “그래도 나는 한마디 말도 못했다. 시형을 선고받은 제자로부터 15년을 선고받은 사람이 도리어 위로의 말을 듣고 이른바 은사라는 입장의 인간이 떳떳이 말 한마디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조용수의 눈이 얼어붙은 듯한 눈을 잊지 못한다. 준수한 얼굴을 물들인 그 깊은 우수를 잊지 못한다. 설혹 어떤 죄를 지었기로서니 그 청년, 그 얼굴, 그 눈빛으로선 사형을 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광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경향신문  2001년 7월5일자>



3. 차가운 외면, 그리고 침묵


  5·16 다음날인 5월 1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임원회의가 열렸다. 고재욱 천관우 박용구 부완혁 박홍서 김영상 최석채 원경수 김창문 강영수 박연대 소한준 등의 인사가 참석했다. 이들은 당시 언론계의 중진이었으며 그 후 언론계의 큰 인물로 평가받는 인사들이다.

  참석자들은 현 시국의 움직임에 대해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혁명의 주체는 누구요?”

  “장도영은 아니고 박정희라는 젊은 장군이라는 데…”

  “그 박정희라는 사람의 전력에 대해 항간에 말이 많은데…”

저마다 처음 겪는 쿠데타의 향후 움직임에 논란이 분분했다.

  이날의 토의 결과는 “비상계엄선포에 따라 보도관제로 신문제작에 애로가 있어 각 사의 회장 및 위원장이 방문 요청키로 했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5월 29일, 역시 신문편집인협회 2차 임원회의가 열렸다. 이날도 고재욱 부완혁 김용구 박홍서 고흥상 조동훈 최석채 강영수 원경수 김영상 박연대 김창문 정현준 등의 인사가 참석했다. 모두 표정이 굳어 보였다. 계엄으로 인한 신문제작의 어려움은 둘째 치고 언론계 인사를 비롯한 각계의 많은 인사가 속속 구속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인의 연이은 구속사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발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작 이날 토의된 내용은 “정부 각 부처에 출입이 억제되고 있어 이에 대한 타개책과 이력서를 출입처에 제출치 않도록 공보당국과 최고회의에 요청하며 언론계가 자율적 정화를 하도록 신문윤리위원회의 조속한 구성을 추진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민족일보 관련자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연행된 상태였다. 그러나 어떤지 모르지만 공식적인 회의록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의록 61년 4월5일부터 62년 3월19일까지. 신문편집인협회보 62년 4월4일자)에는 이런 내용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다.

  마침 61년 6월 1일. 인도 텔아비브에서는 국제신문인협회(IPI) 10차 총회가 열렸다. 한국이 IPI에 가입하고 처음으로 참석하는 국제회의였다. 홍종인 박권상 김성곤 우승규 등이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그때 IPI 임원들은 김성곤 당시 동양통신 사장에게 “군사혁명이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한국언론 현실을 주목한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IPI의 이런 우려는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 후 열렸던 신문편집인협회의 7월 3일 운영위원회에서도 민족일보를 비롯한 언론계 인사의 대량 구속사태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은 없다. 7월 13일 운영자유보도위에서는 임검 나온 남대문서 경찰과의 시비로 개회만 하고 산회해버렸다. 한창 민족일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이지만 이때까지 신문편집인협회의 회의록에는 민족일보 문제가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처음 민족일보 문제가 거론된 것은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 등 세 사람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은 후인 9월4일 제5차 운영자유위원회에서 조심스럽게 민족일보 문제가 거론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민족일보 사건 송지영 피고에 대한 진정서를 최고회의 의장 및 혁재 당국에 제출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회의록에는 송지영만 거론되고, 정작 발행인인 조용수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언론은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이름을 외면했다. 유일하게  한국일보만 사설에서 민족일보 관련자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일보사건의 준엄한 판결과 우리의 소신

  세칭 민족일보사건에 대한 혁재 제2부의 판결이 작 28일 선고되었다. 최고형으로 사형 3명을 위시하여… 이 판결은 여러 점으로 주목을 끄는 바이다.

  첫째는 5·16혁명 후 제정된 특별법 제6조의 ‘반국가단체의 정을 알면서 동조한 자에게 적용한 그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으로 국민에게 특이한 인상을 주는 것이요, 둘째는 판결된 피고들이 대부분 언론에 종사하던 이들이란 점에서 이 나라 신문사상으로 보아 주목을 끄는 바이다. 신문사상으로 보아도 통탄할  일이다. 최근 반세기동안 일제하에서도 다른 정치활동으로 투옥이 되었다가 그 빌미로 옥사한 이도 있고 또 일군에게 남모르게 피살된 이는 있었지만 신문종사자로서 법에 의한 사형선고를 받은 일은 없었으니 명목상으로 신문인이 극형 또는 중형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혁재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이번에 준엄한 판결을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공산당이 아닌 것은 추단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소시민적 성격을 참작하여 금후의 개전으로써 조국을 위하여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없는 것인가. 이리하여 신문계로서도 한 개인의 경각(警覺)으로 더욱 진력할 길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인가.

  남은 길은 극형은 상고의 기회가 있고 중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최고회의의장의 확인의 단계에서 신중한 배려가 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한국일보 61년 8월 28일자 조간 사설. IPI는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한국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그 후 한국 신문편집인협회는 10월 11일, 상고심 선고(10월 31일)를 앞두고 민족일보 사건으로 1심에서 극형을 선고받은 송지영 피고에 대한 진정서를 혁명재판소장 및 상고심판부에 내기로 결정했다. 역시 여기서도 조용수의 이름은 회의록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진정서에 조용수의 구명도 거론됐는지, 안됐는지는 진정서의 내용을 알 수 없어 입증할 수 없다 (재판관계 기록도 없고, 현재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 당시 기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외에서는 민족일보 사태에 대해 조용수를 비롯한 안신규, 송지영이 같은 비중으로 다뤄졌으며, 특히 국제신문편집인협회에서는 발행인 조용수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국제신문인협회(IPI)는 9월 20일 한국 정부에 보낸 1차 항의문에서 다음과 같이 ‘민족일보 간부 3명(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이라고 명시했다.

  IPI 항의문

  신문의 자유가 있는 48개국 신문편집자 대표로 구성된 국제신문인협회(IPI)는 한국 민족일보 간부 3명(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이 선고는 현재 상고중인데 우리는 그 판결에 어떠한 영향을 줄 생각은 없지만 IPI로서 신문 편집관계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에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서울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나 사형선고는 형사사건 결과가 아닌 언론활동에 대해 내려졌다는 인상을 전 세계에 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IPI는 일주일 전 한국정부에 대해 확인을 의뢰하는 전문을 보냈지만 아직 회답이 없다. 때문에 IPI는 법적 절차에 간섭할 의사는 없지만 회원을 대표해 한국에 있어서 언론의 자유원칙이 보장되고 또한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되기를 갈망한다.


  그 후 IPI의 2차 항의 전문에서도 ‘민족일보 사건에서 사형을 받은 세 사람’이라고 돼있다. 다음 전문은 스위스 쥬리히에 있는 IPI가 10월 21일, 한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에게 보낸 것이다.

  “48개 국가 신문편집자를 대표하는 국제신문인협회는 민족일보를 대신해 관용을 베풀 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민족일보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세 사람은 현재 상고 중에 있습니다. 국제신문인협회는 한국 정부와 언론 간에 건전하고 솔직한 바탕 위에 서려는 진실한 노력에 계속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세계 여론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이 특별한 경우는 관용과 인도적으로 처리되기를 기대합니다. <IPI Report. nov.1961>


  이런 IPI의 항의성명은 전 세계에 그대로 타전됐다. 그러나 해외의 이런 분위기는 국내에서 조용수와 안신규는 배제된 채 송지영의 이름만 거론됐다.

  그해 겨우 국제신문인협회에 가입한 한국으로서, 국제신문인협회의 계속된 항의문 발표에 정작 당사자인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 누구도 이런 언론탄압에 항의하거나 조용수의 구명을 요청하는 용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국제신문인협회에 이런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를 보면 당시 왜 조용수와 안신규는 진정대상에서 제외됐는가를 간접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고도 슬픈 사건이 이 기간동안 일어났다.

  그것은 1961. 8. 28 법정은 민족일보의 발행인과 폅집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 사형선고를 들은 국제신문인협회는 11월 21일, 사형이 선고된 사람들에게 관용을 호소하는 전문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한편, IPI 한국위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A.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북괴의 지령을 받는 조총련으로부터 신문의 운영자금을 전달받았다는 많은 증거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조용수의 행위는 언론인의 참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또 이 사형선고로 인해 한국에서 민주원칙이 세계여론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IPI의 우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B. 그러나 IPI 한국위원회는 IPI와 또 다른 곳에서 제기하는 관용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우리정부가 완전히 무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형이 선고된 세 사람 중 12월 20일, 박정희 의장은 조용수만 사형을 확인하고 송지영, 안신규는 무기로 감형했기 때문이다. 특히 송지영의 경우, 언론인으로서의 전력이 고려된 결과이며 전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이렇듯 민족일보 문제는 혁명정부의 언론정책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제신문인협회 한국위원회. ‘Journalism in Korea after the may 16th Revolution.’ 이 문건은 IPI한국위원회가 62년 5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IPI 총회 (한국대표 김성곤 당시 동양통신사장)에 보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총회에 참석한 김성곤 대표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가 간첩이라고 발언해, 한국의 언론 상황에 큰 관심을 가졌던 세계 언론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統一朝鮮新聞 62.5 東京>


  이 보고서대로라면 조용수는 응당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어서 마땅하고, 그런 사람을 죽인 것인데 IPI 본부에서는 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야단인가. 송지영은 무기로 감형됐으니 그 정도면 만족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제펜클럽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일보 사건을 보고 받은 국제펜클럽은 10월 29일 다음과 같은 사무국장 명의의 항의전문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냈다.

  “세계적으로 7천여명의 작가를 대표하는 국제펜클럽은 회원인 작가 송지영에게 10월 28일 내려진 사형선고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보여줄 것을 요구 합니다”

(Telegram Sent On Behalf of International P.E.N. by David Carver to Chung Hi Park, 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for Reconstruction, Seoul, Korea-On October 29-1961)


  한국펜클럽이 아닌 일본펜클럽으로부터 민족일보사태를 보고 받은 국제펜클럽은 61년 9월1일, 베네치아에서 국제펜클럽 집행부회의를 열었다. 그때 투옥작가 위원회에선 한국의 민족일보 사태에 대해 이렇게 논의됐다.


  “국제펜 사무총장 카버씨는 한국에서의 민족일보 사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신문의 발행인과 두 명의 그의 동료는 남북한의 문화 회복, 학생의 교류와 남북한 간의 다른 변화를 꾀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중 사형이 선고된 한 명 송지영은 한국 펜클럽의 중요인물로 한국을 대표해 도쿄 펜회의에 참석한 바 있는 본회 회원이다. 이 사건은 펜클럽 일본지부를 통해 처음 본부에 보고 됐다. 이 사형선고에 대한 구명을 위한 위원회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오사카에서 조직됐다.”

(P.E.N. INTERNATIONAL EXECUTVE COMMITTEE MEETING IN THE PALAZZETTO VENEZIA, ROME. WRITER IN PRISON COMMITTEE. NOV. 1/1961)


  그리고 회의결과 국제펜 본부는 박정희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25개국 작가 대표가 참석한 국제펜 집행부는 귀하에게 민족일보사건에서 송지영과 그의 동료들에게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를 요구합니다”

(Telegram Sent From Rome Conference to General Chung Hi Park -Nov.2-1961)

  일본펜클럽과 국제펜 본부에서 이렇게 항의성명이 나오고 있을 때, 당사자인 한국펜클럽은 민족일보 사태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1년 10월 13일, 한국펜클럽 9회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참석인사는 주요한 조경희 양원달 양명문 조병화 정한숙 백철 이하윤 정비석 정인섭 김광용 등 열한명으로 이들 역시 당대의 꼽히는 문인으로 통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자 장원달이 송지영씨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펜본부로부터의 전문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송지영에 대해서만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진정서를 내기로 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정작 같은 사건에 연루돼 같이 사형이 선고됐지만, 국내에선 이제 서른한 살밖에 안된 조용수의 구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제출된 진정서에도 조용수의 이름은 외면했다. 오랜 언론계 생활을 했고 펜클럽회원으로 작가인 송지영 마저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민족일보에 관한 어떠한 진정도 없었을지 모른다.

  민족일보가 서울신문의 인쇄거부로 장면정권과 대결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언론은 민족일보와 조용수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비겁한 외면과 침묵은 한 젊은 언론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무도 그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안타까와하지 않았다.



4. 불붙은 해외의 구명운동


  국제신문인협회(IPI), 국제펜클럽, 언커크 한국위원회, 일본 등 외국인들과 해외에서의 활발한 항의와 구명운동이 있어났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조용수의 가족만 구명을 호소했다.

  조용수의 구명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일본이다. 그것은 조용수가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일본의 많은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해왔기 때문이다. 또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영근이 일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고 통일조선신문을 통해 교포사회와 일본여론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역시 조용수가 있던 도치키현 민단지부다. 그들은 이런 심정으로 구명운동에 임했다.

  “우리 동네에서 부단장, 사무총장을 했고 한국에서 민족일보 사장까지 지낸 사람이 쿠데타의 희생양이 됐다. 아직 서른두살밖에 안됐는데 이데올로기를 떠나 구명에 나서야 한다”

  초기 구명운동은 도지키현 본부를 중심으로 주일대표부나 본국정부에 대한 데모, 진정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용수 출신학교인 메이지대 학생의 항의성명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국학생은 조용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특히 한국학생모임인 한국학생동맹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은 ‘민족일보 언론인사 구명운동 전 재일한국학생위원회’를 조직했다. 조용수는 이 단체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학생들은 본국 쿠데타 정권에 항의전문을 보내고 연일 한국대표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이 학생위원회는 “구명운동은 동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전국적으로 전개할 계획이고 혁명재판에 의한 재심의 결과여하에 따라 전국학생에 의한 대표부 단식농성도 결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이 위원회는 항의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의 학생단체에 협력을 호소하는 구명운동에 돌입했다.

  민단 본부는 한국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어 조용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구명운동을 방해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61년 12월 11일 민단은 한학동 집행부 전원을 정권조치하고 민단의 의사에 의한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에 반발한 집행부원들은 ‘재일한국동맹’이라는 명칭으로 조직을 구성, 민단집행부와 대립했다” <전 준, 조총련 연구 1, 2, 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 1972>

  그러나 민단본부의 이 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민단 각 지부는 조용수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조용수에 대한 판결이 있은 8월 28일 이후, 구명운동은 보다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사설에서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감형을 요구했다.

  8월 31일 일본 전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한국인은 ‘조용수 구명운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신주쿠 고세넨킨가이가(厚生年金) 회관에서 첫 회합을 가졌다. 이 구명위원회 대표는 도지키현 민단 단장 배기호가 맡았다.

  ‘조용수 구명운동위원회‘는 이날 다음과 같은 운동방침을 발표했다.

  1. 전국적 항의 민중대회를 개최한다.

  2. 구명 서명운동을 전개한다.

  3. 일본 및 자유주의 각국, 국제연합 기타 국제적 각 기관에 로비활동을 편다.

  4. 최악의 경우에는 대표부에서 단식투쟁을 결행한다.


  이 구명위원회는 9월 8일 민족일보사건 피고 전원을 즉시 석방하라는 박정희 의장에 대한 항의문, 본국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각각 발표했다.

일본에 있는 언론출판계 인사도 조용수의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언론기관이 민족의 단결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민족적 의무이다. 민족일보의 논조는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왔다. 민족일보 간부 및 강제 투옥된 모든 언론인을 즉시 석방하라”  <61년 8월. 재일조선인 언론출판인협회 성명>


  이들 재일 한국인기자단은 8월 8일, 조용수 등에 대한 사형선고에 유감의 뜻을 나타내고, 선처를 요구하는 요지의 요청서를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백엽(白葉)동인회 (1957년 민단 중앙총무국장 최선(崔鮮)이 주도로 만든 동인지로 한국의 국가보안법 반대, 평화통일 남북교류를 주장했다)에서도 8월 28일 한국 쿠데타 정권의 “민족일보 사건의 날조는 민주주의를 그 근본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이라는 항의문을 발표했다.

  또 일본에 체류하는 좌우익 문화인사의 공동조직체인 ‘조국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 촉진 재일문화회의’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 언론·출판인에 대한 사형은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죄악”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용수를 비롯한 민족일보 관계자에 대한 사형선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인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곳은 일본펜클럽이다.

  61년 8월28일, 일본 펜클럽 사무국장 마츠오카요오코(松岡洋子) 여사는 “신문인과 언론인에게 언론의 문제로 사형을 선고 한 것은 일본 역사상은 물론,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규정하고 “가능한 방법으로 구명운동을 벌일 생각이며, 현재의 서명운동을 각층의 대표, 전 일본 국민의 서명을 받는 것으로 추진할 작정이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일본펜클럽 회장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명의로 항의전문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고 국제펜본부에 긴급 보고했다.

  영국 런던에서 한국의 민족일보 사태에 대한 보고를 받은 국제펜클럽 타버드카버 사무총장도 박정희 의장에게 전문을 보내, 민족일보 관계자의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고 전 세계 회원국에게 구명운동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일본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전국적 서명운동 전개됐다.

  ‘한국언론인 구명을 호소하는 모임’이 결성됐다. 동경대 신문연구소장인 기도마다이치(城戶又一)는 이 모임을 만들면서 “일본에서도 일찍이 언론 탄압의 어두운 시기가 있었지만 사형이란 일은 없었다,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로서 좌시할 수 없기에 세계적으로 구명 운동을 외쳐 나가기로 했다”고 구명운동의 취지를 밝히고 구명운동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한국 쿠데타 정권의 박정희 의장 앞으로 구명 요청서를 보낸다.

  2. 쥬리히에 있는 국제신문협회(IPI), 미국에 있는 자유인권협회, 각국의 신문 협회, 9월에 개최되는 유엔총회에 도움을 요청한다.

  3. 일본에서 구명 서명 운동을 전개한다.

  이 모임은 서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며칠만인 9월 5일 3시까지 서명자 수가 각계의 대표적 인사만 5백명이 넘었다. 주로 일본의 대표적 작가, 언론인, 문화인사가 서명했다. 마츠오카요오코(松罔洋子) 일본펜클럽 사무국장은 9월 6일, 일차적으로 이 서명서를 주일 한국대표부에 전달했다. 또 서명운동을 계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동경도 센다이다구 1-4번지에 임시 사무소를 설치했다. 이 단체는 이후에도 계속 서명을 받고 항의전문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동경대 교직원조합 집행부, 교수 일동 등 일본대학 관계자도 항의성명을 박 의장에게 보냈다. 또 9월 11일, 일본 정론저널리스트협회가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이외 일본저널리스트회의, 국민문화회의, 오사카지방 일본인 유지들, 일본 총평, 전국 청년대표자회의 등의 단체가 연이어 항의문을 발표했다.

  구명운동과 항의집회는 일본 전역으로 계속 확산됐다.

  고베에서는 ‘민족일보사건 진정위원회’(대표 전해건·全海建)가 조직돼 2천3백명의 서명이 담긴 구명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윤보선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진정서에는 고베의 신문인, 실업가, 미술가, 예술인, 종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외국인도 참여했다.

  당시 조용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전 동경대 총장으로 일본의 대표적 지성 남바라시게루(南原繁), 작가 다카미준(高見順)과 평론가 가메이가츠이치로(龜井勝一郞),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 일본 펜클럽 회장, 유명한 일본 여류작가 겸 평론가 마츠오카요오코(松岡洋子 마츠오카요오코는 일본펜클럽이 한국의 유신체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펜을 탈퇴할 정도로 대가 곳은 여류작가다), 동경대 신문연구소장 기도마다이치(城戶又一), 평론가 겸 아사히신문 논설고문 시라이시봉(白石凡), 역시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모리교죠(森恭三), 메이지대 교수를 지낸 작가로 신일본 문학회회장인 아베도모치(阿部知二), 역시 작가 이시카와다드즈오(石川達三), 대표적 인권변호사 마사키도죠(正木亨), 이와나미(岩波)서점 상무 요사노겐조오(吉野源三) 등이다. 이들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들이었다.

  왜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들이 한국의 한 언론인에게 그런 관심을 보였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에서 군부정권의 대두와 그로 인한 언론인 조용수의 사형판결에 대해 일본 지성인은 공통적으로 과거 군국주의 악몽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바라시게루(南原繁) 전 동경대 총장은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를 거부하다 동경대 교수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그는 야인생활을 하면서 지조를 지키다 후에 동경대 총장이 된 대표적인 일본의 지성인이다. 또 작가 다카미준(高見順)과 평론가 가메이가츠이치로(龜井勝一郞)는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한 자신의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치욕이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던 양심가였다 (조용수 추도사에서 이런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위해, 사실 얼굴도 모르는 한 한국인 청년 조용수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었고, 박정희 의장에게 항의성명을 보냈다. 아마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 이렇게까지 한 목소리를 낸 것은 드문 일이다.

  사실 조용수 구명움직임은 이념적 정파를 떠나 일어났다.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는 ‘조용수는 우리와 입장을 달리한 사람’이라고 전제하면서, 조용수의 사형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남한의 군사 파시스트들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남북경제, 문화의 교류 주장에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그들이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지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폭로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범죄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히틀러, 무솔리니, 이승만 보다도 극악무도한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화의 적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나타냈다.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씨는 조선총련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민단간부였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적 입장에서 조씨에 대한 사형판결에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61년 8월 2일 조총련 중앙상임위 성명 요지>


  북한의 로동신문도 “이것은 진정 언론에 대한 유례없는 야만적이고 파쇼적인 공격일 뿐 아니라, 평화통일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남조선 인민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고 용서하기 어려운 민족적 배신행위이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1961년 8월 31일자>


  민족일보 관계자들에 대한 사형판결에 대한 항의는 비단 일본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IPI 본부는 9월 20일, 10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항의전보를 보내고 항의문을 발표했다. 또 미얀마작가협회, 소련작가동맹도 사형선고의 재고를 촉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9월 28일 국제 펜클럽본부도 항의성명을 발표했고, 10월 27일 재차 구명호소문을 발표했다. 10월 27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도 만장일치로 항의문을 채택, 한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의 즉각 석방과 민주적 권리회복을 요구했다.

  국제민주법률가 협회도 민족일보사 사장, 언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군사적 탄압에 항의,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조선인민의 평화통일, 독립의 염원을 난폭하게 짓밟은 한국 군사정권의 불법적인 폭거에 분노와 불안을 표시했다. 또 언론인들에게 선고한 판결을 취소하고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한국의 법무부장관에게 이와 관련된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 성명문은 국제연합의 출판물과, 국제연합 인권옹호위원회, 국제인권동맹 등 각 단체에 보냈다.

  당시 언커크 알레그라도 의장은 은밀히 박정희 의장을 만나 민족일보 사건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고 박 의장도 그것을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 조용수라는 이름은 어느 곳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물론 쿠데타 후 계엄이라는 것도 한 이유였지만 누구도 조용수라는 한 젊은이의 이름을 거론하길 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