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6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제 6 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1. 갈등과 발전


  민족일보는 가판에서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장면 정부의 탄압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다 다시 발행한 이후 많은 국민은 민족일보를 신문다운 신문으로 평가했다. 당시 언론계는 민족일보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민족일보가 펜대만 들고 나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차림으로 발족했지만 불과 반개월 동안에 5만부의 부수를 발행하게 된 것은 어용지, 보수지의 민의봉쇄 장난에 증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국민(독자)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럼으로 혁신계 신문의 발간을 기성지들도 집권당이나 보수정파와 똑같은 이해타산에서 백안시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자기무능과 부패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건곤일요의 결의가 없고 기성언론계가 낡고 썪은 ‘보수’에 도취하여 장단 맞추고 있는 한 혁신계의 신문은 국민의 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 갈 것이다. 민족일보는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新聞評論 61년 3월 6일자>


  지방에 있는 한 독자가 조용수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민족일보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존경하는 조 선생님

  표현이 조잡한대로 또 붓을 들었습니다.

  못되먹은 기성 정치인들의 꼬락서니와 진부한 정치악의 악취 등에 골탕 먹은 이 민족을 하늘은 살피었는가- 서광이 트는 것 같습니다.

  4·19 1주 기념일에 말씀입니다. 지성의 본산이요 민족혼의 심장인 서울대학교, 그중에도 문리대학생의 힘찬 절규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통쾌했습니다. 괘호 만세를 부르고 싶도록 기뻤습니다. 그들은 현명했습니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의 재동들이었습니다.

  ‘이북 쌀 이남 전기’, ‘오고가도 못하는 내 땅’의 민족비원을 통감했고 기성정치인을 타기하고 민족혼에 호소한 현실적 감각이 예리한 청명아들이었습니다. 통일의 싹을 이들은 멋지게 시위했습니다. 이들의 선언은 통일의 전주곡이었고 민족의 소득 아님이 없었습니다.

  통일 없이 지나온 설움의 시위였고 졸렬히도 겁 많은 보수정객들의 중압을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새싹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겪어온 민족수난이 낳은 총아요 무수한 희생의 결정이며 역사의 산물입니다.

  민족일보여!

  이들을 환영하소서. 슬기로움이 태동하는 이 통일의 서곡을!

  풀리지 않은 이들의 울분과 어쩌지 못해 주저하는 이들의 대열에 감격적인 무대와 빈틈없는 진로의 제시가 있어야 했고, 작열하는 이들의 애국적 정열에 폭발적인 점화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이들 젊은이의 거룩한 용기를 보아야 습니다.

  의혹의 성이요, 금단의 세계였던 반쪽학문의 철창을 선명히 터놓고 이들 지성인 앞에 그 정체를 내놓아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의혹과 공포를 청산하고 온 민족의 새 이념을 똑바로 찾아야겠습니다.

  분단의 민족이요, 이념 없는 족속임을 탈출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요원한 것 같습니다. 험난한 과업임이 분명하매 파란난만일 것이요, 이 속에 성업 수행키에는 의로운 피와 용기가 기대되는 터입니다.

  이 혼란한 민족의 수난과 운명을 같이할 민족일보의 전도, 축복만을 바라겠습니다. 난시(亂時)에 영웅의 칼이 위객을 자랑한다면 민족혼란의 와중에서 쾌도난마, 이세의 풍진에 시비를 가리는 무관의 제왕, 평필의 공이 장하기 어찌 이만 못하리요. 귀하의 뜻하시는 바 날로 번창하와 민족의 영광 되옵기 비옵니다....

  4월 25일  서상모(徐祥模) 백

<이 편지는 지방의 한 젊은이가 조용수 개인에게 보낸 것이다>


  민족일보는 2월 23일, 그동안 지사지국이 완비되지 않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지사를 설치했다. 이제야 비로소 전국지로서 모습을 갖추고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설치된 민족일보의 지사지국장들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춘천지사장 길용남, 광주지사장 이양섭, 청주지사장 이웅희, 대전지사장 이목의, 논산지국장 오희창, 연무대지국장 손영진, 안동지국장 김근연, 논산지국장 김석환, 당진지국장 최영호, 경남지사장 김용출, 군산지국장 서동호 등이다.


  당시 언론은 등록만 하면 누구든지 신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명함만 세기면 신문사 사장이 될 수 있어 2천환짜리 사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거리에는 기자 명함, 신분증을 갖고 기자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의 무권력시대. 아무도 제한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중에는 민족일보 같은 건실한 신문사도 있었다. <한국 신문윤리 30년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1994>


  그러나 문제는 여러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경북대 정치학 강사인 이상두를 논설위원으로 기용했다. 이상두는 서상일 회장의 추천으로 민족일보에서 일했다. (이상두는 나중에 윤길중의 사위가 된다) 이렇게 논설위원을 보강했지만 여전히 사설과 논설 등은 조용수를 비롯한 일부 경영진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됐다. 아니 주장이 반영된 정도를 넘어 실제적으로 경영진에 의해 씌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부적으로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신문을 제작하는 사람은 조용수를 비롯한 혁신계 인사가 편집에 너무 간섭한다는 것이고, 경영진을 비롯한 혁신계 인사는 신문편집자들이 기능만 있고, 신념이 없다는 식의 불만을 나타냈다. 내부적으로 거의 매일 이런 갈등이 계속됐다.

대표적인 예가 오소백 부국장의 사임문제였다. 신문이 창간되고 얼마되지 않은 3월 17일 오소백 취재담당 부국장이 회의석상에서 사의를 나타냈다.

  “혁신관계의 신문이 필요하다는 소신에서 민족일보로 왔소. 그러나 신문에는 전혀 문회한 사람들. 특히 정당관계자가 신문의 편집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고, 또 일부인사의 글에도 문제가 있다고 계속 지적하지 않았소.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일할 수 없소”

  조용수 사장, 안신규 감사, 그리고 혁신계 임원진은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신문제작에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안신규 감사가 만류를 했다.

  “오 부국장.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데 왜 그러시오. 경영도 일단 안정이 되면 자연스레 신문 전문가들이 계속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조금만 참고 지켜봅시다”

  오 부국장은 이미 결심을 한 듯 말을 받았다.

  “조 사장은 일본에서 생활해서 국내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나가다가는 분명 좌절될 수밖에 없어요. 또 내가 지적하는 것은 경영과 편집의 구분이라는 신문의 근본문제도 중요하지만 실제 매일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요”

아침 편집회의에서 이렇게 말하고 오 부국장은 사표를 냈다. 기자 분위기도 이와 비슷했다. 장석구(정치부) 이호일(경제부) 정공채(사회부) 김영광(사회부) 하승주(편집부) 이종배(문화부) 이재섭(교정부) 등 8명의 기자가 민족일보를 떠났다. 민족일보의 내부 인사문제에 대해 외부에선 이런 시각으로 비쳐졌다.

  “···한때 오소백씨 등도 퇴임한다는 설이 유포된 바 있었다. 최근 서울신문과의 쟁송사건이 벌어지기 얼마전부터 한국일보 논설위원 임방현씨의 편집국장 취임설과 더불어 불원 인사 개편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유포되고 있던 터인데 급기야는 부국장 겸 사회부장이던 오소백씨가 사퇴하고 각부에서 8명의 기자들이 집단적으로 퇴임함에 이르렀다.

  민족일보는 혁신세력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자처하고 있는 터이고 동지가 비록 시설 재정 등은 확보되어있지 않다 하더라도 제작태도 하나로써 전도에 기대하는 바가 큰 것이다···”<新聞評論 1961년 3월 20일자>


  그러나 젊은 기자 중에는 민족일보의 편집방향이 옳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비록 신문사 편집국에는 각자 출신과 배경은 달랐지만 동지적 결속감이 팽배했다.

  이종률 주필 겸 편집국장은 민족일보가 ‘민족적 혁신’이 아니라 ‘정치적 혁신’쪽으로 나가고 있다는 이유로 신문제작에서 손을 떼, 거의 공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판국에 취재담당 부국장과 기자 8명이 민족일보를 떠나자, 신문제작에 어려움이 뒤따랐다. 더구나 세상은 온통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이른바 2대 악법투쟁의 회오리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조용수는 이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시간이 쫓겼다. 무엇보다 새로운 편집국장을 물색하는 것이 시급했다. 조용수는 여러 사람을 물색했다. 한국일보 임방현 논설위원(후에 청와대 대변인을 지냄)도 거명됐다.

  남재희씨(전 노동부장관)의 증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딱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조용수 사장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해서 당시 유명한 한식집 ‘향진’에서 저녁을 같이했다. 편집국장으로 임방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오기로 했고, 나보고 정치부 차장으로 와 국회, 정당캡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나는 신문경력이 3년밖에 되지 않았고, 더구나 민국일보로 간지 6개월밖에 안됐을 때였다. 민국일보로 간 것도 정치부 기자를 시켜준다고 해서 간 건데, 1년도 안돼 옮긴다는 것은 너무 사람이 ‘경(硬)’해지는 것이 아니냐며 거절했다”

  조용수는 또 한 인물에 주목했다. 조선일보 조덕송 문화부장이다. 조용수는 조덕송 같은 인물이면 민족일보와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덕송 부장도 사실 혁신 쪽과 인연이 많았다. 그러나 조용수 사장을 만난 조덕송 부장은 완강히 민족일보 행을 거절했다.

  “조 사장의 뜻은 내가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내가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오”

  “아니 조 부장님. 부장님 평소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일보는 선생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제가 빨갱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러십니까. 송지영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사진을 보십시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북송반대 운동에 앞장 선 사람입니다. 일부에서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모함입니다. 그건 조 부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지금 조선일보로 옮긴지도 얼마 안되고···내가 좋은 사람 추천해 드리리다. 지금 자유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는 양수정 선배가 있는 데 언론계 선배로 추천해 드리고 싶소”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조덕송(후에 전남일보 논설고문)부장은 자신이 민족일보로 가지 않은 이유는 그 전까지 감옥을 드나들면서 가족을 고생시켰기 때문에 조선일보라는 회사에 온지가 얼마 안돼 당분간 조용히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조덕송, ‘대하실록 언론의 외길 45년-민족드라마의 증언’, 주간조선 92.1.19일자)

  양수정 국장은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내고 자유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가 곳은 언론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조용수는 자유신문 양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선린동 다방에서 만났다. 조용수는 양수정을 만나자마자 민족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해 달라고 했다.

  “양 선생님은 전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신문에 편집국장이 필요합니다. 같이 일해 봅시다”

  양수정은 민족일보가 어떤 신문이고, 또 사장 조용수도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았지만 이렇게 젊은 사장이라는 데 속으로 놀랐다. 또 만나자마자 편집국장으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는 것도 놀라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민족일보의 성격에 맞는 혁신계와 별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 국장은 오히려 자유당의 원흉인 이기붕이 사주인 자유신문 편집국장을 했다. 조용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살길은 오직 통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 없이 우리가 잘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양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할 줄 모르지만 나는 전혀 바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분단은 순전히 강대국의 강압에 의한 것입니다만, 그것을 언제까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3천만 민족의 비원인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난관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통일의욕만은 꾸준히 고취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남북한 서신교한이라든지, 문화인 교류를 실현시켜 남과 북의 감정완화를 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민족일보가 지향하는 것은 신문본연의 사명인 사회의 목탁적 역할에 타 신문보다는 좀더 강렬한 통일의욕을 고취 대변하자는 것입니다”

  양수정은 조용수가 분명하고 대단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하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조용수는 이틀 후, 다시 양수정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을 같이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무교동 함경도 할머니집으로 갔다. 조금 후 고정훈이 합류했다. 고정훈을 합석시킨 것은 양수정과 조선일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같이 이야기하면 양 국장의 영입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신문에 대해서는 ‘신’자도 꺼내지 않고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양  수정도 술 실력이 대단해 세 사람은 무척 많은 술을 마셨다. 조용수는 의례 술이 취하면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애창곡인 ‘서귀포 파도소리···’를 또 불렀다.

  양수정이 거나하게 취해 말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요. 친하지 못한 사람과 만나 술을 마신다는 것은 도데체가 난 싫소. 그런데 오늘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이렇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오”

  양수정은 이기붕이 사주로 있던 자유신문 편집국장을 했지만 자유당 인사들과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양수정은 고위인사와 요리집에 가는 것보다, 빈대떡집에서 후배와 동태를 맛을 즐기던 부류였다.

  조용수는 바로 양수정의 이런 청렴성에 매력을 느꼈다. 양수정에게는 뇌물이 통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날 세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많은 말을 했고, 어느 정도 서로의 공통점을 찾았다.

  양수정은 내심 민족일보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며칠 후 조선일보 뒤 한 일식집에서 민족일보를 그만 둔 오소백을 만났다. 오소백과 양수정은 이미 잘 알던 사이였다.

  “오 국장 민족일보 어때요. 그만 둔 이유가 뭡니까”

  오소백은 자신의 체험을 솔직히 말해줬다.

  “사장 조용수도 괜찮은 사람이고, 개인적으로 그런 신문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런데 정치인이 신문편집에 너무 간섭이 심해요”

  양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점은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어느 신문이나 경영권과 편집권이 완전히 분리된 곳은 없었다.

  “보아하니 잘 설득하면 통할 사람 같던데요”

  오소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설득을 한했나요. 그런데 도저히 안되요. 이해시킬 수가 없더군요. 무조건 정부를 까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논조가 너무 앞서간다는 겁니다. 만약 양 국장이 거기 가서 일을 한다면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두 사람은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가 아닌 신문장이로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양수정은 내심 민족일보 행으로 마음을 굳혔다.

  양수정은 조용수 사장에게 논설, 사설을 제외한 신문편집의 전권을 달라는 것 등 다섯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조용수는 그 조건을 받아들었다. 양수정은 3월 18일 민족일보 편집국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양수정 국장의 취임으로 일단 외형적인 신문사 모양은 다시 갖췄지만, 문제는 그밖에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운영자금이 딸렸다. 또 중요한 문제는 자체 인쇄시설이 없어 항상 마감시간에 쫓겼다. 온통 2대 악법반대 투쟁으로 시시각각 정국과 사회의 움직임이 급변했지만 정오에 원고를 마감해도 밤 9시쯤에야 겨우 신문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할 정도였다. 자체 인쇄시설을 갖춘 다른 신문사와 속보경쟁이 되지 않았다. 자연히 기자의 사기가 떨어졌다.

  신문의 속보성과 타 신문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또 기자들의 사기를 살펴야하는 편집국장으로서는 조용수 사장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조 사장, 이래서 어디 신문을 만들겠소. 원고 마감하고 인쇄하는 데 하루 종일 걸리니”

  사실 양 국장도 조용수 사장이 매일 신문을 찍을 종이가 없어 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쫒아 다닌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 양 국장. 조금만 기다리시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서 윤전기를 구입하려고 알아보고 있는 중이오.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실제로 민족일보는 창간 전부터 인쇄시설 도입에 대한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즉 이언진(李彦鎭) 당시 동아일보 공무국장과 자모기 제작과 활자제조의 권위자인 김청남(金靑男)으로부터 자문을 받아 미국 독일 일제 윤전기를 발주하는 문제와 당시 운영난에 봉착한 평화신문사 시설을 인수하는 방안, 이기붕이 운영하다 부정축재로 몰려 몰수된 자유신문사 시설을 비밀리에 인수하는 방안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 외국에서 인쇄시설을 도입할 경우 1기 공사에 5천6백만환, 2기 개수시설비 3천만환의 예산을 세웠으며 개수 후 남은 시설을 부산이나 대구에 분공장 시설용으로 활용할 계획도 세웠다. <1961년도 민중일보(민족일보의 전 등록 제호)사업계획서>


  이런 민족일보의 운영은 전적으로 조용수, 안신규 등 일부 인사만 알았다. 그러나 역시 돈이 문제였다. 조용수는 일가친척은 물론 동창을 찾아다니며 돈을 구했고, 안신규는 일본의 이영근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 혁신계 정치인은 처음약속과 달리 재정적으로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더구나 일본에서 돈을 마련하더라도, 정부의 감시가 심해 함부로 반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면 정부는 계속 ‘민족일보의 운영자금에 조련계 유입설’에 대해 내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 일부에서는 여전히 민족일보의 성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민족일보는 점점 그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3월 25일, 독일 DPA 통신은 동경발로 민족일보의 움직임을 이렇게 알렸다.

  “혁신계에서 발행하는 일간신문 민족일보는 가일층 같은 노선에 있는 야당계와 더불어 한국은 이승만 치하 때보다 더 제한되고 또 반민주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견해를 주장해 점차 여론의 지지를 받아가고 있다”


  이런 해외에서 반응은 민족일보를 만드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3월 22일 양수정 국장 취임을 계기로 문화부장에 유정(柳呈, 전 한국경제신문 문화부장)을 영입하고 대한일보 사회부차장 이재형을 보강했다. 또 공채를 실시해 조직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민족일보의 공채에는 의식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다. 조용수 사장은 면접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한 질문을 하세요. 그 교서를 읽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기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민족일보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채에는 경희대 민통련의장인 이수병을 비롯해, 3월 23일 견습기자로는 손성조(정치부 견습) 강석근(사회부 견습) 이수재(조사부 견습) 홍선표(교정부 견습) 박선엽(교정부 견습)을 임용했다.

  당시 이수병은 이종률의 지도를 받았고 출중한 이론과 행동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도 해보지 못한 채 5·16 쿠데타를 맞았다. 게다가 이수병은 그 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인혁당 사건 주모자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용수는 혁신계 인사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과 친분을 넓혔다. 당시 소설가 박화성 여사는 4월 15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조용수에게 보내기도 했다. 특히 조용수는 문인 구상과 자주 만났다. 그리고 구상의 소개로 시인 고은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고은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 경향신문 93년 8월 15일자>

  장면정부는 민족일보의 일본수출, 즉 일본지사 설치 신청을 계속 거부했다. 사실 거의 도각 공세를 펴는 민족일보에게 장면 정부가 해외 지사 설치를 들어줄리 만무했다.

  조용수는 4월 13일 민족일보의 일본지사 신청서를 국무원 사무처에 제출했지만 정부는 4월 21일 불허 통보를 보내왔다. 민족일보는 아예 25일 동경지사장에 김영희를 임명한다고 사고를 내고 동경지사의 설립을 추진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불허였다. 이 민족일보의 일본지사 설치 불허는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4월 26일 통사당 박권희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거류민단원이 민족일보 구독을 열망하고 있다. 유독 민족일보만 수출을 불허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면은 동경지사의 승인을 끝까지 거부했다. 할 수 없이 민족일보는 당시 일본에서 개최되는 한일예비회담을 취재하기 위하여 양수정 편집국장을 특파원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5월5일 조용수는 ‘해외특파기자 파견 및 재정보증서’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외무부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금번 동경에서 개최중인 한일예비회담을 취재하기 위하여 본사 편집국장 양수정을 파견코저 함에 이에 대한 재정일체를 보증하겠으니 여행에 대한 제반 편의를 잘 보아 주시기 바라나이다” <단기 4294년 5월 5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


  그러나 양수정 국장의 일본 특파원 파견은 허가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일보에 대한 장면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은 계속됐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높아질수록 민족일보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아갔다.

  5월 초,민족일보 편집국으로 한 육군 장교가 양수정 편집국장을 찾아왔다. 자신을 김동복(金東馥) 대령이라고 소개한 이 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호남형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큰 보따리를 들었다.

  “양수정 국장이십니까”

  “그런데요”

  “학생혁명으로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하는데 군은 그대로 입니다. 아니 더 썩어가고 있어요. 저는 군의 부패장성을 추방하기 위해 부패장성의 명단과 그들이 저지른 죄과를 낱낱이 적었습니다. 신문에 연재 해 주십시오”

   김동복 대령이 내놓은 자료는 원고지 1천5백매쯤 되는 방대한 양으로 내용은 ○○ 소장- 이 사람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휘발유 ○○드럼을 횡령, 매각 착복했으며, 어디 일선 지휘관 시절에는 무단 벌채로 ○○만원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 양 국장이 물었다.

  “이런 것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하죠?”

  “틀림없습니다. 내가 책임집니다. 그리고 군 수사기관에 가면 은밀히 작성한 조서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줄까요”

  “안보여주면 보도록 해야죠. 무엇 때문에 4.19 민주혁명을 했습니까”

  “부패장성을 사회에 고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검토한 후에 게재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양수정, ‘옥중기-옥창살을 부여잡고’ 월간 다리 1972년 6월호>

  이 내용은 기사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민족일보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예다. <김동복 대령은 5·16 쿠데타가 나고 반혁명으로 구속됐다. 그는 출감후인 64년 남산약수터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정부는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2. 민족일보의 사업-혁명유족 구호운동


  민족일보에 대한 탄압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국민적 기대도 점점 커갔다. 게다가 민족일보는 진보적 지식인과 학생층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일단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일보는 편집회의 연구주제를 ‘보도 분야에 있어서 보수혁신의 영토할애, 기사 가치에 대한 연구검토’로 정했다. 또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태를 쓴 작품을 공모했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이 연구주제와 사업내용, 그리고 독자를 대상으로 한 원고 공모는 민족일보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조용수는 시간만 나면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과 인생을 모두 바친 독립원로의 비참한 생활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한번은 안신규와 원로 독립운동가 이강 선생을 찾았다.(안신규의 누이는 여성독립운동가 안마리아이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약병 몇 개 뒹구는 방에서 노혁명가는 쓸쓸히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장을 지낸 꼿꼿한 정신은 그대로였다.

  “당신과 같은 젊은 사람들에겐 남북통일이 분명히 있겠지만, 나와 같은 늙은이에겐 통일이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몇 날 더 살면서 통일되는 날을 보는 것이 소원의 전부이지만 민족적인 주체세력이 이렇게도 약한 마당에 통일은 무슨 통일···그래도 요즘 학생들이 기특한 점이 있어. 자주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서 민족의식이 공백상태에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이야. 그러나 학생들의 숭고하고 열정적인 정의가 얼마나 주효할 것인지···”

  이강 선생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태였지만 오히려 조용수를 위로했다.

  조용수는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스스로 물었다.

  “이분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활까지도. 이분의 노력으로 조국은 찾았지만 조국은 이분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

  조용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61년 민족일보 올해의 사업으로 ‘혁명유족 구호운동’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 61년 4월 5일자>

  또 조용수는 시간만 나면 동생 용준을 불렀다. 동생 용준은 민족일보 기획부장이라는 직책을 가졌다. 사실 동생은 신문사 경험이 없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여러가지 일을 시키기에는 동생만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 저녁에 회사차를 가지고 정릉 장건상 선생 댁에 좀 다녀와라. 요즘 건강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조용준은 형님이 무엇을 시키는 것인지 뻔히 알았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사용하는 지프가 단 두 대로 취재차량으로 이용하기도 바빴다.

  “형님, 신문 만들기도 벅차 돈 빌리러 다니기도 힘든데,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합니까”

  조용준은 자신이 쌀가마를 싣고, 재야 독립운동 원로를 찾아  다닌다는 일이 신문사에 근무하는 자신으로서 영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회사 내에서 취재차량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공식적인 대외사업은 혁명유가족을 돕는 것으로 돼 있었다. 사실 사업이라는 것은 순전히 조용수의 개인적 생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한 회사의 사업에 내부에서 불만도 많았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용준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회사 내에서 껄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님, 회사 내 직원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이 신문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을 도와주는 구호소라고 해요. 당장 우리 형편도 어려운 판에···”

  조용수는 동생의 투정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그런 분위기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조용수는 동생의 그런 투정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정말 내 뜻을 모르겠어. 이런 일이니까 너에게 시키는 거야. 아무 소리 말고 쌀 한가마 전해주고 와. 내가 신문을 만드는 일 말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하다 지금은 어렵게 사는 사람을 돕는 거야. 민족일보의 대외사업이 혁명 유가족자를 돕는 것이라는 것을 너는 모르니”

  벌써 한두번 하는 일이 아니고, 게다가 자금사정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생으로서 형의 심부름이 영 마땅치 않았다.

  “신문 찍을 종이가 없어 이쪽저쪽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것 모를 줄 알고. 또 부산의 아버지 집을 저당잡고 돈을 마련했잖아. 가뜩이나 어려운 회사 살림인데”

  조용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회사살림을 걱정하는 것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신문사의 운영자금은 너무 빠듯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까지 힘들 줄 몰랐다. 어제도 명동 르네상스 음악실 주인에게 사정사정해 4부 이자로 약간의 돈을 마련했던 터였다.

  “너는 아무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회사는 다 알아서 하는 것이니까 네가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조용준은 사장실을 나오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던 오소백 부국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회사의 제임스딘 또 저녁일 가시나”

  오 부국장은 조용준이 무엇을 하러 가는 지 뻔히 알았다. 오 부국장은 이 회사에서 사장 조용수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조용준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조용수의 동생 조용준에게 반항아 상징으로 영화 주인공의 이름인 ‘제임스 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러나 조용수는 자신의 이런 일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원로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웠다. 지금처럼 원호사업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과거 대단히 훌륭한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중에는 많은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지조와 절개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수는 독립운동 선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까와했다. 현재 광복회의 전신격인 애국동지 원호회를 찾아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취재차량을 동원해 독립운동의 원로를 몰래 찾아다니며 도와주었다. 나도 같이 그 일을 했다” <안신규 증언>



3. 조용수의 고민과 선택


  그러나 각계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했다. 창간호를 내고 임원진과 간부는 무교동 함경도 할머니집으로 갔다. 혁신계 인사는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이종률 주필과 이건호 논설위원은 영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술 몇 잔이 돌자 이종률이 먼저 말을 열었다.

  “조 사장, 계속 이런 식이면 더 이상 주간 노릇 할 수없어”

  가장 열성적으로 민족일보의 창간을 주도했던 이종률이었다. 그가 창간호를 내고 얼마 안돼 민족일보를 떠나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창간 전부터 신문의 논설을 조용수가 간섭해 글을 쓰지 않겠다고 몇 번 말해 온 이종률이다. 그러나 그 실제적 이유는 민족일보가 정치 지향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술자리가 싸늘해 졌다. 조용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선생님 아직 화가 안풀리셨군요. 비록 제가 배운 것은 없지만 민족을 위하는 글이라는 생각 때문에 선생님 글에 손을 댄 것입니다. 사실 저는 민족을 위하는 글에 내 글 네 글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종률은 고개를 가로 저였다.

  “내가 이 신문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것은, 이 신문이 민족을 위하는 방법이 나의 평소 생각과 달라서 하는 것이네. 나는 이 신문은 대중적인 민족을 위한 신문이 되길 원했네. 그러나 지금 이 신문은 전체 민족, 아니 최소한 혁신계를 생각하는 신문이 아니라 혁신 정치인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신문이 되려는 거라고 생각하네. 난 지금 날뛰는 일부 혁신정치인은 혁신의 혁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네. 그런 정치인과 가까워선 이 신문이 안되네”

  조용수는 아무 말 없이 술을 계속 마셨다. 그리고 이종률 주필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민족, 좋은 말이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가장 큰 주제이지. 그러나 그것은 반제국, 반봉건, 반매판이라는 민족혁명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보네. 왜냐하면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우리나라는 사유재산을 민주민족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자본주의의 수정, 또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하는 지금 사회주의 운운의 혁신계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야. 그러나 민족일보는 지금 민주사회적 혁신 정치인들의 대변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네”

  조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용수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민족자본을 민족결집체로 모아 방황하는 대중을 구출해야한다는 선생님의 평소 주장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혁명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 중간목표는 분명 통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헐벗고 굶주린 것도, 또 정치체계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분단 상황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선생님의 민족혁명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족일보는 분단 상황을 극복하자는 것을 사시로 내세운 것입니다. 선생님의 평소 주장에 통일이라는 목표를 삽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술자리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윤길중 의원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 주필, 학자적 관점과 실제 정치의 움직임은 차이가 많이 있어요. 정치는 대중들에게 어떤 실제적 이상을 심어주고 그 이상을 향해 통합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더할 수 없는 큰 이상이지요. 또 실제가 그렇구요. 다른 문제는 정말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요”

  이종률은 윤길중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아무튼 계속 이런 식이면 난 민족일보에서 손 뗄 것이네”

  조용수는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조금 더 지켜보세요. 창간하자마자 주필이 바뀐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도 좋지 안습니다”

  이종률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는 계속됐지만 창간자축연이라기 보다는 무슨 정치 토론장이 되어버린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종률은 나중 법정에서 자신은 하루만 민족일보에서 근무하고 그만두었다고 증언했는데, 박진목은 상당기간 민족일보에서 계속 일한 것으로 증언했다>


  여전히 정국은 국가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의 2대 악법의 제정 강행과 결사반대 공방이 계속됐다. 김달호 사대당 당수의 강제 구인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2대 악법 반대투쟁위 가두방송투쟁반원이던 이영일(서울대 정치학과) 허남경(서울대 정치학과) 등 학생이 계속 연행됐다.

  그러나 2대 악법 반대 시위는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확산되는 기미를 보이며 끊이질 않고 계속됐다.

  3월 17일. 민족일보 사회면에는 ‘유흥비로 흘러 들어간 부도수표 제재금’이라는 기사가 머리기사로 실렸다. 기사 내용은 부도수표 방지를 위해 벌금조로 거두어들인 수천만환의 돈을 시중은행장 집회비용이나 유흥비로 써버렸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것은 민족일보 차태용 기자가 은행관계자의 증언과 확인을 통해 보도한 것이다.

  이 기사가 나가자, 지방 및 시중은행은 그야말로 벌집 쑤셔놓은 꼴이 됐다. 그러나 산업은행 서병수 총재를 비롯한 은행장 7명은 조용수 사장과 차태용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사실 신문사 발행인으로서 이런 것은 별것 아니었지만, 장면 정권의 태도로 보아 만만하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3월 27일, 이 사건이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에게 배정이 됐다는 통보가 왔다.

  게다가 3월 31일, 부산진역에서 취재를 하던 민족일보 경남지사 강 기자가 “빨갱이 신문사 기자”라며 공무원으로부터 욕설과 강제 추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용수는 착찹했다. 마침 일본에 있는 아내로부터 편지가 와서 더욱 울적했다. 편지 내용은 아기를 사산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온지 몇 달 지났지만 일본에 있는 아내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결혼한 지 몇 달 안돼 서둘러 한국에 온 후,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용수는 아기가 사산됐다는 소식에 커다란 죄책감이 자신을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조용수는 복잡한 세상을 잠시 잊고 싶었다. 그럴 때 회사 내에서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양수정 국장이었다.

  조용수는 그날 양수정 국장과 무교동 할마니집에 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같이 술을 들이켰다.

  양수정 국장은 요즘, 조 사장이 회사 내외문제로 고민이 많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양 국장도 능숙하게 상대의 마음을 위로할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잠자코 술을 마셨다. 한잠 침묵 속에 술을 마시던 조용수는 안주머니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내 양 국장에게 건냈다.

  “일본에 있는 아내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어떻하면 좋겠습니까”

  편지를 건네주는 조용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좀처럼 일본에 있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조 사장이 갑자기 지극히 개인적인 말을 하는 것에 양 국장은 자못 놀랐다.

  양 국장은 무표정하게 편지를 받아들었다. 일본어로 가지런히 쓴 편지에는 일본에 있는 아내가 첫딸을 사산했다는 내용을 너무나 슬프게 적었다. 편지를 다 읽은 양 국장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편지를 조용수에게 돌려주며 술을 한잔 부어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일본으로 가서 위안을 해주고 오든지, 그렇지 못하면 서울로 불러내 살림을 차리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

  양 국장은 탁 무언가를 내뱉듯이 말하고 또 한번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조용수는 가만히 술잔을 내려봤다.

  그는 가만히 며칠 전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 교수로 있는 사촌형의 말을 생각했다. 조용수의 사촌형 조용삼은 여려서부터 똑똑한 조용수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 사촌형을 조용수도 존경했다. 그 형이 얼마 전 잠깐 귀국해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한국의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아직 네 나이도 젊으니 미국에 와서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해라. 지금 잠시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 것도 너에겐 좋은 일이다”

  조용수는 사촌형의 말대로 일본에 있는 아내와 미국으로 건너가 조금 시간을 가질까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낙심해 있는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도 생각해 보았다. 사실 서울의 하숙집을 전전하면서(조용수는 안신규 감사의 주소에 동거인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신문을 창간하고 두어 달 정신없이 신문을 만들고, 또 정치의 현장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뛰어다녔는가. 이젠 지쳤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4월 들어 조용수는 결심했다. 그리고 은밀히 미국유학을 준비했다. 신문사는 최근우 선생에게 맡기기로 했다.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치안국 외사과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4월이 들어서면서 통일론의 열기는 점점 달아오르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조용수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