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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3장 새로운 꿈을 품고

 

제 3 장

새로운 꿈을 품고





1. 꿈틀대는 혁신세력


  1960년 3월. 일본 도교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도치키현(板木縣) 민단 사무실. 한적한 지방 민단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조용수는 성난 표정으로 신문을 집어던졌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 그 이승만의 노욕은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을 거야. 이것 보라고, 이기붕을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이런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나. 그걸 막을 인물도 없고. 조봉암 선생을 죽였는데도 한국에서는 잠잠했잖아. 이젠 한국에서 이승만과 대적할 더 이상의 지도자도 없어”

  같이 민단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윤수길도 거들었다.

  “조형, 그래 내가 뭐랬나. 이젠 한국에 돌아갈 생각 말고 여기서 터나 잡을 생각을 해”

  “그래,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아···가봐야 푹푹 썩은 세상”

  당시 조용수는 민단 내에서 조봉암 구명운동을 했다고 민단본부 조직부 차장에서 도치키현 민단 사무국장 겸 부단장으로 일종의 좌천된 상태였다. 윤수길은 조용수와 동갑나기로 조용수와 도치키현에 같이 따라 온 사람이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한국의 실정을 한탄하며 괴로워했다.

  “조형을 따르는 처녀도 많고, 또 교포 중에는 자네를 사위 삼으려는 사람도 많잖아. 이럴 때 장가나 가지 그래”

  조용수 자신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한국에 가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리라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자유당의 암울한 정치소식과 지리멸멸한 개혁의 가능성이었다.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면서 일본에서 22만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보냈고, 조봉암을 처형했을 때 격렬하게 그 부당한 사실에 항의한 그였다. 따라서 이승만이 뻔히 있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지금은 민단 내에서 한국 정부방침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좌천까지 됐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은 말 그대로 절망의 시기였다.

  조용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자신을 학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 자신의 변화계기를 만들어야해. 결혼을 하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진동철(陳東徹)선배가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며칠후 조용수는 윤수길에게 말을 했다.

  “윤형, 나 결혼하기로 했소”

  자신의 결혼사실을 알리면서 조용수의 얼굴은 침울했다.

  윤수길은 조금 의외다 싶었지만 요즘 절망감에 싸여있는 조용수에겐 좋은 전환점이 될 거라 생각했다.

  “잘 생각했소. 그래 신부는 누구요”

  “진선배가 중매했소. 이 동네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사람의 딸이오.”

  조용수의 장인은 성이 강씨로 역시 교포였다. 일반에게 알려진 만큼의 거부가 아니고 도치키현에서 파친코를 통해 돈을 모은 중견 재력가로 통했다. 일단 조용수가 결혼을 결심하자 일은 빨리 진행됐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이 달라졌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에서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용수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드디어 한국에도 희망이 온 것이다. 분명 한국에 미래는 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 것이다.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미 결혼 날짜까지 잡고 주변 친구까지 초청한 상태에서 결혼식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사카가시(市) 가톨릭성당에서 프랑스 신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피로연은 시내 섬유회관에서 했는데 결혼식 축하 피로연이라기보다 급변하는 한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토론장 같았다.

  그는 신혼여행을 가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 혼자 한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제 막 결혼을 한 부인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조용수는 장인과 아내의 만류를 뿌리쳤다.

  “지금 가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수선하지만 인재를 필요로 하는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나 안정이 된 상황에서 제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조용수의 판단은 일면 정확했다. 혁명 후 한국상황은 새로운 인물과 질서를 요구했다. 특히 진보당 조봉암의 사형으로 침체된 혁신세력 내에는 새로운 활기가 감돌았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죽음은 혁신 세력에게 큰 충격이긴 했지만 통일과 혁신을 꿈꾸는 많은 사람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다. 이들 세력은 학생혁명으로 맞은 새로운 질서에서 다시금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한곳으로 집결하지 못했다. 당시 혁신세력은 서상일의 민주혁신당, 정화암의 민주사회당, 장건상의 혁신동지 총연맹, 그리고 진보당 잔류파 등 복잡하게 나뉘어 있었다.

  특히 과거 진보당 지방조직이 남아 있는 곳이 많았다. 김달호, 윤길중, 김기철 등 구 진보계 사람은 조봉암의 뒤를 이을 새로운 인물로 김달호(金達鎬) 전 진보당 부위원장을 밀었다.

  이 진보당계는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 진정한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또 평화통일이 진정한 혁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은 현실적인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김창숙, 최근우, 정화암 등 혁신계 원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혁신의 뿌리는 독립운동이며, 자신은 독립운동을 통하여 혁신운동을 몸소 실천해 왔고, 진보당 같은 정당은 혁신운동중 하나의 방법일 뿐 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정화암은 민주사회당을 창당했지만 힘을 키우지 못했다. 민사당도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가졌지만 정화암이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운동을 해서인지 아나키스트계만 모였다. 이들 원로는 친일적 성향의 인물과 제휴한다는 것을 ‘더러운 변절’로 생각했다.

  구 진보당계는 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장택상과 손을 잡았다. 독립운동일선에 있던 원로에게 장택상은 성향이 다른 인물로 평가됐다. 이에 전진한, 이훈구가 반발, 59년 11월 따로 민족주의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서상일, 정화암(민주사회당)은 장택상과 전 진보당 부위원장 출신의 박기출과 이면협상을 추진했으나 결국, 정화암, 서상일의 원로급이 탈퇴하고 말았다.

  결국 전 진보당 부위원장 출신인 박기출은 장택상과 손을 잡고 ‘반독재 민주수호연맹’을 결성해 대통령 선거에 임하게 됐다.

  60년이 되자 혁신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선거를 앞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60년 1월 일명 아서원 그룹이라 부르는 혁신동지협의회가 구성됐다(아서원 그룹이라고 부른 이유는 서울 을지로 중국집 아서원에서 결성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과거 민혁당 계열의 김철(金哲) 안성용(安晸鏞) 민족민사당 계열의 김무진(金武眞) 통사당 김선적(金善積) 구 진보당 김병휘(金炳輝) 등이 참여했다.

  한편 이들과 따로 진보당 장홍염(張洪琰) 조규택(曺圭澤) 독립노동당 이창근(李昌根) 과거 근민당과 진보당 활동을 한 이광진(李光鎭) 독로계 권오순(權五淳) 등도 혁신단합을 추진했다. 이들은 조계사 그룹으로 불렀다.

  이미 정부통령 선거가 바로 눈앞에 닥쳤다. 그러나 혁신세력은 장택상, 박기출의 입후보 등록서류 피습사건과 전진한, 김달호의 출마포기로 선거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였다.

  부정으로 점철된 3·15 정부통령선거는 결국 4·19 학생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혁신계에게도 엄청난 활력을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질서에 맞는 새로운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60년 4월 27일 서울 을지로 아서원에 젊은 혁신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미 1월에 구성됐던 혁신동지협의회의 아서원 그룹과 조계사 그룹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이 모임의 목적은 혁신세력의 단합이었다. 두 그룹은 혁신세력을 총망라한 혁신연맹이라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10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5월 7일 조계사내에서 혁신연맹 결성대회를 가지기로 합의까지 했다. 그리고 김병로, 서상일, 전진한, 장건상, 신 숙, 이 인, 유 림(柳 林), 정화암, 조경한 등 과거 혁신계, 독립운동가 원로도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결성도 하기 전 조직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 대회를 결성대회로 하느냐, 결성대회 준비대회로 하느냐가 중요 문제였다. 얼핏 보기에 이 문제는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중요한 문제였다. 준비대회로 하자고 주장한 측은 주로 과거 진보당계였다. 이들은 과거 지방조직을 정비해 지방대표로 구성되는 전국대회를 열면 혁신연맹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보당계는 이미 이승만 정권 때 불법화돼 해산된 진보당의 정당등록취소를 시정해 달라는 성명를 냈다.

  그리고 김달호(金達鎬) 박기출(朴己出) 윤길중(尹吉重) 등 진보당계 인사는 새로운 정당을 준비했다. 조규택은 처음에는 구진보계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혁신연맹 10인 위원회에 참가했다. 구 진보계는 김기철을 전권위원으로 혁신연맹 10인 준비위원회에 파견됐다. 그러나 이미 조규택이 10인 위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규택이 계속 전권위원으로 협상에 임했다.

  대회당일 대회개최시각을 늦추면서까지 협상을 계속했지만 타협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는 동안 계엄당국이 집회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회 해산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 조계사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 조계사 대회가 무산되자, 그날 저녁 윤길중, 이동화, 유승목, 등 구 진보, 근민, 민혁당계 20인이 모여 정치간담회를 가졌다.

  이 간담회는 격론 끝에 “개인단위로 된 연맹체 결성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것에만 의존하면 당도 연맹체도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이념, 노선이 일치하는 구진보당, 민혁당, 근민당이 중심이 돼 혁신정당을 결성하되 한편으로는 연맹도 모색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신당창당을 위한 유승목, 이동화 등은 가칭 사회대중당 발기인으로 선정했다. 이것으로 혁신통합의 가닥이 잡혀하는 듯이 보였다.

  이 사회대중당에 참여한 사람은 민혁당계 서상일, 이동화, 유한종, 근민당계의 최근우, 김성숙, 유병묵, 윤우현, 진보당계의 김달호, 박기출, 윤길중, 민족민사계의 이훈구(뒤에 정화암이 가담)등 혁신세력의 원로와 신진이 두루 참석했다.

  즉 김구의 한독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여운영의 근로인민당, 조소앙의 사회당 등 혁신의 기치를 내건 인사가 일단 한 울타리 속에 모인 것이다.

  이 사회대중당 발기에 충격을 받은 혁신연맹 준비위원은 이튿날인 5월 8일 인화루에 모여 다시 연맹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들 중 조규택, 이창근, 이광진 등은 김창숙(유도회) 장건상(근민당) 유 림(독로당) 조경한(한독당) 정화암(민사당) 김학규(한독당) 등 원로를 추대해 5월 12일 ‘혁신동지협의회’ 발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김창숙, 조경한, 김학규, 정화암 등은 곧 탈퇴하고 혁신동지협의회는 5월 27일 혁신동지총연맹을 결성했다.

  이렇게 되자 사회대중당과 혁신동지협의회에서 제외된 아서원 그룹은 전진한 민혁당의 김성수와 제휴해 5월 20일 한국사회당을 발기했다.

  당초 통합을 목표로 했던 혁신세력의 대동단결이 오히려 혁신세력은 사대당, 한사당, 혁연 이라는 3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학생혁명 후 첫 총선을 앞두고 혁신세력은 또다시 4분5열하고 만 것이다.

  한 정당으로 뭉치기로 했던 사회대중당도 5월 14일 창당준비위원회를 열고, 6월 10일 창당준비위원회 계획을 잡는 등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갈등은 계속됐다.

  5월 27일. 서울 일원에 내려진 비상계엄이 해제됐다. 본격적인 혁신의 활동무대가 마련됐다. 정치의 계절이 온 것이다.



2. 정치도전의 좌절


  60년 6월 15일. 학생혁명의 기운이 채 가라앉지 않은 듯 뜨거운 초여름 열기를 뚫고 한 젊은이가 서울에 도착했다. 서른한 살 조용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9월 25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 간지 꼭 10년만이다. 그동안 가끔 한국에 오긴 했지만 이번에는 과거와 다른 감회를 가졌다. 어떻게 보면 세상물정 모르던 스물두 살에 한국을 떠났지만 지금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무겁게 꿈틀거리는 힘과 야심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느낌과 달리 자신의 눈에 비친 서울과 부산의 모습은 10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허름한 집과 열악한 시설. 그리고 예나 다름없는 지친 표정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것은 그들의 눈이 새로운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차 부산에 있는 삼촌 조경규(趙瓊奎)에게 달려갔다. 삼촌 조경규는 4선 중진으로 자유당 원내총무까지 역임한 정치중진이었다. 조용수는 삼촌에게 따지듯 요구했다.

  “삼촌 이젠 자유당으로는 안돼요. 모르세요. 학생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삼촌도 국회의원을 네 번이나 했으면 됐잖아요. 선거구를 저에게 양도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편지로 선거구 양도를 당당하게 요구한 조카 조용수였다.

  “넌 아직 어려. 네가 정치를 쉽게 아는 모양인데 국내에서 살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그래. 내 밑에서 정치를 좀 배워라”

  “아니 삼촌, 삼촌의 시대는 갔어요. 이번에도 자유당 간판을 들고 선거에 나선단 말예요? 분위기를 너무 모르시는 말씀예요”

  조용수는 이미 자유당은 몰락했고 삼촌의 조직만 그대로 인수하면 짧은 선거준비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삼촌 조경규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혁명으로 무너져가는  자유당이지만 자신이 4선씩이나 했고, 또 원내총무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이대로 불명예스럽게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한번만 출마할 것이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지역구민들에게 도리도 아니고, 또 내 자신의 명예도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나를 도우며, 국내 분위기를 익히면서 다음을 준비해라. 다음에는 내가 선거구를 너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하마”

  그러나 조용수는 이번 총선을 포기하기 여려웠다. 정계 진출에 이번이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사회대중당은 창당준비위원회를 준비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갈등이 많았다. 원래 창당준비위원회를 6월 10일쯤 열려고 했지만 서상일과 김달호 사이 주도권 문제가 등장했다. 서상일은 일제시대 비밀결사조직을 이끌고, 3.1운동에 참여했으며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투옥되는 등 독립운동 1세대였다.

  이에 김달호도 만만치 않았다. 김달호는 일제시대 판사를 지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판사를 그만뒀으며 변호사도 허가가 나지 않아 만주에서 광산을 했다. 그는 해방 후 검사를 했고 진보당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 주도권 싸움은 당 의결기관이 총무위원회냐 주비위원회냐는 것이었다. 서상일계는 당 발기 위원회로 구성된 총무위원회가 최고 의결기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김달호계는 총무위원회는 당무위원회나 조직위원회로 창당을 위한 준비기구에 불과하니 당 의결기관은 각부서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주비위원회에서 하자고 주장했다.

  밖에서 볼 때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당시 총무위원은 김기철을 포함하여 12명으로 이중 김달호를 지지하는 같은 진보당계는 윤길중 김기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서상일을 지지하는 인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비위원회에는 김달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김달호는 주비위원회를, 서상일은 총무위원회를 당 의결기관으로 하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며칠간 싸움이 계속되다가 서상일계가 김달호계를 제명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다가는 모처럼의 혁신단합을, 그것도 일부의 단합마저 와해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 때문에 윤길중, 김기철의 조정으로 제명은 취소되고 6월 17일 3.1 당에서 준비대회가 겨우 열렸다.

  조용수는 사대당 창당 준비대회에 참석했다. 이런 창당대회는 과거와 사뭇 달랐다. 과거 삼촌을 따라 다니며 보던 형식적의 자유당의 정치현장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날 창당 준비대회에서 전형위원들이 서상일을 당대표총무로 선출하자, 김달호계가 반발하면서 대회장은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대의원석에서 김달호를 고문으로 모시라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용수는 이런 모습이 보기 싫지 않았다.

  “원래 정치는 조금 소란스러운 것 아닌가.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국민에게 나쁜 모습을 보여줄 우려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텐데. 게다가 혁신세력도 단일화하지 못하고 싸우는 선거인데···”

  싸움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당내에서도 선거를 통해 자기 기반을 다지고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골 깊은 견제의식을 드러냈다. 따라서 다음은 공천싸움으로 이어졌다. 자파를 많이 공천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조용수는 삼촌의 선거구는 양도받지 못하고 자신의 문중인 함안 조씨가 많이 사는 경북청송에 출마하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조용수는 윤길중을 찾아갔다. 이미 박진목, 윤길중은 일본에 있는 이영근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4월 학생의 피로 얻은 혁명을 마무리하는 것은 정치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변혁기에 젊고 패기에 찬 인물이 정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송은 저희 문중 사람도 많기 때문에 충분히 자신이 있습니다”

  윤길중은 당시 지방 출마자 정도는 공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미 윤길중은 조용수가 어떤 청년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았다. 처음 조용수를 본 윤길중은 패기 있고 분명한 청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또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경규가 삼촌이고, 반민특위 위원을 지낸 하만복씨가 외삼촌이라는 가문도 고려했다. 비록 국내의 기반은 별로 없지만 그 정도이면 당선 가능성도 있어 공천했다. <윤길중 증언>

  조용수는 경북 청송에 공천을 얻었다. 1천7백만환 공천자금도 제공했다. 사회당은 1백29명을 전남, 경남·북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천했다. 대구매일신문 주필로 기백 있는 언론인 평가를 받는 최석채, 대구대 정치학과 교수로 사상계 편집위원인 양호민 등 당시로서는 진보적 학자와 소장인사를 대거 공천했다. 그러나 혁신계는 한국사회당이 19명, 한독당 12명, 혁신동지연맹 13명 등 분열된 채 선거에 임했다.

  혁신계는 내부 분열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사대당 서상일 대표는 북한과 경제 문화 인사교류를 주장했고, 또 다른 혁신계는 중공의 유엔가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나섰다. 이에 이태희 검찰총장은 혁신세력의 용공적(容共的)발언을 내사하겠다고 나섰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됐다.

  청송에는 무려 여덟 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조용수는 오랜 일본생활로 국내 기반은 별로 없기 때문에 힘겨운 싸움은 미리부터 예상됐다. 조용수는 청송 시골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 선거 유인물을 만들고 본격 선거전에 뛰어 들었다. 기호 2번. 선거 사무장으로 경남일보 사장을 지낸 조치기(趙致基)씨가 나섰다. 조치기씨는 일제시대 신간회 간부를 역임했던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조용수는 먼저 처녀지나 다름없는 청송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인사말을 돌렸다.

  “무더운 여름 농번기를 당하여 청송에 계시는 여러 어른과 젊은 동지들은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게 된 불초 조용수는 여러분의 만복을 빌며 삼가 인사말씀을 올립니다···앞으로 여당이 될 민주당 및 무소속 간판으로 여당과 결탁하여 1인 독재 대신 다수 독재를 마음대로 하려는 보수 세력과 대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저 사회대중당의 절대한 신탁을 받고 입후보하게 된 것이며, 소생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자나 깨나 자기의 사욕과 출세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성정치인에게 혁명의 뒷처리를 맡기지 못하겠다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이 구성되는 새 국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제가 처리돼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1. 제 2공화국의 민주주의제도를 완전히 확립하기 위하여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모든 법률을 개정 혹은 폐기할 것.

2. 3.15 부정선거를 감행한 주모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

3. 이승만이 도둑질한 국민재산을 속히 회수하여 국고에 편입할 것.

4. 이승만 정권과 공모하여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철저히 적발, 몰수하여 전 국민의 8할이나 되는 농민 노동자의 생활을 향상 시키는데 필요한 기금으로 한다.

5. 거창 사건을 비롯한 각지에서 죄 없는 양민을 대상으로 학살한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여 피해 가족의 생활을 국가가 보상한다.

6. 김구 여운영 조봉암 선생의 경우와 같은 정치적 살해사건의 흑막을 캐서 그 주모자를 엄중히 처단한다

  …유권자 여러분.

  낡은 세력을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정치를 새사람에게 맡기자는 것은 전 국민의 요망 바로 그것입니다. 청송군의 여러 어른과 젊은 동지들은 불초 소생의 이 뜻을 깊이 이해하셔서 따뜻한 지원이 있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기호 2번  조용수  근배

   새 나라 새 일꾼은 젊은이를 보내자

  <조용수, ‘인사의 말씀’, 선거 유인물>

  그는 또 앞으로 정당정치는 보수와 혁신 이념을 바탕으로 야당구조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나라, 이 백성과 동혈동족이 조상이 넘겨주신 땅덩어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인간의 권위와 긍지의 영역권 외에서 값없이 허덕임은 오로지 해방 후 보수정객들만의 절름발이 정당정치를 하였기 때문이고 반공이라는 구실 하에 혁신 정객을 탄압하고 있는 데 있는 것이며… 이제 새로 소생하려는 자유대한의 민주터전에는 고하, 설산, 인촌, 유석 선생 등의 전통을 주체로 하는 보수정당과 몽양, 죽산 선생의 웅지를 주체로 하는 혁신정당을 상호 육성하여 이념적 대결의 정당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노후하고 무능하고 석두 같은 민주당 후보들은 정치사회의 유기분자들이다”

  남아있는 썩은 뿌리 송두리채 뽑아내자. 일하자 싸우자 이기자!!!

  <조용수 선거유인물은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사말씀’이라는 갱지의 인쇄물이고 또 하나는 ‘유권자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모조지의 2색 인쇄물이다. 이 두 선거유인물에 그의 정치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용수 선거 공약은 청송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젊고 똑똑하고 게다가 재산이 많은 재일교포라는 인식이 유권자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또 각 면단위로 선거운동원을 임명해 치밀한 득표 작전을 폈다(조용수가 당시 기록한 선거운동원 명부를 보면 유권자의 성향과 활동 여비 등이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도 지원인사들이 몰려왔다. 1961년 7월 13일 홍형의(洪亨義)라는 인물이 조용수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용수 동지 귀하

  선거에 노고가 많겠습니다. 금번 본교학생 수명이 사대당을 위하여 적극적 활동을 하고 있사오니, 이분들과 협력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부탁합니다. 시간관계로 이만하고 내 22일 청송방면으로 1차 출발할 것입니다.


  청송 진보시장에서 신용순 후보가 연설을 했다. 찬조연사는 박진목이었다. 박진목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고, 남로당에도 가담했으며, 6·25 때는 종전운동을 벌이며 남북을 오갔던 인물이다. 조용수도 이미 일본에 있는 이영근을 통해서 박진목이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들었다. 조용수는 신용순이 유세를 했던 그 자리에서 자신도 유세를 했다. 그리고 우연히 다방에서 신용순과 박진목을 만났다.

  “박진목입니다. 연설 아주 훌륭했습니다. 특히 우리 역사의 관점에서 통일을 이야기한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인사하십시오. 여기서 출마한 신용순 후보입니다”

  “예 고맙습니다. 박 선생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신 선생은 지금은 비록 경쟁을 하는 상대이지만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기도 합니다”

  박진목은 두 후보에게 불쑥 이런 제안을 던졌다.

  “이번 선거는 학생의 피로 얻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같은 혁신의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끼리 한 선거구에서 싸운다는 것은 보수진영만 유리하게 하는 것 아니겠소. 두 사람 모두 훌륭하지만 둘 중 한분이 사퇴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다 이롭고, 또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데 어떻소. 신용순 형,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 조용수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떻소”

  자신의 찬조연설을 하러 온 박진목의 이런 갑작스런 제의에 신용순은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평소 박진목을 잘 알고 있는 신용순은 그저 웃기만 했다.

  “옳은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선거가 코앞이고, 나도 이번 선거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승산도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고요”

  조용수는 혁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출마하게 된 당위성을 설명했다.

  “선배님, 이렇게 같은 정치이념을 가진 사람끼리 한 선거구에서 대결해야 하는 사태가 온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혁신계가 너무 성급하고, 준비도 없이 선거에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혁신계도 통합되고 연구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일은 이제 저희 젊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이번 선거가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위치가 더 유리하니 서로 양보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웃음이 띈 좋은 분위기였다.

  “아무튼 선거 양상을 좀 더 지켜 보기로 합시다”

  결국 두 사람은 후보단일화를 결정짓지 못한 채 헤어졌다.

<박진목, ‘내조국 내산하’ 창진사, 1976>


  그러나 선거전은 모든 것이 불리하게 전개됐다. 민심은 자유당을 무너뜨린 민주당에 대한 기대로 모아졌다. 또 혁신을 내세우는 세력은 분열했다. 그 분열의 정도는 민주당의 신구파 대립에 머금갈 정도였다. 사회당내에서는 공천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상대계파를 낙선시키기 위해 다른 당 후보를 지원하는 작태까지 나타났다. 모든 정치인은 자신의 눈앞 이익을 찾는 데 혈안이 됐다.

  게다가 혁신세력은 민주당에 비해 자금도 열악했다. 아무런 기반도, 또 실제적 힘도 별로 없던 그들은 ‘내가 과거에 나라를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 나를 뽑아 달라’는 식으로 선거에 임했다. 혁신세력은 감상적으로 선거를 치른 것이다.

  우려했던 결과는 엄연한 현실로 나타났다. 낙선이었다. 조용수는 여덟 명의 후보 중 4천2백77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당선자가 얻은 표는 5천9백13표였다. 사실 지지 기반도 없는 곳에 뛰어든 그에게 상당한 지지였던 것이다.

  혁신계는 이 선거에서 민의원은 사대당 윤길중(강원 원성), 박권희(밀양 갑) 박환생(남원 갑) 세 명만 당선됐다. 한사당에서는 김성수(남제주) 한 사람, 참의원에는 이훈구(충남 을) 최달희(경북) 정상구(경남) 세 명만 당선됐다.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일곱 명만 당선된 것이다. 당초 언론에서도 혁신계가 최소 40여명은 당선될 것으로 예측했지만 결과는 혁신계의 참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