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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1장 한 젊은이의 죽음

 








趙  鏞  壽  評 傳















元  熙  福

차  례



1장  한 젊은이의 죽음                              7

1. 1961년 12월 21일 오후 4시 6분                    7

2. 뜨거운 세계여론, 냉담한 한국여론                 15

3. 41년 만에 재연된 민족일보 국회논란              24


2장  격정의 역사속에서                            40

1. 출생과 성장                                      40

2. 일본시절                                         43


3장  새로운 꿈을 품고                             56

1. 꿈틀대는 혁신세력                                56

2. 정치도전의 좌절                                  63


4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73

1.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73

2. 신문 창간 막후                                   85

3. 장면정권의 음모                                  95

4. 정치쟁점 된 민족일보                             99


5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110

1. 민족일보 창간                                   110

2. 첫 도전, 한미경제협정                           117

3. 2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                        124

4. 통일적이고 애족적인 통일세력                   140

5. 2대 악법반대 횟불시위                          148

6. 장면의 음모-혁신을 원초적으로 막아라           156

7. 통일의 열망으로                                 164


6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176

1. 갈등과 발전                                     176

2. 민족일보의 사업-혁명유족 구호운동              190

3. 조용수의 고민과 선택                           194


7장  총에 꺾인 펜                                 200

1. 5.16 1호 구속                                   200

2. 한여름의 혁명재판                               213

3. 차가운 외면, 그리고 침묵                        229

4. 불붙은 구명운동                                 237


제8장  조용수 죽음 이후                            246

1. 복권된 민족일보 관련자들                       246

2. 사라진 재판관계 기록                           253

3. 국내 첫 공식 추도식                             256


9장  부  록                                       263

ꋮ <자료집 목차>                                    263

ꋮ 학술대회 발표 자료집                             338

ꋮ 조용수 연보                                       388

ꋮ 참고문헌                                          390

ꋮ 인 명 록                                          397


제 1 장

한 젊은이의 죽음




1. 1961년 12월 21일 오후 4시 6분


  1961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 기분이 한창 분위기를 돋우던 목요일의 서울 세종로 거리. 더구나 이번 크리스마스는 연휴라서 예전에 비해 더 들뜬 분위기다. 아침에 눈이 조금 뿌리다 갰지만 여전히 쌀쌀했다.

  중앙청 바로 앞에 위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무실에서는 조금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날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혁명이라는 구실로 다섯 명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려는 날이기 때문이다.

  야근에 지친 듯한 사병 하나가 사무적으로 타자기를 쳤다. 타자기도 추위에 얼은 듯 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냈다.

  “탁탁 탁탁···”

  국가재건 최고회의

  법사제 1304호

  수신 혁명검찰부장

  제목 형 집행 확인

1. 피고인 조용수에 대해 특수범죄 처벌 특별법위반 피고사건에 관하여 혁명검찰부 조직법 제 9조의 2에 의거 다음과 같이 확인함.

  가. 인적사항

    본적 경북 대구시 동인동 409

    주거(소속) 서울 종로 도렴동 10의 2

    직업(계급) 전 민족일보 사장

    성명 조용수

    생년월일 단기 4263년 4월 20일 (당 32세)

  나. 판결 사형

  다. 확인조치 사형

의장의 명에 의거 총무처장 육군준장 박희동


  타이프를 치는 사병은 너무나 사무적이고 순식간에 한 장의 서류를 쳐 내려 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언론필화사건, 즉 처음으로 언론인의 사형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며, 5·16 쿠데타의 희생양이 제단에 오르는 문서였다.

  사람의 사형을 공식확인 하는 타이프가 끝나기도 전, 남산아래 필동에 있는 혁명검찰부에서는 박창암 검찰부장 명의로 된 또 하나의 요식적인 공문이 작성됐다.

  혁검 제 300호

  법무부장관 귀하

  사형집행 구신서


  다음 사람에 대하여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 제 5조의 2및 형사소송법 제 463조에 의거 소송기록을 제출하오니 사형집행의 명령을 하여 주심을 구원합니다.

  피고인 조용수 당 32세

  죄명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 6조 위반

  판결법원 혁명재판소

  선고 단기 4294년 10월 31일

  확인 단기 4294년 12월 21일

  형명 사형

  수용 형무소 서울 형무소.


  같은 날인 21일 오전 12시. 고원증(高元增) 법무부장관은 담당 국장이 직접 써, 정서도 안 된 다음과 같은 한 장의 기안용지에 사인을 했다.

  제목:사형 집행명령의 건

  혁명검찰부 부장으로부터 구신한 다음 사형수에 대한 형사사건의 일건 기록을 정밀히 심사한 바 별지조서와 여(如)하옵기 제 2안과 같이 사형집행을 명령하고자 고재(高裁)를 허청(許請)함.


  다음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위반 곽영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 6조 위반, 최백근, 조용수, 특별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 7조 위반 임화수,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위반 최인규

  단기 4294년 12월 2일(21일을 2일로 잘못기재) 혁검증호 제 298, 299, 300, 301, 302 호로 혁명검찰부 검찰부장이 구신한 상기 사형수는 판결대로 사형집행을 명령함.

단기 4294년 12월 21일  법무부 장관

  고원증 법무부장관은(일제시대 만주고등문관 시험에 합격, 국방부 법제위원장을 지낸 육군 준장출신으로 그 후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정서도 안 된 기안용지에 그것도 21일을 2일로 오자까지 나있는 기안지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모든 절차는 이미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이미 조용수가 수감돼 있는 서울형무소에는 사형집행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성탄절을 눈앞에 두고 있고, 대외적으로도 시끄러우니 올해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겠지…”

  이런 생각은 조용수뿐 아니라 사형이 확정된 다섯 사람 모두가 느끼던 감정이었다.

  조용수는 그 전날인 20일 황상모(黃尙謨) 의무관에게 건강검진을 받았다. 가끔 있던 것이지만 이번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동생 조용준에게 내일 아침 일찍 면회를 오라고 했다.

그 의무관은 다음과 같은 검진서를 서울형무소장에게 제출했다.

  “피고인 조용수 당 32세, 건강, 상기자 신체 각 장기 및 심신상태에 이상 무 하며 건강체임. 상기와 여히 진단함”


  그 다음날인 21일 아침, 동생 조용준이 면회를 왔다. 조용수는 어제 건강검진과 오늘 아침부터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 동생에게 하지 않던 말을 했다.

  “몸이 불편하신 아버님. 눈이 오는 겨울에는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내가 이 모양으로 있으니… 너라도 집을 챙겨야지… 숙모님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동생에게는 항상 엄격했던 형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좀처럼 가족문제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던 조용수였지만 이날은 그런 이야기만 했다.

  점심식사가 막 끝난 오후 1시쯤.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 한 삼십분 정도 잔인한리만치 무거운 침묵을 깨며 교도관의 움임이 부산해졌다.

  “내다보지 말고 앉아, 앉지 못하겠어”

  교도관은 사방(舍房) 안팎에서 고래고래 호통을 치며 뛰어 다녔다. 이미 몇몇 교도관은 사형 집행장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이내 정적이 감돌았다. 몇 차례 그런 분위기가 반복됐다. 3시가 조금 넘었다.

  부산한 교도관의 발걸음이 한 감방 앞에 멈췄다.

  “조용수, 부소장 면회”

  조용수는 고무신을 들고 나오면서 아침부터 계속된 이상한 예감을 다시 기억에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째 이상한데. 설마”

  구치감 담문을 빠져나온 교도관은 조용수의 어깨를 지그시 사형 집행장쪽으로 밀었다.

  “……”

  조용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교도관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조용수는 성큼성큼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가 봐도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사람 같지 않았다. 마지막 사형장 쪽대문을 들어서기 직전 한번 서쪽하늘을 우러러 본 것 이외는.

  먼발치 미결 8사 14감방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양수정 민족일보 편집국장은 속으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철창에 해가 뜨-자 따라 뜬 괴로움/철-창에 달지 건-만 그 괴-로움 지-않-네/

  별 만-이 지켜 보-는 싸늘한-마루잠- 애련한-새우잠-/그리움 찾아 기쁨을 찾아 꿈마차나 불-러 보렴/눈물로 달래 보-는 한많은 서러움/눈-물은 마르건-만 그 서-러움 안마-르-네/나 없-는 담밖에-서 꽃피고- 잎지는- 세월이- 야속해/들어온 구멍 남대문이면 나갈 구멍 바-늘 구멍/

  (후렴) 아-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빌기도 한없어라/나가게 해주옵소서 빛을 보게 해 주-소-서/아-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맹세도 한없어라/다시는 못올 데에요 와선 안될 곳 이-에-요

<이 노래는 민족일보 편집국장으로 조용수와 같이 구속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2년여를 복역했던 양수정이 교도소의 취침나팔에 가락을 맞춰 지은 것이다. 그 후 친구이며 작곡가인 손목인씨가 곡을 붙였고, 최숙자씨가 노래를 불러 레코드까지 만들어졌다>


  그날 12월 21일. 이종원 검사의 지휘아래 다섯 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당시 서울형무소장이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서형제 4492호 ‘사형집행 전말 보고의 건’(61.12.22) 공문에는 이날 사형이 집행된 다섯 사람의 내력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오후 2시 1분 곽영주의 사형집행 착수, 2시 14분 종료. 2시 41분 최인규 사형집행 착수, 2시 52분 종료. 3시 11분 최백근 사형집행 착수, 3시 21분 종료. 3시 37분 임화수 사형집행 착수, 3시 47분 종료.

  조용수는 장상희 검찰관의 입회 하에 맨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그의 머릿속에는 바로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된 과거 독립운동가를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2년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죽산 조봉암 선생을 생각했다.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 죽산 조봉암 구명운동을 벌이던 때도 생각났다. 겨우 2년의 일이지만 너무도 먼 시절의 이야기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 그는 입회신부인 윤형중(尹亨重) 신부(경향신문 초대 부사장, 61년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 75년 민주회복 국민회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다 79년 6월 별세)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세례명은 ‘바오로’.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하다. 정규근(친구이며 민족일보 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 데 썼는데, 갚아주지 못하고 가게 돼 미안하다···”

  이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침침한 사형 집행장으로 조용수가 들어왔다. 4시 6분, 그의 얼굴에 검은 두건이 씌워지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밑으로 내려앉았다.

  4시 24분 사형집행이 종료됐다. 다른 사형수는 보통 십분 남짓 걸린 집행 시간이 조용수만 18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조용수는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고, 마지막까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조용수는 첫 번째 교수에서 숨이 끊어지지 않고 한참만에야 죽었다는 것, 그의 사형집행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길게 걸렸다는 것은 교도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죽지 않아야 했던 사람이라는 한탄과 함께 그해 겨울을 유령처럼 떠돌고 다녔다.

  일제 시대에도 그랬고, 해방된 조국에서도 그랬고,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도 그랬다.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서러운 울음을 들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서울형무소의 흉물스런 그림자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 아니 애써 무관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조용수는 하루 더 차가운 서울 형무소 사형장의 싸늘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워 있어야 했다. 다음날인 12월 22일은 일년 중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지였다.

  이날 사형집행은 가족도 몰랐다. 가족에게는 그 다음날 새벽, 일제히 전보가 띄워졌다. 현저동 서울형무소 앞은 사형집행소식을 듣고 뛰어나온 가족의 통곡소리가 이어졌다. 그 통곡소리는 쌀쌀한 날씨에 꽁꽁 얼어 더욱 서럽게 들렸다.

  사형에서 무기로 확인된 송지영씨 부인도 달려 나왔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어쩔줄 몰랐다.

  “이제 한시름 놓게 됐다”

  교도소 안의 사람들은 조용수의 사형소식에 비통함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조용수의 사형이 집행된 후 민족일보 사건 관련자는 기결감으로 옮겨져 한 감방에 수용됐다. 재회의 기쁨, 외롭지 않다는 기쁨, 동지끼리 한 감방에서 징역살이를 한다는 단란감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부족한데서 오는 애처로움이었다. 누가 지시를 한 것도 아닌데 모두 머리를 숙였다. 형장에서 사라진 조용수에 대한 묵념을 했다.

  양수정 국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유일하게 조용수의 마지막 길을 본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 나가는 날에는 그이의 무덤 앞에서 다시 만납시다”

  양수정의 제의에 모든 사람은 울먹이며 말했다.

  “네 좋습니다”

<양수정, ‘옥중기 -옥창살을 부여잡고’ 월간 다리 1972년 6월호>


  서울형무소로 뛰어 나온 조용수 동생 조용준은 할말을 잊은 채 울먹였다.

  “어제 아침에도 면회를 갔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사형을 집행하다니…”

  조용수의 시신은 서울형무소 소우영(蘇宇永) 의무관이 ‘형사’라는 사체검안을 거친 후 오전 10시경, 가족에게 인계됐다.

무척 추운 날씨였다. 조용수는 때가 잔뜩 낀 손수레에 실려 서울형무소 사형 집행장의 쪽문을 나왔다. 동생 조용준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한스러움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기다리던 영구차에 실렸다. 그러나 조용수는 따뜻한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객사한 사람은 집에 들여놓지 않는다는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그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향해야 했다. 조용수는 허름한 망우리 공동묘지의 한쪽구석 언 땅에 누워야 했다. 그때가 밤 9시 반쯤 됐다.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한사람의 죽음은 이렇게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사형확인, 혁명검찰부의 사형집행 구신, 법무부장관의 법률검토, 서울형무소에 사형집행 명령, 그리고 사형집행.

  적어도 이날 오고간 서류만 보아 모든 것이 12월 21일 하루에 이루어 졌다. 조용수가 망우리 한쪽 구석에 눕던 날, 박정희는 국민에게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발표했다. 1961년 12월의 춥고 매서운 밤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2. 뜨거운 세계여론, 냉담한 한국여론


  조용수의 죽음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짤막하게 그의 교수형 집행 사실만 보도됐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차디찬 겨울날씨에 꽁꽁 얼어붙었다.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의 사형집행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양심은 거세게 박정희 군사정권을 비난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씨와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씨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보도를 접하고 통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4백만 일본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 인도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엄중 항의한다” (61.12.22 일본 총평 간사회)

  “일본사회당은 최백근씨 등의 사형에 대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항의한다” (61.12.22 일본 사회당)

  “조용수의 사형에 대해 일본의 지식인, 저널리스트 2천여명을 대표해 강력히 항의한다” (61.12.21 한국의 언론인구명을 호소하는모임 대표 기도마다이치 城戶又一)

  “이 만행은 용서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악귀적 도전이다” (백엽동인회 성명 61.12.21)

  미국에서 한국 통일운동을 하던 조용중씨는 박정희 장군에게 “이것은 이승만정권이 해 온 비열한 범죄행위로 한국국민은 박정희 군사정권을 쓰러트릴 것”이라는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본국정부의 눈치를 보던 재일거류민단은 일본에서의 이런 움직임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민단의 그런 태도는 많은 재일교포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비난의 목소리는 물론 국내에 일체 보도되지 못했다. 군사정권에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미국언론도 조용수의 사형집행을 비판하는 ‘한국에서의 탄압’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탄압

  …여하를 막론하고 자유인은 한국군사정부에 의한 민족일보사 조용수 발행인의 사형에 대한 미국 내 다수 한국인이 분노하는 것에 공감한다. 같이 사형을 선고받은 두 명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가혹한 언론탄압이 한국정부에 대한 호의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 라는 조용중 한국문제 연구소장의 성명에 동의한다.

  몇주전 박정희 대장이 미국을 방문해 한국이 안정과 질서로의 복귀를 목표로 전진한다는 말을 했을 때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반국가 행위라는 이름으로 언론인을 처형하고 무기징역에 처하는 것은 그들의 죄가 어떠하든 박 장군이 애써 수립하려는 미한 양국관계 개선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국 미국은 강압으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정권에 대해 원조를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조치는 박 장군에게 이후 부정을 피하고 언론의 자유를 복귀시키는 것에 중요한 부담이 될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1961.12. 사설)

  또 미국 맨체스터가디언은 “한국에서조차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공산주의를 조장했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한 것”은 “범죄임에 변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맨체스터가디언 1961.12.22. 사설)

  북한에서도 조용수의 사형집행을 비난했다.

  “12월 23일 평양시내 출판보도일군들은 문화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남조선 언론인에 대한 미제와 박정희 군사파쇼 도당의 야수적 학살만행을 폭로 규탄했다. 집회에서는 조선기자동맹, 시내 신문방송 통신 등 출판보도기관 책임일군과 기자, 편집원들이 다수 초대되었다. 재 평양 외국기자들이 이에 초대되었다”(로동신문 1961.12.24)

  그러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펜은 총보다 강하지 못했다.

  62년 1월13일부터 15일까지 쿠바 아바나에서 국제저널리스트 협회(회장 장모리스에르만) 진행위원회 정기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국의 민족일보 조용수에게 만장일치로 국제 저널리스트상을 추서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제저널리스트 협회는 쿠데타정권을 규탄하면서 조용수가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한 것을 평가하고, 이를 칭송한다며 국제 저널리스트상을 수여 이유를 밝혔다.

  국제저널리스트상

  살아서 받았으면 더 없는 영광이었을 이 상을 조용수는 죽어서 받았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이 상을 직접 받지 못했다. 해외에서 그의 처형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또 그에게 국제저널리스트상이 추서됐지만 여전히 그는 망우리의 차가운 한 모퉁이에 누워있어야 했다. 더구나 쿠데타 정부는 ‘사형자의 분묘 및 장례, 초상 등을 금지하는 법률’이라는 법을 만들어 변변한 장례식도 할 수 없게 했다.

  그의 공식 추도식은 한참 후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열렸다. 62년 4월 30일 오후 6시, 일본 동경에 있는 국철노동회관홀에서 제일교포와 일본인 언론인, 작가, 정치가, 종교인, 문화인 등 6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추도식이 열렸다.

  이 추도식은 이념을 초월해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가 공동으로 마련했다. 추도식은 한국인 김(金) 문화인회의 간사와, 일본 펜클럽 사무국장 마츠오카요오코(松岡洋子)여사의 공동사회로 진행됐다.

  먼저 원심창(元心昌) 초대 재일거류민단장이 격렬한 어조로 개회사를 읽어내려 갔다.

  “…우리는 구명운동과 이 추도식을 통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다 숨진 조용수군을 위로하는 것은 곧, 4월 혁명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한 학생의 영전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이 추도식의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4월 혁명을 혁명으로 완성하려다 좌절했습니다. 4월 혁명의 필수적인 성공을 위하여 깊은 반성과 냉정히 현실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처럼 쿠데타 정권하 민중의 침묵은 계속되지 않을 것 입니다. 통일을 원하는 3천만 민족의 가슴에 지하수처럼 솟아오르는 그것은 필히 폭발하리라 믿습니다. 이승만정권부터 민주당, 악랄한 반민족적 쿠데타정권도 그 민족의 비원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것을 조군의 영령 앞에 서약 합니다…”

  이어서 평론가이며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인 시라이시봉(白石凡)이 비감한 어조로 추도식의 취지를 설명했다.

  “세 사람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 일본인은 과거 통감한 경험이 가슴에서 일어났습니다. 민주주의 완성과정에 있어 우리 일본인은 이웃나라에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었습니다. 전 세계 국민을 공포와 궁핍에서 탈피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생존하는 권리를 확인합니다. 이것은 일본헌법 전문 중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처형당한 사람에게 장례식도 허용하지 않아 남북조선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추도식을 개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추도식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언론의 자유와 생명의 존중,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속 깊은 인간성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집회입니다. 우리는 오늘 조용수씨 영면을 기원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한다는 결의를 다시금 확고히 하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비감한 표정의 참석자 사이로 교포 여성합창단이 부르는 추모가가 흘렀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상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추모가가 흐르자 참석자는 모두 일어나 묵념을 올렸다.

  배종익(裵鐘翊) 법대학생이 학생 대표로 조용수의 약력을 읽은 후, 각 단체의 추도문이 낭독됐다.

  먼저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 전국방송 노동조합협의회, 일본출판 노동조합협의회 등 일본의 3개 언론출판 노조를 대표하여 전국방송노동조합 협의회 나카무라기이치(中村喜一) 의장의 추도문이 낭독됐다.

  “우리 신문, 방송, 출판 노동자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씨 영전에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실보도 수호투쟁에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일본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가와카미죠다로 (河上丈太浪)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우리 일본 사회당은 작년 12월 남조선 박파쇼 정권이 세계의 여론을 무시하고 민족일보사장 조용수씨 사형집행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분노로 항의합니다”

  ‘한국언론인 구명을 호소하는 모임’ 대표로 조용수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동경대 신문연구소장 기도마다이치(城戶又一)씨의 추도사가 낭독됐다. 그는 병중으로 교도(共同)통신 사이토마사미치(薺藤正道)씨가 대신 추도사를 읽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정치의 철칙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민족의 마음속 깊이 영원히 살아서 나타날 겁니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민족의 가슴속에 사장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각 단체와 인사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이국의 땅에 모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주창한 죄로 처형한 매국, 매족적 박정희 파시스트의 추행에 증오를 보냅니다. 우리들은 단결하여 통일의 대과업을 달성하여야 합니다. 이런 폭거는 일제시대에도 없고, 지금 인류가 우주를 정복하는 시대에 역사의 암초와 같은 행동이며, 우리는 필시 밝은 미래가 도래할 것을 믿습니다” (최선(崔鮮)재일문화인회의 대표)

  “태평양전쟁 당시, 우리 일본의 문사는 나약하게 군국주의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강하고 위대한 행동으로 우리 가슴을 울렸습니다” (다카미준(高見順) 작가)

  “우리는 당신에게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면서, 양국민의 새로운 연대를 기대했습니다. 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금일의 사태를 당하면서 더 한층 비참한 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비원을 실현할 결심을 더욱 더 다짐합니다. 조용수의 죽음, 이 비극은 필시 가까운 장래에 역사적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확신 합니다” (니시가와가게부미(西川景文) 일연종본법주직)

  이밖에 백엽동인회 대표 한욱(韓郁) 가나가와(神奈川)현 남북통일 간담회 대표 정수덕(鄭秀德) 작가 김달수(金達壽) 등의 추도사가 이어졌고 북한 기자동맹이 보내온 추도사도 낭독됐다.

  남북이 하나가 돼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조용수가 그토록 원했던 통일. 그것이 이 추도식장에서 만큼은 이루어진 듯했다.

  이어 각계에서 들어 온 헌시, 조전 낭독이 시작됐다.

  “아시아가 낳은 자유의 전사를 영원히 기념하며” (남바라시게루(南原繁)전 동경대총장)

“우리들 일본의 민주적 문학가는 군사 파시스트 박정희에 의한 언  론억압에 희생된 조용수씨 죽음을 마음으로부터 애도함과 동시에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조씨의 업적을 칭송합니다. 우리는 일본, 한국 양국가 언론인의 연대를 재삼 강조하면서 옥중에 있는 안신규(安新奎), 송지영(宋志英) 양씨의 즉시 석방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합니다” (아베도모치(阿部知二) 신일본문학회 회장)

  “조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스가하라 미치즈미(菅原通濟) 평론가)


  각계에서 온 조전낭독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후 사회자 마츠오카 요오코 여사는 조용수 국제 저널리스트상 수상소식을 알렸다. 일본저널리스트 회장 고바야시유우이치(小林雄一)씨가 단상에 나와 국제저널리스트협회에서 온 편지와 상장을 읽었다.

  “국제 저널리스트협회 집행위원회는 평화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용감한 투사로, 그 이상을 성실한 저널리스트 활동으로 인해 생명을 잃은 한국의 저널리스트 민족일보사장 조용수씨에게 1961년도 국제 저널리스트상을 추서하기로 했습니다.

  일본과 한국 저널리스트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추도회 개최를 맞아, 국제저널리스트 협회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애도를 표하며 조용수씨 미망인에게 심심한 조의의 경의를 표합니다. 또 우리단체의 전폭적인 지원의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표창장과 상금 5백달러를 보냅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김영희(金英熙) 민족일보 동경지사장이 단상에 올랐다. 그는 사실 임명만 됐지 실제적으로 민족일보 지사장의 업무를 하지 못했다. 수상할 예정이던 조용수의 부인 강(姜)씨는 남편의 사망 사형충격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대신 상을 수상한 김영희는 조용수 부인의 편지를 읽었다.

  “남편의 추도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제가 참석할 수 없게 된 것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쓰러져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고인을 추모하면서, 모인 조의금은 그이가 죽으면서 그렇게 원했던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보탬이 되도록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제 저널리스트상 수상으로 박수소리 요란했던 추도식 분위기는 미망인의 편지가 낭독되면서,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부 참석자는 흐느꼈다.

  이날 추도회에는 39곳에서 보낸 헌화와 각계에서 보내온 조전 및 편지가 2백여통에 달했다. 추도식에 헌화 및 조전을 보낸 주요인사 및 단체는 다음과 같다.

  <헌화>

  자유인권협회, 일본민주법률가협회,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 일본저널리스트회의, 일본방송협회노동조합, 민주방송노동조합연합, 근대영화협회, 일조협회, 일본무역회, 일본사회당, 조 용수추도회 주선인일동, 조용수구명운동재일한국인위원회, 재일여자학생‘지애(地愛)의 회’, 한국문화교육회, 백엽동인회, 조국평화통일 남북교류 추진 재일문화인회의,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일본협의회, 안보비판의회.

  <조전을 보낸 인사 및 단체>

  요미우리신문 호소가와다다오(細川忠夫), 이와떼(岩手)일보 각 편집국장, 홋카이도신문 지사장, 오오이다 합동신문 히메노(姬野)편집국장, 아키다우자쿠(秋田雨崔) 센다코리아(千田是也) 기시데루고(岸輝子) 기다바야시다니코(北林谷子) 나라모도코리아(奈良本是也) 기노시다한지(木下半治) 다카하시신미치(高橋信一) 야마구치 시즈에(山口) 야마하나히데오(山花秀男) 호아시케이(帆足計) 호츠미시치로(穗積七郞) 오카다소오지(罔田宗司) 자유인권협회, 민주법률가협회, 청년법률가협회, 일본아동문학자협회, 미술가평화회의, 아사히신문노동조합유지(有志), 교육출판노동조합, 일본작문의회, 재일본 한국망명군인동지회, 오사카 백두학원.

  추모회에 참석한 사람이나, 조전 헌화를 한 개인과 단체들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이었으며, 지성의 단체였다. 일본이 한 외국인의 죽음에 대하여 이토록 분노했던 적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어도 그것을 전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3. 41년 만에 재연된 민족일보 국회논란


  잊혀진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죽음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연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기는 1997년은 제16대 대통령선거였다. 군정종식을 외치며 문민시대를 연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은 임기 말을 맞이하면서 정권재창출에 고심했다. 김 대통령은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씨를 감사원장으로 발탁하고 국무총리까지 중용했다. ‘대쪽’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회창씨는 대법관시절 진보적인 의견을 자주 낸 소수 의견으로 유명했고 감사원장 시절에는 청와대를 감사하는 등 성역 없는 감사원장으로 국민적 신망이 높았다. 하지만 총리시절, 대통령과의 권한을 놓고 갈등을 벌이다 사임하는 등 김 대통령과 일정부분 갈등이 있는 상태였다.

  김 대통령은 추락한 지지율을 만회하고 신한국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그해 2월 이회창씨를 전격 영입한 것이다. 김 대통령의 의도대로 정국은 온통 이씨에게 쏠렸고 대권주자로서 그의 개인적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그해 2월 정치권에 입문한 이회창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40년간 판사를 지내며 가장 인상에 남는 판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이씨는 “40여년전 민족일보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대답했다.

  그 후 이회창씨는 개인적으로 민족일보와 조용수에 대해 자신의 회한을 나타냈다.

  “당시 나는 갓 임관해 서울지법 인천지원에서 근무했는데 혁명재판소에서 차출 지시가 내려왔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분위기에서 나이가 어린 순으로 차출됐는데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려 거기에 낀 것이다. 조용수는 용모도 준수하고 검사와의 대답에서도 분명한 매우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사형을 받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4월 증언>

  그 후 이회창씨 대선조직에 관여한 안동일 변호사는 “당시 모 판사는 혁명재판소에 가지 않으려다 육군 대령에게 뺨까지 맞기까지 했다”며 “당시 군인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에 갓 임관한 소장 판사가 그 지시를 거부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어떻든 당시 이씨의 민족일보와 조용수에 대한 판결에 대한 회한 내지 후회는 그대로 보도됐다. <원희복, 뉴스메이커 215호. 97.3.27. 경향신문사>

  이 보도를 통해 이회창씨가 민족일보 판결에 참여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문제는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이씨가 여당 대표를 거쳐 대통령후보로 확정되자 당시 야당은 이 문제를 이씨의 반 언론적, 반 개혁적 인물로 묘사하는 데 활용했다.

  당시 야당 국민회의가 만든 ‘이회창 연구’라는 문건에서 ‘이회창은 수구세력을 업은 반민주인사’라고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들고 있다

  “1961년 8월 민족일보 사건 판결, 5·16후 서울지법 인천지원 판사로 재직 중 혁명재판소 심판부 제2부에 소속되어 민족일보 사건을 담당해 사형 판결을 내림”

  자민련도 `이회창 대해부'라는 문건에서 이씨가 민족일보 사건 재판에 참여한 것을 놓고 “부친의 과거전력을 한번의 판결로 덮어버린, 그래서 혈통의 사상성을 대내외에 검증했는지밝혀야 한다. 그는 한 개인은 물론, 언론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는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원희복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과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누구도 민족일보 앞에 떳떳할 수 없다. 기자협회보 1997.8.16자>

  그해 MBC 방송 대선후보 초청토론에서 당시 박원순 변호사는 이 후보에 대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선고의 근거인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소급입법이며 위헌이라는 사실을 몰랐느냐”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이씨는 “당시에는 헌법재판소 등도 없었으며 내가 위헌 여부에 대해 판단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자신의 40년전 판결 사실에 대해 개인적 자리에서 회한만 표시했을 뿐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1997년 12월 이회창씨가 민족일보사건 판결에 참여한 것을 유족과 관련인사에게 사과하는 작업이 은밀히 추진되기는 했다. 당시 이씨측 비서실장은 국회의원 하순봉씨로 그는 조용수의 외가 하만복씨 가문이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조용수와 친인척 관계였고 당시 신한국당에는 민족일보 정치부기자 출신이던 김종하 의원도 있었다. 사과방법은 97년 12월21일 조용수추도식에 이씨가 참석해 40년전 자신의 판결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이씨 참모들이 조용수 추도식 참석 여부를 논의했으나 선거에서 혁신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당내 보수적 인사의 주장에 밀려 성사되지 못했다>


  이 문제는 5년 후 이회창씨가 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서기 직전인 2002년 한나라당 총재 시절 또다시 논란이 됐다. 1961년 민족일보 창간 직전 국회본회의장에서 논란이 일어난 지 꼭 41년만이다.

  2월15일 국회 본회의 사회·문화 대정부질문에서 자민련 송석찬(宋錫贊)의원이 발언대에 나섰다.

“존경하는 이만섭 국회의장님···법무부장관에게 묻겠습니다.···요즘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께서는 과거 인천지원 판사를 시작으로 1961년 8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언론말살 사건인 민족일보 사건의 담당 판사로서 반민주 악법의 칼날을 휘둘러···(장내소란)···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반국가단체 동조혐의로 사형시키는 등 수많은 인사들을 처벌함으로써 언론 말살과 인권탄압에 앞정서 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언론탄압 운운하며 사회를 혼란시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께서는 언론말살, 인권탄압, 총풍, 세풍, 그리고 안기부자금 횡령혐의에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나야 하는 것이 저는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법무부장관과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묻겠습니다. ··· 사건을 맡았던 법관은 누구이고 민족일보 사건으로 지판을 받았던 사람은 누구이며 이들에게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떠한지 분명히 밝혀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송 의원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한나라당 김정숙(金貞淑)의원이 발언대에 섰다.

  “어제 한화갑(韓和甲) 민주당 최고위원에 이어 오늘은 자민련 송석찬 의원이 또 이 문제를 거론하며 역사상 최대의 언론 말살사건이니 민족일보 사건의 담당 판사로서 조용수 사장을 사형시킨 이회창 총재의 언론탄압의 대표적 사례이니 하며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경악과 우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 당시 혁명재판소는 2심제로서 ···이 총재는 서울지방법원에서 파견된 배석판사였을 뿐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고 김정일 답방성사를 위해 북한의 비위 맞추기도 중요하지만 40년 반국가 활동혐의로 사형을 당한 사람을 놓고 언론탄압의 피해자로 규정하는 민주당과 송석찬 의원의 사고가 정상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김정길(金正吉) 법무부장관이 답변에 나섰다.

  “민족일보 사건은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등 13명에 대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특별법상의 특수반국가행위죄를 적용하여 사장 조용수는 사형, 상무 등 2명은 무기징역···당시 피고인들의 범죄 사실은 민족일보의 간부들로서 일간지인 민족일보에 북한의 대남 통일전략을 고무하고 이에 동조하는 내용의 사설이나 논설 기사 등을 게재하여 발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관련 자료는 이 사건이 40여년 전의 오래된 사건으로서 관련 자료가 지금 부산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에 광디스크로 보존돼 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서 제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날 오후에는 한나라당 최연희(崔沿熙) 의원이 단상에 올랐다. 최 의원은 “오늘 오전 대정부 질문에서 최근 당적을 옮겨 자민련 소속이 된 송 모 의원께서 40년전 민족일보 사건을 거론하면서 야당총재를 비판했다”며 “그러나 1997년 8월16일 기자협회보에 게재된 경향신문 원희복 기자의 투고 내용에 의하면···그 사건은 5·16 세력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자민련 명예총재와 관련있다”고 반박했다. 최 의원은 또 “원 기자는 두 사람(김종필, 김대중)은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며 “반면 이회창 총재는 당시 혁명재판부의 재판장이거나 주심 판사를 맡은 것이 아니라 민간인 현직 판사 신분으로 파견돼 재판절차에 도움을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마침 이날 본회의 사회를 보던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은 민족일보 조용수와 고동학교 동기동창일 뿐 아니라 친구 사이여서 민족일보 사건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송 의원은 다시 보충질의를 요청해 단상에 올랐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언론이들이 언론장악을 위한 언론말살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48개국 신문편집자를 대표하는 국제신문편집인협회와 일본 펜클럽 등은 언론의 자유를 사형으로 탄압하는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뿐만 아니라 지난 90년 당시 강만길 rhfuy대 교수와 고은 시인,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등 각계 인사들은 민족일보는 불순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불온하지도 아니하며 다만 시대를 앞장 서 나갔을 따름이라는 평가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 당시 언론말살 사건의 선봉에 섰던 이회창 총재의 자료가 제 손에 다 있습니다.···(장내 소란) 어찌됐건 간에 역사적인 해결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께서 언론탄압뿐 아니라 인권탄압에 앞장서 온 장본인으로서 계속 짚을 것입니다”

다시 김정숙 의원이 보충질의에 나섰다.

김 의원은 “총리는 민족일보 사건을 국기를 흔들고 국가안보를 위협한 반국가 용공사건이라고 보는지, 아니면 귀 당의원의 말대로 언론탄압 사건이라고 보는지 명확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는 “본 답변은 법무부장관에게 했다”며 위기를 모면했다.

<제218회 제5차 국회본회의(2001.2.15) 회의록>


이후에도 민족일보 사건은 국회에서 또 논란이 됐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까지 벌어져 본회의이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이 송석찬 의원의 대정부질문을 거칠게 막았던 행위를 ‘백색테러’라 비난하며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관련된) 조용수 민족일보 사건 조사를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조용수를 죽음으로 내 몬 실제 세력은 5·16 쿠데타 세력이다. 그중에서도 중앙정보부가 핵심이다. 특히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낸 김종필씨는 당시 민족일보 사건 재판을 직접 방청하는 등 핵심 인물이다.

  마침 이 자리에 김종필씨가 자민련 총재자격으로 이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김종필씨는 나중에 이회창씨 어깨를 두드리고 국회 본회의장을 나섰다.

  이런 논란에 대해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는 2월16일“정치권은 민족일보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하나, 민족일보 사건을 주도한 세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이다. 둘, 과거 용공행위가 애국행위로 둔갑했다는 성명을 발표한 한나라당을 규탄한다. 셋, 이회창 총재는 민족일보 1심 판결에 참여한 것이 분명한 이상, 사석에서 유감을 표명하지 말고 당당하게 잘못을 인정하라, 넷, 김정길 법무부장관도 당시 재판기록을 공개하고 절름발이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적용을 5·16 쿠데타 이후부터 적용해 이 사건의 진실을 가려야 한다.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성명. 2002.2.16>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유력한 후보였던 이회창씨는 5년전처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조용수와 관련해 집중적인 언론의 해명과 검증요구 받았다.

  당시 보도된 언론의 주요 검증 요구는 다음과 같다.

  홍세화, ‘인간의 얼굴을 찾아서’ 한겨레신문 2002.4.15

  원희복, 정동탑, ‘이회창 판사의 오판’ 경향신문 2002.5.23

  손석춘, 여론읽기, ‘이회창 후보의 언론관’ 한겨레신문 2002.9.14

  고종석, 오늘, ‘조용수’ 한국일보 2002.12.21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씨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다는 관측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씨는 결국 낙선했다. 이씨가 두 번이나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억울하게 죽은 조용수의 한도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당시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장은 이렇게 입장을 나타냈다.

  - 최근 언론개혁 논쟁 와중에 ‘민족일보 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를 접한 소감은?

  “마무리가 제대로 안된 역사는 언젠가는 다시 문제가 되기 마련이다. 국회에서 민족일보 사건이 재론됐을 때 이 사건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언론탄압’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져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민족일보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착잡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 당시 5·16 쿠데타세력이 민족일보를 탄압한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이며, 그 재판 결과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사상을 의심받던 박정희가 진보성향의 민족일보를 용공좌익으로 몰아 탄압하면서 쿠데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진보세력의 확장을 조기에 차단하려고 꾸민 사건이라고 본다. 재판결과 조 사장은 사형에 처해졌다. 언론인처형은 일제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 재판과정에서 논란이 된 내용은 어떤 것이며, 당시 세간의 여론은 어땠나.

  “재판은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진행됐으며, 피고측에서 자금출처에 대한 증인 채택을 요청했으나 묵살됐다. 당시 보도통제로 국내에서는 왈가왈부할 여건이 되지 못했으나 조 사장의 사형 확정 후 국제적 비난이 빗발쳤다. 나중에 박정희가 조 사장을 처형한 일을 후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 민족일보 사건 재판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심판관(판사)으로 참여했는데 도덕적 문제는 없나.

  “어떤 이유에서건 이 총재가 민족일보 사건 1심 판결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며, 부득이한 사정이었다고 해도 잘못은 잘못이다. 이 총재는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며 이 사건의 재조명 작업에 앞장서야 마땅하다고 본다”

  - 최근 남북관계의 진전 상황을 보면 민족일보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당시 민족일보가 남북관계에서 진보적 노선을 편 배경은 뭔가.

  “당시 민족일보 보도 태도는 4·19직후 상황에서는 그리 앞선 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구의 ‘영남일보’ 등도 이 같은 논조를 폈다. 그러나 5·16이 터지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조 사장은 우익인사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을 뿐 좌익과는 연관이 없다”

  - 최근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두고 야당과 일부 언론사는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데.

  “언론사도 기업인 이상 세무조사는 당연하다. 이를 언론탄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언론사는 좀더 의연하게 조사에 임해야 하며 다만 결과를 놓고서는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야당이 이를 정쟁의 대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씨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을 지낸 동농 김가진(金嘉鎭) 선생의 손자이며, 모친은 여성독립운동가인 정정화 여사다. 현역에서 은퇴한 김씨는 지난 98년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 옛 동료들과 함께 민족일보 사건의 재심을 준비 중이며, ‘인터넷 민족일보’ 복간도 검토 중이다. <정운현기자, 서울신문. 2001.2.20>


  40년이라는 시간을 넘나들며 국회에서 정국의 축으로, 시대의 선각자로, 애닯은 생의 마감자로, 또 30여년간 잊혀진 인물로 존재했던 문제의 그 조용수. 짧았던 그의 31년 일생을 더듬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