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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2장 격정의 역사속에서

 

제 2 장

격정의 역사속에서





1. 출생과 성장


  조용수는 1930년 4월 24일(호적상 4월20일) 경남 진양군 대곡면 단목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진주 남강과 낙동강이 접하는 곳이다. 또 용화산을 경계로 의령과 함안이 접해있는 곳이다. 원래 조용수의 가문은 조용수의 13대 할아버지가 동궁의 서승으로 학문을 하는 고집 센 영남 양반가문이었다.

  일제시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경성제대 산부인과에서 근무했던 조경규(趙瓊奎)씨가 작은 아버지다. 대구신보(大邱新報) 시사신보(時事新報) 사장을 지낸 조경규씨는 2대, 3대, 4대 국회의원으로 자유당 원내총무를 두번이나 지냈다.

  조용수의 아버지 조판상(趙判祥)씨는 진양의 만석꾼 하종식(河宗植)씨의 딸 하규남(河珪南)씨와 결혼했다. 어머니쪽 집안도 역시 알아주는 진주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조용수의 부친 조판상씨는 결혼식을 올린 후, 풍습에따라 신부집에서 거꾸로 매달려 발바닥을 맞다가 사고로 골반을 크게 다쳤다. 일본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지만 불구가 됐다.

  부친은 사진을 좋아해 사진작가로 활동했는데 ‘쟁출’이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이 사진은 목을 빼고 모이를 다투는 병아리를 찍은 것으로, 국회에서 의원들이 서로 두각을 다투는 것을 비유했다.

  조용수는 이런 가정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외삼촌 하만복씨가 3대 독자이면서 자식이 없어 조용수는 외삼촌의 집에서 자랐다. 외삼촌 하만복씨 역시 과도정부 입법의원, 반민특위 위원,2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역의 명망가였다.

  삼촌과 외삼촌이 모두 국회의원을 지내 자연히 조용수도 일찍부터 정치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조용수는 진주 봉래초등학교(당시 제2보통학교)를 나와 1944년 진주중학교에 진학했다. 조용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재학 중 한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는 한번 공부를 시작하면 코피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는 집념이 강하고 또 원칙에 엄격했다. 조용수의 막내동생 조용준씨는 조용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저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는데, 한번 가르쳐 준 것을 잊으면 무섭게 때리곤 했다. 하도 엄한 형님이라 얼굴만 봐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학창시절에 고전음악에 심취했으며,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해방 당시 조용수는 진주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모든 사회가 그랬지만 중학교에도 심한 좌우익의 갈등이 벌어졌다.

  특히 조용수가 진주중학교 3학년 재학당시 세상은 찬탁과 반탁 노선으로 갈린 좌우익의 대결이 첨예화됐다. 당시 조용수는 우익적 입장의 학연간부로 활동했다. 그 학연간부로 활동하면서 그는 같은 학교 좌익 학생으로부터 흉악한 협박을 받았다. 그 협박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조용수는 부득이 자퇴를 하고 대구 대륜중학에 편입했다.

  조용수의 선배로 진주학생연맹 3대 회장을 지낸 김재규씨는 이렇게 말했다.

  “조용수는 공무도 잘했다. 당시 고려대생 이철승씨가 전국학생연맹회장으로 있었다. 해방후 좌우익 갈등이 심할 때 우익계열의 학생단체라고 할 수 있다. 조용수는 좌익계열의 협박에 시달리다 자퇴했는데 그 후 어떻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까지 당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윤성효, ‘진주인물 발굴,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선생’ 진주신문, 1999.3.1자>


  조용수는 대륜중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대구 대륜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연희전문에 같이 입학했던 이만섭(전 국회의장)은 조용수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졸업당시 전교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집념도 강하고 또 명예욕도 있었던 친구였다. 입학하던 해 6·25가 나서 연락이 끊어졌다가 서울에서 신문을 만들 때 몇 번 만났다”

  그러나 조용수는 대구 대륜중학교보다 자신이 자란 진주중학교에 더 애착을 가졌고 실제 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진주중학 동창은 조용수에게 동창명부를 보내올 정도였고, 실제 민족일보에 도움을 준 사람들도 진주중학 동창들이 많았다.

  전쟁으로 조용수는 부산에 내려갔다. 당시 국회의원은 비서관 한명과, 신변보호를 위해 호위경찰관 한명을 둘 수 있었다. 경찰국 소속 공무원이지만 실제는 국회의원 비서와 다를 바 없는 일종의 경호비서였다. 그때 조용수는 외삼촌인 하만복의원의 경호비서로 근무했다. 물론 이 일을 하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점도 있었다. 그래서 조용수는 경남경찰국 소속 경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경력을 가지게 됐다.

  6·25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변신의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이 나자 일본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재일학도의용군을 조직해 참전했다. 마침 이들을 인솔하고 온 재일민단 정동화 감찰위원장이 진주중학교 선배였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다.

  당시 정동화는 조용수에게 한창 공부할 나이에 공부를 중단했으니 아까운 시간만 보내지 말고. 일본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재일학도 의용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면 된다고 했다.

  조용수는 선배의 제의에 귀가 솔깃했다. 말이 경찰이지 외삼촌의 비서로 있으면서 피난수도 부산의 정치판 주변을 지켜보는 것도 신물이 난 터였다.

  1951년 9월 25일 부산항 4부두. 조용수는 재일학도 의용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는 군악대의 환송연주를 받으며 일본으로 향했다.



2. 일본시절


  1950년대초. 일본도 황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내 곳곳은 아직 공습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였다. 전후 1백만명의 교포가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60여만명에 이르는 교포가 일본에 남았다. 그중 일부는 교포사회의 갑부가 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밑바닥 인생을 면치 못했다.

  종전 후 일본은 ‘생활보호법’을 만들어 극빈자에게 약간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는데 그중 6만명이 재일교포였다. 당시 아사히(朝日)신문보도를 보면, 재일교포 4명중 1명꼴로 생활보호대상자이며 이것으로 연간 26억엔이 소요되고 있을 정도로 일본정부의 재정부담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일본 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재일한국인의 80%가 실업상태이며, 일본 경시청 형사국의 통계에 따르면 재일한국인의 범죄발생률은 일본인보다 5배나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독립정부를 세운 이상, 한국정부가 자국국민을 책임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영주권을 주지 않고 강제 퇴거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재일교포 사회는 민단과 조총련계가 분열돼 있고, 민단계도 혁신적 인사와 친 이승만 세력으로 갈라져 갈등을 벌였다. 또 일본 공안당국과 은밀히 내통하는 세력이 있는 등 교포사회 내부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나를 찾아오는 첫째부류는 일본의 치안관계자들이었다. 어차피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므로 그려니 하고 제 민족, 제 동지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응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소위 핏줄을 함께한 자들이 제 동포의 무슨 약점이라도 끄집어 내 팔아먹기 위해 접근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얄밉고도 가련한 자들이었다”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이강훈 회고록, 제삼기획 1994>


  이런 분위기에서 조용수의 일본생활은 시작됐다.

  조용수는 우선 메이지(明治)대 정경학부 경제과 2학년에 편입학했다. 한국에서 학비를 보내주었지만 전쟁의 와중에서 충분치 않았다. 조용수는 한국유학생과 어울려 풍월당(風月堂)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풍월당은 도쿄에 있는 대규모 클래식 음악다방으로 한국유학생들에겐 일종의 집합소격으로 통했다. 특히 조용수는 클래식에 상당히 심취해 이 다방의 분위기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 풍월당에서 한국유학생은 본국의 움직임과, 일본정부의 한국인 정책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이곤 했다. 물론 당시 일본 학원가에서는 좌우익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당연히 조용수도 이런 논쟁의 일원이 됐다.

  당시 동경대에 다니며 조용수와 가깝게 지냈던 윤수길의 증언.

  “조용수는 치열한 좌우익 논쟁이 벌어질 때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았다. 주로 라스키의 책을 읽고, 당시 일본에서 유명했던 ‘현대 일본의 정치와 사상’이라는 책도 열심히 본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사고나 행동에 있어서 자유주의자였다. 조용수의 이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유주의에 민족주의를 합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징집을 피해 도피성 유학을 온 부잣집 자제들도 많았다. 조금 심각하게 토론을 좋아 하는 학생들은 풍월당에 모이고, 사치와 환락을 쫒는 유학생들은 그 맞은편에 있는 마이야미 다방에 주로 모였다.

  1953년 5월30일 조용수는 메이지대에서 개최된 한국학생동맹(한학동) 제 10회 정기총회에서 문화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위원장은 전세호(錢世鎬·메이지대)였다. <민주신문 53년 6월 25일자>

  조용수가 재일학도의용군 귀국길에 동행하고 한학동에 문화위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보아 당시 조용수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학동은 1949년 5월8일 메이지대 강당에서 열린 ‘조선인 학생동맹’ 정기총회에서 좌익계 학생과 충돌, 이 과정에서 메이지대 학생 이상석(李相石)이 사망하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단체로 한청과 함께 좌익청년과 대립하던 조직이다. 한학동과 한청 소속 청년은 그 후 한국에서 6·25가 나자 재일학도의용군을 결성해 참전했다. <李鍾漢, 鄭畯永 ‘한국전쟁 중 재일학도의용군의 묻혀졌던 이야기’ 월간조선 1999.2>

  조용수는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사와 개인이 운영하는 국제타임스사 논설위원으로 언론인으로서 자질을 닦았다.(동생 조용준에 따르면, 조용수는 클래식 음악에 상당한 수준으로 일본의 음악잡지에 음악평을 쓰면서 학비를 보충하고 있다는 편지를 집으로 보내오기도 했다고 한다)


   조봉암 구명운동

  한일회담은 벌써부터 진행됐지만 진전은 지지부진했다. 이승만은 52년 1월 18일 평화선 선포하고 공해 상에서 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한국인을 오만한 민족으로 이런 행위는 영토침략이나 같다고 성토하고 나서면서 한일 양국민의 감정은 악화됐다.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 한국인을 모조리 추방하라’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부를 억류하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인 밀입국자를 대대적으로 단속해 나가사키(長崎)와 오무라(大村)수용소에 수용했다. 오무라 수용소는 초만원이 되고 수용소 내에서 학대와 고문 사실이 계속 교포사회에 퍼졌다. 오사카 수용소에서는 교포 1명이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일본국민은 부산에 억류된 자국 어부를 구출하기 위해 유엔에 제소하고 경제단절, 재일한국인 추방을 거세게 자국정부에 요구했다. 심지어 한국대표부에 몰려가 ‘한국정부 타도’ ‘미국은 한국의 원조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56년 1월 21일 일본 14개현 지사가 시모노세키에 모여 평화선(이라인)을 철폐하지 않으면 14만 남한출신 재일교포를 한국에 송환할 것을 결의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재일교포는 물론 한국인 유학생도 이런 일본의 사회분위기와 무관할 수 없었다.

  일본 내 사정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한국 사정은 더욱 암담했다. 이승만은 59년 2월 7일 자신의 오랜 정적인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한국에서 이런 문제는 일본 교포사회에도 즉각 영향을 미쳤다.

  3월 3일 민단 내 중요인사인 배 정, 강위전, 이강훈, 김삼규, 이천추, 김성규, 양조한, 김종재, 양승호, 이영근, 원심창, 김봉진 등이 도쿄에 모여 ‘조봉암 구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4월 20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메이고테우 호텔에서 조봉암조명탄원 서명운동위원회가 결성되고, 본격적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 모임에는 위원으로 정찬진, 정인석, 홍현기, 권일, 이강훈, 이희원, 김정규 등이 참석했고 구체적인 실무를 맡을 사무국장에는 김팔웅, 조용수는 사무국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조용수의 위치는 민단 내 조직부 차장. 그러나 민단 내에서 조봉암 구명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당시 민단 단장이던 이재화(李載華)도 처음에는 조봉암 구명운동에 서명했다가 취소하는 등 민단에서 본국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조봉암 구명운동 위원이던 이강훈의 증언이다.

  “조용수라는 청년은 죽산(조봉암)의 구명운동에 열성적이었다. 특히 그는 서명운동을 주로 맡아서 했다. 일본에서 22만명이라는 많은 사람의 서명을 받아 당시 이승만에게 보냈다. 서명작업에서 그의 역할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7월 31일, 이승만은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구명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용수의 심리적 좌절은 컸다. 비록 자신이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누가 봐도 자신의 정치적 상대를 비겁하게 단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본국 이승만의 영향을 받고 있는 민단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봉암 추도회를 일본에서 여는데 앞장섰다.

  이런 와중에 민단 내에서 일종의 ‘항명’이 일어났다. 6월 16일 민단 김재화(金載華) 단장, 이유천(李裕天) 등 3명이 정부와 자유당을 불신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1959년 6월 15일.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총본부 3기관은 재일교포 북송문제에 관한 중대시국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차에 걸친 연석회의를 갖고 숙의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재일동포의 북송반대운동을 최후까지 계속 투쟁한다.

2. 일본정부에 대해서는 재일동포의 기본적 인권과 생활권 확보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한다.

3. 본국정부에 대해서는 재일동포의 보호시책에 대한 10여년에 걸친 청원을 해왔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의 있는 시책이 전무함으로 우리는 이 이상 인내할 수 없다.이로써 자유당에 대하여 불신을 표명한다.

  1959.6.15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 중앙총본부

<민단 40년사, 재일한국 거류민단>


  본국 이승만 정권을 불신하겠다는 이 민단 선언의 파장은 무척 컸다. 주일대표부를 비롯한 한국정부 특히 한일회담을 진행하는 외무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졌다. 민단 내부가 격랑에 휩싸였다. 이승만 정권은 민단을 수습, 일부 인사를 종용해 긴급전국단장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민단의 중앙 3기관추방민중대회실행위원회(김광남, 정인석, 오우진, 홍현기 등)를 구성했다. 이런 작업에 의해 도쿄에서는 반공애국단(김영순, 김정영)과 오사카에서는 반공순국단(김삼국, 강규중)이 생겨났다.

  결국 민단은 7월 14일 제24회 임시전체대회를 개최해 민단의 3기관을 탄핵하여 민단을 친 이승만적 인사들로 교체했다.

  조용수는 이런 민단내의 권력다툼에 초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봉암 구명운동에 온 정신을 쏟았다. 친 이승만적 인사들로 바뀐 민단이 조용수의 이런 움직임을 달가와 할리 만무했다. 그러나 조용수는 8월 2일 조봉암 추도회까지 앞장서 마무리했다.

  이때 만난 사람이 운명의 이영근이다. 이영근은 조봉암 비서출신으로 진보당 사건 때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그는 동경에서 통일조선신문을 만들며 반 이승만 운동을 벌였다.

  민단에서 달가와 하지 않던 조봉암 구명운동으로 그는 사실상 ‘좌천’이라는 보복을 받았다. 조용수를 도쿄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만 도치키현의 부단장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본국 이승만 정권의 태도나, 일본 민단내의 모습, 어느 것 하나 조용수의 뜻에 맞지 않았다. 그때 조용수는 엄청난 좌절을 삭이며 열차를 타고 토치키현으로 향했다. 원래 조용수는 술을 잘하지 못했지만 이때 많은 술을 배웠다고 한다.


  북송반대운동과 유태하 추방운동

  그러나 조용수는 도치키현에서 울분만 삭이고 있지 못했다. 이미 재일교포의 북송이 본격화 됐기 때문이다.

  조총련은 이미 55년부터 일·북한 국교정상화 운동의 일환으로 재일교포 북송운동을 제창했다. 56년 2월 26일 일본적십자와 북제적십자사는 비밀리에 일본에 억류된 한국인은 각기 북한과 남한으로 송환한다는 각서를 교환까지 했다.

  사실 일본정부는 56년에 36명의 교포를 북한에 보냈다. 또 국제적십자는 ‘재일한국인의 거주지 선택의 자유는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같은 행위는 인도적 견지에서 당연하다는 일본과 미국의 지지를 받을 정도였다. 일본과 북한은 이것을 적절히 이용했다.

  게다가 일본정부를 비롯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는 조총련의 이런 움직임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교포의 생활보조비로 연간 20억엔을 사용했고 재일교포가 야기 시키는 갖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를 만들고 언론도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일본의 북송지지여론을 이끌어 갔다. 미국도 인도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북송을 찬성했으며 북송반대 운동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조총련은 한일회담을 방해하는 또 다른 목표를 가지고 교포북송을 추진, 서명자만 2만명을 받았고 희망자는 5만명이 넘었다고 선전했다. 이미 북한은 조총련을 통해 재일교포 2세들의 교육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해 왔다. 북한은 58년 이런 평소의 지원 말고도 별도의 6억엔을 조총련에 지원해 북송사업을 지원했다.

  이에 비해 한국정부는 재일 민단에 대해 예산지원은커녕, 재일교포들로부터 찬조를 받아 주일대표부를 운영할 정도였다. 당시 주일대표부에는 김용식 대사, 유태하 공사, 최규하 참사관(후에 대통령을 지냄)이 근무했다.

  그러나 주일대표부는 교포북송문제를 안이하게 판단했다. 주일대표부는 북송 희망자가 2만명이 넘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본국정부에 보고할 정도였다. 그것은 한국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국정부와 정치권은 2·4 파동의 후유증에 휩싸여 일본의 이런 움직임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후 몇 차례 소규모의 북한송환이 이어졌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골몰했다.

  “북송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주일대표부가 모두 정세를 안이하게 오판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 대통령의 또 다른 지론도 작용했던 것으로 나는 본다. 이 대통령은 한일회담의 교포지위 분과위에서 일본 측이 해방이후 태어난 재일교포 2세에 영주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고집하자, 그렇다면 그들을 귀국시켜도 좋다는 비현실적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조 ‘회상 30년 한일회담’ 중앙일보사 1986>


  특히 유태하 공사에 대해 교포의 원성이 높았다. 그는 교포가 본국에 입국할 때 필요한 여권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 돈은 이승만에게 아부하는 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태하 공사는 당시 노무라 수용소에 수용중인 교포들이 한국의 선박을 이용해 밀입국하는 것이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키기 때문에 엄벌에 처한다고 엄포를 놨다. 실제 남해 두미도 근해에서 노무라 수용소에서 강제로 송환된 재일교포 17명을 태우고 밀입국중인 배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것이 교포사회를 분노케 만든 것은 당연했다. 조총련은 거액의 돈을 써가며 살 집과 취직을 보장하겠으니 북한으로 오라고 선전하고 있는 터에, 자신의 비용으로 수용소를 나와 자신의 돈으로 한국에 가는 배를 구해 귀국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몰아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국정부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기는커녕, 검거되면 엄벌에 처하고 선박까지 몰수한다고 공언했다. 이런 주일대표부의 태도가 교포 사이에 원성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교포들은 주일대표부가 동포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을 하기는커녕 여권장사로 돈을 버는 기관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용수는 재일 교포권익옹호 위원회를 만들어 유태하의 추방운동에 앞장섰다. 본국에서도 유태하 공사의 인책을 요구 했으나, 이승만은 계속 그를 신임했다. 오히려 9월 20일 김용식 대사를 소환하고 유태하 공사를 대사로 승진시키는 조처를 취했다. 일본교포는 물론 한국의 여야 모두 이승만의 이런 조치에 강한 불만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유태하 공사는 원래 3등 우편국 서기였으나,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승진을 거듭, 일등 외교관이 되어 일본대사까지 지냈다. 결국 그는 5·16 쿠데타가 나서 한동안 귀국을 거부하다, 귀국 후 무려 2백억환 축재혐의로 구속됐다>


  일본에서 한국의 전쟁특수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한국교포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불황으로 일거리가 없던 터였다. 대부분 재일교포는 그날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이 밑바닥 인생의 교포들은 ‘고국귀환’‘직장과 주택을 제공한다’는 북한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민단은 58년 10월 27일 긴급 중앙위원회를 열고 재일교포북송반대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민단은 조총련의 이런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59년 1월 29일 후지야마 일본외상이 중의원에서 ‘북쪽으로 돌아가기 희망하는 재일한국인에게는 이를 허락할 것’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59년 2월 13일 일본각의가 북송을 정식으로 결정하자, 한국정부는 뒤늦게 범국민 반대운동에 나섰다. 언제나 그랬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호들갑을 떠는 모습 그대로였다.

  2월 16일 ‘재일한인 북송반대 전국위’가 각 정파를 망라해 결성됐다. 이기붕, 조병옥, 장택상 등이 지도위원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장택상(전 총리), 최규남(전 문교장관) 유진오(고려대 총장)을 제네바에, 정운갑, 조재천, 이재형을 일본에 보내 북송반대저지 운동을 지원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에 비해 조용수를 비롯한 민단내의 일부 청년의 북송저지 운동은 눈물겨웠다.

  조용수는 재일본 거류민단 도치키현 본부 부단장으로, 재일한국인 북송반대 도치키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12월 10일, 도쿄 대전구민회관에서 열린 중앙민중대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 모두는 교포의 북송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기로 다시 결의했다. 이날 오후 2시, 조용수를 비롯한 청년행동대원 30여명과 6백여명의 단원은 일본경찰과 조총련계 행동대원과 격돌했지만 역부족으로 물러났다.

  그 이튿날인 12월 11일, 신주쿠에 다시 집결한 조용수를 비롯한 민단 청년 결사대 5백여명은 역구내와 철로에 누워 결사적인 북송저지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민단간부로 신주쿠 역에서 북송반대 투쟁을 한 것은 당시 중앙공보부에서 촬영해, 영화관에서 대한뉴스로 상영되기도 했다. 이 필름은 그 후 조용수 자신은 조총련계가 아님을 증명할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됐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단 행동대원들은 동경지역 등 각지의 북송자들이 니카다로 떠나는 것을 실력으로 저지하기 위해 각지의 역선로에 드러눕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경찰의 투입으로 저지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 민단측의 열혈 청년들은 정말 생사를 건 투쟁을 했다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조총련은 북한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은 데다 일본 좌익계열은 물론이고 자민당과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으며 북송지지운동을 벌였다. 그에 비해 민단은 참으로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다. 우리 정부의 후원금은 한 푼도 없이 대다수 일본인으로부터 적대적 태도와 냉대를 받으면서 순전히 자발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김동조 ‘회상 30년 한일회담’ 중앙일보사 1986>


  1959년 12월 14일. 북송 1진 9백75명을 태운 소련선박 ‘크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는 니카다항을 떠나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그 후 67년까지 1백56회에 걸쳐 총 8만8천6백11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들어갔다.

  원래 북한행을 신청한 교포는 14만1천8백92명이었으나, 나머지는 신청을 취소하거나 포기했다. 일부지만 북한행을 포기한 것, 그것에는 조용수의 조그만 노력도 상당부분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 후 5·16 쿠데타 세력은 이때 대일외교의 실패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교포북송의 이면에는 물론 일본과 북한 괴뢰가 야합하여 이루어진 연극이 내재되어 있었으니, 이 원인은 이승만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졸속에 연유되었다. 첫째 원인은 한국에서 재일교포를 푸대접했다는 사실이다. 재일교포의 생활은 모두 가난하였고 또한 일본정부는 교포를 냉대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은 60만의 이들 교포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 북한 괴뢰 측에서는 이 맹점을 틈타서 1957년부터 1959년 2월말까지 2개년의 교육비로 일화로 무려 6억 44만엔을 소비한데 반하여 이승만 정권측은 기천만환에 불과하였고 소위 조련계에서는 일본전국을 통하여 대학 1개와 2백 26개의 각급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2만4천4백 1명(1959년 5월말 현재)을 취학시키고 있는 반면에, 우리 거류민단계는 불과 유아원 2,초등부 10,중학 4,고등부 2 도합 12개교에 2천 87명을 취학시키고 있는 현상이었으며 이것마저 운영난에 봉착해 있던 현상이었다.

  또 이승만 정부는 가난한 교포의 주머니를 털어서 무려 2백억환을 축재했다는 항설이 있는 유태하 등을 외교관으로 앉혀 놓아 자기조국에 다니러 오는 교포들로부터 여권 1매에 일화로 무려 5만환까지 호가한 사실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원인은 고립 무원한 외교정책 때문에 미국이나 국제적십자사가 북송이 비인도적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 ‘5·16 군사혁명사’ 1962>


  60만 재일교포의 96%가 남한출신이었지만, 그들은 아무 연고도 없는 북한에 들어갔다. 당시 재일교포는 하루 끼니가 급했다. 그런 사람에게 북한은 돈을 주고, 집을 주고 직장을 준다며 북으로 데려갈 때 한국정부는 정적을 죽이는데 몰두했고, 헐벗은 그들에게 여권장사를 하며, 귀국하면 밀입국으로 처벌한다고 아우성쳤던 것이다.

  그 북송교포가 그 후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가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 후에도 이런 역사적 책임을 곧게 묻질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