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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제4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제 4 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1.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60년 11월 4일.

  조용수는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낙선의 회한을 달랬다.

  “이번 기회가 나의 뜻을 펼쳐 볼 수 있는 처음의 기회였는데 ···괜찮다고는 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영근 선생에 대한 면목도 안서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혁신은 곧 공산당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혁신계가 단일화 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이번에 추진하는 민간통일 기구 민주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을 통해서 통일을 갈망하는 세력이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데”

  조용수는 공천과정과 선거 전후에 나타난 혁신의 분열, 자신의 목전 이익만 따지는 혁신인사에 적지 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도 독립운동, 통일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던 사람이라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용수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이영근을 찾았다. 언제나 이영근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조 동지. 좋은 경험한거야. 그래도 득표를 많이 한 것이야. 그리고 일전에 연락 준 민자통은 잘 진행이 되고 있나”

  “예, 일단 민자통 구성을 위한 주비위원회를 9월 3일 구성했습니다. 9월 15일 이미 자주 민주 평화의 3대 통일원칙도 발표했구요. 지금 각계 인사에게 가입 서류를 보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 대부분 혁신계 인사 같습니다”

  “그럴 거야. 보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통일이 안 되길 내심 바라고 있을 거야.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르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흩어진 혁신계의 통합을 민간단체에서 이루기에는. 아무튼 좀 쉬라고. 할 일이 더 많아질 테니까. 자네 부인이 기다리고 있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조용수는 동경에 머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사회대중당 결당식, 김달호계만 3백여명 모여 종로구 진명여고 강당에서’ ‘전 근로인민당계의 최근우, 유병묵, 유한종, 하태환···사회당 결성 선언. 종로구 청진동 임시 시무실에서.’

  통일과 혁신에 대해 정말 사소한 문제로 혁신계는 또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렸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외형적으로나마 민자통 결성을 주도하고 있는 이종률, 박진 선배의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진은 상해 윌리암스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상해 임정의정원의원을 지내고 상해청년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 후배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며칠 후 이영근은 조용수와 이야기 도중, 지나가는 말로 ‘한국에 가서 신문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라는 말을 했다. 당시 이영근은 동경에서 열흘에 한번씩 발행되는 ‘통일조선신문’(統一朝鮮新聞)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들었으나 집으로 돌아 온 조용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조용수도 지난 선거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혁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 가를 체험했다. 때문에 혁신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였다.

이튿날 조용수는 이영근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어제 말씀하신 신문을 만들자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저도 지난번 선거에서 아주 절실히 체험한 것이기도 하구요.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절규하고 혁신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간신문을 하나 만들려면 상당한 자금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 지금 조 동지에게 그런 돈이 없지 않은가”

  “돈이야 만들면 됩니다. 지금 선생님이 만들고 있는 통일조선신문도 돈이 있어서 만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동지의 도움으로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신문을 만들기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혁명 후 혼란스런 사회에서 국민이 혁신과 통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 언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번에 정권을 잡은 장면이 누구입니까. 이광수에 머금 가는 사람 아닙니까. 독립운동을 같이한 이승만이 혁신세력을 그렇게 말살하려 들었는데 장면은 더 혁신계를 탄압할 사람입니다. 이럴수록 우리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문이 절대 필요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번 결심하면 무서운 집념으로 이루고야 마는 조용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영근이다.

  “그래 한번 해보지. 나도 힘껏 도우겠네. 내가 지금 일본에서 하고 있는 일이 조국의 평화적 통일운동 아닌가. 이런 일을 하려면 직접 고국에 들어가서 해야 하는 데 내가 그럴 처지도 아니라서 이렇게 일본에 있는 것이니까. 오히려 조동지의 역할이 더 클 수 있지”

  다음날부터 조용수는 신문의 창간준비를 위해 뛰어다녔다.

  먼저 배기호(裵基鎬)를 만났다. 그도 지난번 한국의 7·29선거에 구미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사람이다.

  “배 선배, 제가 서울에 가서 신문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신문을?”

  “예 지난번 선거에서 혁신은 곧 공산당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문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텐데”

  “자금은 여러 곳에서 모으면 됩니다. 선배님이 좀 도와주세요”

  “알았네. 큰 힘은 못되더라도 조금씩이야 모을 수 있지”

  조용수는 이영근을 통해 박용구(朴容九)를 만났다. 박용구는 당시 재일교포 사회에서 가장 큰 재력가로 통했다. 그는 일본 기업과 정치인을 상대로 대규모 고리대금업을 해 당시 동경 아가사카에 큰 빌딩까지 소유했다. 그는 일본 정재계에도 막강한 인맥을 갖추고 있고 민단 내부에서는 혁신파로 분류됐다. 이영근과 박용구는 같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한국에서 신문을 만들겠다는 얘기는 이영근을 통해 들었네. 그런데 일본에서만 생활해서 한국 실정을 잘 모르지 않는가”

  사실 박용구는 자유당 정권 때 한국에서 사업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일본에서 번 돈을 들여와 국내에 투자했지만, 이승만에게 잘못 보여 투자한 자금을 모두 날리고 교도소까지 갔다. 조용수도 박용구의 그 점을 잘 알았다.

  “선배님.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선배님도 일본에서 돈을 벌어 일본에서 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국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내가 돈을 도와준다고 해도 아직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불법일 수밖에 없어. 지금 일본 세무당국과 경시청의 감시가 심해서 말이야. 아무튼 원칙적으로 자네의 생각에는 찬성하네”

  <박용구는 평소 “일본놈을 잡아먹으며 돈을 벌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일본 교포사회에서 가장 큰 거부로 당시 한국 삼성의 이병철 회장보다 돈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파친코와 고리대금업 이외 일체의 다른 사업을 허용하지 않아 사업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5·16후 박정희는 그에게 인하대학교를 줄 테니 공화당 재정부장을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그 후 한일회담 반대시위(6·3사태)를 보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 후 박용구는 일본에서 장학재단을 만들어 육영사업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와 불편한 관계 때문에 일본 세무당국의 기습적인 세무조사를 받고 무너져 버렸다. 그 세무조사는 박정희가 일본정부에 요청했다는 소문이 재일 교포사회에서 파다하게 돌았다. 당시 롯데 신격호는 재력에서 박용구보다 한참 뒤떨어졌지만, 박정희와 좋은 관계 때문에 한국에서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된다. 그가 조용수에게 돈을 대주었어도 당시 돈을 주었다고 말할 수 없던 것은 일본 세무당국의 집중적인 감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4년 윤수길 증언>


  이밖에 일본에서 파친코 기계를 제작해서 큰 돈을 모은 정동필(鄭東弼), 이희원(李禧元) 등 교포유지에게도 지원을 약속받았다. 조용수는 물론 장인과도 상의했다. 조용수의 장인은 도치키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며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위가 큰일을 한다는 데 내몰라 할 수 없어 어느정도 자금을 지원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용수는 어느 정도의 자금은 쉽게 마련했다.

11월 21일. 조용수는 자금조달에 한창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 이영근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한국에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송지영이 동경에 와 같이 있는데 와서 인사하라는 것이다.

  조용수는 국장(國莊)온천 호텔에서 송지영을 만났다. 이영근은 과거 조봉암 비서로 있을 때 당시 태양신문 기자였던 송지영과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이영근은 조용수를 송지영에게 인사시켰다.

  “내가 가장 아끼는 조용수라는 청년이오. 지난번 7·29 총선에서 낙선하긴 했지만 뛰어난 식견과 조국애를 가지고 있지요. 이 청년이 서울에서 신문사를 운영할 터이니 선배로서 잘 보살펴주세요”

  “물론입니다. 제가 아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송지영이 일본에 온 것은 한국전통사 사장으로 통신사와 TV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자재교섭을 위해서였다. 또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재일교포 재력가 권일씨를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송지영에게 TV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자금조달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그해 12월 30일, 송지영은 이영근에게 3천만환을 빌려 귀국했다.

  조용수는 일본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다. 이영근은 서울에 있는 윤길중 의원과 자신과 경복중학 동창인 고려대 이건호 교수, 같이 활동했던 박진목 동지, 사업적 감각을 가진 안신규 동지 등을 통해 조용수를 도와 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조용수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12월 초하루였다. 조용수는 서울로 향하며 어떤 신문을 만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얻은 조용수는 계속 자금 마련에 분주했다. 그는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진주중학 동창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또 혁신계를 대표할 신문을 만드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장건상, 최근우, 서상일, 윤길중씨 등을 부지런히 만났다. 일본에서 인사한 송지영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만나 신문사 설립에 따른 기술적인 자문과 실무 인선에 대한 추천을 받았다.

  12월 13일, 조용수는 윤길중 의원과 무교동 ‘형제집’에서 마주 앉았다. 윤길중은 이미 조용수가 신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윤길중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승만이 국민을 우롱했던 무력통일론이 일반인의 의식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지난 선거에서 실감했지 않았나. 지금 세계정세가 변해 한참 변했는데 아직도 무력통일을 믿고 있는 지. 설사 위정자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윤길중은 무력통일은 민족을 모두 멸망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 자신은 당선됐지만 지난 선거에서 혁신세력의 패배도 그에게는 충격인 듯했다. 조용수는 잠자코 술만 마셨다. 어떻든 자신은 지난 선거에서 패자였기 때문이다. 혼자 몇 잔을 들이킨 조용수는 말을 열었다.

  “누구보다 제가 그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국민에게 올바른 민족의식을 일깨워 줄 신문을 만들려고 합니다”

  윤길중도 술을 많이 마셨다.

  “애기는 들었네. 우리 혁신계에서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지. 그러나 모두 어렵게 살아가는데 누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지. 조동지가 큰 결심을 한거야. 나도 전적으로 도우겠네”

  “지금 4월 혁명의 주역들인 학생들은 국민계몽을 한다고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을 비롯한 기성세대는 항상 학생의 뒷북만 치고 있지, 누구 하나 그들을 이끌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요. 아니 학생을 이끌 생각은 고사하고 일반 국민들을 이끌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이번에 만드는 신문에서 윤 의원이 발행인을 맡아 주세요”

  윤길중도 기꺼이 이 제안에 찬성했다.

  “물론 나도 신문창간작업에 노력하겠네. 자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네.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아는 전라도 광주 몇몇 사업가가 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나 돈을 대라고 말해 보겠네”

  윤길중은 이날, 만드는 신문은 시사성도 좋지만 국민계몽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 신문이니까 제호는 ‘대중일보’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조용수도 좋다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윤길중 증언>

  그 다음날 조용수는 자신의 충무로 사무실을 대중일보 창간 준비사무실로 바꿨다. 그리고 정부에 신문발행 신청서를 냈다. 제호는 ‘대중일보’였고 발행인은 국회의원 윤길중으로 했다.

  이어서 조용수는 박진목을 만났다. 박진목과는 어려울 때 아니면 인간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다. 사실 조용수의 눈에 박진목이라는 인물은 조금 특이한 존재로 보였다.

  조국을 걱정하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났지만 상당수 선배는 구체적으로 조국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 할 비전을 가지지 못했다. 그 원로 선배는 열정만 앞섰다. 형편도 어려워 자신에게 돈을 얻으러 오기 급급한 선배도 많았다. 그러나 박진목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오히려 고생한다며 돈을 쥐어줄 줄 아는 선배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용수에게 그는 역사를 꽤 뚫는 눈과,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찬 인물로 보였다.

  조용수는 충무로의 한 다방에서 박진목을 만나 이영근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며 신문창간 계획을 털어놨다.

  “이 근처 충무로에 사무실을 하나 냈습니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섭니다. 이미 대중일보라고 등록도 했습니다. 발행인은 윤길중 의원으로 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소식은 들어 알고 있던 박진목은 조용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었다.

  “신문창간의 목적이 뭐냐, 또 자금이 되는가”

  조용수는 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즘의 세계정세를 보아도 그렇고 우리나라는 평화적 통일이 절대적 사명입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은 우리가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공산당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잘못된 인식을 계몽하고 또···지금 분열된 진보적 민주세력을 하나로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참 조용수의 말을 듣고 있던 박진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지적했다.

  “발행인을 윤길중씨로 했다면···윤길중씨가 핵심적 역할을 하는 사회대중당은 지금 분열돼 있지 않은가.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혁신의 특정계파가 발행인을 하면 널리 사람이 모이겠는가”

  조용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지난 7일 혁신계 민의원 참의원은 혁신구락부를 결성했고, 15일에 장건상 선생님이 혁신계의 단합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 이번 26일 범 혁신계 인사들은 물론, 평화적 자주통일을 위한 모임인 민족자주통일 협의회가 결성을 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분위기는 평화적 통일을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아직 혁신인사는 자신의 눈앞의 이익 때문에 통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신문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진목도 조용수의 생각에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그리고 뒤에서나마 열심히 돕겠다는 약속도 했다.

  12월 27일 민자통 준비위원회는 남북한 경제 문화 교류 및 서신교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뜨거웠던 1960년 한해가 저물었다.

  새해 들어 윤길중은 장건상과 추진하던 혁신정당을 파기하고 우파적 입장에서 새로운 혁신정당을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또 사회혁신당의 고정훈도 새로운 혁신정당을 추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월 8일, 장건상은 혁련계와 전 사회대중당 중도파를 모아 혁신당 결당 준비대회를 열어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유엔 협조 하에 통일, 영세중립국으로의 전환이라는 정강까지 채택했다. 바로 그날, 정순학은 민족자결의 원칙에서 조국이 통일되어야 한다며 조국통일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새해 들어 혁신세력의 분열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정치색채가 적은 민자통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각 혁신 정파마다 조금씩 다른 통일방법론에 어떠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1월 15일 민자통 준비위원회는 다음의 통일 선언 및 강령을 발표했다.

  - 통일선언서

  8·15 해방의 감격과 환희는 일장의 춘몽인양 유래 15년 동안 우리는 억압과 빈궁 속에서 허덕였고 겸하여 민족상잔의 일대 참극까지 겪어온 것이다.

  이는 실정의 누적과 민족자주역량의 결여 등에 기인된 바 크다 할 것이나 그 보다도 더 큰 근인은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이 분열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지상명령이며 최대의 염원인 통일성업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앞에는 고난과 민족적 수치만이 더한층 가중될 것이며 또한 6·25와 같은 비극이 다시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도 하나이며 민족도 하나이다. 수많은 동포들이 부모처자의 소식조차 몰라서 애절한 것이 오늘의 현상이며 문물이 상통되지 못하여 모든 사업은 위축일로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속일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우리는 외원에 의존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외원이 충족하다 할지라도 이는 영구한 지속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영구히 외원에 의존하는 민족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경제의 자립이 없는 곳에서 정치적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정치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국가의 독립이 있을 수 없다.

  이승만 독재자는 그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망국적인 북진론을 고창하였고 자신의 안일과 호화만에 급급한 일부 정치인들은 공상적 통일론을 제창하면서 시대의 요청이며 국제상식이 된 평화통일론을 짓밟고 있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국제정세는 평화노선을 지향하고 세계 각 약소국들은 속속 독립을 달성하여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통일독립국가로서 국제무대에 진출하지 못함을 통탄하는 바이다.

  수많은 선열의 흘린 피와 4월의 뿌린 피는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의 발전 민족장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이 정신에 따라 하루속히 통일성업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외세에만 좌우될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고 미·소 양국 및 국제의 공정한 협조를 촉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우유부단한 정부의 활동에만 맡기고 있을 것이 아니라 범 민족운동을 통하여 정부를 독려하고 유엔에 제청하는 등의 온갖 활동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당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서 민족역량을 총집결하는 민족민주통일 협의회를 구성을 준비하면서 3·1의 독립선언 정신에 입각하여 민족자주통일을 선언하는 바이다.

  전체민족은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깃발 아래로 !


  - 강령

1. 우리는 민족자주적이며 평화적 통일을 기한다

2. 우리는 민족자주역량의 총집결을 기한다

3. 우리는 민족자주의 처지에서 국제우호의 돈독을 기한다


  1차로 선출된 중앙준비위원 1천명의 명단이 함께 발표됐다. 중앙준비위원에는 김성숙, 서상일, 여운홍, 장건상, 최근우, 정화암 등의 혁신원로를 포함해, 고정훈, 김기철, 박래원, 송남헌, 신창균, 문희중, 박진, 이동화, 유병묵, 최백근, 윤길중 등의 혁신계 중진, 도예종(후에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당함) 이수병(역시 같은 사건으로 사형 당함) 김금수(후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자동(민족일보 기자) 정구호(후에 경향신문 사장) 등의 당시 젊은 층도 참가했다. 비단 이 단체는 혁신세력뿐만 아니라 조윤제 등 당시 4·19혁명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교수도 참여했다.

  물론 조용수도 여기에 참여했다. 사실 조용수는 이 민자통을 만드는 데 있어서 상당한 재원을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민자통의 아이디어는 이종률이 낸 것이다. 이종률은 비 정치적 국민운동기구를 구상해, 가입대상을 정부여당인사는 물론, 보수세력까지 포함하는 범 통일운동 단체를 구상했지만, 회원이 가입하는 과정에서 진보계 인사만 가입해 기구의 성격이 자연히 진보적 성격이 됐다. 이종률은 민자통이 이렇게 변질된 것에 아쉬움을 나타내며 그 후 자신도 활동이 소원해 졌다고 재판에서 말했다” <박진목 증언>

  하지만 일부 인사는 민자통이 너무 급진적인 노선을 갖고 있어 탈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고정훈, 이동화, 송남헌 등이 그런 사람이었다.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한 길’, 한울, 2000>



2. 신문 창간 막후


  61년 1월 20일경.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 10여명이 을지로 1가 아서원에 모였다. 서상일, 최근우, 박진목, 윤길중, 고정훈 등의 혁신계 인물과 이종률, 이동화, 주홍모, 이건호 교수, 조동필 교수, 송지영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절친한 안신규, 그리고 조용수 등이다. 이 자리는 신문의 제호와 임원진을 확정짓는 자리였다. 누군가 먼저 말문을 얼었다.

  “혁신하면 빨갱이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혁신계의 정치적 이념을 올바르게 심어주기 위해서 신문을 창간하려고 한 것입니다”

  회의는 부산대 이종률 교수가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이종률 교수가 이 모임에 참여한 것은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인연 때문이다. 이종률은 이영근이 죽산 조봉암이 구속되면서 부산으로 피신했을 때,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일본으로 밀항을 도왔던 인연이 있다.

  이종률은 이미 28년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중 우리말 연구회 사건으로 퇴당당하고, 학생운동회인 성진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36년 형평사운동을 배후에서 조정하다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게다가 4월 혁명 후 부산대 교수로서 청년재야 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을 지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조용수가 신문을 만든다고 했을 때, 이영근은 부산대 교수로 있는 이종률에게 창간작업을 도와주라고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또 조용수와 이종률은 이미 민자통을 만드는 데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였다.

  이종률은 신문의 성격을 미리 규정하고 나섰다.

  “이 신문은 민족적 즉 민족이 장래를 지향하는 신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건호 고대 교수는 이 회합에 참여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혁신 인물들인 것에 내심 놀랐다. 자신은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경복중학 동창으로 지난번 일본에 국제회의 참석차 갔을 때, 이영근을 만났다. 그때 이영근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온천에 조용수를 불러 인사를 시킨 적이 있어 이미 조용수와는 구면인 셈이다. 이 교수는 이영근이 도와달라고 해 이 자리에 참석했지만 영 불편했다. 그는 한마디만 하고 서둘러 나왔다.

  “신문은 일반적인 민족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건호는 아무래도 이 자리가 자신의 정서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신문의 제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화제에 올랐다.

  서상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호가 뭐 중요합니까. 대중일보로 등록을 했다니 그대로 가는 게 어떨까요”

  “대중일보라는 제호는 전에 있던 것인 데 아무 상관없는 우리가 다시 쓸 이유가 있을까요”

  “조양일보는 어떨까요”

  이런 저런 이름이 10여가지 거론됐다. 그러나 이거다 하고 딱 맘에 드는 제호는 없었다. 이종률과 서울대 주홍모 교수가 슬그머니 나갔다 들어왔다. 아마 이종률이 주홍모에게 무언가 언질을 주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주홍모는 제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중, 조양일보도 좋지만 민족의 개혁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다는 신문인데 민족일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종률이 거들고 나왔다.

  “좋습니다. 제호에 힘도 들어있고 또 지향하는 바를 뚜렷하고 나타낼 수 있는 제호라고 생각 합니다”

  모두 ‘민족일보’라는 제호에 찬성했다.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가 신문을 만들 것인가였다. 이종률은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신문을 키우려면 인선에서부터 폭을 넓혀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사장에 이인, 편집국장 고재욱, 필진으로 김팔봉, 조윤제, 이건호씨 등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종률은 자신이 주필을 맡겠다고 나섰다.

  박진목이 말문을 열었다.

  “대혁신계의 통합도 이 신문의 중요한 임무인데, 현직 사대당 당수가 발행인이 되면 무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존 혁신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새 인물을 영입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신문을 만드는 데 자신이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많았고, 혁신의 각 계파는 자신의 세력을 신문사에 심으려 치열하게 로비를 했다. 또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신문의 제작에 서로 참여하려고 애썼다.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사회당의 청년외곽단체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등 일부 재야단체는 몇몇 부장에 자신의 세력을 추천, 자신도 신문제작에 참여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여기도 혁신의 통합 못지않게 이견이 많았다. 사회당 최근우가 사장으로 추천되면 통사당 윤길중이 반대하고, 정당 당수가 사장으로 추천되면 민자통 쪽이나 교수들이 반대했다.

  사회대중당 이동화는 사상일을 사장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일본에 있는 이영근은 최근우를 사장으로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신문사를 실제로 만들고 있는 중요한 인물은 조용수였다. 일본에 있는 이영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용수는 자신이 추진하는 신문에 서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툼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렇지만 조용수는 원로 선배를 밀치고 앞으로 나설 처지가 아니였다. 그는 조용히 이 자리에서 논란을 들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누가 경영 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략 사장은 원로인 서상일로 하고, 지금까지 실무를 진행한 조용수가 상무 정도로 하자는 선에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회의가 끝나고 박진목은 안신규를 따로 만났다. 안신규는 박진목과 이영근이 서울에서 고생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안신규는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이영근과 가깝게 지냈다. 안신규는 이번 신문 창간에 있어서 이영근을 대리하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거 서로 사장을 하겠다고 난리인데 사람들 경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또 혁신통합운동을 하자는 데 자신의 계파이익만 생각하고 있으니”

  사업경험이 있는 안신규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이 사람들 지금 자신의 이름 생각만 하고 있어. 돈을 어떻게 만들고, 신문사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말야. 무조건 신문만 찍어내면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박진목은 이렇게 제안했다.

  “차제에 정말 신선한 인물을 사장으로 내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 생각에 조용수가 사장이 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네만. 지금 실제로 자금을 모으고 일을 추진하고 있으니 경영도 책임질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만한 사관과 양식을 가진 젊은이도 흔치 않네”

  안신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협의해 보겠네. 이영근은 내심 최근우를 사장으로 생각하고 있는 눈치던데”

  “내가 최근우와 서상일을 설득할 테니까 그건 염려 말게. 나는 조용수를 사장으로 추천할 테니까. 자네는 이영근에게 그렇게 연락을 해 두라구. 이영근도 반대는 하지 않을 거야”

  일은 이렇게 처리됐다.

  61년 1월 25일, 조용수는 자본금 5천만환으로 정식 주식회사 민족일보사를 등록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주당 5천환인 민족일보의 주식분포는 다음과 같아 실질적으로도 조용수의 회사였다. 서상일 1천주, 최근우 1천주, 윤길중 1천주, 조용수 5천2백주, 고정훈 5백주, 이종률 5백주, 안신규 5백주, 안 훈 3백주 계 1만주. 민족일보 주주·주식명단>


  민족일보 창간당시 조용수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저는 작년 여름 그 7·29 선거투쟁 때 일회 내일의 저의 소신을 피력하여 고교(高敎)와 찬동을 얻는 다행도 가졌거니와 애족선배 및 요우(僚友)일동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게 되었음이 지금 생각해도 황송하온 일이오며, 경제적 통치적 및 사회적으로 너무도 불리한 생활들을 하고 계시는 청송 전체 군민 대중들의 그 박복한 모습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집니다.

  원래 산전(山田)이 많고 약간의 평야가 있다손 치더라도 박토이며, 그리고 거기서 생산하는 양식과 소득을 나누는 모든 관계가 실질적 봉건 유제(遺制)의 속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또 이승만적 악정이 지속되는 조건 이외에 특히 이곳은 궁핍하고 도회지로부터 길이 멀게 되어 있는 등의 사정 때문에 군민대중들은 이제 극도로 가난하고 답답한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전체 조국을 민주적이며 통일적이며 부복(富福)스런 국가로 만들면서, 그 별의 하나로서의 우리 청송도 근대적이며 더 진보적인 지역이 되게 하고 거기서 부조전래의 순풍미속(淳風美俗)들이 새로운 단계에로 계승 발전되게 하고, 지방분권주의적 이익획득에 노력하고 아울러 향토애의 자조력과 분발심등에 의한 복지 청송을 건설해야 할줄 압니다.

  중앙에서의 전체 조국을 위한 활동과 지방에서의 구체적인 청송을 위한 활동이 어찌 상호 관련성이 없겠습니까. 먼 곳 여기 서울에 떨어져 있습니다만 배전의 교애(敎愛)와 협조를 주시옵기 삼가 바라옵니다.

  이 동안의 저의 소식 일말을 여쭈오면 ‘7·29’선거 때 저의 공천단체로 되었던 ‘사회대중당’은 해체되고 신명의의 당이 창립되었으나, 저는 거기에 가담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통일적이며 민주애족적인 당 하나를 쟁취적으로 건설해 낼 수 있으며, 그 당의 힘을 중핵세력으로 한 애족적이며 투쟁적인 민족전선적 전체조직을 세력적으로 강화 또는 창건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은 여전히 걱정해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번 이런 걱정들은 실천적으로 갖고서 수고하는 선배 및 요우(僚友)들의 일부가 중심이 되어 일간신문 ‘민족신문사’를 창립했으며 선배 및 요우들의 교도 밑에서 제가 그 대표취체역으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계도적 이론과 보도의 민족공기’라는 구호 밑에서 저희들 동인 일동은 애족적 성명(誠明)을 갖고서 분투할 것이오며, 저도 그중 한 사람으로서 또 사의 대외책임자로서 성심껏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교애(敎愛)가 계셔주시옵기 거듭 바라옵니다.

  끝으로 고당의 만복을 비옵고 예는 삼가 가추지 못하나이다.

1961년 1월  민족신문사 대표취체역

  <이 원고는 전체 8매인데 맨 앞 1매가 없는 상태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자신이 출마했던 청송 지역구민에게 보냈던 인사말인 듯한데, 신문을 만들게 된 조용수의 의지와 정치적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또 그때까지 민족일보는 가칭 ‘민족신문사’로 불렸던 것 같다>


  당시의 중역진으로 취체역 회장 서상일, 이사격인 취체역에 윤길중, 이종률, 고정훈, 상임감사에 안신규가 선임됐다. 주필 겸 편집국장은 이사인 이종률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민족일보의 주식회사 형태는 일반 주식회사와 조금 다른 정관을 가졌다고 한다.

  “민족일보는 일반 주식회사와 달리 정관에 신문발행의 책임을 상임 감사가 지게 되어 있다. 조용수 사장이 결재해도 감사실의 나에게 별도로 결재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사전에 상임감사의 승인이 없으면 어떤 사업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임감사인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안신규 증언. 그러나 민족일보의 정관을 보면 일반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대표취체역이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일단 진용을 갖추자 민족일보의 창간작업은 더욱 빨라졌다. 창간은 2·8 독립선언 기념일에 하기로 결정했고 민족일보가 지향하는 네 가지 사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첫째,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둘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셋째, 민족일보는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넷째, 민족일보는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이 네 가지 사시는 민족일보의 창간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솔직히 나타내고 있다.

  원래 계획했던 2월 8일 창간은 여러 가지 여건상 쉽지 않았다. 이 신문에 참여하려는 사람 대부분은 이름만 앞세운 것이지 실제 돈을 마련하고 일을 꾸려나가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월 29일. 드디어 민족일보라는 이름이 신문지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광고를 통해 신문의 제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4·19후 워낙 많은 신문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지만 부정을 고발하고, 근로대중의 이익과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 성격의 신문이 만들어 지기는 처음이다.


  <민족일보 창간에 즈음하여>

  이미 허다한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일보라 제호하는 또 하나의 일간신문을 세상에 내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는 이 신문이 발행되는 몇 가지 말씀할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흔히 신문은 경세의 목탁이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있으나 필연 이것은 정당한 평가일런지요. 일부분의 신문은 오늘날 그 소유자들과 집필자들에 의하여 부당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자기의 이익으로 생각하는 신문경영자, 집필자가 몇 사람이나 될런지 이것은 하나의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신문을 또 하나 늘릴 생각은 터럭 끝만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국토의 양단, 민족의 상상적 분열, 생활의 도탄, 사회악의 창궐, 이것을 광정(匡正)하는 것이 이 나라 이 백성의 이익이 되는 것이나, 이 점을 망각하거나 고의로 무관심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지려는 또 하나의 언론기관 민족일보는 이와 같은 현실을 자신의 문제로 확신하고 민족의 봉화가 될 것을 자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일보는 결코 어떤 개인, 어떤 정당정파의 이익을 위하여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이 나라와 이 나라 전 인민의 이익과 행복만을 위하여서만 그 활자 하나하나를 참되게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 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열열이 정력을 바치려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하는 민주적 애국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서 하루속히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절실히 염원하면서 선구적 구실을 담당할 것을 사양치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민족일보는 명칭 그대로 우리 민족의 대변자가 될 것만을 기도함으로 민족의 이익에 배치되는 모든 부정과 부패에 대하여는 가장 가열한 고발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할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오도하는 모든 비과학적 신비주의적 주장에 대하여는 예리한 감시자가 될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민족일보는 언제나 비정상적인 것과의 타협을 긍정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즉 민족일보는 혁신적이라고 불리 워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각오와 취지가 어떠한 열매를 열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은 오로지 독자 여러분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신문이 본질적으로 여러분의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일보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마찬가지로 넉넉지 못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지지와 편달을 얻어 앞날의 발전을 기하고자 할 따름 입니다“

<1961.1.29 민국일보 석간>

  이것은 민족일보의 태동을 알리는 일종의 예고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예고문과 함께 전국일원의 지사지국 설치 광고도 함께 실었다. 지사지국 모집 광고에는 민족일보의 필진을 함께 소개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조윤제(홍익대 교수. 4월 교수데모 주동) 송지영(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이동화(성균관대 교수, 사회대중당) 조동필(고려대 교수) 이건호(고려대 교수) 유병묵(중앙대 교수, 사회대중당) 고정훈(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박기준(朴琦俊) 주홍모(서울대 교수) 김철(金哲) 김병태(金炳台) 박창근(朴根昌)

  이들은 당시 진보적인 학자나 교수로 당시 지식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창간작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광고를 통해,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 민족일보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실 민족일보는 지사지국 모집에 있어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다. 부산지역 지국설치에는 무려 1천만환에 계약이 이뤄졌다. 말이 지국보증금이지 어떻게 보면 혁신운동에 대한 일종의 성금 성격을 띤 것이 사실이다. <안신규 증언>

  그러나 일은 순탄하게만 진행되지 않았다.



3. 장면정권의 음모


  61년 1월. 뜨거웠던 혁명의 기운이 차가운 대지위에 식으면서 짙은 김을 내뿜었다. 장면총리는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조재천 법무장관과 현석호 내무장관을 만났다. 장면총리는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요즘 소문 듣고 있어요?”

조재천 법무장관과 현석호 내무장관은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요즘 일부 혁신세력이 조총련의 자금지원을 받아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말입니다”

  장면의 말이 떨어지자 현석호 내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거요.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쪽 사람이 모여 회합을 가졌는데 무슨 신문을 만들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신문을 만드는 데 드는 돈을 누가 댈 것이고, 또 어떤 신문을 만드느냐가 중요한거요. 일본에서 반한 활동을 하는 이영근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돈을 댄다는 거 아닙니까”

  조재천 법무장관이 말문을 열었다.

  “저도 이영근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데, 그 사람이 북쪽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겠습니다. 검찰에서도 지난번 조봉암 사건 때 조사를 했는데, 그런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어요. 물론 법원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무죄가 됐지요. 아마 지금 그 사람 일본에서 조그만 주간신문을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면은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국내에서 도망가서 일본에서 무슨 돈으로 어떻게 지냈는지. 그런 사람이 조총련에 다리를 놓아 국내 혁신계와 연계해 모종의 음모를 꾸밀 수도 있잖아요. 또 그 사람은 원래 우리와 성향이 달라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만들면 분명, 우리한데 이로울 것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대책을 마련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너무 드러나게 하면 말 많은 혁신세력이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떠들테니 조심스럽게 내사 하세요”

  현석호 내무장관은 청사로 돌아오자마자 김포공항 경비경찰대장을 불렀다.

  “요즘 일부 혁신세력이 일본의 조총련과 연계해 국내에서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오. 특히 재작년 일본으로 밀항했던 이영근이라는 사람을 주목하시오. 일본을 오가는 혁신계 인사의 내사를 강화하고. 꼭 공항뿐만 아니라 부산의 항구도 각별히 체크하도록 하세요”

  법무부 청사로 돌아 온 조재천 법무장관은 이태희 검찰총장을 불렀다.

  “요즘 혁신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서 특별한 게 있습니까”

  이태희 검찰총장은 몇 가지 서류를 챙기면서 말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그래도 잠잠합니다. 혁신세력 내부 갈등문제에 정신이 없고. 그런데 문제는 학원가입니다. 봄이 되면 혁신세력과 일부 학생이 연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건 그때 문제고. 지금 혁신세력이 신문을 만들려고 한다는 데, 그 문제가 우선 급합니다. 벌써 등록까지 마쳤는데”

이태희 검찰총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신문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생기고, 돈이 없어도 신문사를 차릴 수 있는 데, 혁신세력이 신문을 만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자금줄인 바로 이영근이라는 사람이 문제예요. 그리고 이영근이 조총련과 연계되어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나온 신문이 어떤 신문이 될 거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이태희 검찰총장은 그제서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영근이라는 사람은 바로 2년 전,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 때 구속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정치적 구속이었지 별다른 혐의는 검찰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총리의 지시입니다. 특별수사부를 만들어 일본에 있는 이영근의 최근 행적에 대해 조사를 해보세요. 특히 이영근 그 차체가 아니라 이영근과 조총련과 연계를 밝히는 것이 중요 합니다”

  “알겠습니다. 은밀히 수사 하겠습니다”

  “조심할 것은 은밀히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미 국회의원이나 혁신계 인사 상당부분 관계되어 있으니까 섣불리 다뤘다간 말만 많아집니다. 한가지, 이 내사는 치안국에도 별도 공작팀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세요”

  민족일보 관계자에 대한 은밀한 내사가 시작됐다. 김창욱 검사가 그 실무를 맡았다. 동태는 물론 서신까지 감시 대상이 됐다. 특히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접촉은 중요한 체크사항이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이영근이 조용수에게 보낸 편지가 공항에서 압수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창욱 검사와 치안국 공작대는 3회에 걸쳐 일본에 특파됐다. 그들의 수사초점은 이영근과 조총련과의 관계를 캐고,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유입되는가 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모아졌다. 수사팀은 일본의 흥신소와 사설탐정까지 동원해 이영근의 뒷조사를 실시했다.

  5·16후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이용택(전 국회의원)증언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민족일보는 이미 5·16 나기전인 장면 정권부터 특별검찰부 수사국에서 내사를 하던 사건이었다. 우리는 5·16후 그 사건을 그대로 인계받아 수사를 계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특별수사부는 이영근이 조총련과 관련돼 있다는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수사는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오히려 1959년 1월 21일 조총련 중앙위원회가 각 지부에 하달한 ‘민주신문’(통일조선신문 이전 제호) 분쇄 지시공문만 확인했을 뿐이다. 조총련이 이영근을 통해 조용수에게 자금을 전달했다면 왜 조총련이 이영근이 운영하는 ‘민주신문’을 분쇄하라는 통보를 각 지부에 보냈을까.

  이것은 이영근과 조총련과의 무관함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였지만 장면은 어떻든 혁신계 신문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냥 좌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무턱대고 신문발행을 중단시킬 수도 없는 것이었다. 민족일보가 창간 작업을 진행시키는 것에 비례해 민족일보 비밀 내사팀은 초조해 졌다.

  이런 가운데 치안국에서 민족일보 내사설이 붉어져 나왔다. 결국 민족일보문제는 국회에서 거론되기 이르렀다.



4. 정치쟁점 된 민족일보


  1월 30일, 국회 민의원 본회의장. 대정부 질문이 막바지에 사회를 보던 이영준(李榮俊) 부의장이 말을 열었다.

  “잠깐 의원 여러분께 양해를 얻고자 하는 것은, 김준섭 의원이 간단히 한마디 물어보려고 하는 특별한 발언청구가 있어서 지금 발언권을 드립니다. 김준섭 의원 나오세요”

  김준섭 의원은 준비한 메모지를 챙겨 단상에 올랐다. 김 의원은 서북청년단 출신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통했다.

  “의장님께서 시간이 없고 여러분께서도 지금 지쳐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발언을 삼가라고 말씀이 있었지만, 제가 말씀하고저 하는 것은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는가, 중대한 위기를 내포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면서 우선 몇 가지 말씀을 올립니다…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을 집행당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했고 6·25 동란 당시에도 부역을 한 이모가 입건 구속되어 2심에서 5년 이라는 실형을 받았습니다. 그이가 병보석으로 가출옥 해가지고… 일본으로 탈출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조총련계가 발간하는 통일조선신문을 운영하고 있고, 그 후 막대한 자금을 정체불명의 단체로부터 받아가지고 한국에 있는 공작원에게 전달했고, 또 그간 각종 선거에 있어서 모모인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했습니다”

  김준섭 의원은 물을 한 컵 마시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작년 11월 15일 그이가 조모라는 사람을 통해서 편지를 한국에 있는 모씨에게다 전달하다 압수되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 편지내역을 본다 할 것 같으면 수억을 보내는 데 있어서 누구를 얼마주고, 또 신문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인사 관계를 어떻게 하라는 등등 기타 불온한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그 후 모정파의 국회의원이 이것을 갖다가, 관계 당국에 가서 그 편지를 내달라 갖은 수단방법을 쓰고 있는 것을 듣고, 내무장관을 만나러 갔더니 마침 없어서 제가 모 차관에게 그 편지의 내역에 대하여 수사가 전개되고 있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또 그이에게 그 편지를 내주면 증거인멸이 될 테이니까 주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했더니 그이가 그다지 신통하게 대답을 하지 않아서 아마 이것이 수사관계상 기밀을 요하는 사안이겠거니 생각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새 듣는 바에 의할 것 같으면, 그 편지를 그 모 국회의원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중대 사건에 있어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그 편지를 갖다가…”

  ‘그 국회의원이 누구요’ ‘이름 공개하시오’하는 소리가 의석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김준섭 의원은 수사기밀상, 또 장관의 답변을 들은 후에 밝히겠다면서 발언을 계속했다.

  “…자 그러면 편지수교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후에 그 편지내역에 대해서 현재 어떠한 수사가 전개되고 있는가, 여기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또 지금 그 계열의 신문사는 현재 어떠어떠한 신문사라고 간판까지 도하 중심지에 붙여, 인선까지 완료해 가지고 일간 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일단 발간할 것 같으면 폐간하기가 어려운 이러한 신문사가 나온다 할 것 같으면 대한민국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통탄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무장관께서는 대공사찰에, 이 치안의 요체인 대공사찰에 대하여 중점적이고 강력한 시책을 해 주시기를 부탁해 마지 않습니다”

  민족일보의 창간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영근, 그리고 실제 신문사를 만들고 있는 조용수, 그리고 현역 국회의원으로 민족일보에 관여해 온 윤길중 의원 등을 거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현돈 내무장관이 답변에 나섰다.

  “…이 문제는 아마 내무 책임자로서 종래에 답변하던 그런 심경보다는 저 자신으로도 중대한 심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방책이 무었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직 제가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기에 내무분과위원회와 더불어 최종 결론을 내린 후에… 이 수사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히 검토한 후에 답변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민의원 속기록>


  국회 본회의 석상에서 있은 이 발언은 이튿날인 31일 각 조간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그 31일자 신문에는 공교롭게도 민족일보의 창간을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나란히 실렸다. 그 신문이 민족일보를 지칭하는 것이고 거기에 관련된 인물들이 누구라는 것은 창간광고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민족일보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발언의 대상인물인 윤길중은 마산에 출장 중이었다. 서울로 올라 온 윤길중은 신문을 보고 조용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오늘 아침 신문 보았는가. 김준섭, 그 사람 미친 사람 아닌가”

  전화상으로 들리는 윤길중의 목소리는 상당히 흥분된 상태였다. 조용수도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봤습니다. 편지를 전했다는 11월 15일이라면,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 그 사람, 무슨 근거로 내가 조총련의 자금을 가지고 신문을 만든다고 국회에서 발언을 합니까. 윤 의원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조건 상대를 빨갱이로 모는 작태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서글픕니다. 지금 해명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네. 보수세력이 순순히 신문을 만들게 놔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하지 않았는가”

  전화를 끊은 윤길중은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역시 본회의에서 신상발언을 신청했다.

  “새로이 발간하려는 민족일보는 혁신유지들의 자금으로 설립된 것일 뿐, 결코 재일 조련계의 자금이 유입되거나, 그들의 조종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일본에 있는 민족적 입장의 교포들 가운데 한국에서도 혁신계를 지지하는 신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조용수는 거류민단에서 활약하던 청년으로 재일교포 북송반대에 압장 섰던 사람이다. 30일 김준섭 의원의 발언은 진보당을 공산당으로 몰았던 자유당 정권의 수법과 같은 것으로, 혁신지를 말살하려는 음모이며 그 진부가 백일하에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날 국회내무위원회에서 신현돈 내무장관은 전날 발언한 김준섭 의원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면서, 문제의 편지는 수사도중에 있어 나중에 발표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 이튿날인 2월 1일, 시경 정보과에서는 ‘조련계의 자금 일부가 민족일보사로 흘러갔다는 단서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에는 치안국에서도 같은 수사를 했기 때문에 수사를 치안국으로 일원화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서서히 민족일보로 사정의 칼날이 향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수사당국이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수는 민족일보와 자신에게 대한 의혹을 해명하는 성명서를 각 신문에 실었다. 해명이 아니라 음해 세력에 대한 반격서였다.


  - 민족일보를 음해함에 반격하여

  재작 1월 30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민주당 소속 김준섭 의원은 현재 서울에서 조련계 정치자금이 들어와 있고, 그 자금의 일부로 일간지의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이 김 의원의 발언이 무엇을 기도함인가. 그것을 여기에서 밝히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항간에서는 그 일간지라는 것이 ‘민족일보’를 가르쳐 말한 것이라고 유언되고 있고, 또 작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통사당의 윤길중 의원의 신상발언을 통하여 ‘민족일보’가 구체적으로 문제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음에 우리는 사실을 밝힐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생이 대표 취체역으로서 2월 8일경,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상에서 그 지위가 빛나기도 한 ‘2.8 민족독립선언’ 기념일을 전후하여 창간호를 내려고 미력이나마 노력을 다하고 있는 ‘민족일보’는 전 민족의 이익과 행복만을 위하고 양단된 조국의 서러움을 하루속히 지양시키는 민족의 공지가 될 것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간이전부터 많은 분들의 기대를 받기도 하며,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지나친 미움과 중상을 받기도 한다.

  만약 전기 김 의원의 발언이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일보’를 지적한 것이라면, 그것은 후자의 소행밖에 더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 ‘민족일보’의 자금은 결코 김 의원이 허무맹랑한 망언을 한 것과 같이 조련계의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본지 운영자금 구성에 있어서 재일 일본인 교포들의 민족애에 불타는 깨끗한 성금들도 물론 도움이 될 것이거니와, 미주 구주 기타 전체 해외동포들의 성금도 그 일부를 차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방법으로써 조달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같은 소신은 생이 재일시 민족진영의 한 사람으로서 맏은 바 소임을 다하여 거류민단 및 그 주변의 민족적 양심기업가들로부터 두터운 애호와 후의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생은 이 기회에 애족선배 및 국내언론계 여러분에게 삼가 일언을 드리려 한다. 종래 거류민단에서 일하고 있던 저희들은 4월 혁명 이후 그 각오를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첫째 우리들은 민족을 팔아 사복을 채우고 모함을 능사로 하여 ‘조작 빨갱이’들을 만드는 등의 이승만적 수법은 다시 이 나라에서 적용되지 않게끔 전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울러서 민족분열의 비애에서 제기된 북송문제를 경험한 우리는 평화적이며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위하여 전생명력을 받쳐서 싸우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애절하고 비장한 각오 밑에서 모국에 찾아와 혁명선배 및 동지들의 교시와 협조를 받아 가면서 생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국내에서 마련하여 ‘민족일보’ 창간에 일로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자임하고 있는바 ‘민족일보’있는 곳에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지 못할 것이며, 일절의 사이비 정치이론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일보’있는 곳에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국민대중의 이익을 횡령하고 애국정치인들을 모함하는 자들의 날개가 구겨질 것이다. 동포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수호와 편달이 있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1961.1.31

  민족일보사 대표 취체역    조용수


  조용수가 사회와 정치권에 쏜 첫 번째 선전포고였다.

  민족일보에 대한 국회에서의 공방은 계속됐다. 2월 2일 오전 10시, 처음 민족일보를 국회에서 거론했던 김준섭 의원이 또 신상발언을 얻어 단상에 섰다. 그는 전날 윤길중 의원의 반박에 적지 않게 흥분했다. 그는 ‘중요한 안건이 많은데 이렇게 일신상의 발언을 허락한데 감사한다’며 발언을 시작했다.

  “…그런데 도둑놈이 제발 저리다는 격으로 제가 윤 의원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데 제 하필 뭐가 그리 안타까워 올라와서 자기가 그 편지에 연관되어 있다느니, 민족신문을 하는데 일보를 하는데 뭐 조련계 운운을 하느니, 이것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또 윤 의원이 말은 조련계가 아니고 거류민단계의 자금이 왔다는 것인지 안 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발언을 했어요. 또 일본에서 조모라는 자가 반공을 위해서 결사대를 조직했다고 하니, 그것 또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진보당이 우리도 반공을 한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선전과 똑 같지 않고 무엇인가 말입니다”

  김준섭은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사회를 보던 서민호 부의장이 ‘될 수 있으면 범위를 좁히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김 의원은 발언을 계속했다. 국무위원석에 앉아있는 장면총리는 이 논쟁이 재미있다는 듯이 느긋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런 의미에서 윤 의원에게 몇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그 편지에 윤 의원이 관련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 관련되어 있으니까 윤 의원이 관계고위층에 가서 달라고 했는가, 달라고 했다면 몇 번 어디서 또 공갈 협박을 받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문제의 송금편지는 내무장관은 보관하고 비밀리에 수사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편지의 내막을 아는가 말입니다… 조용수가 조련계가 아니고 민단계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다 아는지 모르지만 여러분,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도 마지막까지 자기가 간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음모조작이라면 공산당식 말입니까 혁신세력의 말입니까…”

  이어서 윤길중 의원이 다시 단상에 올라왔다.

  “…민족일보라고 하는 것은 본의원이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무슨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국내외에 퍼뜨리려고 하는 이 자체가 음모조작의 형태가 아니냐는 그런 형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직당국에서 해명을 한다든지 하지, 어떤 불온단체에서 나왔다든지 조련계에서 나왔다든지 이북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든지 하는 범죄적인 요소를 들어가지고 문제를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그냥 아무 애기나 해서 설왕설래, 횡설수설… 자 죽산 조봉암씨가 간첩으로 몰려 돌아갔다. 그 밑에 있던 비서가 어떻게 되었다. 비서가 어떻게 되면, 그가 비서였다는 것만 입증되면 그것이 조련계가 되고 불온단체가 되는 것입니까. 또 재일교포들, 그 관계가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있으면 불온단체가 되고 불온문서가 됩니까. 문제를 어떤 범죄라든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예시하지 아니하고, 그런 막연한 풍설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음모조작이 아니냐… 만일 죄가 있다면 사직당국에서 구체적 범죄사실을 내가지고 잡아가지 왜 국회의사당에서 논란이 되는 것입니까…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지난날에도 싸워왔고, 오늘날에도 뒤지지 않게 싸울 용의가…”

  “잠깐 계세요. 아까 이미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하여 미진한 바가 있으면 정식으로 동의안을 내셔 가지고, 이 다음이라도 토의할 기회가 얼마든지…”

  사회를 보고 있던 서민호 부의장이 만류하고 나섰다.

  이번에는 박권희 의원이 단상까지 쫓아 올라가서 격렬한 기세로 신상발언 신청했다. 서민호 부의장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소리를 쳤다.

  “가만히 계세요. 가만히 계세요. 무슨 협박입니까. 이미 여러분께서 요청해서 나와 계신 장 총리를 비롯해…”

  박 의원도 지지 않았다. 박 의원은 크게 소리쳤다.

  “개인의 신상에 관한 것입니다”

  서민호부의장은 조금 수그러드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면 개인에 관한 신상발언이라 하므로. 만일 이 문제에 대한 말씀이 있을 때에는 발언을 중지시킬테니 그렇게 아시고 박 의원, 이제 발언 드립니다”

  발언을 끝내고 의석에 앉아있던 김준섭 의원은 박권희 의원에게 발언기회를 준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그가 ‘이게 뭐요’ 소리치면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겨우 서민호 부의장의 진정으로 조용해진 의석을 향해 박권희 의원이 입을 열었다.

  “선배의원들 중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본 의원은 작년 6월말까지 일본에 있다가 온 …아무 의원이 말씀한 바와 같이 재일교포의 한 사람이올시다. 우리 60만 교포가 먼 곳에서 조국을 바라보고, 일본사회에서 천대를 받아가면서 또 지난 자유당 정권하에서 서자취급을 받아가면서도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정부의 잘못과 일본놈들의 천대로 60만 교포 중에는 본의 아니게 공산당의 감언에 따라서 이 시간에도 북을 향하고 있고 우리가 모든 힘을 기울여 북송을 저지하더라도 아직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조국에 와서 어떤 사업을 하나 하려고 하든지, 혹은 정계에 나가서 활동을 하려고 할 때에 반드시 친일파니 빨갱이니 조련계니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사직당국이나 김 의원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내서 그 사람을 처단할 것이지 통틀어 교포들이 나와서 어떠한 선의적으로… 이 나라 부흥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혼동하지 말아주십시오. 애달프고 애절한 교포의 심경을 안다면 앞서와 같이 원내에서 허무맹랑하게 고발하는 일이 없도록 교포의 한사람으로 부탁드립니다”

  국회에서의 민족일보에 대한 공방은 표면적으로는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됐다. 그러나 이날 국무위원석 맨 앞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면 총리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그 후에 드러난다.

  그날 조용수와 윤길중, 안신규, 김기철, 이명하 등 일행은 함경도 할머니가 하는 ‘아바이집’에 가서 밤새 술을 마셨다. 일행 중 젊은 조용수는 단연 술집의 여급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얼굴도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호쾌한 태도며, 게다가 구성지게 부르는 그의 노래는 단연 인기 최고였다.

  “서귀포 파도소리에 물새가 운다.”

  그날 조용수는 자신의 애창곡인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불렀다.

  김준섭 의원은 그 후 당시 폭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누가 사주해 폭로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적 증거가 있던 것도 아니다. 그때 민족일보에 대한 그런 소문이 많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질의했다”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