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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JP, 회고록 안 쓰나 못쓰나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4)

JP, 회고록 안 쓰나 못쓰나

 

김종필 전 국무총리(JP)1210일 오랜만에 국회에 돌아왔다. 역대 최다선 의원(9) 의원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호를 딴 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87JP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된다. 그가 말한 생로병사중에서 생로병까지 왔다는 말은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6년 만에 국회에 돌아온 JP’가 한 이 말은 일면 비장하게 들린다.


그가 이번에 국회에 돌아온 것은 510개월만이라고 한다. ‘돌아온이라는 말은 JP에게 낮설지 않은 단어다. ‘돌아왔다가 익숙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주 갔다는 말이다. 그의 정치를 자세히 보면 외유를 떠났다 돌아오거나, 정치판을 떠났다 돌아오거나, 결별했다 다시 만나는 등 떠남과 돌아옴이 유독 많다.


1960년 군 하극상 사건으로 강제 전역했다가 돌아온 것이나, 1963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했다가 돌아온 것, 1968년 박정희를 넘보다 정계를 은퇴했다 돌아온 것, YS(김영삼)에게 토사구팽 됐다가 복귀해 DJ(김대중)와 연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번 안보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보는신조를 중시했던 우리 정치문화와 달랐다.

 



사진은 그 유명한 돌아온 JP’ 사진으로 19631023일 김포공항에 내리는 JP와 그 부인 박영옥씨(박정희의 조카 딸)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한일협정 체결을 지휘하던 그가 자의 반 타의반망명 아닌 외유길에 올랐다 귀국하는 것이다. 부인의 짧은 미니스커트가 인상적이다.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로 국민에게 '충격'을 준 것이 이보다 한참 후인 1967년이다.


돌아온(떠난)’ ‘자의반(타의반)’ JP의 수식어 대부분은 분명하고 명징한 용어가 아니다. 앞서 평가대로 그의 삶이 매우 애매하며, 이중적이며, 심지어 미스터리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그는 국회의원을 9번 했고, 총리, 대권주자로도 꼽혀 완전히 국민들에게 발가벗긴정치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개인적 삶은 지금도 베일에 가린 점이 많다. 충남 부여에서 그의 가족의 삶이나, 해방직후 경성제대 재학 시 활동, 그리고 최고 명문대 학생에서 13연대 사병으로 추락한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육사 입학 후1950년대 미국 유학시절이나, 박정희를 만나 조카사위가 되는 과정도 그렇다.


그는 또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중요하고도 비밀스런 역할을 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민족일보 사건이나, 황태성 사건을 주도한 것에 그는 아직까지 분명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유명한 일본 외상 오히라와 한일협정 체결, 이후 3선 개헌이나, 유신을 거쳐 노태우와 3당 합당, 김대중과 DJP연대 등 숱한 현대사의 고비에 대해서도 그 과정을 소상히 밝히지 않았다.


현대사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진 기자에게 JP는 정말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는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나 현대 정치사를 연구하거나 기록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중요 사건을 그가 직접 주도했거나, 최소한 그 핵심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자는 JP는 지금쯤 회고록을 쓰고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사과, 그리고 최소한 후학에게 대한 마지막봉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9번 지내고 국무총리를 몇 번씩 지낸 사람이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물론 솔직한 회고록이 최상이지만 회고록에 자신을 미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회고록을 검증하는 후학들이 있고, 그것은(회고록의 진위는) 자신에 대한 마지막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JP는 매우 실망스런 얘기를 했다.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쓸 얘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일까? 워낙 비밀이 많아 가슴에 묻고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JP는 너무나 단견이다. 회고록은 자신만의 얘기가 아닌 역사의 진실의 규명하고, 빈틈을 메꾸고, 또 풍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공직에 있던 사람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후학들에게, 사회에,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심지어 의무이기도 하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회고록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의무를 방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