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3)
박창신 신부와 지학순 신부
가톨릭과 박근혜 정권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4일 ‘저항은 믿음의 맥박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들은 “관권 부정선거에 고백하고 대통령의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했는데 불통과 독선,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는 공포정치의 수명은 길지 않다”고 일갈했다.
그동안 숱한 학생, 교수, 원로들의 시국선언에도 오불관언,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국정을 운영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박창신 신부의 퇴진요구에 파르르 떨며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청와대, 법무부, 보수언론이 난리를 떨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종북구현사제단’으로 매도됐다. 이에 사제들은 “사제단에까지 이념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 한국천주교회를 심히 모독하고 깊은 상처를 줬다”고 비판했다.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는 말은 유신시대 박 대통령의 부친이 자주 쓰던 말이다. 특히 가톨릭 사제에 대한 사법처리는 정권의 거의 막장인 유신시대를 억지로 떠받치던 긴급조치 상황에나 있던 일이다.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지 1년도 안돼 40여 년 전 아버지 시대의 모습을 연출할지 누가 알았을까.
가톨릭과 박 대통령 집안은 사연이 깊다. 40년전 원주교구에 지학순 주교가 있었다. 그는 유신정권은 무효이며 긴급조치를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하며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번 박창신 신부와 비슷하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를 내란과 정부전복 단체에 자금을 지원해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구속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그해 9월 11일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은 그래서 생겨났다. 본격적인 가톨릭의 현실참여 운동이 전개됐고, 세계 가톨릭도 동조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물론 로마 교황청도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국내의 저항과 국제적 비난에 직면한 박정희는 결국 지 주교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사진은 바로 지 주교의 석방 당시 모습이다. 주변에 외국인 신부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 사태에 로마 교황청이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맨 오른쪽 김수한 추기경의 젊은 모습이 새삼스럽다.
박정희 정권은 실체도 없는 민청학련 사건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조작, 유신정권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호재로 활용했다. 이것은 이후 재심 등을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지금 정부는 그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배상을 하고 있다.
지금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진보당에 대한 해산 신청을 하고, 남북교류 단체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는 것은 40년 전 수법 그대로이다. 당시 유신이라는 정통성이 없는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대선 부정선거 논란으로 확산되는 정통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박 대통령은 부친으로부터 배운 정치를 40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박창신 신부를 구속할 것인가. 사제단은 ‘순교자적 자세로 저항 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한민국 정치는 이제 막장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유신독재의 비참한 결말’에서 왜 교훈을 얻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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