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5)
노무현에게 ‘골 지른’ 기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부림사건 변론 모습을 그린 영화 ‘변호인’이 개봉됐습니다. 이 영화에 관객이 몰려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부산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을 고문, 간첩으로 조작한 요즘으로 치면 종북몰이 사건입니다. 이 사건 변론을 통해 노무현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진=노무현 재단>
사진은 부산지역 인권 변호사로 1987년 6월 18일 부산 민주항쟁 시위중 사망한 고 이태춘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부산 거리를 행진하는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왼쪽)의 모습입니다. 마스크를 썼지만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이들의 자세가 비장합니다. 사실 서울에서도 큰 시국사건이 많았고 인권 변호사가 즐비했던 시절, 지방 부산에서 활동하던 노무현 변호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어려움을 딛고 중앙정치 무대에서 당당히 대권을 거머쥐었지요. 그럴 수 있던 요소는 뭐였을까요?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기자는 출입기자였습니다. 그때 저는 해양연구원이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특종하는 등 해양수산부를 매우 골치 아프게 하는 기자였습니다. 2000년 12월 21일 해양수산부 기자단 망년회 자리였습니다. 당시 해양수산부는 충정로 동아일보사 건물에 있었고, 망년회는 서대문 화양극장(현재는 헐렸음) 뒤 장보고수산센터였습니다. 당시 해양부 회식은 양식어민을 도와야 한다며 횟집, 그것도 비싼 일식집 아닌 막회집에서 했습니다.
그때 노 장관은 백세주를 좋아했습니다. 좀 흥이 나면 백세주에 소주를 탄 ‘50세주’를 마셨지요. 그 때 노 장관은 차관이하 주요 실국장을 모두 대동하고 호기 있게 기자들과 백세주를 마셨습니다. 그때 저는 기자단 간사가 아니었지만 노 장관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노 장관과 안면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때 술잔이 몇 번이 돈 후 제가 노 장관에게 ‘골지르는 얘기’를 했습니다. 마침 그날 아침 민주당 안동선 의원이 김중권 대표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정당 출신 김중권을 대표로 임명하자, 안 의원이 ‘집권세력의 정통성이 전혀 없는 인물’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던 인물’이라고 쓴 소리를 한 그날이었습니다.
내가 '안동선 의원이 바른 말을 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이 뭐 대단한 감투라고 김중권 대표 같은 사람 밑에서 그러고 있느냐. 그 사람(김중권) 과거 노무현 장관 대우조선 노사분규 3자 개입으로 구속될 때 민정당 법사위원장 아니었냐’ ‘당신의 변호사 자격을 정지시킨 사람이 바로 그 사람’라고 계속 골을 질렀습니다. 노 장관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한참 듣더니, 덥썩 제 손을 잡으며 술잔을 권하면서 “원 동지, 맞소, 나 김중권 같이 기회주의적인 사람 존경하지 않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노무현의 당대표 비난 발언은 바로 저와 노 장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권하며 김중권과 민정당, 심지어 옛날 공화당 후신이던 자민련 세력까지 싸잡아 DJP 연대를 비난했습니다. 다른 기자와 공무원들은 이를 재미있다는 듯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저쪽 구석에 않아있던 동아일보 김동원 기자가 은근슬쩍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 술 먹다 말고 회사로 뛰어가 이 내용을 기사로 썼지요. 저와 노 장관은 이것도 모르고 실컷 정치 얘기를 하고 2차 노래방까지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 장관과 저의 발언은 동아일보 1면, 5면에 걸쳐 실렸습니다. 다른 신문도 모두 물을 먹었지요. 정작 나와 노 장관의 대화록이었는데, 내 얘기는 없고 전부 노 장관이 한 얘기로 돼 있더군요. 사실 저와 노장관이 서로 죽이 맞아 얘기한 것이니 동아일보가 오보한 것이라 할 수도 없지요. 물먹은 저는 이 건으로 편집국장에게 크게 혼났습니다. (친한 사람과 마주보고 술 먹으며 한 얘기라도 기사거리가 되면 즉각 써야 하는 것이 기자의 숙명입니다)
이후 오히려 노 장관과 친해졌습니다. ‘장관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라며 빈정거린 기자의 객기에 솔직한 자기 심경을 토로했던 인간 노무현이 훨씬 훌륭했던 것이지요. 아마 노무현이 지방 부산의 한 인권변호사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솔직함' 그것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것 말고 인간 노무현과 다른 여러 가지 인연이 있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밝히겠습니다. 영화 ‘변호인’ 꼭 보십시오.(저는 두 대목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돼지 국밥을 먹고 돈이 없어 도망쳐 바다에서 토하는 장면과 마지막 법정에서 온몸으로 진실을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 참고로 요즘 대통령에 대한 막말 논란이 있는데, 새누리당(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훨씬 심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제가 쓴 칼럼을 소개합니다.
<정동탑> 우리 시대의 마키아벨리
[경향신문]|2003-09-27|06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흔히 '마키아벨리' 혹은 '마키아벨리즘' 하면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정치를 일컫는 말로 통용된다. 마키아벨리처럼 철저하게 '악의 화신'으로 전락한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그는 수백 년간 모든 악의 근원이며 음흉한 정치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로마교황청은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을 정도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일부계층의 행태도 이와 유사한 느낌이다. 야당과 일부 언론, 극우단체는 노대통령을 모든 국가위기의 원인 제공자이며 혼란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노 정권이 보여주는 국정운영 행태는 과거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어렵다. 청와대라는 권력의 핵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통제력에 익숙한 사람에게 지금은 국정난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동안 학맥과 인맥으로 엮어 알짜 보직을 나눠 챙기던 관료에게 지금의 파격 인사는 졸속 인사로 보일 뿐이다. 뒤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얻는 데 익숙한 기업은 현 정부가 '미숙아'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충격에 위기감까지 느낄 것이다. 검찰이 여당 대표를 잡아 넣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보는 정치인에게는 심각한 충격일 것이다. 부정확한 사실로 시대적 공론을 모으기보다 특정 이익을 추구하던 일부 언론의 입장에선 도전이다. 한반도에 전쟁이 재발하건 말건 남북긴장으로 이득을 보던 사람들에게 주변은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보일 뿐이다.
이런 사람의 눈에 노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닌 모든 국가위기의 원인 제공자이며 혼란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중세교회가 마키아벨리를 모든 악의 화신으로 규정한 것과 일면 비슷하다.
중세교회가 마키아벨리를 그토록 철저하게 짓밟은 이유는 간단했다. 마키아벨리는 중세 암흑기에서 고대 로마의 찬란한 영광을 르네상스라는 시대조류를 통해 이탈리아에 재건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가졌다. 그 방법으로 권력은 곧 교회라는 당시의 '진리 아닌 진리'에 도전한 것이다.
지금 노정권은 수십년간 우리사회를 지배하던 '진리 아닌 진리'에 도전하고 있다. 그 진리 아닌 진리는 무소불위의 청와대, 살인자를 영웅으로 둔갑시킨 국가정보기관, 정치권력의 시녀 소리를 들었던 검찰, 남북 대결국면으로 이득을 보는 특정세력, 경쟁력 확대보다 정치자금을 통한 특혜에 관심이 많은 기업, 실력보다 학벌이면 출세가 보장되는 사회 등등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은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이런 고질적인 구질서를 혁파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구질서를 혁파하겠다고 달려든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중세 교회에 도전했다가 수백년간 악인으로 낙인찍힌 마키아벨리처럼 구질서의 집요한 저항과 역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도 "아직까지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던 길을 택하는 것이 두렵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의 이 고백은 불행히 적중했지만 그의 시대정신은 궁극적으로 옳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지금 '현대 정치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행스러운 일은 노정권은 마키아벨리보다 쉬운 싸움을 한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힘을 키우는 방법으로 구질서와 싸웠다면 노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방법으로 구질서와 맞서기 때문이다. 내것을 버리겠다는 데에는 누구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노대통령은 이미 '버리는 승부'에 달관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래서 노대통령을 가리켜 '바보 노무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를 건 대결에서 바보가 아닌 철저히 마키아벨리적이어야 한다. 상대는 여전히 강하고 또 집요하다. 게다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권력자를 앞으로 다시 만들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원희복 지방자치부 차장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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