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동탑

남북은 하나가 아니다?

시골에 사는 만득이가 서울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초행길이라 걱정이 되는 어머니는 역까지 바래다주면서 "가장 큰 역에서 내리라"고 신신당부했다. 만득이는 열차를 타고 한참 졸다가 엄청 큰 역이 눈에 들어오자 서둘러 내렸다. 만득이는 플랫폼에서 "서울역이다"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대전역이었다. 시골에서만 살았던 만득이는 대전역이 자신이 본 역 가운데 가장 컸기 때문이다.적당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얼마전 한 언론학자가 '남북은 하나가 아니다'라고 쓴 글을 읽고 생각해 봤다. 그분은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코리아라는 명칭으로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에 따로따로 가입하고 국기도 저마저 다른, 하나 아닌 두 나라로 이뤄진 이 괴이한 단일팀…"이라며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둘이다. 이것이 현실이요, 진실이다"라고 썼다.

기자가 이 글을 읽고 만득이 생각이 난 이유는 이렇다.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분단국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구분하지만 법.정치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 심리적 요소를 모두 감안해 남북을 분단국가로 규정하는 데 동의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분단국가 일반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코리아라는 가상의 총괄국가(global state) 안에 남한과 북한이란 부분국가(partial state)가 있는 형국이다.

또 분단국가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근원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현실적으로 양분돼 국제법상 양자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가진 국제적 주체로 잠정적으로 구분돼 있는 국가"라고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제법상 동등한 지위'와 '잠정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남북이 유엔에 따로 가입하고 국기도 다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잠정적'이라는 것은 분단국가 이전상태, 즉 코리아로 돌아갈 하나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분단국의 통일은 재통일(re-unification)이라고 구분해 표현하기도 한다.

남북이 유엔에 각기 가입한 문제만 해도 그렇다. 독일통일의 초석을 닦은 빌리 브란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냉전에 의해 분단된 국가의 재통일 방법으로 유엔 동시가입을 주장했다. 과도기적으로 유엔을 통한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1970년대 중반까지 '만득이 같은' 정부는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주장하는 학자나 학생을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보냈다. 또 일부 관료나 학자, 논객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남북한 동시유엔가입이 분단 고착화라며 반대했다. 이런 분들이 서울대 총장과 통일원 장관까지 지냈다.

그러나 분단국의 재통일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나. 동.서독은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결국 재통일을 일궈냈다. 그러나 남.북 베트남은 1975년부터 몇 번이나 유엔 동시가입을 시도했지만 실패, 결국 무력에 의한 재통일 과정을 밟았다. 유엔 동시가입이 분단국 재통일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앞서 두 분단국의 재통일 과정을 보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았는지 자명해진다. 결국 유엔 동시가입은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거쳐 재통일로 가는 길목의 한 상황일 뿐이다. 우리는 시골서 서울가는 길목에서 지금 대구, 아니면 대전쯤 올라 온 것이다. 그런데 그 길목에서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만득이가 대전역 플랫폼에서 "여기는 서울역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남북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글을 읽고 있으면 30년전 남북유엔동시 가입을 반대한 바로 그 학자와 논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요, 통시적(通時的) 관점이 부족한 탓이다.

'남북이 하나다'라는 것은 현실은폐나 비현실적 환상이 아니다. 열차는 꼭 서울역에 도착한다. 만득이처럼 굴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으면 열차는 서울역에 반드시 도착한다. 그것이 현실이요, 또 희망이다.

원희복 / 지방자치부 차장
wonhb@kyunghyang.com

'정동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고초려의 본뜻  (0) 2003.01.23
沒역사적 시대구분  (0) 2002.12.19
'DJ 名臣言行錄'  (0) 2002.10.17
복구도 땜질, 보상도 땜질  (0) 2002.09.12
기술직 우대, 행자부 부터  (0) 2002.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