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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탑

삼고초려의 본뜻

요즘 공무원 사회에서 화제 1순위는 고건(高建) 총리 내정자다.고 총리내정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전남지사와 청와대 정무2비서관(지금의 행정비서관)을 지냈고, 최규하 대통령때는 정무수석비서관, 전두환 대통령 밑에서는 교통.농수산.내무부장관을 지냈다. 또 노태우 대통령 아래서 관선 서울시장, 김영삼 대통령 당시에는 국무총리로 국정을 운영했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공천장을 받아 민선 서울시장,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또 총리내정자로 지명됐다.

한 사람이 무려 7명의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고 국정을 논한다는 것은 거의 '환상적' 경력이다. 그것도 헌정중단과 과거 정권과 차별화가 극심했던 난세의 우리 정치사에서 말이다. 흔히 그를 '달인'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달인 수준을 넘어 거의 '신(神)'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비서실장이나 수석 내정이야 임명장을 준 것도 아니지만 총리내정을 국회에 통보하는 것은 헌법 절차를 밟는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노당선자의 첫 공식인사인 셈이다.

노당선자는 고건씨를 지명한 이유로 '안정'을 꼽았다. 그런데 화려한 경력이 안정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기자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요직에 있을 때 10.26 군사변란,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 환란(換亂) 등 국가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가 당시 책임있는 위치에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별개 문제로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화려한 경력이 곧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노당선자도 기존 존안자료를 믿을 수 없다며 중앙인사위원회를 방문해 인사에서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을 강조하지 않았나. 과거에 인재가 없다는 이유로 화려한 경력자를 영입해 썼지만 대부분 정치적 철새로 변신했다.

사실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학력, 고시에 합격했다는 이력, 중요 업무를 맡았다는 경력서는 그 사람의 앞길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처럼 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매사가 다 그렇다면 명문 대학을 나오지 못한,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좋은 경력이 없는 나머지 99%의 젊은이에게 무슨 희망을 얘기할 것인가. 양지를 좇아 경력관리를 잘하는 것이 출세의 길이라면 누가 고생을 하더라도 신념을 지킬 것인가.

바로 노당선자가 처절한 당사자 아닌가. 노당선자가 상고를 나와 취직한 해운회사에 계속 근무했다면 혹시 전무나 사장이 됐을까. 노당선자가 계속 판사를 했다면 명문대 출신이 즐비한 법원에서 대법관까지 될 수 있었을까.

후보의 경력이 180도 달랐던 지난 대통령 선거는 이력서만으로 사람을 뽑아선 안된다는 국민의 심판도 들어 있다고 본다. 사실 지난 대선은 미래학의 거장 엘빈 토플러가 말한 바로 그 '권력이동'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지금의 권력이동은 단순한 권력의 추(錘)가 옮아가는 것이 아닌, 권력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적 코드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화려한 과거 경력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혹자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애들이 감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될 때 나이는 마흔넷에 불과했다. 그가 총리가 되기 전까지 경력이라고는 예비 내각에 잠시 거론된 것이 전부였다. 미국의 카터는 땅콩농장 경영 경력으로도 대통령이 됐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맞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 할 때 유비 나이 마흔일곱, 제갈공명은 불과 스물일곱이었다. 당시 제갈공명은 초야에 묻힌 무명의 새파란 젊은이에 불과했을 뿐이다. 삼고초려의 본뜻은 인재를 '모셔온 것'이 아니라 인재감을 '발굴한 것'이다. 인사에서 화려한 경력을 따지는 것은 숨은 인재를 발굴할 안목과 키울 자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원희복 지방자치부 차장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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