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6)
장세동과 남재준
우리 국가정보기관 책임자는 대부분 ‘한 인물’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걸출한 인물’을 꼽으라면 1961년 6월 중앙정보부를 처음 창설한 김종필(JP)이다. JP는 5.16 쿠데타를 성사 시키자마자 한 달도 안돼 정보기관을 만들고, 민족일보 사건, 황태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만들었다.
다음은 중정부장을 하다 미국으로 망명해 박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옛 부하들에 의해 프랑스에서 살해된 김형욱 부장(1963~1969),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 심장에 총을 쏜 김재규 부장(1976~1979), 그리고 내란을 성공시킨 전두환 부장(1980.4~1980.7) 등이 있다. 총으로 죽이고, 죽은 후진국 정보기관장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나름 한 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다.
이름이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전두환 시대에는 장세동 부장(1985.2 ~ 1987.5)이 단연 두드러진다. 장세동은 청와대 외곽을 지키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전두환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그는 1983년 전두환의 미얀마(버마) 방문도중 발생한 폭탄테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됐다. 결국 그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사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깨끗이 물러났다. 게다가 그는 1993년 이른바 신한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에 안기부가 개입한 것이 드러나자 ‘내 선에서 처리된 사건’이라며 스스로 경찰에 출두했다.
사진은 바로 그 용팔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장세동 부장의 모습이다. 손목에 수갑을 차고 포승줄로 몸을 둘렀지만 매우 당당한 표정이다. 아래 부하에게, 심지어 외부 휴민트에게 책임을 미루는 요즘 국정원과 차원이 다르다.
장 부장은 자신의 잘못에 분명한 책임과 명확한 거취를 밝혀 ‘의외로’ ‘남자다운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 아웅산 폭탄테러, 박종철 고문치사, 용팔이 사건 등 통치권자가 져야 할 책임을 떠안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장세동 부장은 감옥에서 다른 사람과 달리 사식을 먹지 않고, 교도관에게 절대 반말을 하지 않는 등 ‘찌질하지 않은’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장 부장은 잘 생긴 외모에 책임을 부하에게 미루지 않는 당당함과 소신으로 당시 강남 룸사롱 마담에게 최고의 ‘인기남’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장세동 부장은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서초구을)하거나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만용’을 보였지만 어찌됐든 그는 당당했다.
요즘 국정원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연이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70년대 3류 첩보영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스토리다. 심지어 증거조작에 가담한 요원이 ‘국조원’(국가조작원)이라고 조롱했을 정도다. 그런데 국정원은 휴일 밤 해명서 한 장 내놓고 꼬리 자르기, 서로 책임 책임 미루기에 급급하다.
그러자 3월 10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신경민 최고의원은 ‘찌질해도 너무나 찌질한 국정원’이라고 일갈했다. 신 최고위원은 “국정원에서 007의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찌질해도 너무나 찌질한 국정원”이라고 힐난했다.
신 최고위원은 남재준 국정원장을 겨냥, “남재준 원장은 왜 말이 없나. 작년 8월 국정원 명예 운운하면서 국제정치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상 대화록을 공개하지 않았나. 지금은 블랙(하수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은 1심에서 증거로 제출한 사진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나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다시 중국영사 서류를 위조해 끝까지 간첩을 조작하려 했다. 이것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보다 훨씬 계획적이고, 악질적이다.
국가기관이 불법 증거를 법정에 제출한 것은 대한민국 사법체계를 뒤흔드는 ‘국기문란 사건’이다. 게다가 국정원은 이 과정에서 여동생을 6개월간 감금해 오빠를 간첩이라고 증언시키는 반인륜적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이미 여당 중진 이재오 의원은 “증거 위조로 간첩을 만드는 시대는 이미 한참 지났다”면서 남재준 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게다가 10일 저녁에는 국정원이 검찰의 압수수색이란 수모를 당했다. 수사를 하는 국정원이 압수수색 대상이 된 것은 매우 수치스런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남 원장을 과거 전두환의 장세동 부장만큼 신뢰하고 있는지 모른다. 남 원장을 경질하지 않는 임명권자도 문제지만,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는 국정원장은 더 문제이다.
군인은 진퇴를 분명히 하는 것을 평생 배운다. 진격할 것이나, 후퇴할 것이냐를 놓고 ‘찌질’거리다가는 부하를 모두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찌질하다는 소리를 듣고, 여당에서도 사퇴요구까지 나오는 남 원장은 진작 장세동 선배에게 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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