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이 평생 한두 번 할까 말까한 법적 소송을 무려 170번이나 했다면? 그것도 변호사에게 의뢰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일일이 소장과 준비서면을 작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복잡한 이 세상에서 치열한 번뇌에 찌들어 사는 사람일 것이다. 남들은 이런 복잡한 번뇌가 싫어 산속에 들어가 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중이 되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사실 그는 속세에서도 하지 않던 이런 법적 싸움을 중이 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번뇌가 싫어 중이 되는 그런 ‘보통의’ 길을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혜문 스님(41)이 그 사람이다. 그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운동’을 10년째 하며 우리 정부 당국은 물론, 일본 법정까지 가서 치열하게 ‘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는 작게는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장검에 붉은색 안료가 칠해져 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최근 문화재청과 현충사는 이를 바로잡기로 했다) 일본 천왕이 거주하는 천왕궁 왕실도서관에서 소장하던 조선왕실의궤를 돌려받았다. 심지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존된 구한말 한 여인의 생식기를 예의를 갖춰 장례 치르도록 했다.
2006년 일본에서 찾아온 조선왕조실록
이런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 관련 기관이나 정부를 상대로 치열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소장을 제출한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이다. 이런 일들은 한두 달 만에 해결되지 않는다. 최소 3~4년 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녀야 겨우 성공할까 말까 하는 일이다. 물론 이런 일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이 일이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는 ‘운명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속세의 번뇌가 싫어 중이 됐지만, 여전히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불행한’ 중이다.
그는 그 ‘불행’이 운명이라고 했다. 1988년 봉선사에서 출가, 2004년 공부를 하러 일본에 갔다. 그때 일본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도쿄대 쓰에마쓰(末松保和) 교수가 쓴 ‘청구사초’(靑丘史草)라는 책을 만났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도쿄대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필자가 이 책을 지인에게 선물하며 ‘저자 걸정’(著者 乞正·내용의 오탈자를 바로잡아달라)이라고 썼는데, 나는 이것을 조선왕조실록을 조선으로 돌려주라는 저자 양심의 목소리, 일종의 계시로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귀국 후 자료조사를 하고, 월정사 주지스님과 시민들을 모아 환수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도쿄대에 8번 찾아간 끝에 2006년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왔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 자행된 약탈 문화재가 운동을 통해 반환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해외에 있던 문화재 1300점 되찾아
약탈 문화재 반환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는 프랑스에서 돌려받은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1993년 경부고속전철 국제입찰 과정에서 프랑스는 자국 테제베를 팔기 위해 미테랑 대통령까지 동원해 의궤를 돌려줄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프랑스는 수조원짜리 경부고속전철 입찰을 따내자마자, 안면을 바꿔 의궤 반환을 미루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양국의 공식적인 반환 협상을 시작했고, 노무현 정부의 공식 반환 요청에 이어,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2월에야 정부 간 ‘임대방식 반환’에 합의했다. 마침내 의궤가 돌아온 것은 2011년 4월이다. 그러니까 김영삼~이명박 대통령까지 4명의 대통령이 나서 무려 14년 만에 의궤를 돌려받은 것이다. 그것도 완전한 반환이 아닌 5년마다 임대계약을 갱신하는 조건이다.
그런 어려운 작업을 조그만 체구의 스님이 3년 만에 해낸 것이다. 물론 정부의 지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중에 협의가 다 끝난 다음 생색은 정부가 냈다. 이렇게 시작한 문화재 제자리 찾기 작업은 일왕궁에 있는 조선왕실의궤 환수, 2013년 미국 LA카운티 박물관에 있는 조선 중종 왕비 문정왕후의 어보 환수, 2014년 4월 미국에 있던 대한제국 국새를 비롯한 9점의 조선왕실 인장 반환 등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해외에 있는 문화재 4건 1300점을 환수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국보 혹은 보물급이다.
혜문 스님의 이런 활동에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곳도 있다. 우선 정부가 못하는 일을 하니 정부가 백안시한다. 특히 문화재청 산하로 해외 문화재를 조사·환수하는 업무를 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그렇다. 하는 일이 꼭 겹치기 때문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는 “사자가 사냥을 할 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처럼 해외 문화재 환수작업은 아주 조용하게 일을 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소장자가 문화재를 감춰버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문화재재단의) 조용히 해야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방법”이라며 “문화재를 가진 바로 그 외국에서 활발한 환수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혜문 스님의 활동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시설이 좋고, 관람객이 많은 외국 박물관에 우리 문화재가 있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는 시선이다. 혜문 스님도 이런 지적에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도자기나 서화와 달리 한 민족의 정체성, 혼이 깃든 문화재, 즉 왕조실록이나 국새, 국왕의 투구 이런 것은 외국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이런 문화재가 외국에 있다는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것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혼이 깃든 일종의 신물(神物)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일반 도서나 서화, 도자기 같은 문화재는 자신의 환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하지만 정부의 문화재재단은 이런 서화를 환수하고 있다)
혜문 스님이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있는 조선 대원수 투구와 갑옷을 둘러보고 있다. 조선 대원수 투구와 갑옷은 혜문 스님이 꼽은 4대 신물 중의 하나로 현재 환수작업을 진행 중이다. |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앞으로 꼭 찾아야 할 신물 4가지
그는 앞으로 우선 환수해야 할 ‘신물’ 4가지를 꼽았다. 보통 하나의 문화재를 환수하는 데 3~4년 걸리기 때문에 4개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있는 조선 대원수 투구와 갑옷, 일본 오쿠라 슈코간(大倉集古館·사설 박물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오층석탑, 미국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마탑형 사리함, 중국 대련에 있는 금강산 장안사 범종이 그것이다. 그는 최근 북·일수교가 궤도에 올라가고 있어 일본에 있는 북한 문화재 반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또 일본 국립박물관의 오오쿠라 컬렉션에 대해 7건이 도굴품·도난품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이를 일본 법원에 제소할 계획이다.
이 일은 문화재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문화재에 대해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나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듯하다. 그는 대학원에서는 문학을 공부했고, 학창 시절엔 사법시험 공부를 더 많이 했다.(그는 자신의 속세 시절 얘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것은 따로 공부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일종의 법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법력이란 신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은 엄청난 정보가 스쳐 지나가는 곳”이라면서 “스쳐가는 인연을 강한 신념으로 전광석화같이 잡아내는 고도의 집중력, 그것이 바로 신물과 인연”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일도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금강경의 금강반야바라밀경에 나오는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의 자리를 찾는 것)라는 말을 좋아한다. 결국 자신이 지금 하는 일, 문화재 환수작업은 바로 문화재가 본래 자리에 있던 곳으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그는 최근 <우리 궁궐의 비밀>이라는 책을 냈다. 이미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다룬 <조선을 죽이다>(2009년) <되찾은 조선의 보물 의궤>(2011년) (2012) 등의 책을 냈다. 그는 “1년에 책을 1권씩 쓰기로 했다”면서 “책을 팔아 (문화재 환수운동) 경비도 좀 대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부는 문화재 환수에 ‘사상’이 없다”
국새나 어궤 등의 문화재 환수는 민간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사업 아닌가.
“한 번도 정부 차원에서 이런 문화재 환수에 나서지 않았다. 1965년 한일협정 때 협상 의제로는 올라갔지만 다루지 않았다. 정부가 문화재 환수에 나서지 않는 것은 사상, 즉 정신적 이유가 없어서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다. 중이 염불이나 하지 뭐하러 이 짓을 하고 있느냐. 그것을 해야겠다는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없으면 결국 되지 않는다.”
문화재 반출이란 제국주의 시절의 유산이다. 유네스코 같은 곳에서 국제적 기준을 만들어놓고 있지 않나.
“유네스코 협약이 있다. 돌려주게 돼 있는데 구속력이 없다. 1970년대 협약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까지 소급적용이 안 되고, 불법 도난 문화재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또 제소 당사자가 국가여야 하고, 정부 간 조정으로 해결하도록 돼 있다. 실효성이 없는 것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문화재청에서 자신들이 안 하고 있던 일이 드러나 곤혹스러워 할 수도 있겠다.
“약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단순히 캠페인만 하면 좋은데, 직접 담판을 해 반환을 이뤄내고 있으니 더 당혹스러울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바로 정부 차원에서 문화재 환수를 하기 위한 기구 아닌가.
“그렇다. 그런데 안휘준 이사장의 언론 인터뷰를 보니 문화재 환수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했다. 시끄럽게 하면 문화재가 숨어버려 찾아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온 국민의 열망을 똘똘 뭉쳐 목소리를 높여도 되찾기 어려운 것을 조용히 한다고 주겠나? 정부는 우리 것을 당당히 찾아올 생각을 안 하고 조용히 청탁, 구걸, 구매, 기증, 임대 이런 방식으로 찾을 생각을 한다. 사상이 없는 것이다.”
일본을 70번이나 갈 정도라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나.
“부처님이 계산해 주신다.(하하) 주로 봉선사 스님들 주머니를 턴다. 신도 중에서 도와주는 것도 있고, 결국 부처님이 주신 것이다.”
속세의 얘기는 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8년 출가했으면 매우 일찍 출가했다. 그 나이에 출가하려면 보통 결심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출가하기 전까지 소풍 때를 제외하고 절에 가본 적이 없었다. 보통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했다’고 하는데 사람이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너는 세속에 살 사람이 아니다’라고 부처님이 부른 것 아닐까, 부처님의 이끎이 있었을 것이다.”
속세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인터넷에 내가 사법시험 준비했다고 올렸다.(하하) 사법시험에 낙방했다. 지금껏 내가 소송을 170건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정부 등이 상대다. 모든 소송을 변호사 쓰지 않고 소장이나 준비서면 다 내가 작성했다. 그중 4건 빼고 다 이겼다. 학창시절 공부한 법률지식을 이럴 때 써먹게 되더라.”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나는 꼭 문화재만 찾는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꼭 하고 싶은 목표, 세상을 변화시킬 구체적 목표 50개(현충사 충무공 장검 색칠 개선, 전주역사박물관에 보관된 동학군 장군 유골 안장 등)를 적어놨다. 그 중 43번까지 이뤘다. 이 50개를 다 이루면 후학을 지도하겠다. 그리고 후학들과 50개 목표를 선정해 후학들이 그 50개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싶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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