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봄 수학여행길에 시작된 세월호 참사는 여름을 지나 가을인 9월 중순까지 왔다. 5개월간 계속되는 진도 팽목항 구조작업은 잔인한 인내를 요구하고 있고, 서울 도심 한복판 광화문에서는 처절한 단식이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에서 참변을 당한 유민양 아버지 김영오씨로부터 시작된 광화문 단식은 가수 김장훈으로, 국회의원 정청래로, 많은 일반시민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사 소식에 중국 공연 중단하고 귀국
한편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세월호 특별법 제정 요구를 정쟁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도 노골화되고 있다. 일부 무분별한 사람들은 단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다.
가수 김장훈의 단식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단식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는 ‘본분인 가수에 충실하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환자’ 등의 원색적인 비난도 적지 않았다. 그는 단식과정을 페이스북으로 중계하면서 “무엇인가 혼란스럽고, 아프고, 슬프다”고 말했다. 그는 처절한 진도 팽목항과 곡기 끊은 광화문 한복판에 앉아 우리(정치·사회·언론 등)를 지켜봤다. 지금까지 가수 김장훈은 무대에 서 있었다. 우리들은 객석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기간 중 김장훈은 객석에 앉아 무대에서 ‘까부는’ 우리(정치·사회·언론 등)를 관찰했다.
8월 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가수 김장훈씨가 공연 도중 세월호 유가족을 안아주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그는 세월호 참사 소식을 국내가 아닌 중국에서 들었다. 당시 그는 한·중 공조전으로 중국을 돌며 독도 아트쇼와 위안부 할머니 특별전을 하던 중이었다. 상하이 공연을 마치고 베이징 공연을 준비하다 문득 회의가 들었다. ‘이렇게 남의 일처럼 내 공연이나 하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고민했다. 결국 그는 베이징 공연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한 달 동안 폐인처럼 뉴스만 봤다고 한다. 기울어진 배, 차분히 구조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순진한 모습, 똑같은 화면만 반복해서 보던 그는 6월 5일 자리를 박차고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인간애로 한 일이 정치적 논란으로
“팽목항은 지옥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부모·형제·자식의 시신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 산 사람이 아닌 형체도 몰라볼 시신을 기다리는 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신을 찾으면 기뻐해야 하는 곳, 시신을 발견한 사람을 부러워해야 하는 곳, 시신을 찾은 사람은 미안해해야 하는 곳, 이런 지옥에서 무슨 답을 찾을 수 있겠나.”
그는 그 지옥에서 말없이 봉사를 시작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추모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급기야 단식에 합세하는 상황까지 갔다. 물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공연도 많고, 신곡 준비도 해야 하는데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했다. 그도 “이탈리아 오페라하우스 초청공연은 정말 포기하기 아까운 공연이었다”고 술회했다.
처음에는 2~3일, 길어야 일주일 정도로 예상했던 김장훈의 동조 단식은 보름을 넘어 24일간 계속됐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세월호 특별법은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정쟁으로 훼손됐고, 단식은 조롱의 대상까지 됐다.(상자기사 참조) 김장훈은 이런 상황에 대해 “한 소외되고 나약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도리로 시작한 일이 진흙탕으로 끝난다면, 그동안 모진 칼 맞고 똥 뒤집어쓰고 견뎌온 날들이 참 허망하다”고 탄식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어느 것 하나 ‘욕을 먹을 짓’을 하지 않고 살았다. 가수로는 ‘공연의 황제’ 소리를 들었고, 기부 천사라는 선행의 아이콘에 독도와 종군 위안부 할머니 돕기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언제나 그랬지만 ‘소박한 인간애’에서 시작한 자신의 행동이 이렇게 ‘정치적 논란’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이번 단식 동참이 가져온 정치적 논란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정치적 촛불 문화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의 본질만 가지고 얘기를 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막상 본질문제에 맞닥뜨리면 그는 다시 (권력자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매우 순진했다.
단식을 끝낸 김장훈은 세월호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팽목항에서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단식이 길어지면서 중단됐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단순한 힐링콘서트나 문화제는 유족들이 그 자리를 떠나 집에 돌아가면 다시 허전해진다”면서 “가슴 깊숙이 치료해줄 다양하고 장기적인 행사를 기획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노란 리본을 통한 다양한 행사를 플래시몹 형태로 유튜브에 올리거나, 유가족 소원 들어주기와 같은 지속적인 유가족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인간적 갈등이 내 노래이자 무대”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잘사는 집이 졸지에 망하면서 세상물정 모르는 성직자였던 어머니와 가족들은 8만원짜리 월세를 전전했다. 그의 말마따나 “어린 시절 웃는 사진이 한 장도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건설현장 막노동과 룸살롱 반주, 시계 외판원 등 무려 30여개가 넘는 직업을 거쳐봤다.
추석 연휴에 진도 팽목항을 찾아 유족을 위로하고,(사진 왼쪽) 설거지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장훈씨.(사진 중앙) 9월 8일 추석날 김장훈씨가 세월호를 수색하는 잠수사에게 치킨과 피자 350인분을 전달하기 위해 바지선으로 이동하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사진 오른쪽) | 김장훈 페이스북
가수가 된 지금도 하루 3시간만 자면서 밤무대를 뛰며 열심히 돈을 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번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다. 이북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사내 새끼레 돈 갖고 치사하게 굴지 말라우”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껏 기부한 돈은 150억원이 넘는다. 하지만 그는 ‘기부천사’라는 말보다 ‘공연 1위 가수’라는 평가를 더 좋아한다.
그는 “내 노래는 성대를 통해 가슴으로 부르는 것”이라며 “세상도 무대이고, 무대가 세상으로 둘은 하나다”라고 자신의 음악관을 철학적으로 말했다. 사실 그는 평소 익숙한 연예지가 아닌 시사지와의 인터뷰라서인지 인터뷰 내내 용어 선택에 신중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희망을 만끽하지 못하고 내일의 불행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노래가 사람들의 벼랑끝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남들보다 더 처절한 삶을 살았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이 나름 적임자라는 생각도 한다.
그는 기교가 아무리 좋아도 가슴을 울리지 못하는 노래는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은 잘하고 못하고가 있지만 예술은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 감동을 주느냐 못주느냐만 있을 뿐이라는 게 김장훈의 노래 철학이다. 그는 “내가 주고자 하는 감동은 뭔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것,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결국 아픔과 혼란, 인간적 갈등, 이 모든 것이 내 노래이며 무대”라고 말했다.
“정치는 죽어도 안 한다. 여도 야도 다 싫다”
광화문에서 단식 중인 김장훈씨. | 서성일 기자
왜 세월호 단식에 동참했는가.
“모든 것을 파괴당한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단식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저대로 가면 죽으니 기절시켜 병원으로 데려갈까, 수면제를 먹여 병원으로 옮길 생각도 했다. 단순히… 나라도 있으면 먼지만큼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24일간은 보통 긴 단식기간이 아니다.
“솔직히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특별법에 합의하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 되고, 교황이 오기 전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교황이 왔다 가도 안 되고, 유민이 아빠가 병원으로 실려가고도 단식이 안 끝났다. 그러다 보니 길어진 것이다.”
단식을 하며 심경을 페이스북으로 세밀하게 중계한 이유는 무엇인가.
“1인 언론을 구축하고 싶었다.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했다는 생각도 든다. 두 달 동안 1200만명이 방문했다. 글 하나에 70만명 이상이 ‘좋아요’를 눌렀고, 1000개 이상 댓글이 달린 글도 많았다. 많은 사람과 소통의 기회를 가졌다.”
24일간의 광화문 단식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본 인간군상을 들라면.
“한 인간이 저렇게 단식하고 있는데…. 심지어 노숙자에 비유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이 일에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이 와서 손을 잡고 ‘잘하겠다’고 하면서 인간적으로 안아주면 끝날 단식을…. 그래서 대통령 전상서를 썼다. 정치적인 것을 떠나 내가 대통령이니까 손잡고 잘하겠다고 하면 될 것을, 본인도 언제든지 연락하라. 특별법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단식을 하며 페이스북에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 자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가.
“못 얻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이렇게 못해본 것도 처음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진실과 정의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사실 그 해답은 내 마음속에 있지만, 해답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그렇다. 특별법,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고, 해결하는 방법도 있는데 나는 권한이 없어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다. 4월 16일, 아니 단식을 시작할 무렵에는 민심이 하나였는데, 지금은 갈라졌다. 수없는 왜곡과 루머가 난무했고, 언론은 침묵했다.(그는 기존 언론에 불만이 있지만 <경향>은 아니라고 했다)
연예인들은 대부분 친여적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반정부적이면 방송 출연이나 공연에 불이익을 받기 때문 아닌가.
“내가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고, 제일 서글픈 질문이 바로 그 ‘괜찮겠냐’는 것이다. 정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이게 반정부 시위도 아니고, 빨갱이 노릇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내 나라를 잘 만들겠다고, 불쌍한 사람 인간애로 대하자는 것인데 열이면 아홉이 두려워하더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을까.”
단식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중 ‘노래를 게을리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일베 같은 사람들이 ‘노래 연습 언제 하냐’고 댓글을 단다. 대꾸할 가치도 없지만 나는 3시간만 자고, 좋아하는 친구 안 만나고 10시간 노래 연습하고 10시간 세상에 뛰어들어 산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만큼 노래 연습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단식을 하는 자신의 행동이 정치적으로 휩쓸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신경 안 쓴다. 페이스북 댓글에 개인 홍보, 또 정치색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독도문제도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정의롭지 않은 것을 지적할 뿐이다.”
정치를 잘할 것 같은 연예인 1위에 나오기도 한다. 정치를 할 생각이 있는가.
“어떤 게 정치색인가. 정치를 할 생각이 없고, 죽어도 안 한다.(매우 단호한 표정으로) 여야도 다 싫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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