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30 재·보궐선거에서 동작을 지역은 한국 정치의 축소판, 아니 인생사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난장’(亂場·사람이 뒤엉켜 어지러운 장터)이었다. 근 한 달 정도(6월 24일 출마 선언~7월 24일 후보 사퇴)에 불과했던 선거 기간은 약육강식과 우정과 야망, 그리고 명분과 실리 등 인생사의 모든 것을 축소해 놓았다.
그 난장 한가운데에 기동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966년생이니 이제 만으로 마흔여덟, 말 그대로 인생의 ‘절정기’에 이른 사내다. 그는 지난 7·30 재·보궐선거에서 한바탕 불꽃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모든 언론이 그에게 집중했고, 실제 그에게 부여된 정치적 의미도 적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듯이 그의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내민 방송 마이크는 수십개였으며, 짧은 기간 동안 인터넷에 오른 그에 대한 기사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간 지금 그에 대한 기사는 아무것도 없다.
빼앗은(?) 동지의 지역구를 다시 양보
그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의 지역구를 가로챈 인물이라는 뼈아픈 이미지만 남았다. 또 후보를 사퇴했지만 자신으로부터 양보 받은 후보마저 낙선하면서 대의를 위한 희생도 빛이 바랬다. 심지어 그는 7·30 재·보궐선거에서 야권 참패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잘 나가던 젊은 정치인 기동민은 한 달 만에 180도 처지가 바뀐 것이다.
그는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관심에 대해 고맙습니다”라며 “다음에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완곡하게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정치인에 대한 기사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나중에 본인이 필요해 하는 인터뷰는 기사가 안 된다. 독자들은 그의 공약과 포부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우정과 정치에 대한 진솔하고도 아픈 고백을 듣고 싶어할 것이다. 또 그런 고백을 용기있게 하는 것도 젊은 정치인이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힘들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상자기사 참조) 그럴 것이다. 방금 지나간 아픈 사연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7·30 재·보궐 동작을 선거를 복기해보자. 우선 야권은 시작부터 ‘약육강식’의 잔인함을 드러냈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이곳에 있는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오랫동안 터를 닦은 허동준 위원장이 있었다. 허 위원장에게는 지역구만 관리하다 전략공천에 밀려 세 번이나 출마가 좌절된 아픔이 있었다. 2004년과 2012년 총선에서는 이계안 선배에게, 2008년 18대 총선에선 대권주자인 정동영 선배에게 밀렸다. 허 위원장은 이번 재·보궐선거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 또 다른 인물이 ‘전략공천’이라는 마패를 들고 나타나 네 번째 출마 기회마저 빼앗아가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랜 동지이자 친구인 기동민이었다. 허 위원장과 기동민,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를 넘어 집안 식구끼리도 잘 아는 친구였다. 하지만 20년 우정도 공천권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졌다.
“자리를 잘못 잡아 모든 것을 잃은 사례”
고향인 광주 광산을에 사무실을 열고 출마 선언까지 마친 기동민으로서도 황당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 옳은가를 놓고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면서 “내가 왜 정치를 하는가?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우정보다 실리를 선택했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큰 용기라 생각했다”면서도 “하지만 독선과 독주, 불통으로 상징되는 박근혜 정부를 심판하고 국민과 더불어 새로운 희망을 일구는 것이 더 큰 용기”라고 출마 이유를 밝혔다.(7월 8일 출마선언문)
그러나 그의 출마선언식은 우정을 버리고 실리를 쫓은 약삭빠른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각인시킨 자리가 됐다. 종편과 보수언론은 난장판이 된 출마선언식장에서 ‘20년 우정을 가른 패륜 공천’이라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기동민을 부각시켰다. 사실 그의 출마변은 아무리 멋진 명분으로 포장하더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박근혜 정부의 독선과 독주, 불통을 왜 꼭 자신이 이곳에서 심판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동민에게는 오랜 우정을 배신했다는 점도 문제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 불쑥 나타나 표를 얻으려 했던 무모함이 더 문제였다. 정치평론가 정순훈 ‘원세와 방세 연구소’ 대표는 “유비가 제갈공명을 만날 때 ‘봉황은 천 길을 날아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고, 선비는 숨어 살지언정 참주인이 아니면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기동민 후보는 택목(擇木)을 잘못해 모든 것을 잃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택목이란 ‘뛰어난 인재는 현명한 자리를 잡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동작구에서 열심히 뛰었다. 청와대와 정치권(국회), 중앙행정(보건복지부)과 지방행정(서울시)을 두루 경험한 젊은 일꾼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리인’으로, 게다가 잘 생긴 얼굴까지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기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이 있고, 그 위에 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저 멀리 다른 당에 있던 노회찬 후보가 ‘날아온’ 것이다. 재선에 서울시장 출마 경력까지 가진 노회찬 정의당 후보에게 첫 출마자인 그는 인지도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학생운동, 재야활동, 정치 두루 거쳐
그는 제1야당 후보였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신통치 않게 나왔다. 이대로 야당후보가 분열된 상태라면 새누리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될 것이 뻔했다. 노회찬 후보는 후보 사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아니 당 전체의 운명을 걸고 후보단일화를 계속 압박했다. 결국 기동민은 7월 24일 “노회찬 후보께서 반드시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승리해 달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보름여 만에 기동민은 ‘얻고 준’ 아니 ‘뺏고 빼앗긴’ 경험을 모두 한 것이다.
7월 8일 기동민 후보 출마선언식장에 난입한 허동준 위원장(왼쪽)이 기동민 후보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사실 노회찬 후보는 바로 1년 전 갑자기 날아온 안철수 후보에게 자신의 지역구인 노원병을 빼앗긴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다. 과거 안철수 후보에게 당했던 노 후보가 이번엔 기동민 후보에게 갚은 셈이다. 기동민은 허동준의 지역구를 빼앗고, 그 기동민은 다시 노회찬에게 단일후보 자리를 양보한다. 이것이 정치판이다. 정치판은 냉정하다. 강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그의 사퇴에 대해 당은 180도 태도를 바꿔 ‘놀라운 결단’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선거연대는 없다’던 야권은 투표일 막판에 거래하듯 ‘주고 받기식’ 야권연대를 이뤄냈다. 그의 사퇴가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냐, 아니면 당 지도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냐에 대해 논란은 있다. 개인의 선택이었다면 살신성인이지만, 당 지도부의 지시였다면 그는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적으로 그의 개인 의지, 즉 살신성인적 결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살신성인적 결단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후보도 양보하고 같이 선거운동을 했지만 노회찬 후보는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7·30 재·보궐선거에서 야권은 철저히 참패했다. 권은희 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의 영입은 오히려 역효과가 났고, 난장판 공천파동, 막판에 이뤄진 어설픈 선거연대 등이 패배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 중심에 기동민이 있다.
기동민은 80년대 중·후반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군대에 징집됐다. 군 제대 후 기자가 되려고 학생운동을 그만뒀지만 후배들에 끌려 총학생회장에 선출됐고, 다시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 그는 군대를 갔다온 복학생 학생회장으로, 전대협 대변인으로 대학을 마쳤다. 그는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 당시 재야 지도자 김근태·이재정을 만나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운좋게’ 청와대-국회-정부-서울시를 섭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호연지기’와 ‘대장부’라는 단어를 배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멋진 일을 기획하고 살지는 않았다. (다만) 주어진 길을 마다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마주친 그 순간, 한 순간이 내게 과제였을 뿐이다”라고 토로했다.(7월 30일 페이스북) 사실 그랬다. 1980년대 우리는 그에게 민주화라는 과제를 내줬고, 1990년대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무거운 과제도 부여했다. 그리고 2000년대 가난한 사람을 보듬는 복지문제를 냈고, 2010년대에는 ‘안전 서울시’ 과제를 그에게 부여했다. 실은 그의 과제가 아니라 시대적 과제였다.
그는 순간 순간 맞부닥친 시대적 과제를 피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에도 그에겐 ‘박근혜 정부 심판’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제를 풀지 못했다. 아니, 과제를 풀다 중도에 퇴장해버렸다. 물론 과제를 수행 못한 그의 잘못도 있지만 어설픈 ‘전략공천’이라는 이름으로 정도(正道)를 걷지 않은 야권 지도부에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 선배들은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잔인하고 고통스런 과제를 부여했다. 그리고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그들 모두 실패자가 됐다.
7월 30일 투표를 마친 기동민은 “그러나 또, 정진의 순간들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래를 기약하는 희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선거 패배는 그를 더욱 더 가혹한 난장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에게 진짜 호연지기가 필요한 건 바로 지금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힘들다, 그냥 있고 싶다”
몇 번의 전화에도 그는 완곡히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예의상’ 오는 전화는 받는다고 했다. 그는 “양해해 달라”, “그냥 조용히 있고 싶다”는 말만 거듭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와의 전화통화 내용에서 그의 심경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요약해 본다.
물론 힘든 과거의 순간을 다시 기억하기 싫은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선거과정에서 하고 싶은 말도, 또 억울함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인터뷰) 안 하고 싶다. 그냥 있고 싶다.”
지방(고향)에 내려가 있나.
“아니 서울에 있다.”
차 한 잔을 하든지 아니면 지금 전화에서 몇 가지만 물어보겠다.
“나중에 소주 한 잔 하자.”
정치인 인터뷰는 타이밍(시기)이 중요하다. 나중에 기 후보가 필요할 때 하는 말은 기사가 안 된다.
“지금 (나에게) 기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직 젊은 정치인으로 고뇌의 순간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죄송하다. 그냥 있고 싶다.”
내가 쓰는 것은 인터뷰가 아니라 인물탐구이기 때문에 꼭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기사는 나간다. 이왕이면 본인이 심경을 밝히는 것이 좋지 않겠나.
“제가 지금 드릴 말이 없다. 전화를 안 받으면 예의가 아니라서 받은 것이다. 양해해 달라.”
지금 486 정치인들이 도매금으로 매도당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에 항변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
투표 날인 7월 30일 페이스북에 호연지기와 대장부를 얘기했다. 20년 우정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계속 듣고 있으려니 너무 힘들다. 고맙다. 전화 끊겠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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