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9월 23일 강원도 원주 원동성당에서 가톨릭 성직자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신부는 300여명. 이날 세미나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무거웠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에 대해 사제들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한참 토론한 끝에 마침내 결론이 내려졌다. “사제는 예언자적 입장을 지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희생해야 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신부만이라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
1974년 창립결의문 낭독
이날 결의로 만들어진 행동하는 신부들의 모임이 곧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여기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계속되던 시절,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가톨릭 신도이던 시인 김지하에게 도피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는 간첩조직인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해 ‘내란음모’를 꾀했다는 혐의(긴급조치 위반)로 지 주교를 구속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유신헌법은 폭력과 공갈,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지 주교의 내란음모를 인정해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대축일에 명동성당에 모인 전국의 사제들이 제1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 사제단은 기도회를 계속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변인으로 결의문과 성명을 발표한 사람이 바로 함세웅 신부(아우구스티노)였다.
두 차례 투옥, 감옥서 ‘서울의 봄’ 맞아
정의구현사제단은 곧 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으로 자리 잡았다. 각계가 연대해 유신에 정면으로 저항한 민주구국선언문 발표(1976년 3월 1일), 5·18 광주항쟁 진상 폭로(1980년 5월 30일),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직선제 개헌 촉구 선언(1987년 4월 23일), 정권의 야만을 알린 박종철군 고문치사 수사조작 폭로(1987년 5월 17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1999년 9월 7일), 이라크 파병 철회 촉구(2004년 6월 28일) 등등 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구현사제단에는 함세웅 신부의 성직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예수님은 루카복음 4장 18~19절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감옥에 갇히고, 눈 멀고, 억압받는 모든 분들을 위한 구원자이자 치유자이며 ‘해방자’이다”라면서 “이런 예수님이 내 실존의 근거와 목적”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구원과 치유, 나아가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매진했다. 최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너무나 닳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당에서 나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장으로 가라. 빼앗긴 사람들의 현장에 가서 손잡고 우리들 사제에게 흙물이 튀겨도 현장으로 가라”고 말했다.
함 신부도 그랬다. 고난의 현장, 특히 감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유신체제에서 두 차례 투옥됐다. 1979년 현직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되는 10·26 사건 때도 수감 중이었다가 1979년 12월 18일 겨우 출감했다. 그 후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단식기도, 길거리 미사, 반전·평화 미사 현장에는 늘 함 신부가 있었다.
그의 오랜 ‘민주화를 위한 고행’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휴지기’에 들어섰다. 이후 함 신부는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문제 청산과 남북화해문제(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공동대표)에 진력했다. 그리고 오랜 민주화운동 경력을 살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일을 맡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다시 거리로
불행한 건 그의 싸움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싸움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퇴행이 노골화됐고, 함 신부는 다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함 신부는 국민보다 정권, 서민보다 가진 자를 우대하던 이명박 정부를 꾸짖었다. 그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업 등 전체적으로 본다면 다 반인간적·반자연적·반역사적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등장한 박근혜 정부는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고, 간첩을 조작하더니, 내란음모 혐의로 정당까지 해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친일파가 득세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 3월 25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권 부정선거와 증거조작 특검 촉구, 부정선거 감시 호소 각계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심지어 지 주교에게 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한 것과 같은 ‘가톨릭 탄압’ 분위기가 재연되는 분위기다. 지금 경찰은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원로신부(72)의 사법처리 수순을 밟고 있다. 박 원로신부는 지난해 11월 22일 군산 수송동 성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집전하면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평소 친일 청산과 민주 회복, 남북화해를 주창해온 그로선 너무 참담한 일이었다. 2013년 9월 23일 사제단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는 시국미사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다. 사제들이 대통령 사퇴를 요구한 것은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사건도 그의 마음을 허탈하게 했다. 함 신부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정치적 박해가 용인되는 사회, 종북이라는 딱지 하나로 공공의 적이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사회, 이 비정상의 사회가 만들어낸 유령이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함 신부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해법에 대해서도 명쾌하다.
“첫째 진상을 규명하고, 둘째 진상규명 결과에 따라 죄 지은 사람을 처벌하고 나타난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후 배상과 보상을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고, 셋째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감시하면 된다.”
함 신부는 “세월호 특별법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정부와 여당, 야당이 어쩜 저렇게 무능할 수 있느냐”고 한탄했다.
그는 평생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원자·치유자·해방자인 ‘청년예수’를 닮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운동권 신부, 종북 신부, 심지어 사제단을 좌익 혁명기지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비난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그분의 삶을 전해주는 복음서의 증언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가톨릭 사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사제는 이웃을 위한 이타적 존재이다. 나는 바로 그런 사제들 중의 한 사람이다.”
“두 추기경은 시대고민 없는 수구적인 분들”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을 주도한 입장에서 4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으로 봅니다.
“저는 사목현장에서는 은퇴한 사제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일들은 늘 새 세대와 함께합니다. 한 시대의 주체가 되는 시간과 사람은 달라져도 ‘인간 존엄’의 가치는 여전히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에게 ‘감회’ 같은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지요. 충실한 삶, 늘 최선을 다하는 생활,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사제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람은 보통 머리로 생각하고 종합하며 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가슴과 심장,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저도 많은 분들의 감동과 예찬에 공감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단어가 ‘가난’입니다. 성서의 핵심이지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고 함께 나누는 삶, 그 실천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 사회 공동체 특히 교회 공동체에 속한 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항적 가난’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수도자와 스님의 자발적 가난은 아름답지만, 불의와 부정부패, 탐욕의 결과인 비참한 가난도 있습니다. 비참한 가난을 퇴치하는 아름다운 가난이 바로 ‘저항적 가난’입니다. 불의한 정권과 불의한 기업, 탐욕에 종속된 우리 시대의 많은 종교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내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우리 정진석·염수정 두 추기경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한 명(김수환 추기경) 시절보다 추기경의 존재감이 없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보수는 참된 가치와 진리를 보존하고(保) 지키는(守) 아름다운 일입니다. 따라서 참된 보수는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보수란 말이 참뜻을 잃어버리고, 남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적인 분입니다.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동참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동시에 진보적 가치를 지닌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두 교구장은 보수적인 분들이 아니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지 않은 수구적인 분들이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용공’이라는 이름이 요즘은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내란음모를 꾀했다며 정당까지 해산하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죽산 조봉암 선생님을 사법살인하고 당시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님의 사건에 대해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현 정부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도 이념 갈등과 정보부를 이용한 간첩공작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파멸했습니다. 평가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불법·부정행위에 대한 징벌적 배상과 손해배상에 대한 법률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를 통한다면 불법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조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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