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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탑

재난총괄부서의 '적재적소'

새 밀레니엄으로 한창 희망이 부풀어 있을 때인 2000년 한국행정학회가 주최한 동계세미나 주제는 의외로 '행정학의 위기'였다. 그때 한 교수는 "행정학은 정부와 기업 모두에서 외면받고 있다"고 토로했다.2001년 7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국제행정학회(IIAS) 제25차 총회에 참가한 공무원과 행정학자들은 "전세계적으로 공무원제도는 중요한 변화와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며 "일방적인 행정비용 절감이 행정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데 공감했다.

지금까지 정부를 지탱했던 행정학과 공무원제도는 이제 근본적인 변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무원 스스로 초래한 요인이 많다. 특히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행정시스템, 변화를 거부하고 경쟁을 회피하려는 공무원, 전문성을 키우지 않고 몸집만 불리려는 조직 생리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행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직을 민간에 개방하거나, 아예 민간인을 기관장으로 위촉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개방된 공직에 임명된 인사의 80% 이상이 역시 공무원 출신으로 외형만 민간에 개방됐을 뿐 실제는 과거와 다름없이 운영되고 있다.

또 공직에 전문가가 없다며 거액의 연봉을 주며 민간 전문가를 모셔오는 것도 사실은 문제다. 현재 공무원 중에는 국민의 세금과 시간을 들여 전문적인 능력을 키운 사람이 많다. 문제는 이 전문직 공무원이 승진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의 2급 이상 고위직 263개중 전문기술직 공무원이 갈 수 있는 직위는 19개에 불과하다. 가장 전문성이 요구되는 건설교통.과학기술부 등 24개 과학기술 및 경제관련 부처 공무원 정원의 75%가 일반행정직이고, 전문기술직은 25%밖에 안된다. 심지어 전문기술직을 임명하도록 돼 있는 복수직렬도 대부분 일반행정직이 차고 앉아 있다.

국민의 세금을 들여 전문가로 키워만 놓고 자리는 만들지 않으니 전문직은 공직을 포기하고 민간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중에 인재가 없다며 더 많은 예산을 들여 민간전문가를 모셔오는 바보같은 행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예산낭비는 물론, 바로 행정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정부는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계기로 재난총괄부서를 만들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요청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반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급이 낮은 전문직은 소외시키고 차관급인 청장 자리를 통해 일반직 공무원의 인사숨통을 트느냐에 쏠려 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나자 내무부(지금의 행정자치부)에 재난관리국을 만들어 일반행정 공무원이 서류상으로 재난을 '관리'만 하다 없앤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는 것이다.

화재가 나든 홍수가 나든 불시에 닥치는 재난과 재해에 대한 대처는 숙련된 전문가의 신속하고 정확한 초기판단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른 행정부서와 달리 서류상으로 오고갈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행정조직은 몰라도 재난총괄부서는 철저히 현장 전문가 위주로 구성하는 것이 옳다. 실제 불이 나면 소방이 응급구조에서 원인분석과 개선책까지 일관되게 처리하고, 태풍이 오면 역시 재해 전문가가 수습에서 재발방지책까지 마련하면 된다. 그런 전문적 능력을 가진 인적자원은 지금 행자부 소방국이나 방재국에 상당히 많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4월21일 과학기술의 날을 맞아 공직에 기술직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했다. 과거 그 어느 대통령도 기술입국이니, 전문직 우대를 외치지 않은 적이 없다. 문제는 실행이다. 재난총괄부서 초대 청장 인사는 노대통령이 과거와 얼마나 다른 대통령인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될 것이다. 원희복 지방자치부 차장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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