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에 해당되는 글 71건

  1. 김동길 ‘막장의 길’
  2. 유태하-부친 처벌, 딸이 복권?
  3. 함세웅-두 추기경은 '수구'
  4. 적과 동지-서청원·김무성
  5. 재활용 총리·'인듯~' 총리
  6. 공국진의 마지막 투쟁
  7. 대식가 김대중의 斷食
  8. 최형우 뇌출혈 미스터리 (3)
  9. 해양부장관 노무현의 강단 (18)
  10. 막걸리 따르는 대통령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74)

김동길 막장의 길

 

20141128일 멱살잡이 난장판 끝에 한 조직이 재건됐다.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서북청년단은 해방직후 친일 극우 정치세력이 남한에 삶의 터전이 없는 실향민들을 모아 만든 무소불위의 테러조직이다. 제주 4.3사건이 이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그런데 그런 극우테러 세력을 사라진지 60년이 지난 지금 재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종북좌익의 반역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서북청년단이 분연히 일어섰다오늘의 상황에 맞는 행동양식과 전략으로 국민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적화통일을 분쇄하는 구국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서북청년단의 고문으로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김동길 연대 명예교수 등의 임원을 선출했다. 서북청년단 고문 김동길. 참 시간의 아이러니이다.

 




사진은 1975215일 형집행정지로 서대문교도소에서 풀려나는 김동길 연대 교수 모습이다.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 영락없이 독립투사의 모습이다. 옆에는 누나인 김옥길 교수(후에 문교부장관 역임)와 수염을 기른 함석헌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뒤에는 재야 계훈제 선생, 맨 오른쪽에는 한승헌 변호사(후에 감사원장 역임)이다.


그는 연대교수로 재직 하면서 당시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유신과 긴급조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장준하·안병무·문동환·백기완 등과 함께 유신헌법 철폐 시국선언과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결국 그는 1974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민청학련 사건이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학생, 교수, 종교인, 재야인사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을 획책했다며 깡그리 잡아들인 사건이다. 그의 기소장에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면서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했다고 돼 있다.


요즘 논란이 된 내란음모 사건과 아주 유사하다. 물론 이 사건은 40년 후 정보기관의 조작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학생, 교수, 재야인사 등 180명이 구속됐다. 김동길 교수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자마자 그날로 항소를 포기했다. 그 때 그는 법이 법 같아야지라고 말하는 기개를 보였다.


하지만 세계적 인권유린으로 비난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풀어줄 수 밖에 없었다. 김동길 교수는 감방에서 풀려났지만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해직교수로 왕성한 필력으로 무려 14권의 책을 냈다


진보적 올곧은 소리를 하던 김동길 교수가 1991년 정치 물(새한당 창당, 이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합류)을 먹더니 변했다. 정치를 은퇴한 이후에는 보수를 넘어 극우적으로 또 변했다. 그리고 결국 서북청년단이라는 극우의 막장에 몸을 담았다.


사진 속 함석헌 선생은 죽을 때까지 올곧은 재야지도자로 생을 마쳤다. 계훈제 선생 역시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서울대) 재학중 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하는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민주화운동, 재야운동 등 한평생 자유와 평등의 실천가로 살았다


누나 김옥길 교수도 1980서울의 봄때 문교부장관으로 학도호국단을 폐지하는 등 개혁적 행보를 걸었다. 변호인 한승헌 변호사는 나중에 좋은 시절을 만나 감사원장 등의 감투를 쓰긴 했지만 평생 인권변호사로 한 길을 걸었다.


사진 속 인물 중 오직 그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그는 해직 교수시절 <끝이 없는 이 길을>이란 수필집을 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끝이 없는 길을 떠나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 아닐까. 그는 나중에 사진속의 가족 동지들을 만나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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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73)

유태하-부친 처벌, 딸이 복권?

 

요즘 역사왜곡 문제가 180도를 넘어 360도까지 돈 느낌이다. 180도는 정반대에 있지만 360도를 돌았다는 것은 거꾸로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을 도외시한채 스스로 발목을 죄고, 모순에 빠지는 형국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유영익 위원장)가 한국 현대사 관련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유태하 보고서>이다. 국편은 앞으로 10년간 30권의 <사료 한국현대사> 사업을 추진하는데, 올해 연구과제의 절반(5000만원)을 투입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맹종했던 유태하 주일공사(후에 대사)를 조명한다고 한다.


유 위원장이 직접 낙점한 이 과제는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이 수행한다. 이는 이승만 바로 세우기를 추진하는 국편 유 위원장의 첫 번째 시도로 보인다. 유 위원장은 뉴라이트 보수 역사관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유 위원장이 유태하를 재평가하려 하는 것은 일종의 자살골아닌가 생각된다.



 

사진은 1961년 유태하 대사가 본국의 소환지시를 거부하고 일본에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태하의 모습이 매우 거만하고, 또 잘 먹어 기름기가 줄줄 흘러 보인다. 공사를 지내고, 대사까지 지낸 유태하가 본국 지시를 거부하며 망명 아닌 망명을 하고 있는 전후 사정은 이렇다.


1955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앞선 북한은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추진했다. 일본정부도 도박, 범죄조직에 많이 연루해 있어 골치 덩어리인 한국교포를 본국으로 송환시키는 사업에 적극 동조했다. 당시 북한과 조총련은 취업과 주택을 보장한다며, 재일교포를 북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민단은 인권유린을 내세우며 북송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한국 주일대표부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당시 한국 주일공사가 바로 유태하였다. 당시 많은 재일교포들이 고향에 돌아오려 했지만 주일대표부는 비자조차 발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일대표부는 거액의 비자발급료를 받았다


그래서 많은 재일교포들이 밀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주일대표부는 밀항선을 타면 처벌한다고 으름짱을 놨다. 북한은 집과 직장을 준다며 좋은배(만경봉호)에 태워 북으로 가는데, 한국은 고향 길에 비자장사를 한 것이다.


그래서 재일교포 사회에서 유태하 공사 추방운동이 벌어졌다. 훗날 <민족일보> 사장을 역임한 조용수가 바로 이 유태하 추방운동을 주도했다. 원래 유태하는 일제 강점기 우편국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승진을 거듭, 일등 외교관까지 됐다. (최규하 대통령이 그 밑에서 참사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유태하 공사 추방운동에도 이승만은 오히려 그를 신임, 공사에서 대사로 승진시켰다. 유태하가 비자 장사를 해서 번 돈은 이승만 비자금으로 사용된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래서 유태하는 이승만의 양아들 소리까지 들었다.


1960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이 몰락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유태하 파면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유태하는 정부의 귀국 지시를 거부하고 일본에 머물렀다. 사진은 당시 모습이다. 외교관이 본국 지시를 거부하고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때 모습인 것이다.


5.16이 나고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구악을 일소한다며 혁명재판소를 만들었다. 당연히 유태하도 처벌 대상이 됐고, 결국 유태하는 끌려와 법정에 섰다. 박정희 소장의 쿠테타 업적을 기록한 <5.16군사혁명사>에는 유태하의 죄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가난한 교포의 주머니를 털어서 무려 2백억환을 축재했다는 항설이 있는 유태하 등을 외교관으로 앉혀놓아 자기 조국에 다니러 오는 교포들로부터 여권 1매에 일화로 무려 5만환까지 호가한 사실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불법 치부혐의로 처벌한 유태하를 딸이 대통령 되자 역사적 재평가 하는 것은 아이러니 아니인가. 아무리 유태하가 이승만 정권을 뒷받침한 인물이라고 해도 국편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유태하를 재평가하려 했을까. 


뉴라이트 역사관을 가진 국편 위원장의 우회전이 돌아도 너무 돈 것 아닌가. (유태하는 1965년 한일수교 협상때 '일본 외교통'이 없다는 이유로 김종필에 의해 재기용, 막후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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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72)

함세웅-두 추기경은 ‘수구’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9월 23일 강원도 원주 원동성당에서 가톨릭 성직자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신부300여명은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사제는 예언자적 입장을 지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희생해야 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신부만이라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계속되던 시절,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가톨릭 신도이던 시인 김지하에게 도피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는 간첩조직인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해 ‘내란음모’를 꾀했다는 혐의(긴급조치 위반)로 지 주교를 구속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유신헌법은 폭력과 공갈,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지 주교의 내란음모를 인정해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대축일에 명동성당에 모인 전국의 사제들이 제1차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성명은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 사제단은 기도회를 계속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변인으로 결의문과 성명을 발표한 사람이 바로 함세웅 신부(아우구스티노)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곧 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으로 자리 잡았고, 함세웅 신부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중에서 핵이었다. 그는 고난의 현장, 특히 감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유신체제에서 두 차례 투옥됐다. 1979년 현직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되는 10·26 사건 때도 수감 중이었다.  







사진은 1979년 12월 8일 새벽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하는 함 신부의 모습이다. 한강천주교회 신도들과 강우일 신부(현 제주교구주교), 함 신부의 모친 등이 출감을 축하하고 있다. 이 모습은 미국 ABC, 일본 후지TV 등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함 신부는 그 후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단식기도, 길거리 미사, 반전·평화 미사 현장에 함께했다.


함 신부는 “예수님은 루카복음 4장 18~19절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감옥에 갇히고, 눈 멀고, 억압받는 모든 분들을 위한 구원자이자 치유자이며 ‘해방자’이다”라면서 “이런 예수님이 내 실존의 근거와 목적”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삶은 “성당에서 나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장으로 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너무 닮았다. 그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창립 40주년을 맞아 아래와 같은 소회를 밝혔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정진석·염수정 두 추기경은 ‘시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지 않은 수구적인 분’이라고 평가한 대목이다. 


존재감 없는 두 추기경에 대한 평가는 한국 카톨릭의 불행한 현실이다. 하지만 더욱 불행한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화를 위한 싸움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두 추기경은 시대에 고민이 없는 수구적인 분”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을 주도한 입장에서 4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으로 봅니다. 

“저는 사목현장에서는 은퇴한 사제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일들은 늘 새 세대와 함께합니다. 한 시대의 주체가 되는 시간과 사람은 달라져도 ‘인간 존엄’의 가치는 여전히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에게 ‘감회’ 같은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지요. 충실한 삶, 늘 최선을 다하는 생활,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사제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람은 보통 머리로 생각하고 종합하며 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가슴과 심장,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저도 많은 분들의 감동과 예찬에 공감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단어가 ‘가난’입니다. 성서의 핵심이지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고 함께 나누는 삶, 그 실천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 사회 공동체 특히 교회 공동체에 속한 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항적 가난’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수도자와 스님의 자발적 가난은 아름답지만, 불의와 부정부패, 탐욕의 결과인 비참한 가난도 있습니다. 비참한 가난을 퇴치하는 아름다운 가난이 바로 ‘저항적 가난’입니다. 불의한 정권과 불의한 기업, 탐욕에 종속된 우리 시대의 많은 종교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내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우리 정진석·염수정 두 추기경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한 명(김수환 추기경) 시절보다 추기경의 존재감이 없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보수는 참된 가치와 진리를 보존하고(保) 지키는(守) 아름다운 일입니다. 따라서 참된 보수는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보수란 말이 참뜻을 잃어버리고, 남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적인 분입니다.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동참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동시에 진보적 가치를 지닌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두 교구장은 보수적인 분들이 아니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지 않은 수구적인 분들이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그 주장은 유효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요구할 생각인가요.국정원등 국가공권력을 이용한 불법, 부정 선거에 대한 법률 규정을 사제단이 제시한 것입니다. 부정, 불법 선거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핵심입니다. 앞으로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국민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안게임이 인천에서 열리고 있는데, 지금 남북 화해는커녕 오히려 갈등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야당마저 민족화해에 방기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북에서는  민간단체들 회담이나 협력을 위한 제안도 없고 반응도 없습니다. 옛날 삼국시대를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고구려, 신라, 백제를 우리가 구분해서 어느 한 나라를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다 우리 역사이고 선조들입니다. 오십년 또는 백년 후에 우리 후손들도 지금 남북을 다른 나라 역사로 배우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국제적으로 위상이 더 나은 우리 정부가 양보할 것이 더 많습니다.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북을 상대하고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용공’이라는 이름이 요즘은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내란음모를 꾀했다며 정당까지 해산하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죽산 조봉암 선생님을 사법살인하고 당시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님의 사건에 대해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현 정부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도 이념 갈등과 정보부를 이용한 간첩공작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파멸했습니다. 평가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불법·부정행위에 대한 징벌적 배상과 손해배상에 대한 법률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를 통한다면 불법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조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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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71)

적과 동지-서청원·김무성

 

집권당 새누리당 대표를 새로 뽑는 7·14 전당대회가 점차 가열되고 있다. 9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지만 관심은 유력 주자인 서청원 의원과 김무성 의원 간의 접전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심증을 배경으로 한 서청원 의원은 공식 선거전 시작부터 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 이에 국립현충원을 방문한 김무성 의원은 청와대 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당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두 사람은 치열한 신경전에 급기야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생부논란까지 제기하고 있다. 서 의원 측이 먼저 김 후보가 당 대표가 되면 손봐야 할 살생부 친박 3, 혹은 친박 5적의 진실을 밝히라이는 당원과 국민에 대한 협박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김 의원 측은 살생부 등은 들은 바도 없다"면서 "네거티브 공세에 대해서는 아예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윤상현 사무총장이 후보자들께서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불공정 행위를 자제하고 경선규칙을 확고히 지켜주시리라 믿는다자제를 호소할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에는 서로 껴안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실 두 사람이 이렇게 감정싸움을 하고 있지만 원래 두 사람은 같은 정치적 뿌리일 뿐 아니라, 판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치적 노선이 같았다. 심지어 선거법 위반이라는 전과도 같다.


1980년대 중반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도와 통일민주당으로 정계에 입문한 두 사람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활동도 같이 했다. 1992YS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 두 사람은 나란히 정무장관과 내무부 차관을 지내는 등 관직도 비슷하게 했다.

 

(사진=<우정은 변치 않는다>-정치인 서청원을 말한다)


1997년 대선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 정치발전협의회를 만들어 특정 대권주자에 줄서기를 않고, () 이회창 후보 입장에 섰다. 사진은 1997526일 바로 그 정치발전협의회가 첫 기자회견을 하기전 간사장으로 추대된 정발협 핵심 인사들이 인사하는 장면이다

왼쪽에 김무성 의원과 가운데 서청원 의원, 복지부 장관을 지낸 김정수 의원, 그리고 맨 오른쪽이 서석재 의원이다.


모두 상도동 YS직계로 나이나 정치적 경력으로 서청원 의원이 형님 뻘이다. 사진속의 정발협 멤버중 상도동계 서열을 따지면 서석재-김정수-서청원-김무성 의원 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에서 서청원 의원이 훨씬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정발협은 당시 서울대 총장이던 이수성 후보를 대권주자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야당의 길을 걸었다.


20085월 두 사람 모두 친박으로 분류돼 공천을 받지 못하자, 한 사람은 무소속(김무성 의원)으로, 다른 한 사람은 무소속 연대인 친박연대를 통해 당선(서청원 의원)됐다. 이후 서청원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19대 총선에 보궐선거로 재기에 성공했고, 김무성 의원 역시 19대 총선에서 출마를 포기하고 있다가 보궐선거로 다시 금배지를 달았다.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은 정치적 행보였다. 공천탈락에, 무소속 출마, 선거법 위반, 보궐선거 당선 등 정치인이 겪어야 할 천당과 지옥을 두 사람 모두 비슷하게 겪었다.


그러나 이제 당 대표자리를 놓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겨루고 있다. 정치적 입장도 청와대와 어떤 관계설정을 하느냐를 놓고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이다. 결과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까지 연결되는 매우 의미있는 경선이다.  두 사람을 보면 정치에는 영원한 동지,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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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70)

재활용 총리·'인듯~' 총리

 

정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사퇴의사를 밝히고 대통령이 후임 총리후보까지 지명한 상황에서 전임 정홍원 국무총리를 다시 임명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후임자 찾기가 어렵다고 그래 퇴임한 사람을 다시 쓸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쓸만한 총리감을 찾을 자신이 없었을까.


이것은 대통령이 헌법이 부여한 인사권을 행사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꼴 아닐까.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구일까. 이것으로 재활용 총리라는 유괘하지 못한 별명을 달게 된 정홍원 총리에게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아무리 의전·방탄총리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한 처사 아닐까.


법적으로도 논란거리이다. 새정치연합 박범계 대변인은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하지는 않았지만 후임 총리를 지명한 것은 사표 수리 의사표시”라이것을 유임으로 포장하는 것은 법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정홍원 총리의 유임은 유임이 아니라, 중임으로 인사청문회와 국회동의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논란거리로 헌재의 결정까지 가봐야 하지 않을까.


정부수립이후 총리를 두 번 중임한 사람은 3명이다. 장면 총리는 이승만 정권 시절 2대 총리와, 내각책임제하의 실세총리(7)를 지냈다. 김종필 총리는 박정희 정권에서 11대 총리, 김대중 정권과 연대한 공로로 31대 총리를 지냈다. ‘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고건 총리는 김대중 정권(30)과 노무현 정권(35)에서 총리를 지냈다.

 

 

사진은 1960819일 총리 인준을 받고 윤보선 대통령(오른쪽)과 곽상훈 민의원(현재의 국회) 의장(왼쪽)과 같이 한 모습이다.


정홍원 총리를 보면 장면 총리와 일면 비슷한 점이 있다. 장면 총리는 19512월 총리에 취임했다. 그런데 자유당내에서 정치적 배경이 별로 없는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자연히 이승만 대통령의 질시가 시작됐다.


그러자 장면은 5111월 유엔총회에 참석했다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미국 병원에 입원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국내 기류를 읽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격노한 이승만은 52년 112일 허정을 총리 서리로 발령을 냈다. 하지만 그가 총리 사표를 낸 것은 한참후인 419일이다. 그러니까 장면은 석 달 넘게 총리이면서 총리도 아닌위치에 있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 이후 4월 27일 사퇴를 공표한 정홍원 총리가 총리아닌 총리로 2개월 정도 보낸 것과 비슷하다. 요즘 정 총리에 대해 총리인 듯 총리 아닌 총리같은 너~’라는 패러디가 유행하고 있는데, 아마 당시도 그랬을 것이다.


장면 총리도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에서 실세 총리도 복귀했다. 당시 총리는 국무위원 임면권과, 국무회의 의장, 행정 각 부의 지휘 감독권과 민의원(국회) 해산권한까지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하지만 장면 총리는 5·16쿠데타로 정권 자체를 내놓고 말았다. 장면 총리는 총든 군인이 무서워 성당에 숨어버렸다


정홍원 총리도 대선배 장면 총리처럼 '시즌2'에선 실세 총리가 될 수 있을까? 하기사 지금 총리도 권한은 막강하다. 스스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아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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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69)

공국진의 마지막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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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미 옷 벗을 각오로 이 공판정에서 진실을 증언해 왔다. 마지막 기회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육군은 단 한 사람에 의하여(참모총장) 통솔되어야 하며, 어떠한 자라도 이것을 문란하게 할 수는 없다.”


 1957220일 군법재판소에서 열린 김창룡 암살사건 피고인 최후 진술이다. 김창룡 암살사건이란 19561월 30일 아침 서울 한 복판에서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던 김창룡 특무대장(요즘 보안사령관과 정보사령관 겸직)이 5발의 총탄에 사살된 사건이다. 이승만의 엄명으로 수사한 결과 허태영 대령, 이진용 대령을 비롯한 몇몇 군인과 민간인 등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김창룡은 누구인가. 김창룡은 일본 헌병대 군속을 거쳐 만주 독립군을 고문하던 악질 관동군 헌병 출신이다. 최근 SNS상에서 돌고 있는 검으로 독립군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끔찍한 사진의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악행이 워낙 극심해 해방이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고향(함경도) 근처에 숨어 살았다. 하지만 김창룡은 결국 소련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원산으로 압송되던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김창룡은 국방경비대를 거쳐 육사(3기생)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중 승진을 거듭, 1953년 군 정보와 보안을 총괄하는 특무대장이 됐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육군 참모총장도 손을 대지 못하는 절대자로 군림했다.


 나중이지만 김창룡은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인물임이 드러났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1992단정수립에 반대하는 백범을 제거해야 한다고 김창용 특무대장이 세뇌시켰다고 증언했다. 김창룡은 전형적인 수법인 '빨갱이 조작'은 물론 암살까지 동원하는 방법으로 이승만의 정치적 행동대장으로 행세했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김창룡은 군 인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물론, 군수품을 부정으로 빼돌리고 심지어 밀수까지 손을 대 무려 20억원이 넘는 거액을 치부를 했다. 앞서 공국진의 최후진술처럼 참모총장도 그를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를 암살한 배후로 검거된 사람이 바로 공국진 헌병사령관과 강문봉 2군 사령관 등이다. 정일권 육군참모총장까지 사건에 관련돼 있었지만 이승만은 파장을 우려, 여기까지만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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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김창룡 암살사건 직전 이진용 대령, 공국진 준장, 허태영 대령(왼쪽부터) 세 사람이 서울 비원에 놀러가 찍은 사진이다. 이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잔인한 일제 관동군 헌병’ ‘용공조작, 정치테러 군인’ ‘군 하극상의 핵’ ‘부정축재 군인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넘치는 것 같다. 실제 암살을 실행한 허태영 대령은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에 비교하기도 했다.


 여기서 공국진은 어떤 사람인가. 공국진 역시 일본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훈련소 사격조교를 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국방경비대(군번 2)와 육사(2)를 거쳐 19511군단 작전참모가 됐다. 이때 군단장이 역시 일제 관동군 출신 백선엽이었다. 백선엽은 무자비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유명했다. 이에 공국진 대령은 지금 8로군 토벌하는 것이냐? 양민과 적을 가려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이견은 지리산 주민을 광주포로수용소로 옮겨 수감하는 작전을 놓고 극에 달했다. 백선엽은 주민 모두 포로수용소로 이전하는 작전을 지시했고, 공국진 작전참모는 난방과 급식준비도 안돼 위험한 작전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백선엽은 공국진을 작전참모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백선엽은 이 작전을 감행했고, 45000~48000명에 이르는 광주포로수용소 수감자 절반이 추위와 기아로 사망했다. 그들은  대부분 어린아이와 부녀자, 노약자들이었다.

 

 헌병사령관이 된 공국진은 같은 수사권한을 가진 김창룡 특무대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공국진 헌병사령관이 김창룡의 군수물자 비리를 수사하자, 김창용이 오히려 이승만을 움직여 공국진을 헌병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결국 공국진을 비롯한 강문봉 장군, 허태영 대령은 김창용 암살을 구체화 한다. 아마 김창룡 암살사건은 악질 친일파 군인’ ‘극우 정치 테러리스트’ ‘위계를 문란케 한 정치군인’ ‘부정부패 군인()에는 이(’)로 단죄한 최초의 사건이 아닌가 한다.


 공국진 헌병사령관은 이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됐으나 확인과정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수감 도중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그 역시 형집행 정지로 출감했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이며, 정일권 군맥으로 알려진 그는 몇 차례 공직과 정계진출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강등된 이등병에서 원래 계급인 준장으로 복권된 것은 노태우 정권에서였다.


 그 공국진 장군이 최근 병원에서 그의 마지막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94세이니 정말 마지막 투쟁일 것이다. 요즘도 여전한 친일 극우 정치 테러리스트를 보면서 공국진 장군의 마지막 투병에 성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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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68)

대식가 김대중의 斷食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세월호 참사 때문에 지방선거를 좀 연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이는 옳지 못하다. 우리는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지방선거를 치렀다. 우리의 지방자치법은 정부수립 직후인 19497월 제정됐는데, 이행되지 않다가 524월 비로서 선거를 실시했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지방선거를 유보했다. 이후 지방자치는 우리 정치사에서 사라졌다가 80년대 말 야당의 집요한 노력으로 다시 추진됐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정치적 약속을 해놓고도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는 등 끝까지 거부했다.




이때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단식에 돌입했다. 1990108DJ는 정치사찰 금지, 지방자치 전면 시행 등을 요구하며 여의도 평민당사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사진은 평민당사에서 단식이 길어지면서 DJ가 탈진, 병원으로 옮겨지는 장면이다. 왼쪽의 권노갑, 신순범, 한화갑 등의 가신과 큰아들 홍일, 부인 이희호 여사가 보인다.



DJ와 같이 식사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DJ는 무척 식사량이 많은 대식가이다. DJ는 기름진 중식을 풀코스로 남김없이 먹는 스타일이다. YS가 소식가라는 점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당시 정치권에서 ‘YS는 단식할 수 있지만 DJ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런 DJ가 무려 13일 동안 단식한 것이다. DJ는 이 단식으로 지방선거 전면 시행이라는 확답을 얻어냈다. 하지만 지방자치 선거는 YS가 대통령이 된 95627일에서야 전면 시행됐다.


이후 우리의 지방자치 제도는 보완을 거듭, 제도만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완벽하다. 주민감사청구제나 주민투표제는 물론이고, 유럽도 드물고, 미국에도 일부 주에서 시행하는 주민소환제까지 갖추고 있다. DJ조차 대통령이 되자 자치 과다라는 이유로 대도시 자치구를 폐지하는 것을 추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문제는 제도를 시행하는 데 있어 중앙정부의 예산배분 의지와 운영하는 지방정치(자치단체와 지방의회)의 수준이다. 제도는 좋은데 운영을 못하는 것이다


이번 6·4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여야 무승부’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야당이 전국적으로 승리했지만 수도권에서 졌고, 여당도 수도권에서 신승해 전면 패배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심지어 '박근혜 눈물' 혹은 '여당의 읍소 마켓팅'이 승리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결과만 본 표피적인 분석이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여당은 완패했고, 야당은 완승하지 못한 선거라고 규정한다. 여당이 잘해 수도권에서 신승한 것이 아니라 야당이 지독히 못해 광역 수도권과 기초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 야당의 패착의 주범은 바로 범 민주, 시민, 개혁, 진보세력의 단일화 실패다. 기초의 패배는 어설픈 '우클릭'을 시도한 공천 잘못이다. 새정치연합은 많은 기초단체 지역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능가하는 보수 수구 후보를 공천했다. 


야당은 여당의 텃밭인 부산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곳은 민주, 시민, 개혁, 진보세력이 비교적 합리적으로 단일화를 이뤄낸 지역이다. 그러나 단일화에 실패한 경남은 큰 표차이로 야당이 패했다. 통합진보당 후보는 5.1%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낙선한 김경수 후보 당사자도 패인으로 '통합진보당과 단일화 실패'를 꼽고 있다. 


수도권 패배지역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야권의 수도권 패배는 '전체 선거 패배로 규정될 정도로 중요했다. 인천에서 당락을 가른 것은 2만1천여표차이다. 통합진보당 후보는 이보다 많은 2만2천여표를 얻었다. 무효표도 1만4천여표나 됐다. 


특히 경기도의 무효표는 149886표에 달한다. 당선자와 표차에 거의 5배에 이르는 엄청난 무효표이다. 이는 통합진보당 후보와 단일화가 늦어 투표용지에 정당과 후보이름이 그대로 인쇄됐기 때문이다. 대부분 정치 평론가도 그렇게 분석한다.


그렇다면 수도권의 패배, 즉 야권패배의 근본 원인은 야권이 민주, 개혁, 진보세력까지 아우르는 대통합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4~5%라는 확고한 지지율을 가진 통합진보당을 끝까지 통합에서 배제 했던 새정치연합 지도부의 전략적 미스였던 것이다. 기초단체 공천 잘못 역시 새정치연합이 책임이다.


소선거구제에서 연대를 통하지 않고는 진보정당(통합진보당, 정의당, 녹색당 등)의 당선은 애당초 여려운 일이다. 진보정당의 퇴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거전에도 그랬지만 야당이나 언론은 선거후에도 유독 통합진보당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는 야당은 연대를 추진하지 않은 지도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언론(진보)은  지난 통합진보당 경선 오보를 영원히 뭍어 버리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월호 참사의 맥락과 다르지 않다. 정확한 원인 분석을 바탕으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세월호 참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다. 세월호 참사를 그렇게 비난했던 야당도 언론(진보)도 세월호 참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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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67)

최형우 뇌출혈 미스터리

 

지난 5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한 행사가 열렸다. 바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및 기념식이었다. 민추협은 1980년대 암울한 시기, 김영삼(YS)의 상도동계와 김대중(DJ)의 동교동계가 단합, 제대로 된 야당과 민주화를 일궈낸 구심체였다.


이들은 이날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쟁취될 수 있었는지 그 역정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들은 요즘 권위주의적 정치상황을 겨냥해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품이 될 수 없기에 계속 감시하고 지켜서 발전시켜야 하는 것임을 거듭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은 물론, 새누리당 의원도 참석했다. 지금 새누리당 중진 상당수는 바로 이 민추협 출신이다.


이날 행사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맨 앞줄에 흰 머리를 그대로 드러낸 최형우(온산) 전 의원이다. 온산은 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한국당 당내 1인자로 19973월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빠른 수술로 목숨을 건지고 오랜 재활치료로 불편하지만 그래도 거동할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됐다.


아마 온산이 재활치료에 기적같이 성공할 수 있던 것은 그 특유의 강인한 체질 덕분일 것이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가졌다.

 



사진은 1971년 초선의원 시절, 날치기를 막기 위해 상임위원장 책상에 떡 앉아있는 신민당 최형우 의원의 모습이다.(그 밑에 한병채 의원의 얼굴이 보인다) 울산 출신인 최형우 의원은 YS에게 우동영, 좌형우’(오른쪽에 김동영, 왼쪽에 최형우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다.


온산은 부잣집 샛님이던 YS를 민주투사로, 대통령으로 만든 행동대장이었다. 암울한 시대, 야당 정치의 최고 조건은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뛰어난 지략을 자랑하는 DJ마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겠는가.


아무튼 온산은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실세로 등장했다. 내무부장관, 집권당 사무총장 등을 거치며 자타가 공인하는 당내 실세로 떠올랐다. 그리고 1997년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출신의 이회창 의원이 영입됐지만, 당내 기반이 튼튼한 그는 당내 여론조사에서 1위로 나왔다.


그런데 313일 그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졌다. 청와대에서 YS를 독대하고 나온 직후였다. 과연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사람들은 온산이 쓰러진 것은 그의 저돌적인 혈기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토록 건강한 온산이 그리 허무하게 쓰러진 것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기자는 온산이 쓰러지기 바로 이틀 전 인터뷰했었다. 그때 그는 대권 레이스에서 빠지고, 목표를 당권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YS와 독대는 바로 이것을 확약받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기자는 온산이 쓰러진 상황에 대해 다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온산은 YS와 독대에서 대권후보는 포기할 테니 당 대표를 용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YS는 그것도 안된다고 일축했다. 이에 온산이 흥분했고, 체스처도 커졌다. 온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밖에 있던 청와대 경호관이 뛰어 들어와 온산을 제지했다. 이 과정에서 온산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온산이 청와대를 나와 차안에서 쓰러진 것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경호관의 제지 과정에서 쓰러진 것과는 많이 다르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쓰러졌다면 과잉경호였고, YS도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YS도 요즘 힘겨운 투병생활을 한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만약 그 때 온산이 쓰러지지 않고 당권을 잡았더라면...YS의 탈당은 없었을 것이고...김대중 대통령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노무현 대통령도 없었다면...그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가정에 가정을 더해보지만 세월은 이미 흘렀고, 역사는 만들어졌다. 백발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행사에 참석한 온산을 보면서 그의 쓰러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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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66)

해양부장관 노무현의 강단

 

한 달여 계속되는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424일 팽목항에서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가 오늘낮에 연합뉴스에서 지상최대의 구호작전이라는 기사를 봤다××, 너 내 후배였으면 죽었어라는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기레기(기자 쓰레기)’로 이어지는 측면을 봤겠지만, 기자는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모습에 더 주목했다.


한 민간인(기자)의 호통소리에 찍소리도 못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진도 구조현장에 더 이상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자원한 한 학도병의 호통에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이 기죽어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이 탈영하다 들킨 모습이 떠올랐다.


이 참담한 모습을 본 국민들은 우리 아이를 구해줄 구조대는 없다는 절망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본 부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믿고 전투 할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승객을 남기고 도망간 선장이나,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장관이나 청장 모두, 무능의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사진 노무현 재단>


해양수산부 장관 리더십 얘기가 나왔으니 이주영 장관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해양부 장관 시절 리더십을 비교해 보자. 사진은 2000년 노무현 해양부장관이 해경함정을 방문해 함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매우 진지하게, 겸손한 자세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실 지금도 해양부의 비리 커넥션이 많이 드러나지만, 거대 항만공사를 위한 건설사, 재벌 해운사, 원양 어업 기업 등이 즐비한 해양부는 비리 여지가 많았다. 해양수산부 기획관리실장은 국정감사 때마다 비리를 폭로하는 국회의원 입막음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특히 20008월 노무현 장관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 해양부장관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는 1998925일 어설프게 체결한 한일어업협정으로 전국적 시위에 직면하고, 연이여 터진 내부 비리로 장관이 6~9개월 만에 교체되는 등 거의 부 해체 요구에 시달렸다. 아마 요즘 해양부나, 해경 수준의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취임한 노무현 장관은 취임사에서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을 하다 생긴 실수는 내가 책임질 것이지만, 일을 하지 않아 생긴 문제는 직원들이 책임져야 합니다"라며 직원들에게 용기와 책임감을 심어줘다이번 세월호 사건 때 팽목항에서 잘못한 직원들을 가려 모두 책임을 묻겠다며 자신은 아무책임이 없다는 투로 얘기한 박근혜 대통령과 천양지차 아닌가.


특히 노무현 장관 시절은 IMF 직후로, 모든 금융기관이 망가진 상황에서 금융업을 했던 수협은 부실이 더욱 심각했다. 동네 조합장이 대충 대출해 준 것이 부실해져 전국 수백 개 단위 수협이 퇴출대상에 올랐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있는 수협 퇴출을 막기 위해 해양부에 집요하게 압력과 로비를 가했다.


그 때 노 장관은 내가 책임진다, 수협과 관련된 어떠한 자료도 국회의원에게 주지 마라, 국정감사 자료도 줘선 안된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의 자료거부에 대한 혹독한 비난과 질타를 웃으며 당당히 받아들였다. 노 장관은 나중에 "국회의원들에게 수협 부실자료를 줬다면, 수협 구조조정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무와 책임 앞에서는 당당한 자세를 보인 것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무능한 이주영 장관을 보면서, 노무현 장관의 책임감 있는 리더십이 생각난다. 아마 노무현 해양부장관이었으면 이렇게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속수무책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리더가 중요한 것이다.

오늘 고 노무현 대통령 5주기라서 더 그 때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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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65)

막걸리 따르는 대통령

 

요즘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 속이 어수선하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공천 후유증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도대체 컨트롤타워가 없어 보인다.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는 정부의 컨트롤타워 부재 만큼이나 야당도 컨츠롤타워가 난맥을 보이고 있다. 물론 3김씨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과거보다 당내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지난 12일 열린 새정치연합 의원총회에서 김영환 의원은 당의 전략공천에 대해 “4선 국회의원으로 의원총회장에 앉아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나면서 당으로부터 저의 제명을 요청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비난했다전남도당위원장인 이윤석 의원은 김한길 안철수 두 공동대표에게 당을 나가라고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비공개 의총에서 정청래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김대중은 젊은 피를 수혈해 고름을 짜냈고 안철수는 생살을 찢고 피멍들게 한다. 김대중은 자기 팔을 잘라 당을 살렸고 안철수는 남의 팔다리를 잘라 당을 죽이고 있다. 김대중은 본선승리가 목적이었고 안철수는 공천승리가 목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현 안철수 공동대표의 정치적 행보를 참 절묘하면서도 신랄하게 빗대 비난하고 있다. 정 의원이 말한 김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로 가보자.


 


사진은 1968년 목포를 방문한 당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노상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다. 옆에 앉은 사람은 박영록 당시 대변인이고, 오른쪽에서 노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따르는 사람이 김대중 의원이다.


자신의 지역구를 찾은 당 총재를 깍듯이 모시는 김 의원의 태도가 무척 겸손해 보인다. 게다가 제1야당 총재와 의원들이 허름한 노상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은 정겹기까지 하다. 식탁을 보니 안주도 변변한 것이 없다.


김대중 의원의 이런 겸손한 태도를 바탕으로 5년 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었다.(실제는 종이가 없어 명함에 당직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써줄 정도로 긴박하고 처절한 당내 세력게임의 결과 이지만선배들에게 대든 40대 기수론 깃발을 맨 처음 든 김영삼 의원은 선배로부터 구상유취하다는 소리를 듣다가 결국 대통령후보 지명에서 패배한 것과 대비된다.


물론 김대중 의원은 이후 죽음을 오가는 민주화 투쟁과 투옥, 그리고 적과 동침끝에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평화상까지 받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실 당 대표에게 대드는것도 문제이지만, 당 대표가 당원들을 가슴으로 껴안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이다. 특히 정치에서 당 대표, 정치선배들이 비난받는 이유는 정치를 가슴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야당정치는 가슴이나, 열정, 의리보다 행정적이고, 사무적, 타산적이 되어 간다는 평가가 많다. 말로는 동지라 하지만 사진처럼 막걸리나 소주에 스민 인간적 정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대표가 조금 수틀리면 대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정치는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상대를 가슴으로 껴안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의 김대중 의원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지 않는, 게다가 가슴으로 상대를 껴안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국민들은 그런 민낯을 지금 세월호 참사 수습과정에서 뒤늦게 발견하며 후회하는 것 같다.


~~~~~~~~통곡과 한숨소리만 길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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