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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정치인 같은 시인 김지하, 시인 같은 정치인 김상현

생노병사의 길을 가야 하는 인간에게 ‘어떻게 늙느냐’도 중요한 화두이다. 오히려 후세 역사가들은 젊은 시절보다, 노년의 행적을 더 중요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역사가들은 일제 강점기 젊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나이들어 변절한 것을 더 혹독하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와 같이 격변의 역사에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은 1975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는 김지하 시인의 모습이다. 그는 ‘오적’이라는 저항시로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다 구속과 석방을 반복한 시인이다. 그는 국제펜클럽 등 ‘글을 쓰는’ 세계인의 구명운동으로 이날 석방됐다. 짧게 깎은 김 시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금 모습과 달리 순박해 보인다. 


김 시인을 부축하며 안내하는 오른쪽 사람이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던 ‘후농’(後農·김상현 의원의 아호)이다. 나이는 후농이 조금 많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향사람으로 친하게 지냈다. 이때 김 시인은 동교동 김대중 선생을 방문해 “시인은 어둠속에 감춰져 있는 진실을 빛속에 드러내는 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실 이 말은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 되는 명언이다. 


그러나 김 시인은 이후 15년도 안된 1990년대 초반 ‘죽음의 굿판’ 운운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때는 정치인 못지않는 행동과 발언으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더니 그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문재인을 지지한 48%는 공산화 세력”이라고 말했다. 김 시인은 늙어가면서 정치인, 그것도 진실은 커녕 논리도 없는 ‘꼴보수 정치인’으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서울대 출신의 김 시인보다 ‘배우지 못한’ 후농은 사실 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불과 30세에 국회의원이 돼 3선 가도를 달린 ‘촉망받는 젊은 대권주자’로 꼽혔다. 그는 1966년 3월 국회 한일협정 대일청구권자금 사용에 반대하는 무려 4시간 30분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후농은 유신치하 언론의 자유가 말살됐을 때 잡지 언론인으로 변신해 김지하 시인의 시와 희곡을 발표하는 등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보안사 지하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암울한 전두환 시기, YS·DJ세력을 묶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해 사실상 ‘야당복원’의 선봉장이 됐다. 후농은 거의 모든 정치인이 우리 현대정치사의 양대 거물 YS와 DJ에 굽신거릴 때 당당히 맞선 몇안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6선을 거치는 동안 명분과 대의에 어긋나는 행보를 걸은 적이 별로 없다. 비록 말년에 낙천과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는 쓰라림을 겪었지만 그가 부정하게 돈을 축재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것은 여의도 사람들은 다 안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한푼의 가산을 늘리지 않고, 오히려 가산을 탕진한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한 시민단체가 그를 낙천대상으로 지목했을때, 많은 민주화 원로와 신부·목사 등이 그를 옹호하는 성명을 낸 것도 유명한 일이다. 그는 ‘정치를 예술처럼, 시인처럼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정치인이 돼 가는 시인과, 시인처럼 정치를 한 정치인. 사진속에 나란히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또 어떤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한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