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1. 민족일보 창간


  국회에서 한바탕 논란을 거듭한 후, 민족일보에 대한 논란은 표면적으로 나마 잠잠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창간자금의 출처에 대한 의혹의 눈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시각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 신문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창간자금에 대해 책임질 만한 입장이 아니고 신문창간의 자금은 조용수를 비롯한 몇몇 경영진에 의해 마련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창간 예정일인 2월 8일은 지키지 못했지만 창간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주필 겸 편집국장은 이종률이 담당했고, 취재담당 부국장 겸 사회부장에 경향신문 사회부장 출신의 오소백, 편집책임부국장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출신 권일하 등을 영입했다.

  조용수는 기자 구성을 국장 1명 부국장 2명 편집부(도안포함) 부장포함 4-5명, 정치부 부장포함 4-5명, 경제부 부장포함 3명, 사회부 부장포함 7-8명, 문화부 부장포함 4명, 교정부 4명 등 30명에서 32명 선으로 잡았다. (이 정도 규모의 편집국 규모는 당시 다른 일간 신문사와 비슷했다)

  기자는 기존 신문사에 있는 경력기자로 일단 충원하고 빠른 시일 내에 공채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미 신문의 성격을 밝혔기 때문에 신문의 사시에 마음이 들어 자진해서 입사하려는 젊은 기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우는 기존 신문사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당시 민족일보 기자는 다음과 같다.

  ∙ 편집부장 공석하(전 경향신문 편집부장, 후에 한국경제일보 편집국장, 논설위원 역임)

  ∙기     자 이상용 이진형 김지회 백인수(후에 동아일보 편집위원 역임) 하승주

  ∙정치부장 김명구(전 경향신문 정치부기자, 재무부 공보관, 천안공업전문대학장 역임)

  ∙기    자 전무배(전 서울신문 기자, 후에 인혁당 사건으로 피소) 한병걸 이재문(후에 남민전 사건으로 옥사) 정현순 김종하(전 서울신문 기자, 후에 신아일보 편집국장, 국회의장 비서실장, 10,11대 국회의원 지냄) 장석구(전 평화신문 기자, 후에 대구매일신문 기자, 인혁당사건으로 피검, 옥사)

  ∙경제부 기자 최상순 이호일

  ∙사회부장 양기수

  ∙차    장 김재형(평화 경향 세계 동양통신 기자 역임)

  ∙기    자 문계준(전 경향신문, 조선일보 기자, 후에 국정교과서 근무) 정의석 규성일 이원종 권재열 김영광(전 통민청 중앙간사장, 후에 인혁당 관련 피검)

  ∙문화부장 유성(자유·중앙일보 문화부장 역임)

  ∙기    자 이종석 차 철 이 호 이종배

  ∙조사부장 전원중

  ∙기    자 정삼성 김혜숙 신현복(준사원)

  ∙교정부장 김기웅

  ∙기    자 신동백 김유동

  ∙사진부장 최희연(조선·한국·경향신문 사진부장 역임)

  ∙기    자 이락선 유창열 김종옥

  후에 정치부장으로 경향신문의 이창기 부장, 세계일보, 자유신문 출신 윤익섭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이는 민족일보 편집국 기자명부에 의한 것으로 그 후 변동사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일선 기자의 진용은 일반 신문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2월 10일, 합동통신과 통신전제 계약을 맺고, 가장 어려운 문제인 인쇄문제도 이날 서울신문사와 인쇄용역 계약을 체결해 해결했다.

  인쇄소 문제가 해결되자 조용수는 모처럼 차분하게 책상위에 앉았다. 민족일보의 2백자 원고지 한쪽에는 이런 문구를 넣어 인쇄했다.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

  조용수는 머리에서 글이 쉴새 없이 나오는 것들을 원고지에 옮겼다. 민족, 동포, 분단, 통일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자신도 느끼면서 글을 써 내려 갔다. 그러나 이젠 한 신문의 발행인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튿날 조용수는 자신의 취임사를 이종률 주필과 이건호 논설위원에게 보여줬다. 천천히 취임사를 읽어 본 이 주필과 이 위원의 안색이 교차했다.

  “조 사장, 이건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오”

  일일이 조용수의 취임사에 붉은색 줄을 그은 이건호 위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부분이 앞서간다는 겁니까”

  조용수는 그래도 자신의 원래 생각을 충실히 쓰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 미진한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앞서간다는 말에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 사장의 글은 우선 용어선택에서 문제가 있어요. 인민이니 하는 용어는 지금 우리가 함부로 써서는 안 될 용어예요. 또 우리 신문의 성격을 알리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너무 일부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는 듯한 신문은 위험부담이 많아요”

  옆에 있던 오소백 부국장도 거들었다.

  “맞아요. 지금 이 신문은 일반적 민족지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투쟁적입니다. 또 창간호 사설도 조 사장이 가필했는데 그런 식으로 나가면 곤란 합니다”

  그러나 이종률 편집국장은 잠자코 좌중의 이야기만 들었다. 조용수는 자신의 취임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 예, 인민이라는 단어는 원래 그 뜻이 좋은 뜻 아닙니까. 그런데 이북이 그 용어를 쓴다고 거부감이 있으면 선생님 말씀대로 국민이라는 용어가 좋겠군요,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 합니다”

  잠자코 듣던 이 주필이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신문은 분단을 절규하면서 통일을 생각하자는 근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있는 사람이 아닌 없는 사람을 위하는 신문을 만들자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운동은 정치적이어서는 안되고 대중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조용수는 실망과 용기가 교차했다. 그것은 이미 신문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한 사람이 이 신문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 사장은 일본에서 생활해서 국내사정을 잘 모르는 점이 있어. 또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 이론이 부족한 점도 있고, 그 이유는 조 사장이 너무 정치적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이 주필의 말을 듣고 있던 조용수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물을 한잔 들이켰다.

  “물론 선생님이 진보적 학문을 한 학계의 권위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제가 일천한 지식밖에 없다는 것도요. 장기판에서 수는 못해도 훈수는 둘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분명하게 말하지만 저는 지금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고, 신문을 만드는 목적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달라진 세상, 그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중요한 임무가 우리 신문에 있는 것입니다”

  논쟁은 큰 목소리까지 나오게 됐다. 그러나 조용수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2월 13일 창간호가 나왔다. 1면에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가 실렸고, 시인 김수영의 시를 실었다. 또 신문의 2면 한쪽 구석에 조용수 사장의 다음과 같은 취임사가 실렸다.


  <취임사>

  여기 창간되는 민족일보의 대표직을 제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관계자 전체가 민족의 공지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동포들의 위대한 기대를 받고 있는 대표취체역의 직을 연소한 이 사람이 담당하게 되었다는 데 대하여 오직 책무의 진중함을 통감하는 동시에 한편, 영광스러운 감 금할 길 없습니다. 밖으로는 동포 여러분의 지도와 편달에 힘입고 안으로는 주주 취체역 제위와 사원 동지들의 협력 밑에서 성과 열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일보가 명실이 상부한 민족의 신문으로써 우리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같이 걷고, 민족의 융성과 같이 발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면 저에게 있어서 더 큰 다행이 없다 하겠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이 민족일보가 ‘대중일보’라는 이름으로 창간 준비사무를 시작한 지는 피의 3, 4월 혁명이 있고서 그리 멀지 아니한 시기였습니다. 저희들은 그 4월 혁명에서 민족의 주체적 투쟁을 통하여 찾은 우리의 주권을 다름아닌 바로 그 방향에서 발전시키고 민족의 소리를 참되게 반영시킬 수 있는 신문을 하나 내어보려고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고심해 오다, 오늘 비로소 이렇게 산성(産聲)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임무의 큼에 따르는 결심과 포부가 가슴을 설레게 할 뿐입니다.

  신문으로서의 형태와 규모는 작습니다만 장래를 전망한다면 현재의 단간을 시급한 시간 내에 복간제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인위적인 장벽에 의하여 분열된 우리 민족은 상호간의 적시와 골육상쟁에 뒤이어 심각한 빈곤만을 경험해 왔습니다. 또한 민족의 긍지를 저버리고 외세에 의존하여 15년간의 세월을 헛되게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우리 민족일보는 이러한 민족의 분열과 비원을 영속화 시키는 일부의 작용에 대하여 온갖 정력을 기울여 싸울 것이며 특히 적극적으로 남북간의 민족의식의 추진과 생활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하는데 있는 지면을 과감하게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민족일보의 대표로서 복무하게 된 저는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투쟁의 선두에 섰다는 것을 자못 자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보수진영 인사들은 저를 ‘조련계’ 운운의 낭설로써 모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련계’ 와는 계열을 달리하는 ‘거류민단’에서 일해오던 과정에서 조국의 분단을 영구화 시키고 거기서 전쟁위기를 빙자하여 갖은 수법으로써 대중박해를 일삼고 특권을 보수하려는 이승만 도당은 발제하여야 한다고 지각하고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날의 이승만 도당들은 오늘에 와서 ‘무력북진론’ 대신에 ‘선건설 후통일’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것을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 현실방법의 예시는 없이 대중을 다시금 기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를 조련계 운운하여 모함하는 수법은 탈을 바꾼 ‘북진통일론’과 유관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규명될 것이오니 과히 걱정들 마시고 민족일보의 발전을 위해서는 물론, 대표취체역으로서의 저의 직책수행에도 성과가 있도록 동포여러분의 변함없는 교도(敎導)가 있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대표 취체역  조용수


  창간 첫 호의 감격은 무척 컸다. 혁신계는 물론 학생층에서 격려가 쇄도했다. 창간 인사차 민족일보를 방문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다음은 그 명단으로 괄호 안은 당시 직책이다.

  이동화(통일사회당 정치위원장) 송남헌(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 정화암(통일사회당 정치위원) 최석채(조선일보 편집국장) 구익균(통일사회당 재정위원장) 윤식(서울대 민통련의장)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 박용구(작가) 김수한(한국노동조합 총연맹 지도위원) 조헌식(통일사회당 통제위원장) 양호민(사상계 주간) 주홍모(서울대 교수) 임기봉(전 민의원) 유승범(한국일보 논설위원) 김병용(경영과학연구소 대표) 박완일(민주학연 대표) 하태완(조국통일민족전선 선전부장) 장수경(우국노인회 최고위원) 이강훈(전 재일거류민단 중앙총본부 고문) 윤희경(변호사) 신현정(세계연방협회 한국연맹 사무국장) 이영선(재일귀환교포 원호대책위원장)



2. 첫 도전, 한미경제협정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쟁점이 된 사안이 바로 한미경제협정 문제였다.

  61년 새해 들어 장면정부는 본격적인 경제 활성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을 원조 받아 쌀값을 억제하고 여기서 남는 돈으로 국토개발사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또 일본에 대해서 이승만 정권 때부터 추진하던 국교정상화를 꾸준히 진행시켰다. 특히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 이전이라도 민간차관과 교포재산의 반입을 허용키로 여당과 합의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계속했다.

  장면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야당인 신민당의 반대에 부딪쳤다. 야당은 장면정부의 대일완화정책은 범국민적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신민당은 자체 창당일정에 쫓겨 외부 문제에 신경 쓰지 못했다.

  민족일보는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해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오히려 장면정부가 한일국교 정상화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미경제협정은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장면정부는 2월 8일 한미경제원조협정에 조인하고 국회의 비준을 기다렸다. 대학내 민통련 중심의 한 학생세력과, 혁신정치 세력은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 이슈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2월 12일 통일사회당은 한미경제협정의 굴욕적 성격에 대해 비난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 한국정부는 ‘원조사업의 계획실황 및 관계서류 일체를 미국원조기관의 대표에게 제약 없이 수시로 감시 재검토 할 수 있게 허용하도록 규정한 제3항은 호혜적이고 쌍무적이어야 할 국제조약체결상의 상궤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민족적 자긍심 없는 장 내각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규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동 협정 제 6항은 실질적으로 한국에 상주하는 모든 미국인에게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부여하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한국에 도입되는 원조자금을 최고의 실세 환율에따라 원화와 교환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원화가치의 계속적인 하락을 추구할 우려가 있는 바, 환율인상에 따르는 각종 물가의 앙등은 이미 도탄에 빠진 근로대중의 생활조건을 한층 더 악화시킬 것이 분명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이때까지 원조를 제공했거나 현재 주고 있는 나라들과 미국사이에서 맺어진 어느 원조협정에도 찾아볼 수 없는 비 호혜적이고 굴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2. 이번 신 협정에서 양측이 확인한 바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상호 방위원조협정, 대한민국과 유엔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등은 모두 한국이 가장 어렵고 남의 힘이 아쉬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6·25 동란을 전후하여 채결되었던 탓으로 주권국가로서의 위신과 이익에 상반되는 제 조건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전 국민이 이점을 유감으로 여겨왔거늘 이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개악하는 방향으로 단일화한 장면 내각의 반민족적 처사는 전체 국민의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3. 국회는 원조가 보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정될 때까지 신협정의 비준을 거부하는 한편, 이것을 계기로 신분협정 및 행정협정의 체결을 서두를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4. 미국은 신협정과 같은 비 호혜적인 조약을 우리에게 강요함으로써 한미양국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균열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서는 무능부패한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울분의 궁극적인 대상이 되어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선전 자료를 제공하는 과오를 제공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통일사회당의 성명에 이어 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 혁신당, 사회대중당 그리고 민자통도 유사한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 문제는 모처럼 혁신세력이 단결된 모습을 보일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야당인 신민당과 혁신정당은 이 협정을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에 비유했다. 2월 13일 민의원 본회의장에서 신민당 강승구(姜昇求)의원은 정부가 추진 중인 한미경제협정에 대해 이렇게 비난했다.

  “이번 한미간에 체결된 경제원조 단일화 협정은 그 내용과 협상경위에 있어 한일합병을 전후하여 맺어진 을사조약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번 조약의 비준이 거부될 경우 장 총리는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물러설 용의가 있는가”

  이에 대해 장 총리는 전례 없이 강한 어조로 답변을 했다.

  “이번 협정이 을사조약과 비슷하고 경제적인 예속을 초래하는 우려가 있다는 발언은 한미간의 상호입장을 볼 때 정치적 식견이나 미국의 입장을 몰이해한데서 온 것이다. 이렇게 미국을 음해하는 발언을 의정단상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가. 미국측의 침략적인 의도가 있다면 증거를 대라”

  신민당의 박준규(14대 국회 국회의장 역임)의원은 정치학자답게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째, 초당파외교를 지향하겠다는 정부가 일체의 사전협의도 없이 이번 협정을 체결하고 사후결제에 야당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용에 있어 이러한 협정을 맺고 있는 어느 나라의 것보다 굴욕적이고 비 외교적인 것이다. 둘째, 국회의 동의를 얻는 이유가 무엇인가. 셋째, 미국의 경제기술원조 목적을 국방상 이유로 국한한 제1조는 미측 원안에 없는 것을 우리 측에서 삽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넷째, 자주외교를 지향한다는 장 정부가 이번 협정에 미국어만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섯째, 합동경제위원회 구성에 있어서 한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을 주장한 적이 있는가. 1945년 중국에서는 중국인 3명에 대해 미국인 2명의 비율로 되어있는 데 이번 협정에서는 1대1의 비율로 되어있다. 여섯째, 제3조 정보제공에 대한 유사규정은 …다른 나라의 규정과 비교할 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이 문구가 자손만대에 남을 것을 생각한다면, 정부는 이 조항만 수정내지 해석에 못을 박아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곱째, 원조기관원과 계약상사 구성원들에 대한 외교관 특권부여는 부대해석조항을 붙여서라도 좀더 자주성을 주장할 수 없는 가. 여덟째, 이 협정의 폐기조항을 넣지 않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국회에서의 논쟁 못지않게 학생청년단체는 이 협정의 비준을 거부하기 위한 반대투쟁에 들어갔다. 각 대학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국학생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정부와 국회에 대한 건의문을 발송하고 미국정부에 대해 메시지를 보내 ‘예속적 식민지적 불평등 협정에 결연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또 국회의원에게 비준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공개장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일보는 단연 이 협정의 비준에 반대하고 나섰다. 창간 다음호인 2월 14일자 사설에 ‘장 정권은 미국에의 굴욕적인 태도를 수정하지 못하면 물러나라’를 싣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왜 이 꼴인가-우리의 빈곤은 누구 때문인가’라는 중앙대 김병태 교수의 연재논단을 실었다. 15일자에는 ‘매국론과 불가피론-단기적인 안목의 원조에 만족하여 민족건국의 원칙에 맞설 수는 없다’는 사설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2월 16일, 미국은 국무부 매카나기 대사를 통해 ‘미국이 대한민국 또는 다른 어떠한 나라의 주권도 이를 침해할 이유와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한다’는 해명각서를 발표하자, 17일자 사설에서는 이 성명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매카나가 미대사 성명을 보고 - 선의적이나 초점을 찌르지 않았다’는 사설을, 18일자 사설에서는 ‘경제안정의 길은 딴 데 있다’를 게재했다.

  학생들은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대한민국은 미국의 조차지가 아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적 예속정책을 버리고 한국민의 감정을 다치지 말라’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대구에서는 혁신정당 사회단체 주최로 한미경제협정 반대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성토대회와 시국강연회가 연이어 열려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정부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2월 15일 장면 총리는 주례 공식기자회견에서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이 북한괴뢰의 지령에 의한 것이며 그 구체적 증거를 잡았다”고 발언했다. 그 구체적 증거란 지령문을 입수했다는 구체적인 언급까지 곁들였다. 이 발언에 대해 국회에서도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장면 정부가 내놓은 구체적 증거라는 것은 북한의 평양방송에서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북한의 지령이 구체적으로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가에 대해서 장면 총리는 ‘상상에 맞기겠다’는 애매한 대답만 반복했다.

  장 총리의 이런 발언에 대해 민족일보는 16일자 사설에 ‘망언’, ‘노망’, ‘무지’라는 단어를 써가며 ‘장 총리의 망언은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면이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북한지령, 그것도 조총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무언중에 민족일보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장면은 자신의 정치적 제1의 적은 민족일보라고 생각했다. 민족일보를 대상으로 한 감시는 물론, 테러까지 은밀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민족일보에서 나오는 데 건장한 청년 서너 명이 날 둘러쌌다. 그때만 해도 나도 혈기가 왕성한 때인지라 ‘이놈들’하며 큰 소리를 쳤다. 그 청년들은 조금 주춤했다. 나는 한 청년들의 어깨를 잡고 ‘술 한잔 사겠다’고 했다. 인근 중국집에서 배갈을 시켜 안주도 없이 한 대접씩 나누어 주고 나도 한 대접 들이키니 그 청년들은 기가 죽어 버렸다. 당시 민족일보와 혁신계 인사들에게 미행과 테러가 많이 일어났다” <윤길중 증언>


  민족일보의 이러한 논조에 대해 물론 내부에서도 반발이 존재했다. 그러나 조용수를 비롯한 경영진은 이런 위상을 계속 밀고 나갔다. 아예 조용수는 자신이 직접 연사로 나가 한미경제협정의 부당성을 따지기도 했다.

  “조 사장은 당시 외부의 연사로 나가 지방까지 돌아다니며 많은 강연을 하기도 했다”<안신규 증언>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은 창당이 임박해서 내부적으로 한미경제협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따지던 박준규 의원도 ‘정부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건부비준’으로 돌아버렸다.

  결국 2월 28일 오후 한미경제협정은 박준규 의원이 제안한 세 가지 양해조건, 즉 대한민국 주권의 완전존중 정신에 배치된 적용을 할 수 없다, 외교특권부여를 요청할 관리의 수는 양측 정부 협의 하에 제한한다, 면세조항의 적용범위와 대상자의 국적 등 세부항목을 양국정부의 합의사항으로 한다는 세 가지를 조건부로 민의원에서 찬성 1백33표, 반대 1표로 비준안이 가결됐다.

  혁신정당 의원은 퇴장함으로써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참의원에서는 제적 34명 가운데 찬성 32표, 반대 1표로 통과돼 이 문제는 일단락 됐다 .

  이 한미경제협정 파동은 비록 조건부 비준으로 마무리됐지만, 갓 창간된 민족일보의 성격과 진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첫 번째 시험대였다. 그것은 분열된 혁신세력에게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고, 또 진보적 지식인, 학생의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호적인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미국에 대해 재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녔다.

  이 사건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는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혁신정계와 민통련을 비롯한 학생세력, 민자통 등의 사회단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것은 곧 장면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그것에 대한 대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쳤다.



3. 2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


  1961년 3월. 그러니까 한미경제협정을 마무리한 바로 직후였다. 정국은 3·1절을 맞아 다시금 술렁거렸다. 더구나 장면 정부는 은밀히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과 ‘반공 특별법’ 두 개의 법안을 준비했다.

  3월2일 오후 5시쯤, 서울신문 공무국. 민족일보 편집부 기자가 3일자 편집을 마치고 4면 지형을 막 뜨려는 순간, 갑자기 서울신문 공무국장이 공장안으로 들어와 소리를 쳤다.

  “민족일보 작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중지한다”

  한창 작업을 하던 서울신문 공무국 직원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 놀란 사람은 민족일보 편집부 기자였다. 서울신문 공무국장에게 무슨 영문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 소리 없이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가 버렸다.

  2면 조판을 하고 있던 민족일보 편집기자는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민족일보 업무, 총무 두 국장이 달려 온 것은 그 후 얼마되지 않았다.

  민족일보 업무 총무국장은 서울신문 공무국장을 만났다.

  “왜 갑자기 신문 인쇄를 거부하는 것인가”

  서울신문 공무국장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사장으로부터 민족일보 인쇄를 중지하라는 지시만 받았다. 사장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그대로 실행할 뿐이다.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편집이 완료된 것은 인쇄를 해줘야  할 것 아닌가”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민족일보에 대해서 활자하나 만져서 안된다”

  한창 고성이 오가고 논쟁을 하고 있을 때 3층 공장에는 이미 편집이 완료된 민족일보 3일자 조판이 허물어졌다. 두 사람은 다시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을 만났다.

  “이건 계약 위반이다. 계약서에는 분명 인쇄를 못할 경우에는 5일전에 통고하기로 되어있지 않는가”

  서울신문 오 사장은 곤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완고하게 인쇄를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우리도 위에서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인쇄를 해줄 수 없다. 다른데 가서 인쇄를 하면 될 거 아닌가”

  “아니 지금 이 시간에 원고를 다 넘기고 편집이 완료된 상태에서 인쇄를 못하겠다면 오늘 신문을 내지 말라는 것 아닌가”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인쇄를 해줄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봐라”

  “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이유라도 말해 달라. 우리 신문이 장 정권을 비판해서 인가. 우리 신문의 논조를 바꾸면 인쇄를 해주겠다는 것인가”

  오 사장도 분명한 계약위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본인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한 것은 국무원 사무처장의 인쇄허가 각서를 가져오기 전에 나는 민족일보를 찍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조용수 사장에게도 통보가 된 것이다”

  비슷한 시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서울신문에서 온 장 상무를 만났다.

  “자 이 계약서를 보세요. 이런 계약위반이 어디 있습니까. 서울신문사는 오늘 아침 3월분 인쇄대금을 미리 받아가지 않았습니까. 아니 오늘 인쇄대금을 미리 받아가고 인쇄를 못하겠다는 것은 무슨 행위입니까. 또 계약서상에는 분명히 계약을 취소할 때에는 5일전에 통보하기로 되어 있어요”

  조용수 사장은 무척 흥분했다. 같이 있던 안신규 감사는 “이것은 사기행위나 마찬가지야. 우리도 법적으로 가만히 있지 않겠어”라며 소리를 쳤다.

  서울신문 장 상무는 곤욕스런 표정으로 사정을 했다.

  “저희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서울신문이 누구의 것이라는 것을. 오 사장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다 오늘 갑작스럽게 지시가 내려와서···아무튼 저희 신문사에서는 국무원의 지시가 없으면 인쇄가 불가능합니다. 계약에 대한 문제는 차후 정리하도록 합시다”

  마냥 이렇게 싸우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조용수 사장은 장면 정권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 했지만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오후 6시를 넘었다. 벌써 인쇄가 끝났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에 단시간에 4만 여부의 신문을 인쇄할 새로운 인쇄소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다른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들이 몰려왔다. 신문사가 취재대상이 된 것이다. 조용수 사장은 기자들에게 회사의 입장을 밝혔다.

  “권력으로 언론을 억압하는 현 정권의 태도에 크게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민족일보는 다른 인쇄처를 찾아 계속 발행할 것이며, 부득이 하루 이틀 신문을 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족일보는 이날 신문발행을 포기하고 각 신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성명서를 게재함은 물론, 성명서 8만장을 인쇄해 신문 대신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조용수는 분노에 차 성명서를 써내려갔다.


  성명서

  본지의 인쇄방해 조치에 항거하며

  독자 및 동포여러분들의 절대한 지원 밑에서 창간되어 그동안 일취발전의 길을 걷고 있는 본 민족일보는 통한막심하게도 지령 18호라는 짧은 시일에 발행저지 당하게 되는 비통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본지는 맡은바 임무의 중대함에 비하여 재정력이 빈약한 사정상 우리들의 공장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서울신문사 인쇄공장을 이용해 왔다. 계약에 의하면 해약은 쌍방 어디에서든지 5일 이전에 그것을 상대방에 통고하기로 되어있다. 이러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편집을 마감하여 바로 인쇄에 걸려는 직전인 금일 하오 5시 서울신문사 사장 오종식씨는 정부의 지시임을 언명하면서 인쇄의 중지를 강집(强執)하였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와 상업적 계약의 준수가 있어야 하는 법치국가의 일이라면 언론탄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사는 독자 및 동포 여러분과 함께 분격해 마지않으며 1, 2일 안에 무슨 방법으로든 속간을 하고 나아가서는 불원한 시일에 본사의 설계에 의한 고급 자기공장을 설비하여 보수 세력과 그들의 모든 무리한 처사들에 항거하는 명실상부한 민족의 신문으로서의 위용을 갖출 것이다.

독자 및 동포여러분은 오늘을 참고 내일을 기다리시기 바란다.

  1961.3.2

  민족일보사  대표취체역  조용수


  신문사에는 독자의 문의와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민족일보 인쇄중지의 배경은 쉽게 밝혀졌다. 국무원 정헌주 사무처장은 민족일보가 창간된 지 일주일도 안돼, 사무처 공보국 보도과장을 서울신문사에 보내 민족일보 인쇄를 중지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그 후 2월 28일 정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직접 공문을 보내 민족일보 인쇄를 즉각 중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쇄중지를 명령하게 된 계기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족일보가 장면 정권에 대해 호되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실 장 정권은 창간 전부터 은밀히 신문자금에 대한 내사를 벌여왔지만 특이한 혐의를 잡지 못했다. 결국 민족일보는 창간됐고 우려했던 대로 민족일보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더구나 혁신세력의 발호를 좌시할 수 없던 보수진영의 위기의식은 점점 높아갔다.

  특히 2월 26일 실린 김철의 ‘장내각의 중대책임’이라는 논단은 장면 내각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장 정권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이 논단은 두 번에 걸쳐 연재됐다. 이 논단은 장면정권의 그동안 실정을 하나하나 지적한 것으로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래 없는 창녕선거난동 사건도 묵인하고, 민주당과 대결했던 입후보자들의 선거사범은 준엄하게 다루고, 집단 월북기도사건을 미연에 알지 못하고, 부정선거 원흉이 해외로 망명하는 것도 모르면서 혁신세력의 정치활동이며, 교원들의 단결, 학생들의 사회참여를 억압하고, 황폐한 농촌을 살리기 위한 대책은 하나도 세우지 아니하면서 농협협동조합에 관권으로 압력을 가하고, 헌법규정의 군 통수권에 관련된 사항 해석을 멋대로 해 임기제 참모총장의 경질을 마음대로 하고, 경찰중립화를 좀처럼 추진할 생각을 안하는 것은 독재화의 위기를 충분히 시사한다.

  부패에 관해서 장 내각은 거의 변호할 여지가 없다. 부정축재자의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는 점, 환율을 올리기 전에 정부보유 외화 수만불을 불하하여 소수 재벌에게 막대한 이득을 준 것, 관공서의 결재나 취직에 뇌물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 특히 장 내각이 권력에 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부패를 일소하지 못한 것이다.

  학원을 민주화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실제는 학원 노리배를 동원하여 학원 개혁운동을 저지하기에 급급하고, 한국 경제는 언제나 미국 또는 일본에게 의존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남한의 역량이 충분히 성숙한 후에 통일문제를 논하자는 것인데 언제고 세계정세가 한국만을 위하여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바에 통일이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 혁명 첫 내각이 가져야 하는 책임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장 내각은 물러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장면정권은 민족일보를 ‘적’으로 규정했다. 장면은 민족일보가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장면총리 공보비서였던 송원영은 회고록에서 ‘민족일보는 창간직후부터 계속 도각(倒閣)공세를 폈다’고 말했다>

  장면정권으로서 민족일보는 너무나 골치 아픈 존재였다. 내심 민족일보를 조사하면서 겉으로는 회유도 했다.

  “하도 장면정부를 비난하는 논설을 써대니까 장면총리의 공보비서 송원영씨는 기사를 빼기위해 민족일보 사무실로 달려와 사정을 하는 것도 여러번이었다” <김 철 증언>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면 정부는 한미경제협정 체결에서 민족일보가 보였던 태도로 보아 앞으로 제정할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에서는 정권이 더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튿날인 3월 3일. 마침 장면 총리의 주례 기자회견이 있는 날이었다. 장면 총리는 민족일보의 인쇄중지가 언론탄압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탄압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면서 정부는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통고한 것이고 다른 곳에서 인쇄를 하면 될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국무원 사무처장은 민족일보의 인쇄를 중지하도록 명령한 것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서울신문사의 업무계획은 보고하여 승인을 얻어야 할 것임에도 승인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취소시킨 것이고, 서울신문과 민족일보간의 계약은 사전에 보고를 받지 못해 아는 바가 없다”

  계약의 당사자였던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의 입지가 난처해 진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이런 말만 반복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말고 국무원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조용수 사장은 바로 이날 정오 일본 마이니찌 신문 한국특파원 미하시(三橋史郞)기자와 인터뷰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미하시: 이번 사태의 경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미 각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정부의 압력으로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중지됐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과 같은 언론탄압이며 방법이 더 교활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볼 때 수법이 치졸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각 정당, 특히 같은 보수당인 신민당까지 반발하고 언론기관이 성원해 주고 있다”

  미하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국제신문인협회(IPI)에 제의하고 서울신문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겠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금명간 속간할 것이다”

  미하시: 민족일보의 자금에 대하여 말이 많은데 어떻게 운영하는가.

  “국내에서 조달하고 있다. 항간에 조련계 자금 운운하는 데 낭설이다. 일본 한국거류민단계의 유지 12인이 이사회를 만들어 한일국교가 정상화되면 다대한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인쇄중지 사태로 신문이 못나온 그날, 청와대 윤보선 대통령은 민족일보 사태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받지 못하고 “왜 민족일보는 안가져 왔느냐”며 비서진을 독촉했다고 한다. 비서진이 당혹스러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결정에 대한 내외의 반응은 한마디로 ‘장면정권도 이승만 정권 못지 않다는 것’이다.

  양일동 신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은 “장면정권에서 내려진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조치는 헌법에 보장된 자유언론을 기술적으로 억압하는 졸렬한 짓이다”고 성토했으며 김영삼(후에 14대 대통령) 의원은 “자유언론 탄압이 이승만 정권 때와 다를 바가 없다. 민족일보가 장 총리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했다면 장 총리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경향신문이 폐간됐던 때를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윤재근 민의원 운영위원장은 “언론자유 보장을 앞세운 장 내각의 중요한 정치적 실책이다. 인쇄중지를 내린 것은 사실상의 발간중지나 다름이 없으므로 간접적인 탄압이다. 조속히 속간되기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보수정당이 이럴 정도인데 혁신계의 반발은 더 심했다.

  통일사회당은 “헌법상 보장되어있는 언론자유를 실질적으로 말살시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처사이다. 악독한 일본놈들이 신문을 폐간시킬 때에는 폐간사를 쓸 시간적 여유를 주었는데 인쇄 작업을 중단시킨 처사는 더 악랄한 방법이다. 장면 정권의 이와 같은 이승만적 수법을 답습한다면 4·19와 같이 민중의 정당한 울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이밖에 중립화통일연맹, 민족혁신청년연맹, 민족성개조연맹, 통일청년단(가칭)도 민족일보의 인쇄중지조치는 “보수 세력의 부패근성에서 비롯된 것, 혁명을 가장한 한국적 매카시즘 타도에 국민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한국신문인협회도 3일 오후 임시회의를 열고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조치를 논의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내린 결론은 “이번 정부당국의 조치가 탄압을 하여 신문발행을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고, 다만 정부관리재산인 서울신문사로 하여금 외간물을 못하게 한 것으로 음성적인 방해같은 인상을 준다. 정부가 서울신문사에 대해 외간물을 일체 중지시킨 것은 정부와 서울신문사간의 내부 문제이고, 서울신문사와 민족일보의 문제는 계약위반에 따른 법적인 문제이다”라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관구 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은 민족일보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을 했다.

  “정부가 자기관할 기업체에 대해 민족일보 인쇄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또 그것을 4-5차에 걸쳐 요청했다는 사실을 볼 것 같으면 국무원사무처 관할 기업체에 대한 내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민족일보를 일시적이나마 발간불능 상태에 빠지게 했다는 것에 대하여 유감이라고 아니할 수없다. 물론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데서 발간할 수 있을 줄 알고, 또 정부가 자기관할 이외 인쇄공장에 대하여 간섭 못할 것을 알지만 그러나 민족일보의 비판적 태도에 대해 정부로서 재미없게 생각하는, 그리고 이것을 간접적으로 일시적이나마 발간불능의 상태로 빠트렸다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민족일보의 보급을 더욱 자극시키는 우려도 없지 않다”

  사실 민족일보는 기존 신문사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당시 유력지인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발행부수가 4만5천부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일보는 처음부터 4만부 이상 인쇄했다. 인쇄를 맡고 있던 서울신문이 2만 4천부 정도 인쇄할 때였으니 서울신문 입장에서는 외간 신문이 훨씬 발행부수가 많았던 것이다.

  더욱이 민족일보는 가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다른 신문의 입장에서 강력한 경쟁상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민족일보 사태를 놓고 ‘유감이지만 보급이 늘어날 것을 우려한다’는 어정쩡한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시 언론계는 편집인협회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고 있다.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사건 등 언론계에 대한 외부의 압력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언론인의 권익옹호를 위한 유일무이의 기관인 ‘편집인협회’가 전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해서 언론계의 비난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 따라서 점점 어용화해 간다는 비난성과 아울러 회원의 자격문제 등으로 인한 소장 층의 반발기세는 편집인협회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심각한 논의까지 자아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어찌보면 민족일보는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용수는 산업경제신문사로 인쇄처를 옮겨 5일부터 신문을 복간했다. 그리고 6일 아침 조용수 사장은 오종식 서울신문사장을 사기혐의로 서울지방 검찰청에 고소했다. 우리나라 초유의 언론사간 고소사건이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한국신문사의 오점’ ‘2공화국 신문가의 비보’라고 평했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고소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고소장(형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정동 1의 48 주식회사 민족일보사내 고소인 조용수

  우 대리인 변호사 김춘봉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의 3 주식회사 서울신문사내 피고소인 오종식

  사기 고소 사건

  고소취지

  피고소인의 행위는 사기죄를 구성하오니 엄중 조사하신 후 공소제기를 바람.

  고소이유

  1. 피고인과 피고소인은 신문발행업을 경영하고 있는 처지인바 고소인은 아직 창립시일이 일천한 까닭에 여러 가지 사정상 인쇄시설의 기준미달로 서기 1961년 2월 10일자 피고소인과의 간에 단간(석간)제 푸랑켓판 4면 신문 조판인쇄계약을 함에 있어

  계약기간은 1개월 단위로 하되 쌍방간 만료 5일전에 해약통고를 하지 않을 시에 는 계약은 자동적으로 갱신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인쇄료는 매월 2회에 분하여 선불하기로 한바, 그 내역은 조판료 면당 1만8천환 정(지형 연판포함) 인쇄료 연당 2천5백환 정 사진제판료 연평당 80환정으로 정하되 인쇄부수에 증감이 있을 때에는 별도로 협의하기로 약정하고 서기 1961년 2월분 인쇄료로(동년 2월 10일부터 2월 28일까지)계약과 동시에 금 3백만환을 고소인은 피고소인에게 선불하였던 것임.

  2. 그 계약만료 1일전인 서기 1961년 2월 27일이 되어 고소인과 피고소인은 하등의 이의 없이 계약갱신에 합의하여 피고인은 피고소인에게 동년 3월분 인쇄료로 동 2월 27일에 금 30만환정(현금) 동 2월 28일에 금 70만환 정(현금) 동 2월 28일에 금 2백만환 정(서기 1961년 3월 5일자 연수표액면 금 1백만환권 3매) 계 금 3백만환을 지불한바 피고소인은 동년 3월 2일자 오전 12시경에 이르러 각 금1백만환 액면의 연수표를 액면 금 십만환정 10매와 액면 60만환정 1매로 서환하여 줄 것을 요청함으로 고소인은 피고소인의 요청대로 분할 환서하여 준 사실이 있음.

  3. 동년 3월 2일 오후 2시경 피고소인은 돌연 고소인사에 내도하여 동년 2월 28일에 고소외 대한민국 국무원 사무처장으로부터 받았다는 동처장 정헌주 명의의 통고서라는 것을 고소인에게 보이면서 인쇄를 못하게 되었으니 귀사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도록 수배하라는 말 한마디 남겼을 뿐 동일부터 일방적으로 인쇄를 중지하여 금일에 이르렀을 뿐더러 기 수령한 3개월분 인쇄료 선불금도 고소인에게 반환하지 않고 있음.

  피고소인의 이러한 행위는 서기 1961년 2월 10일자 쌍방간에 체결된 계약의 명백한 배신행위임은 물론, 계획적인 사기행위에 해당되는 것임. 만약 피고소인이 고소인과의 계속 계약을 원하지 아니하였다면 계약서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계약만료 5일전에 통고하여야 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서기 1961년 2월 28일에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로부터 민족일보사의 인쇄를 중지하라는 서면통보를 정식으로 받고 그보다 10여일 전에 구두로 인쇄중지연락을 받은 사실이 있다면 고소인에게 여유를 두고 통지를 하거나 계약갱신을 하지 아니함이 정통인즉 피고소인은 여하한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피고소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하거나 재산상의 이득을 보기 위하여 전기한 바와 같이 2월 28일 양일에 걸쳐 3월분 인쇄료 선금으로 고소인으로부터 금3백만환 정을 편취하고 횡안무통하게도 3월 2일에 이르러서는 피고인이 인쇄료로 지불한 수표액면 금 1백만환짜리 1매와 금 10만환짜리 10매와 금 60만환짜리 1매 금 40만환짜리 1매로 각 분할 서환하여 가는 등의 행위는 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2월 28일전에 충분히 주지하고 있는 피고소인으로서는 완전한 범법행위인 것임.

  피고소인의 이와 같은 행위는 대부분이 귀속주가 되어있는 서울신문사로서는 정부의 정치적 압력에 대항할 능력은 없으나 일방 신문사경영상의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범법행위를 무릅쓰고 고소인을 이용한 것으로 사료됨.

  증거방법

  1. 필요에 응하여 제출하겠음

  서기 1961년 고소인 대리인 변호사 김춘봉 서울지방 검찰청 귀중


  그리고 ‘인쇄료 반환 및 계약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 2천5백67만8천 3백35환을 청구했다.

  조용수는 자신이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을 고소하게 된 감정을 이렇게 나타냈다.

  “정부에서 누차 통보했다지만 언젠가 한번 서울신문 장 상무가 우리 회사의 안 감사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귓결에 슬쩍 스쳐지나가는 말이고 정식 통고라곤 도저히 간주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통고’라고 간주할만 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사전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고소를 취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니와 이미 국외로 NHK(일본) 등을 통하여 널리 퍼졌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오 사장은 같은 언론인으로서 선배입장에 있는 분이고, 인격 면에서도 개인적으로 퍽 존경해왔던 분인데 이번 처사로 미루어 그저 한심스럽기만 하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그러나 이 소송은 5·16 쿠데타가 나고 모두 없던 일이 돼 버리고 말았다.

  장면정권의 언론탄압 1호로 평가될 이 사건은 언론사(言論史)에 있어 의미 있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같은 한국 신문편집인협회 회원이면서, 또 IPI(국제신문인 협회) 회원이지만 정작 국내 언론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단신 기사로 처리해 버리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당시 민족일보 사태에 대한 각 언론사의 입장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의 언론탄압인 민족일보 인쇄사건에 대한 각지의 보도 논평태도는 그대로 그들의 생리를 표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그 보다도 이처럼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 이토록 눈을 감아버리려는 신문들의 고의적인 회피에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지경이다. 동업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온 이럴 수 있나 싶다. 이제 각지의 동기사 취급태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 사건이 일제히 보도된 것은 3월 3일자 조간지면이다. ‘경향’ ‘서울’이 일단 단신으로 지극히 간단히 치워 버린 건 순여당지로서 그럴 만도 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른바 중립지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이 2단 소기사로 취급했고 석간에서도 2단으로 냉정하게 보도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재미있는 일은 ‘한국’은 바로 동일한 지면에 ‘이 박사 입원’이라는 외신기사를 2단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석간에서는 ‘민족일보’사건의 속보를 1단 단신으로 하단에 깔아놓은 대신 ‘이 박사 입원’ 속보를 물경 특호활자 4단 제목으로써 최상단에 모셔놓은 것이다. 탄생순간에 4-5만부의 발행부수를 발행하기 이르렀다는 ‘민족’에 대하여 ‘한국’이 동업자적인 질시에서 이렇게 냉정했다고 본다면 이는 실로 가공할 상혼이랄 수밖에 없다.

  ‘동아’는 어떠한가. 조간 제1면에 특호고딕 3단 제목에 초상사진을 곁들여 ‘이 박사 입원’을 보도한 것이 크게 눈에 띄이는 반면에 2단 제목으로 한 귀퉁이에 밀어 넣은 ‘민족일보’사건 기사는 너무 대조적이다.

  ‘동아’는 일제 시와 이 정권시대를 통하여 그 자신이 겪어 온 휴간 정간 폐간의 쓰라린 경험으로서나(비록 이제 와서는 순수 야당지의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다 할지라도) 대 신문으로서의 긍지로 보아서나 극히 가(可)석할 보도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서울일일’이 톱기사로서 컷 주제 밑에 특호활자 5단 제목으로 상세히 동 사건을 취급한 것은 괄목할 일이며 ‘조선’이 4단 제목으로 톱 다음가는 큰 기사로 보도한 것도 수긍된다.

  이번 민족일보 사건을 언론창달의 공복으로서의 절실한 공감성과 사명감을 지니고 보도 논평한 것은 유독 ‘민국일보’이고 지방지로서도 ‘부산일보’등은 특이할 만한 성실성을 보여 싣고 있다.

  ‘민국’은 제1면 톱기사로 7촌 횡서컷 밑에 5단 제목으로 거의 반면의 지면을 할애하였는데 사건 당사자인 ‘민족일보’사측과 국무원 사무처 측 및 ‘서울신문’사측의 해명은 물론이요, 나아가서 민주당, 신민당, 민정구락부, 사대당, 그리고 신문편집인협회측의 견해까지 보도하였고 이에 밑받침하여 석간에서 다시 ‘긁어 부스럼격의 장 정권 언론정책’이란 논평기사로서 여론을 환기시키기에 유루가 없기를 기한 열의가 역역이 보인다.

  무릇 언론사에 종사하는 자가 권력에 굴복 내지 아부하여 곡필할 때 스스로의 수명을 짧게하고 마는 것임은 멀리 그 전철을 찾지 않아도 4·19 전후의 언론계를 상기하면 곧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나마 모처럼 찾아오던 언론의 자유마저도 제거되려는 이 흉조 앞에서 경향을 막론한 각 동업지의 일대 각성을 바라마지 않는다. <민족일보 인쇄소동과 동업계 각 신문의 표정, 新聞評論 61년 3월 16일자>


  당시 한국 언론계는 국제신문인협회(IPI)에 겨우 가입이 허락된 상태였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IPI에 가입하려 했지만 IPI에서 우리나라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개별자격으로 참여만 인정했을 뿐, 국가단위 회원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 4월 동경총회에서 IPI는 한국의 언론자유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서 특별조사단까지 파견했다. 그러나 이 조사단은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인정하지만 군정법령 88호에 의한 신문허가제와 경향신문의 정·폐간 등으로 보아 언론자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4·19후인 1960년 4월 혁명으로 한국에서의 언론자유가 확보됨에따라, 60년 11월 스위스 주리히에서 개최된 IPI이사회에서 겨우 한국에 IPI지부 설립이 승인됐다. <한국신문인협회보 61년 4월 5일자>

  이렇게 어렵사리 얻은 한국 신문의 국제적 지위였지만, 한국 언론계는 그 지위에 걸 맞는 역할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다.

  이것은 민족일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운명에 처해지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 후 닥친 5·16 쿠데타 이후 여타 언론의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4. 통일적이고 애족적인 통일세력


  조용수는 언론인이지만 정치적 색채가 강한, 정치 지향적인 젊은이였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적 관점은 앞서 언급된 편지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통일적이며 민주애족적인 당 하나를 쟁취적으로 건설해 낼 수 있으며, 그 당의 힘을 중핵세력으로 한 애족적이며 투쟁적인 민족전선적 전체조직을 세력적으로 강화 또는 창건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여전히 걱정해마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가 갈망했던 통일적이고 민주적, 애족적인 하나의 당은 요원한 것만 같았다. 혁신세력은 계속 분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당계만 남은 사회대중당은 윤길중계와 김달호계의 내부 불화로 김달호계만 사회대중당으로 창당했다. 또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 탈당파, 윤길중을 비롯한 사회대중당 잔류파, 김성숙 중심의 한국사회당, 정상구계의 혁신연맹, 고정훈의 사회혁신당은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기 위해 1월 21일 창당준비위원회를 발기했다. 이로써 61년 들어 혁신계는 장건상의 혁신당, 김달호의 사회대중당, 최근우 중심의 사회당과 통일사회당의 4개 정파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16개 정당 사회단체가 참가하는 민간운동기구로 민자통이 결성을 앞둔 상태였다.

  4월 혁명 주역인 학생은 여름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새로운 세력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문리대 신진회, 서울대 법대의 신조회, 고려대의 협진회, 이수병을 비롯한 부산지역의 암장 등, 처음에는 과거부터 있던 서클중심의 움직임이지만 학생들은 4·19혁명의 완성은 통일운동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60년 10월 15일 서울대 민족통일전선(11월18일 연맹으로 개칭)을 시작으로 12월까지 경희대, 건국대, 고려대, 국학대, 단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에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민통련)이 조직됐으며, 부산대, 수산대, 경북대, 대구대, 청구대, 전남대, 조선대 등 지방대학까지 확산됐다. 이들은 민통전학련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했다.

  청년운동단체로는 이종률이 지도하는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는 김상찬, 이영석, 하상연, 최종국,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 등이 활동했다.

  또 사회당 외각조직격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사회당 조직부장인 최백근과 최근우, 유병묵의 영향을 받았다. 이 단체에서는 우홍선, 진병호, 김영옥, 김영광, 이구영, 이재문, 배근식, 양춘우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주학생연맹에는 박완일(위원장) 박명수, 신영순(부위원장) 조창도, 김용철, 이진형, 이완수 등이 참여했다.

  이밖에 전국학생혁신연맹, 전국학생자립경제추진회, 전국피살자유족회 청년학생위원회, 민주학생통일연맹 등 많은 단체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활동반경을 넓혔다.

  조용수는 이들 단체들과 긴밀히 연락을 했다. 정치권은 물론, 서울대 민통련 윤식과도 가까웠다. 조용수는 서울대 민통련에 연구자금으로 10만환의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용수가 가장 기대를 걸었던 민자통은 내부적으로 통일방안을 둘러싸고 갈등이 극심했다. 그것은 민족일보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조용수 사장과 이종률 주필의 견해차이가 그 단편적인 예였다. 또 구체적인 통일방안이 문제였지만, 그 내부에는 뿌리 깊은 혁신의 주류논쟁이거나 정치인과 혁신인사의 갈등 때문이기도 했다.

  민자통이 혁신계 통일세력의 결합체가 되지못하고 분열하게 된 것은 민자통내 통사당 세력과 비통사당 세력의 파벌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대북정책에 대한 노선차이도 중요한 혁신계의 분열요소였다.

  “민자통은 남북협상에서 통일정부가 수립되기만 한다면 비록 그 정부가 공산정권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민자통은 극단적으로 흐는 것 같아 도무지 동조하기 어려웠다” <송남헌 증언>

  2월 21일 민자통에 참여하던 회원 270명이 민자통 통일방안에 구체성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탈퇴,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을 발기했다.

  탈퇴자는 안재환, 신숙, 장백산, 이동화, 김성수, 문용채, 이명하, 김기철, 양회채, 조규택, 장홍염, 고정훈, 안준표, 배재훈, 송남헌, 서상일, 김성숙, 윤길중, 김중화, 오광선, 이현익, 조헌식, 이훈구, 김선적 등 혁신계 활동가 상당수였다.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은 “민자통은 단순히 민주, 자주,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연방제를 내세우고 있는 이북의 안에 비해 너무 막연하다. 현재 국제상황으로는 미소의 군사적 완충지로 영세중립국으로 통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사실 중립화 통일론은 해외의 통일운동가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온 사안이다. 일본에 있는 김삼규와 이영근, 미국의 김용중이 특히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중립화 통일론은 60년 10월 22일 “한국의 통일문제를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로 해결하는 것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미국 민주당 맨스필드 상원의원도 건의한 통일방안이다. 그러나 장면정부는 이를 즉각 거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민자통은 이들의 탈퇴에 대하 “상습적 분파주의자의 행동에 실망한다. 민자통은 중립화 통일을 배격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민자통은 극악한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인사가 가담할 수 있는 조직체이며 나간 사람에 대해 문을 열어놓고 기다릴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조용수는 착잡했다. 자신이 민족일보 만큼이나 애정을 가진 민자통이 반쪽이 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족일보의 회장인 서상일, 이사인 윤길중, 고정훈 등 상당수의 민족일보 관련 인물들이 민자통을 떠났다. 아예 고정훈은 민자통은 ‘좌익들의 모임이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2월 25일. 민자통은 예정대로 결성됐다. 조용수는 침통한 마음으로 안신규, 박진목과 함께 천도교 수운회관의 결성식에 참여했다.

  천도교 대강당에는 전국에서 온 1천여명의 대의원들로 열기가 뜨거웠다. 단상 양쪽에는 ‘뭉치자 민족주체세력, 배격하자 외세의존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조용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통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면, 구체적 통일방안은 만들어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은 한곳으로 모여도 시원치 않을 때인데”

  민자통을 실무적으로 준비해 온 박진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민자통 결성대회는, 장상호 준비위원회 조직부위원장의 대의원 심사보고가 이어졌다. 이어 장건상은 개회사에서 통일을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민족통일의 주체세력이 되는 이 대회는 역사적인 모임이므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열정적인 운동을 하자”

  함석희 준비위 선전위원장의 사회로 임시집행부 구성에 들어갔다.

  “임시집행부는 기존의 준비위원회 5개 상임위원장으로 합시다”

  맨 먼저 경기도 대의원이 동의했다. 그러나 경북대의원인 정세형이 다른 의견을 내 놓았다.

  “임시집행부는 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대표와 청년단체 대표 3인, 주비위원회가 구성된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대표 각 1인씩 4인, 일반참여 대표 4인 등 모두 13인으로 구성해야 전국의 대표성을 띌 수 있습니다”

  양측의 주장은 사실, 혁신의 일부가 이미 탈퇴한 현행 민자통 준비위원회를 그대로 할 것인가와, 이미 탈퇴한 혁신일부세력을 수용하기 위한 여지를 주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섰다. 결국 논란 끝에 표결까지 갔지만 두 개안 모두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 부결되고 말았다.

  민자통 준비위원회 간부들은 별도의 모임을 갖고,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 5인으로 전형위원회를 구성해 임시집행부를 구성했다. 그 임시집행부는 장건상, 최근우, 김달호, 김성달, 박래원, 박진, 함석희, 조문태, 이흥로와 지방 대표 4인이다. 이 안은 양측을 절충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미 이탈한 혁신세력을 재결집 시키는 데 미흡했다.

  조용수는 가만히 이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합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관념론이 아니라 조국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민족의 지상명령이다. 진보와 혁신을 자처하는 일부에서도 짐짓 선의의 혼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통일운동이 2분화 되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공죄반반(功罪半半)이라고 할까. 공은 결국 오고 말  서로의 이견을 피차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고, 죄는 그만큼 통일의 시기가 늦어지는 것이다. 공이건 죄건 모두가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함이 씁쓸하다. 역사의 창문을 열어 제치고 동서고금의 민족통일사를 통감하면 진리는 의외에도 간단한데 있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말하면 통일절대주의라고 할까. 개인적인 아집도 당파적인 주장도 계급적인 갈등도  통일절대 라는 이름의 용광로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갈라져 있던 조국과 민족이 비로소 제구실을 할 게 아닌가”

  민자통 전형위원회는 2월 26일, 의장단을 선출하고 27일 실무비서진을 갖추는 등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민자통에 참가한 사람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의장단:김창숙 장건상 최근우 김달호 노정일 허영백 정순종 안경근 조기하 주옥경 조문태 이원혁 조윤제 함석희 박래원 김성달 오지호

  명예의장단:김삼규(일본) 김용중(미국) 서영해(구주)

  박 진(사무총장) 함석희(사무차장) 박영옥(총무위원장) 조석하(총무부위원장) 문한영(조직위원장) 도예종(조직부위원장) 이제춘(선전위원장) 김철악(선전부위원장) 신인철(재정위원장) 이흥로(외무위원장) 최만리(부녀위원장) 김성달(상임위원회의장) 조문태 박래원(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윤제 이희승 임창순 주홍모 권오돈 함석희 박 진 박희범 정재각 김창선 정순종 유병묵 윤성식 권대복 (이상 통일방안 연구위원)

  여기서 일본의 명예의장단으로 선임된 김삼규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유당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던 사람으로 이승만 독재를 비난하고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이다.

  1994년 2월 공개된 외무부외교문서철을 보면 이런 사실이 나타나 있다. 1958년 10월 29일 아침 10시 1분. 외무부에 일본 공사관으로부터 한 장의 전문이 날아든다.

  “수신:외무부장관 귀하

  소위 귀국문제에 대한 공청회 개최의 건. 지금 조총련의 소위 귀국문제에 대한 운동은 그때그때 보고하고 있는 바이나, 주재국 중의원 외무위원회의 주최로 명 29일 오후 3시부터 동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차 문제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코저 다음인사를 초빙하여 공청회를 개최한다고 하옵기 우선 보고 드리오며 회의 경과는 추후 보고할 것임.

  귀국을 찬성하는 측:김영준. 귀국을 반대하는 측:김삼규.

  본 사본을 내무부장관에게도 전달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주일공사  <일본 영사관의 정무보고 1958년. 외무부>


  일본 공사관에서는 북송을 찬성하는 김영준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내무부 신원조회를 의뢰한 것인데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본으로 회신한 내용에 의하면 김영준은 민단 중앙촌본부 사무총장 서리로 밝혀졌다. 당시 민단은 북송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처지였고, 조용수도 그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다. 한국 외무부와 일본공사관이 온통 난리가 났다.

  하지만 58년 11월 7일 오후 3시 44분 주일참사관은 다시 다음과 같은 전문을 외무부로 보냈다.

  “외무부 정무국장 귀하. 10월 28일자 TS-911051로 보고 드린 전문 중, 귀국을 찬성하는 자로 김영준, 반대하는 자로 김삼규로 된 것은 김영준과 김삼규가 서로 뒤바뀌어 타전된 것이며 김영준은 민단 사무총장서리로 물론 북한귀국 반대자임을 회보하나이다. 주일참사관”


  이것은 당시 주일대표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김삼규. 그는 재일교포의 북송을 지지했던 입장에 섰고 조용수는 결사적으로 북송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그러나 민자통에서 김삼규는 명예의장단으로 한때 조용수와 같은 입장을 가지게 됐다. 묘한 인연인 셈이다.

  이 통일방안을 둘러싼 혁신세력의 분열, 좀더 엄밀히 말하면 혁신세력간의 반목에 조용수도 예외일 수 없었다. 결국 조용수는 2월 28일 민자통을 탈퇴하고 말았다.

  굳이 조용수의 정치적 성향을 따지자면 그는 통사당계에 속했다. 혁신계에서도 우파로 분류될 수 있는 성향이었다. 민족일보의 인맥구성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민자통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사회당 인물이 많았다.

<김세원, 어느 통일운동가의 육필 수기 ‘비트’, 일과놀이, 1994>


  민족일보 내에서 이종률이 민자통의 주요 인사였다. 그는 창간호를 만들고 나서 민족일보와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였다. 법정진술과 달리 이종률은 민족일보의 제작에 있어서 더 진보적 논조를 주장하며, 조용수에게 ‘보수반동’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진목 증언>

  따라서 민족일보는 민자통의 분열 과정에서 민자통보다, 통사당쪽에 기울어지는 듯한 논조를 취했다. 그러나 당시 조용수는 아무런 정당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자신이 청송 유권자에게 보낸 인사장에서도 나타난다.

  조용수의 주장은 민자통 즉, 비 통사당계가 내걸고 있는 민주, 자유, 자주의 3원칙과 통사당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민주자주적 입장에서 중립화론은 원칙상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주장은 일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가면서 ‘통일운동 그 자체의 불통일’에 대한 자성을 일깨우게 된다. 그것은 곧 통일운동 세력의 분열이라는 내외적 자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통일안의 단일화 작업이 본격화 된 것이다.



5. 2대 악법반대 횟불시위


  3월 19일, 민자통 사무실은 바쁘게 움직였다. 18일 대구에서 벌어진 대규모 악법반대시위의 영향을 검토하고 서울에서 시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조용수 사장은 회의에 참석하기 직전, 대구에 특파한 김자동 특파원으로부터 대구의 분위기를 전해 들었다. 김자동 특파원이 본사에 전달한 대구 분위기는 이랬다.

  “대구역전에서 오후 네시부터 행사가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1천5백여 명이 모였습니다. 주도는 경북대, 청구대를 비롯한 대구 3개 대학과 고등학교, 중학교까지 참가했습니다. 학생 15명이 궐기사를 했고 ‘2대 악법 통과되면 4월 혁명 허탕이다’, ‘악법 만드는 반역들을 처단하라’, ‘자유당의 최후 발악 민주당이 벌써한다’, ‘ 피흘려 지킨 권리 피흘려 찾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면서 군중 수는 5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심야 횟불데모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마 작년 4월 혁명이래 최대 시위였습니다”

  조용수 사장은 보고를 받고 민자통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낮 익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달호 사회대중당 위원장이 조용수 사장에게 물었다.

  “조 사장, 오늘 오전 청조회 김영삼 의원 기자회견 소식 들었소?”

  “아니요. 방금 대구에 특파한 기자로부터 어제의 대구 데모에 대해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 의원이 무슨 발언을 했나요”

  “아니 글쎄 장면이 3·15 마산지역 반정부 데모를 무마하기 위해 1억환을 뿌렸다는 거야. 그것을 김영삼 의원이 폭로했어”

  “그래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용수는 서둘러 전화통을 붙잡았다. 그리고 편집국으로 전화를 했다.

  “김영삼 의원이 폭로했다는 내용 들었소? 아 그래요. 이미 원고를 쓰고 있다구요. 그것은 중요한 문제요”

  조용수는 전화통을 내려놓으며 참석자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정훈 통사당 선전부장이 말문을 열었다.

  “어제 대구에서 대단했다면서요?”

  조용수는 자신이 바로 전 연락받은 대구이 분위기를 설명해 줬다.

  한참 조용수의 이야기를 듣고 난 최근우 사회당 위원장이 말했다.

  “대구에서 민심의 동향을 확인했어요. 이번에는 서울에서 다시 한번 민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제안에 참석자는 모두 이견이 일치했다.

  “맞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대구에서 기운을 서울로,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빨리 서울에서도 궐기대회를 열어야 합니다”

  이날 모임에서 결론은, 3월 22일 2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전 반대세력이 모이는 대규모 성토대회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날 연사로 등단할 인사와 주제도 정했는데 될 수 있으면 혁신세력뿐 아니라 학생, 법조계, 언론계, 보수 야당인 신민당까지 참여해 악법 조문을 하나하나 따지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연사와 연설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장건상(혁신당 위원장) 국민은 궐기하라

  최근우(사회당 위원장) 보수 세력의 반민주성

  김달호(사대당 위원장) 반민주 악법은 망민법(網民法)이다

  윤길중(통사당 정치위원·국회의원) 양선(良選)은 당연히 악법제정 흉계를 봉쇄해야 한다

  고정훈(통사당 선전부장) 악법제정은 이적행위이다

  신태악(변호사·법조계대표) 반민주 악법은 위헌이다

  조용수(민족일보 사장) 반민주 악법은 언론탄압의 독소를 내포하고 있다

  박완일(청년투위 대표) 민권수호 전위로서 청년은 과감하라

  노정훈(학생투위) 4월 혁명 흘린 피에 보답하라

  김면중(4월 부상학생 총연맹 대표) 4월 혁명에 대한 반동은 용서할 수 없다


  이튿날인 20일, 악법반대 공동투쟁위는 다시 민자통 회의실에서 시청앞-광화문-종로-동대문-을지로-시청까지 횟불데모를 벌이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장면정부는 21일 밤 긴급 원내대책회의를 열어 당초 제정하려던 반공법안을 철회하고, 현재 보안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원래 의도인 공산세력을 막는 내용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정부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악법반대 공동투쟁위는 개정하는 국가보안법에 반공법의 문제조항이 그대로 삽입되는 것에 불과하다며 계획대로 시청앞 횟불시위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 22일. 구름이 잔뜩 낀 서울거리는 곳곳에 서있는 경찰들의 차가운 눈초리로 더욱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간혹 용공단체 즉시 해산하라’고 방송하며 지나가는 반공단체의 관제 데모대차가 시청주면을 맴돌았다.

  정부는 궐기대회가 열리는 시청 앞에 기동대 6백여 명, 기마부대 3백여명, 최루탄부대 등 1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다. 더구나 모든 경찰이 군복을 착용하고 곤봉을 휴대해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청 앞 광장에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찼다. 트럭 두개를 이어서 만든 연단을 중심으로 39개 정당, 사회, 학생 단체 3만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피로써 찾은 민권 악법으로 뺏을 쏘냐’, ‘반공이란 이름 밑에 생사람 잡지마라’, ‘4월의 피는 통곡한다’ 등 수십 개의 플랭카드가 걸렸다.

  먼저 노구를 이끌고 장건상 혁신당 위원장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이 땅에 또다시 독재의 씨를 뿌리려 하는 마당에 전 국민은 모두가 민권수호에 총궐기하라”고 외쳤다.

  이어서 최근우 사회당 위원장은 “이승만 독재의 재판이 되어가는 보수세력은 또다시 민권을 앗아버리려는 흉괘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당의 김달호 위원장, 윤길중 의원, 고정훈 통사당 선전부장도 2대 악법의 독소조항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열기는 점차 달아올랐다.

  조용수도 연단에 섰다. 그는 또랑또랑하고 힘센 어조로, 2대 악법이 언론 탄압의 도구로 어떻게 악용될 것인가에 대하여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 우리는 장면 정권이 획책하고 있는 ‘반공임시 특별법’, ‘데모 규제법’은 물론, 이승만 전제정권의 해족적(害族的)인 국가보안법까지도 즉시 폐기할 것을 결의한다.

  2. 우리는 반민악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외세의존으로 남한 특권보수주의를 고수하여 민족통일을 방해하려는 반민족적인 장면 정권은 총사퇴할 것을 결의한다.

  3. 우리는 인류역사상 최초 및 최대의 악법인 ‘반공법’및 ‘데모규제법’을 인민의 의사를 배반하여 만약 현국회가 이를 통과시킬 때는 국회불신임 투쟁까지 전개할 것을 단호히 결의한다.

  4. 우리는 배고파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수백만 피압박대중들의 그 외침에 발맞추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단시일 내에 성취할 것을 결의한다.

  5. 우리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짓밟고 양민을 공포정치 속에 휘몰아 넣으려는 2대악법안을 철회할 때까지 결사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오후 2시20분에 시작된 궐기대회가 5시 40분쯤 일단락됐다. 그러나 시위대는 스피커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구호 선창에 맞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맨 앞에는 정당관계자, 다음은 공동투쟁위 간부, 청년학생, 시민들로 이어지는 대오는 구호를 외쳐가며 준비된 솜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공산주의를 막는 길은 반공법 제정에 있지 않고, 헐벗은 국민에게 빵을 주는 데 있다”

  이때 대기하던 군복 차림의 경찰대는 태평로 국회의사당 방향을 막아섰다. 시위대는 방향을 바꿔 남대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대문 쪽도 경찰이 이미 차단한 상태였다. 잠시 시위대는 우왕좌왕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국회의사당 쪽으로 몰려갔다.

  경찰의 방망이가 높이 솟는가 싶더니, 경찰의 강제진압이 시작됐다. 불붙은 솜방망이와 경찰의 몽둥이가 격렬히 뒤섞였다. 그러나 곧 경찰의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더욱 기세를 올리며 국회의사당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키고 있던 경찰의 2차 저지선은 경찰기마병. 그러나 횟불에 놀라 말이 뛰기 시작하면서 두 번째 기마병 저지선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약 5천명의 시위대는 ‘외세에 의존하는 장 정권은 물러가라’‘배고파 못살겠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종로로 접어들었다. 종로를 거쳐 동대문까지 이르는 길에서 시위대는 다시 늘어났다.

  7시 5분, 시위대는 동대문에서 다시 시청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에서 철야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거리에는 어둠이 깔리고 시위대의 횟불이 종로통을 가득 메웠다.

  돌아가는 길은 혜화동을 통해서였다. 마침 명륜동은 장면 총리의 집이 있는 곳이다. 시위대가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자 장면 총리의 사택을 지키고 있는 5백여 명의 경찰과 맞닥트렸다.

  경찰의 방어와 시위대의 투석전이 이어지고 구호와 함께 애국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탕탕탕. 최루탄을 쏘는 소리와 함께 본격전인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일부 학생이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흥분한 일부 시위대는 경찰차에 방화를 하고 시내버스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

  혜와동 로터리는 온통 전쟁터였다.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일부 학생 시민 중에서 ‘반도호텔로 가자’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일부 시위대는 다시 반도호텔로 향했다. 반도호텔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장 총리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달라”

  한 시위대원이 앞에 나가 경찰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시위대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고 민족반역자를 만나는 데 영광은 무슨 영광이냐”

  시위대의 장 총리 면회요청이 들어질리 만무했다. 그러나 반도호텔의 연좌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경찰은 이날 횟불시위에 1백23명을 검거했으며 23명의 경찰 시민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대규모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날 시청 앞 집회에서 연사로 참석한 사람은 모두 소환대상으로 지목했다.

  바로 횟불시위가 있던 날 새벽 6시, 통사당 선전부장 고정훈이 성북구 안암동 집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시청 앞 집회의 연사이기도 했고, 민족일보 이사격인 취체역이다.

  이튿날 신현돈 내무장관과 조재천 법무장관은 공동 담화를 발표해 “이번 데모는 사회질서와 국민안전을 훼손하는 행위로 주동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공언했다. 게다가 출처가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이날 시위도중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이 일부 보수 신문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악법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회는 학생이 중심이 돼 27일 서울역전에서 2차 투쟁집회를 갖기로 결의했다. 또 한번 정국은 대대적인 시위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경찰의 대대적인 학생 검거작전이 시작됐다.

  24일 세종로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정정훈 악법반대 학생투쟁위원장이 연행됐고, 김달호 사회대중당 당수가 자진출두 형식으로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 하일민(서울 문리대) 이태훈(서울 법대) 황건(서울 법대) 심재택(서울 법대) 김정강(서울 문리대) 이춘희(항공대) 김상문(성균관대) 등의 학생이 속속 구속됐다. 이 전국적인 검거 선풍에 민족일보도 초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시청앞 시위의 연사로 참석한 조용수도 수사대상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3월 25일 국회 민의원 본회의에서는 또 김준섭 의원이 나와 민족일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성토대회에 참석한 연사들은 김일성 만세보다 더 무서운 말을 했어요. 이건 공산당 방식의 선동입니다. 이 시청 앞 시위는 내가 지난번 모 일간지가 창간되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암울해 진다고 한 그 신문을 경영하고 있는 자들이 주동이 된 것입니다”

  김준섭 의원은 지난번처럼 민족일보를 직접 지칭하지 않았지만 그 신문이 민족일보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게다가 그는 무슨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발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민족일보 이사격인 취체역 최근우, 윤길중, 고정훈이 시청 앞 시위의 연사로 나선 것을 겨냥한 것으로 민족일보를 주동자로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민족일보에 혁신인사가 많이 모였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바로 그날 경남도경은 “신원불상의 이모가 혁신계 모 일간신문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연락책으로 일본에 밀항하려고 다대포 부근 해안에서 밀항을 꾀하려 해서 지명수배를 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 신문이 어떤 신문이고 또 어떤 사람을 지명수배 했는가도 밝히지 않은 모호한 발표였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일보를 지칭하고 또 음해하려는 신호탄을 의미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민족일보를 겨냥했다. 또다시 전국적으로 4월 위기설이 떠돌았다.



6. 장면의 음모-혁신을 원초적으로 막아라


  61년 새해 들어 장면 정부는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했다. 장 총리는 현석호 내무부 장관과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렀다.

  “민족일보에 내사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조 법무장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게···아직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영근의 일본 행적을 일본정부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시키는 것에 조금 어려움이 있습니다. 계속 내사 하겠습니다”

  장 총리는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는 내무부장관에게 물었다.

  “아니 시골 부녀자가 개회중인 국회에서 데모를 하다니. 그게 있을 법한 일입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데모로 시작해 데모로 끝날 것입니까. 계속 무절제한 행동을 하는 데모대를 방치해야 합니까”

  현석호 내무부장관은 최근 교원노조원의 시위 농성과 국회 앞 부녀자 농성사건에 대해 보고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번 교원들의 데모나 부녀자들의 상경 데모 보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이 학원내의 움직임 입니다. 지금은 조금 잠잠한 편이지만 개학을 하면 학생의 데모는 더욱 격렬해 지면서 요구사항도 정권에 대한 도전양상으로까지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학생혁명의 주역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일반의 지지를 받고 있어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장 총리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나가니까 일부에서 정부에 대해 무능, 무능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무절제한 행동을 방치할 수 없습니다.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현석호 내무부장관은 이미 대책을 마련했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데모의 핵심적인 진원지는 혁신세력입니다. 각 대학에도 이미 상당한 혁신세력이 포진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학생과 연계된 혁신세력을 차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칭 반공특별법이라는 것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 총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우린 할일이 많아요. 더 이상 무능한 소리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강한 소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세요”

  1월 19일, 내무부는 대공사찰을 강화하기 위해 반공특별법을 기초중이라고 언명했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데모를 규제하는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뿐만 아니라 이미 법무부를 통해 현행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대체입법, 즉 반공특별법 등 두개의 법률안을 준비했다. 그 법안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 것인지, 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한참 후에 드러난다.

  3월에 접어들자 내무부장관의 예측대로 학원을 비롯한, 사회전반에 또다시 데모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번의 데모 양상은 과거와 달랐다.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서울시내에는 3월 위기설이 떠돌아 다녔다.

  3·1운동 기념식장은 ‘3·1 절을 통일절로’, ‘통일만이 살길이다’는 구호가 나오면서 빈곤과 부패의 구조적 해결은 통일로만 가능하다는 욕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이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여론을 이끌어 나간 것은 민족일보였다.

  장면 정부는 민족일보의 조총련 자금 유입설 내사, 서울신문과 인쇄계약 파기라는 무기로 민족일보의 예봉을 꺾으려 했지만 민족일보는 끈질기게 사회 전체의 통일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

  정부는 민족일보의 조총련계 자금 유입에 대해 내사를 계속했지만 그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3월 6일, 박래원 치안국장은 1월 31일 자신이 언급한 ‘민족일보의 조련계 자금 유입설’에 대해 “아는 바 없다”면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장면은 계속 민족일보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5·16이 나고 얼마 후 당시 치안국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민족일보에 관계한 사람들은  5·16이 나서 오히려 ‘살았다’는 말을 했다. 왜냐하면 장면 정권은 이미 민족일보와 그 관련자를 제거하기 위해 우익테러를 비롯한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5·16이 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만약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박정희보다 더 처참하게 민족일보 관련자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박진목 증언>


  아무튼 한미경제협정 체결과 국회비준과정, 그리고 민족일보 인쇄중지사태에서 오히려 정권의 체면만 구기고, 민족일보와 혁신세력의 위치를 확인한 장면 정부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에 박차를 가했다.

  3월 6일. 장 총리는 서울시대 일원에 가상 폭동훈련인 ‘비둘기 작전’을 실시했다. 정부는 그 이유에 대해 3월 15일을 기해 마산, 창녕, 삼천포 일대에 반정부 봉기가 일어난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야권과 혁신계에서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법안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끈했다.

  그러나 장면 정부가 의욕적의로 추진했던 이 법안이 내무부를 거쳐 국무원사무처 법제국에 이르러서 내부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3월 7일, 이 법안을 심의 중이던 국무원사무국 법제관은 이 법안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모규제법의 위헌성은 그 목적에서부터 비롯됐다. 장면 정부가 만든 데모규제법 제 1조의 목적은 “본 법은 집회와 시위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공공의 복리와 질서를 유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것은 2공화국 헌법 제 28조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는 조항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게다가 현행 국가보안법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마련된 반공특별법안에는 ‘공산주의의 강령과 행동이 국헌을 문란케 하고···’라고 포괄적으로 표현돼 있어 혁신세력에게 가장 강력한 족쇄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이 두 개의 법안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알려지자 혁신계는 물론, 보수당인 신민당, 집권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3월 8일. 민족일보 사장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날도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혁신계 정치인이 많았다. 변호사인 윤길중 의원이 말문을 열었다.

  “이 두 개의 법안 중 특히 반공임시특별법은 우리 혁신계의 입지를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법의 4조 3항, 4항은 반국가단체에 이익이 되는 문서, 도서 기타 표현물에 대한 처벌조항을 명시해 놓고 있어 민족일보를 직접 겨냥할 수 있는 조항입니다”

  순간, 좌중에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서상일 회장이 말을 이었다.

  “이 법은 이승만 정권이 2.4파동을 일으키면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것보다 훨씬 강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민족일보에서 타 언론사의 창구역할을 도맡아 하던 고정훈 통일사회당 선전국장이 현 상황에 대한 의견을 내 놓았다.

  “이 법안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민주당 내부조차 이견이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야당인 신민당도 반대의 뜻을 나타냈고요. 다른 언론사도 이 법안만큼은 반대 의견을 나타내려는 움직임입니다. 법조계에서도 악용의 우려가 있어 반대하는 분위기 입니다”

  장면 정부의 노골적인 인쇄중지 사태로 바로 3일전에 겨우 복간한 민족일보 관계자는 이 법안이 장면의 민족일보를 비롯한 혁신세력에 대한 또 다른 음모라는 점에 공감했다. 조용수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민족일보와 혁신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또 다른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배수진을 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저께 서울신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지난번 한미경제협정 때보다 여론의 향방은 우리 쪽에 있으니 저지투쟁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문제는 잘하면 분열된 혁신세력의 대동단결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민족일보는 그쪽으로 여론을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봅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회의 초반을 감싸던 냉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튿날 민족일보는 1면에 ‘장 내각, 양대 반민주 법안을 추진’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뽑았다. 또다시 장 정권과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이번 싸움은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언론의 일치된 반대가 큰 힘을 발휘했다. 한국일보도 “공산당이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들어 내는 법률”이라고 비판했고, 대구일보는 “헌법위반”을 지적했다. 대부분 언론은 이 법안이 반민주적임을 지적하고 나섰다.

  3월 10일, 정치권에서 청조회 김영삼 의원이 포문을 열었다.

  “반공법을 만들려는 것은 의식적으로 국민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시키려는 것이다. 반국가란 용어가 결과에 있어서 반정부적인 것을 탄압하려는 것으로 본다. 즉 건전한 정당운동과 야당활동을 방해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정부비판의 자유를 억압할 우려가 많다. 장 정권이 선정할 생각은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악의에 찬 짓을 하고 있으므로 국민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혁신계의 반발은 더 강도가 높았다. 고정훈 통사당 선전국장은 ‘범국민적 투쟁에 나설 것’을 경고했다.

  “반공과 반일을 국가의 지상정책으로 삼던 이승만 독재정권이 강행했던 국가보안법보다 더 악질적이고 가혹한 법을 현 민주당 정부가 구상한다는 것은 스스로 묘혈을 파는 짓과 같은 것이다···통사당은 원내투쟁은 물론 범국민적 투쟁을 벌이겠다”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에 김대중 민주당 대변인(15대 대통령)은 “이 반공임시 특별법의 입법취지가 언론탄압이나 혁신세력의 탄압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 강변했지만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민주당내 이철승 의원(신풍회 총무, 후에 신민당 대표) 조차 “이 법안의 필요성을 조금도 못 느끼겠다. 이 법의 제정에 반대할 생각이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이 2대 악법 반대 투쟁은 보다 조직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3월 9일 오후, 사회당 준비위원회에서 먼저 ‘범혁신계 공동투쟁’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사회대중당 선우정 선전위원장은 즉각 원칙적 찬성의 뜻을 밝혔다. 통일사회당을 비롯한 4개의 혁신정당이 한 자리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11일 4·19 혁명의 주역인 학생은 ‘2대 악법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고, 12일 혁신계 각 청년단체는 ‘반민주 악법반대 청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청조회 대변인 김영삼 의원은 ‘학생과 연계해서 저지투쟁에 나설 것’을 언명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민주당은 김대중 대변인을 통해 “만일 야당 측이 현행 보안법의 보강에 찬성한다면 반공특별법안은 철회할 수 있을 것이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대해 일부 야당은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학생과 혁신계에서는 ‘더 불손한 수법’이라며 반대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4일 한국교원노조도 반대투쟁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14일, 통사당, 사회당, 사대당, 혁신당, 삼민당 등의 정당과 중립화 통일운동 총연맹, 민자통 등 혁신계 정당 사회단체가 망라된 ‘반민주악법 반대 공동투쟁위’가 구성됐다. 보수야당인 신민당도 여기에 가입의사를 내비쳤다.

  민족일보도 당연히 이 움직임의 중심에 섰다. 조용수의 예측대로 이 악법반대 투쟁이 혁신세력의 단합의 기회도 제공한 것이다.

  말 그대로 운명을 건 싸움 양상을 보였다. 조용수는 신문을 통해서 이 법안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중 강연에 나서기로 했다.

  “사실 조 사장은 신문사의 전체 윤곽만 따졌고, 세세한 경영 문제는 내가 도맡아서 했다. 조 사장은 신문의 대외적 문제와 외부 강연에 바쁘게 움직였다. 강연으로 지방에 내려가는 일도 많았다” <상임감사 안신규 증언>

  드디어 3월 15일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김창숙, 장건상, 최근우, 이동화, 김달호, 김성숙, 문용채, 채원개 등이 지도위원으로 선임됐다.

  이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동투쟁 강령을 채택했다.

  1. 민주호헌 정신에 입각해 반민주악법의 제정을 반대하는 원내외 투쟁을 효과적으로 단행키 위하여 광범하고 강력한 대중운동을 추진한다.

  1. 원내외 투쟁의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일반대중에 호소하는 원외투쟁을 활발히 전개한다.

  1. 원외에서는 과감하고 거족적인 극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 단체에는 사회당, 사대당, 혁신당, 민자통, 중통련, 삼민당, 광복동지회 일부, 조국통일전선 등이 전당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말 그대로 혁신계의 전 세력이 재집결한 것이다. 이 모임의 기획위원은 각 정당 사회단체에서 3명의 대표로 하고 실무부장은 다음과 같이 선임했다.

  총무 조기하, 조직 유한종, 선전 고정훈, 재정 박권희, 청년 권대복, 부녀 최만리, 학생 윤성식, 의원 윤길중, 섭외 조규택, 동원 한왕균.

  그 다음날인 16일 학생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같은날 청년단체들도 공동투쟁위원회(소집책 박완일)를 결성해 극한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장면 정부는 이 법을 제정해 혁신세력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를 강화할 움직임을 버리지 않았다. 장 총리는 이미 어느 정도의 반발을 예상했다.

  17일 장면은 비장한 어조로 “이 두개법안을 기필코 입법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특별법을 반대하는 학생을 내사하겠다고 공표했다.

  정국은 2대 악법 반대와 관철이라는 마주 달리는 열차와 다름없는 형국이었다. 특히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벌써부터 격렬한 시위가 시작됐다.



7. 통일의 열망으로


  2대 악법을 제정하려 했던 장면 정권은 사실상 강력한 반대투쟁에 밀려 주춤했다. 그러나 장 정권은 반공법은 국가보안법의 강화로 대체해서라도 기필코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악법반대운동에서 자신을 얻은 세력은 운동의 방향을 통일운동으로 옮아갔다. 학생의 악법반대 시위는 ‘통일 촉진, 악법반대’로 그 주장이 바뀌어 갔다.

  민자통에서 현상 공모한 통일행진곡이 불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3.8선 마의 장벽 가로 막아도

민족의 핏줄은 끊이지 못한다

사대의 노예들이 춤을 추어도

정의에 사는 대중 나라 지킨다

(후렴) 일어나라 동포여 대열에 나서라

       줄기찬 투쟁으로 통일을 하자

<이 통일행진곡은 민자통 상임위원 하태환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일보는 남북교류문제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언론계 모두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가진 문제였다. 특히 학생층에서 주장하는 남북한 기자교류 문제는 언론으로서 명확한 입장을 표명을 강요당했다. 당시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이런 문제를 의식해 몇몇 언론에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민족일보 오소백 부국장은 민족일보를 대표해 이렇게 설문에 답했다.

  1. 귀하는 남북 언론인 교류가 필요하다고 봅니까.

  “절대 필요하다. 녹슨 마음의 교통을 먼저 하기 위해서다. 기자는 어떤 정권의 앞잡이가 아니다.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선다. 그러므로 정치적 편견에서 가장 독자적이다”

  2. 남북언론인 교류가 현 단계에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남북의 집권자들이 정권보다 통일조국을 비원 한다면 문제는 단순하다. 이런 가능성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무 위험성도 없다. 패배주의는 금물이다”

  3. 남북언론인 교류의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입니까.

  “1대1로 보내고 받고 하는데 무슨 다른 방안과 보장이 또 필요한가. 가장 큰 문제는 통일에 대한 성실한 자세만이다”

  <한국신문 편집인협회보 1961년 4월 5일자>


  통일운동의 기운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국내의 통일운동에 촉매역할을 하는 사건이 유엔에서 일어났다.

  4월 10일, 한국참전 13개국은 유엔 정치위원회에 한국통일에 관한 결의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유엔의 제 원칙에 의한 한국의 평화통일을 지지하고, 한국민 스스로 장래를 자유로이 결정하려는 한국민의 열렬한 희망을 존중하고, 한국은 유엔가입자격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것은 기존 유엔 결정에서 별로 진전된 것이 아니지만 곧이어 인도네시아가 유엔에 북한 대표도 참석시키자고 제의했고, 그 다음날 스티븐슨 미국 유엔주재 대사는 인도네시아의 안을 일부 수정, 유엔의 자격과 권한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북한대표 초청을 제기했다.

  이것은 그동안 북한과 협상, 교류가 통일을 위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했던 혁신계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당시 한국은 북한을 괴뢰로 인정했기에 협상이나 교류는 물론, 유엔에 같이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조는 그 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1972년 7·4 남북공동 성명이 발표된 직후까지 계속됐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도 한동안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학문적으로 주장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됐다)

  결국 4월 12일, 유엔 정치위원회는 찬성 49 반대 14 기권 24표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가결했다.

  “제1 위원회가 대한민국으로부터 대표 1명을 한국문제 토의에 투표권 없이 참여하도록 초청한 것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우선 대한민국이 그렇게 한 것처럼 한국문제에 관한 조치를 취할 유엔의 자격과 권한을 수락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들의 대표 1인도 한국문제 토의에 투표권 없이 초청할 것을 결정한다”


  이런 사태에 야당은 한결같이 ‘외교의 자주성을 잃은 실패작’이라고 장면 정부를 비난했고 장면 정부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바로 장면정부는 이런 결정을 ‘오히려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북한이 유엔에 나오지 않고, 유엔의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유엔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연히 정국은 장면 정부의 외교적 실책에 비난이 쏟아졌다. 이때 장면 총리는 국회에서 “용공통일 보다는 분단지속이 낳고, 유엔결의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발언으로 또 한번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이 발언은 야권의 집중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불리하다면 유엔 결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장 총리의 발언은 망언이다. 용공 운운하지만 유엔 감시하 남북 총선거를 국회에서 결의했고, 사실상 유엔에서 현실 그대로 남북한을 인정하고 통일을 하려 하지 않는가. 장기집권을 영속화하는 것이며 망언이다” (양일동 의원)

  “이승만 독재도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단상황 지속 운운은 용서 못할 망언이다, 국내외 정세를 거역하지 말고 공산당을 이겨내는 자체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김영삼 의원)

  “장 총리의 발언은 유엔 결의를 존중하고 유엔에 의해 수립된 우리나라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망말이다. 통일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통일이 안될까를 연구하는 불성실한 태도의 일단이 노출된 것이다. 용공 운운하지만 유엔 감시하 총선거라고 한다면 북한공산당이 자유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 터인데 공산당이 출마하는 것을 용공이라고 한다면 민주방식에 의한 통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윤길중 의원)

  조용수도 이런 장면의 태도에 맹공을 가한 것은 물론이다. 민족일보는 ‘통일외교에 실패한 장 정권은 물러나야 마땅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장면을 노골적으로 질타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두 차례나 대표단을 유엔본부까지 이끌고 갔던 정일형 외무부장관과 장면총리는 처음 남북한 동시 초청안이 나왔을 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서슬이 퍼랬다가, 그 안이 채택되니까 ‘우리들의 일대 승리’라고 대 찬양하더니, 정부를 상대로 시비걸기를 좋아하는 야당정객들이 몇마다 꼬집는 바람에 ‘그것은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포석이며 북괴는 결코 유엔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단한 낙관을 표명하여 마치 잔꾀만 는 성인이 국민을 우롱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측이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는 이상, 대표를 파견치 않을 수 없다’고 나오자 정부는 ‘북괴의 참석을 필사 저지하라’는 훈령을 유엔 대표부에 보내는 한편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구구한 변명을 하기에 바쁘다….”


  장면 정부의 이런 무원칙한 통일정책은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다. 마침내 4·19 학생혁명 1주년 기념식을 통해 새로운 학생 차원의 통일문제가 제기되기 이르렀다.

  4월 19일. 서울 성동공원에서 벌어진 4·19 1주년 기념식에서 학생대표는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학생운동이 새로운 차원의 통일운동으로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죽음으로 관권에 항쟁하여 민권을 쟁취한 오늘, 혁명재판이 끝났어도 부정축재자들까지도 처벌 못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한탄하며 정부가 혁명과업수행에 과감할 것을 촉구하고 국토통일에의 대열로 뭉치자”


  공식적인 4·19 학생혁명 기념식과는 별도로 서울대총학생회는 일체의 기존 정치세력을 불신하는 이른바 4·19 제2 선언문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들은 가시지 않은 1년 전의 용기와 분노를 지낸 채 우리의 선혈로 물들어 지던 4월의 광장에 다시 모였다…. 그 거룩한 3, 4월의 항쟁은 정치 지도자 조직의 허약성과 전환기 정치이론의 빈곤성 등이 그 항쟁을 중지시켰다…. 우리는 3, 4월 항쟁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이 땅의 역사사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봉건, 반외압세력 반매판 자본주의 위에 세워지는 민족혁명을 이룩하는 길 뿐이다. 이 민족혁명 수행의 앞길에는 깨어진 조국의 민족통일이라는 커다란 숙제가 놓여있다···우리들은 이를 위하여 나아간다. 외롭게 가신 3, 4월의 영웅과 전체 선열들의 무덤에 민주승리의 그날을 드릴 그날까지”


  그리고 네 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했는데 그중 통일 관련된 부분이 “우리들 서울대학생은 조국의 자주통일을 방해하는 외압세력과 이에 결탁하는 사대주의 세력을 일절 배격한다”고 선언, 통일운동이 제2의 학생혁명임을 규정했다.

  서울대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민통련)도 기념식을 갖고 선언문을 발표, 적극적으로 통일운동 전면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조국 분단의 전책임은 국제공산주의와 독점자본주의 및 그들의 추종자들인 냉전 추종자들의 반민족적 사대주의자들이 냉전 청부행위에 존재한다. 민족의 조속한 평화통일을 위하여 전 민족 자주세력은 총집결하여 남북한의 문화교류, 서신왕래, 경제교류 및 학생회담을 포함하는 비정치적 인사교류를 위하여 제 1차적 투쟁을 전개하고 외세에 의하여 강제되는 분단 상황의 고정화와 군사가지의 심화를 분쇄하라”

  대부분 대학에서 통일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고가도 못하느냐’, ‘언론인 사회단체 남북교류’, ‘민족자주 통일’, ‘외세는 물러가라’, ‘한국문제는 한국인의 손으로’, ‘남북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속지마라 소련놈, 믿지마라 미국놈’, ‘이북 쌀 이남전기’

  청년단체도 성명서를 내고 민족통일의 시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알렸다.

  “…북진통일론으로 민족통일을 실질적으로 방해하던 반민족 도배들도 3, 4월 혁명으로 인하여 민족친화와 민족번영의 길이 오직 평화통일이라는 대전제를 거부하지 못하게 된 오늘날, 선건설 후통일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결과적으로 통일을 원치 않는 무리들이다. 소위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국토건설을 시도한 장정권의 정책은 무계획과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통일 없이는 못살겠다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고 민족양심의 명령이며 배고파 헤매는 동포들의 뼈 속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제 국내적으로도 통일세력은 강화되고 국제적으로도 통일기운은 성숙하고 있다. 장면 정부도 유엔 정치위원회에서의 ‘스티븐슨’안의 결의를 외교적 승리라고 수락하였으므로 이제 남북 대표자들의 회동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남북의 서신 인사 경제교류가 촉성되는 면에서 민주민족적인 통일조국건설이 실천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성명>


  이제 학생 청년들은 통일운동이 곧 제2의 학생혁명, 학생혁명의 완성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야당인 신민당의 서민호 국회부의장은 유엔총회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그들 유엔의 관심밖에 있다. 우리가 통일을 하겠다는 열의가 있으면 유엔을 믿고 있을 수만 없다. 유엔이 현재 운영방식으로 한국의 통일은 요원하다. 우리끼리 남북협상을 해서라도 전 국민의 숙원인 통일과업을 이룩해야 한다.”

  또 양일동(신민당)의원도 비정치인의 남북교류 실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혁신계의 주장인 중립화 통일문제까지 언급했다.

  4월 혁명이 절정기를 이룬 것은 4월 25일 교수단의 시위였다. 이 사건은 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크나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교수들이 4월 25일 시위 1주년을 맞아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한국교수협회(회장 조윤제, 부회장 정석해 이상은)는 다음과 같은 대 북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학생들의 영웅적 항쟁과 시민이 궐기로 성취한 4월 민주혁명의 1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수협회는 4월 혁명에 있어 독재자 이승만의 하야를 불가피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4.25 대학교수단 데모를 기념하고 북한의 교수, 학자, 문인, 예술가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는 통일의 기본정신이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니와, 현하 더욱 다급해진 이 통일의 과업에 대하여 우리들의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하고 흔쾌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대들과 만나 통일을 위하여 논의하고 싶었다. 우리가 이승만을 내쫒은 것과 같이 그대들도 김일성을 타도한 다음 민족의 자주통일을 논의하자”


  비록 조건이 있는 메시지였지만 통일의 봄, 아니 통일논의의 봄이 왔다. 더구나 장면 정부는 그토록 극심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킨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을 사실상 포기해 자연스럽게 통일문제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용수는 이미 이 통일운동세력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했다.

  서울 외국어대는 4월 29일, 대강당에서 ‘조국통일과 학생들의 진로’라는 강연회를 계획했다. 이때 연사로 초청된 사람은 정부측은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 조재천 법무장관,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의 신상초 의원, 신민당 김용성 의원, 통사당 고정훈 대변인, 사회당의 유병묵 대변인, 학계는 조일문 교원노조 위원장(후에 건국대 총장)그리고 언론계 대표로 조용수였다.

  그러나 정부측 인사는 참석을 거부했고 다시 학생들은 김재순 외무부 정무차관(후에 국회의장역임)을 교섭했으나 거절당했다.(결국 이 대회는 경찰의 압력으로 무산됐지만 당시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 대회는 허망한 미신을 버리고 우리대로의 살기를 찾기 위해 남북 교류와 협상을 주장하면서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5일 서울대 구내 다방에서 전국 17개 대학 민통련 대표가 모여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결성 준비대회를 열고 취지문과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면서 통일운동 기운은 더욱 더 확산됐다.

  북한은 5월 5일, 서울대 민통련 제의에 환영을 나타내면서 회담을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정식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대해 혁신세력은 찬성했고 정부는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민자통은 ‘남북학생회담 환영 민족통일 촉진 궐기대회’를 열어 학생을 지지하려 했지만 경찰은 이 집회를 계속 허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5월 9일 기어이 이북학생과 만날 것을 다짐하는 성명 ‘정부와 기성세대에 준다’를 발표, 정부는 학생회담을 방해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장면 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교류와 학생회담은 위험하고 비정상”이라며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원로들과 일부 혁신계 인사는 각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협의체를 조직해 학생과 구체적인 논의를 할 것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5월 13일, 민자통은 서울운동장에서 학생회담이 실현되게 지원하라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에서’였다.

  이때 연사는 정치권에서 장건상, 선우정, 조기하, 유병묵, 민자통의 박진, 이재춘, 청년 대표로 김금수, 김영광, 학생대표는 이수병(경희대 민통련의장, 민족일보 견습기자) 유근일(서울대 민통련 대의원회 의장, 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이다.

  그러나 정부의 불가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의 정치활동에 대해 학칙에 따라 엄중 처벌할 것을 공언하고 나섰다. 학생과 정부가 다시 한번 대결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5월 13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위원회는 ‘남북한 학생회담 및 통일축제 개최에 관한 원칙 및 우리의 요구’를 발표했다. 이것은 남북학생회담의 구체적 내용을 밝힌 것이다. 학생회담의 우선 전제는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범주에 속하지 않고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민족적 감정과 정분을 소통할 수 있는 문제로 회담을 하겠다는 내용을 밝힌 것이다. 즉, 남북한 학생의 친선 사절단 교환, 남북학생 기자교환, 학생 체육단 교환, 학생 예술단 교환, 학생 통일 축제를 회담내용으로 정했다.

  또 학생회담은 정치적 문제를 모두 배제하고, 월북 월남행위를 금지하고, 이 행사가 일부학생의 주장이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학생투표로 그 의사를 확인 할 것 등을 제안하면서 정부는 이 주장을 승인하고 편의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덧붙였다.

  조용수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내는 신문 사설을 직접 썼다.

  민족의 자주적 세력으로서 남북협상의 단계까지 정세를 발전시키자

  -통일운동자들의 올바른 목표와 자세를 위하여

  조국의 통일에 관한 국내외 정세는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제 민족은 저마다 수세기동안 그네들이 자유와 생존권을 얽매고 있는 철쇄를 끊고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여 수년전만 하더라도 인류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국제정치무대서 굉장한 발언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힘만 결집시킨다면 어떠한 강압자도 타도할 수 있고 여하한 간섭도 배제할 수 있다는 신념과 위대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용기와 자신, 그리고 신념이 바로 조국통일의 원동력이 안 될 수 있을까!… 이때 조국의 통일운동을 추진하는 자라면 모름지기 이 민족주체역량에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조국 통일은 민족이 자주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아선 안될 것이다. 정치적 사상의 차이를 초월해서 순수한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한 남북의 학생회담을 갖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의 제의는 이러한 이유로써 통일촉진을 위하여 지극한 의의를 갖는다. 공통의 민족감정, 이것이야말로 조국통일의 정신적 근저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민족지상의 과업을 수행하는 통일운동자에게 거듭 부탁하노니 통일전선에 보수와 혁신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공명을 다투는 소아가 있어서 안될 것이요, 배타주의가 게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민족일보 1961년 5월 16일자 사설>


  13일 학생의 요구사항은 16일자 신문광고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누구도 그 대세를 막지 못할 듯 학생들의 통일 열기가 점점 북으로 향했다.

  그해 보릿고개는 유난히 넘기 어려웠다. 서울에서도 하루 1천4백석의 보리가 배급으로 방출될 정도였다. 국민은 배급받은 보리로 채우지 못한 허기를 통일의 열망으로 분출했다.

  그리고 1960년 5월 16일의 새벽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