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에 해당되는 글 12건

  1. 조용수 평전 책 표지 (1)
  2. 인명록
  3. 제10장 조용수 연보 및 참고문헌
  4. 제9장 부록
  5. 제8장 조용수 죽음 이후
  6. 제7장 총에 꺾인 펜
  7. 제6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8. 제5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9. 제4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10. 제3장 새로운 꿈을 품고

조용수 평전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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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부록  (0) 2013.07.18
제8장 조용수 죽음 이후  (0) 2013.07.18
제7장 총에 꺾인 펜  (0) 2013.07.18

인명록

 

인 명 록



∙ 강등인(姜登仁) 황주 공립보통학교 졸업. 46년 북조선 특산기업 황주과실 검사소 소장. 50년 북조선 농업기술협회 창설위원. 1·4 후퇴시 월남. 60년 구국청년단 가입. 60년 민자통 중앙협의회 지도위원. 재정부 차장. 총무위원회 서무. 5·16후 징역 12년 선고.

∙ 강석화(姜石華) 일명 강 훈. 19년 함북 부령 출생. 31년 만주 동흥 중학 졸업. 35년 만주 북만학원 졸업. 48년 한독당 조직부 지도위원. 48년 남북협상 참가. 56년 진보당 가입. 60년 사대당 인천시당 조직위원장. 61년 통일사회당 인천시당 조직 준비위원장. 5·16후 징역 3년 선고.

∙ 강진원(姜振元) 전북 고창 출생. 일본 중앙대학 1년 중퇴. 49년 대한통신사 전북지사 기자. 전북 고창 민주학생동맹 가입. 50년 노동당 가입. 56년 진보당 전북도당 당무간사. 60년 사회대중당 입당. 60년 조국통일 민족전선 사무국장. 5·16후 징역 12년 선고.

∙ 강창덕(     ) 48년 서상일 의원 개인비서. 56년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 60년 사회대중당 경산군당 준비위원회 대표총무위원. 5·16후 징역 7년 선고. 63년 출소,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선고. 82년 출소.

∙ 고정훈(高貞勳) 20년 평남 진남포 출생. 38년 일본청산학원 영문과 수학. 41년 만주 하르빈 북만학원 노문과 수학. 46년 평양 소련보도부 통역관. 47년 미소공위 미국측 통역관. 48년 육사 7기 특별반 졸업, 육본 정보국 차장. 50년 중령예편. 54년 코리아리블릭 편집국장. 5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56년 진보당 추진위선전부 간사, 민혁당 선전국장. 60년 구국청년단 대표. 61년 통일사회당 선전국장. 민족일보 논설위원. 61년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주비위원. 5·16후 징역 10년 선고. 65년 출옥. 80 국보위 입법회의 의원. 81년 민주사회당 당수(11대 국회의원) 82년 신정사회당 총재.

∙ 곽순모(郭淳模) 만주 봉천 정치 전문학원 3년 중퇴. 만주에서 농장경영. 45년 조선인민당 입당(봉산군당 선전부장) 50년 월남 후 UN 군 전투경찰대 입대 복무. 53년 육본 대북방송 요원. 순국충영봉안회 상무. 59년 혁신당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위원회 부위원장.

∙ 권대복(權大福) 32년 서울 출생. 57년 국학대학 정치과 졸업. 54년 조국수호 전국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 56년 한국 가톨릭학생 총연합회 의장. 57년 여명회 회장, 진보당 통일문제 연구위원. 56년 진보당 사회부간사. 60년 사회대중당 청년국장, 동 조직부 위원장. 61년 혁신당 기획위부위원장. 5·16후 징역 15년 선고. 68년 출감. 73년 통일당 정치위원 겸 조직국장.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12년 선고. 84년 신사당 정책위 의장. 85년 12대 선거 낙선. 신사당 대표위원. 민추협 지도위원.

∙ 권오돈(權五惇) 경기도 여주출생. 중동학교 졸업. 24년 혁청단 가입. 25년 상해망명, 한인청년동맹 가입. 무창군사정치학교 입교. 29년 문예운동사 사건으로 5년 복역. 41년 창씨개명 거부로 10개월 복역. 해방 후 연희대 교수. 60년 4·19 교수데모 주동. 61년 민자통 통일방안 심의위원. 5·16후 해직. 서울대 한문 강사. 72년 민족통일 촉진회 운영위원장, 최고위원.

∙ 구익균(具益均) 상해 공화대학 정치과 졸업. 흥사단 및 한국독립당 학생지도위원. 중국 중산대학 정치학과 조교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선고. 상해에서 금속상 운영. 해방 후 한국인 교민협회 조직, 비서실장 겸 재무위원장. 상해 선무단 총무국장. 47년 귀국, 현대화학 건설주식회사 운영. 60년 사회대중당 상무집행위원장 겸 재정위원장. 통일사회당 재정위원장. 61년 중립화 조국통일총연맹 주비위원. 5·16후 징역 3년 선고.

∙ 기세충(奇世忠) 39년 생. 일본 동사중학교 3년 중퇴. 47년 조선신민당 입당. 조선문화단체 총연합회 산하 문학가동맹가입. 국가보안법위반으로 피검, 6·25 북한의용군 입대. 51년 자수, 53년 전남 광주 임곡중학교 교사. 59년 민의원 송영주 비서. 60년 혁신당 부간사, 민자통 준비위원. 61년 민자통 지방부장. 5·16후 징역 15년 선고.

∙ 김기철(金基喆) 15년 함남 흥남 출생. 39년 동경공전 전기공학과 졸업. 45년 건국후원 함남협력회 간부. 46년 좌우합작 위원회 경제분과위원. 47년 민족자주연맹 보도부장, 민주한독당 선전부장. 48년 남북협상 참가. 52년 조봉암 대통령후보 사무장. 56년 진보당 통제위원회 부위원장, 경기도당 위원장. 57년 진보당통일문제 연구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조직위원장. 60년 5대 국회의원 낙선(부산 영도). 61년 영세중립화통일연맹 대변인. 5·16후 징역 6년 선고. 71년 신민당 통일문제특별위원장. 72년 민족통일연구 위원장. 77년 신민당 지도위원. 77년 박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제의. 84년 별세.

∙ 김금수(金錦洙) 37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민민청 중앙간사장. 60년 민자통 중앙준비위원. 5·16후 징역1년, 집행유예 3년 선고. 64년 인혁당 발기인, 무죄석방. 76년 한국노총연구원. 88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2003년 노사정위원장

∙ 김달수(金達洙) 39년 생. 대동상업학교 4년 중퇴. 61년 부산시 민주민족청년동맹 사무국장. 61년 민자통 조사부장. 5·16후 징역 5년 선고.

∙ 김달호(金達鎬) 12년 경북 상주 출생. 일본 중앙대학 법과 중퇴. 3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판사. 40년 판사사임, 변호사 신사불참 이유로 개업불허. 47년 서울고등 검찰청차장검사. 48년 변호사. 54년 국회의원(경북 상주). 56년 진보당 부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총무위원. 60년 5대 총선 낙선. 60년 사회대중당 위원장. 61년 민자통 의장단. 5·16후 피검, 68년 출감. 79년 별세.

∙ 김동림(金東林) 만주 용정중학교, 일본대학 법문학부 졸업. 만주 동안중학교 교사. 황해도 사리원 상업학교 교사. 56년 진보당 가입. 60년 사회대중당 가입. 60년 조국통일민족전선 통제국장.

∙ 김대희(金大熙) 01년 전북 익산 출생. 23년 일본 와세다대 중퇴. 46년 독립촉성 중앙협의회 간부. 48년 5·10선거 출마 낙선(전북 익산) 57년 진보당 이리시당 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원. 61년 민자통 전북기획위원장. 5·16후 징역 3년 선고.

∙ 김득수(    ) 혁신동지 총연맹 회원, 민자통 농어민부장, 5·16후 피검, 불기소 처분. 인혁당 후보당원.

∙ 김무진(金武眞) 60년 혁신동지협의회 참여.

∙ 김문갑(金文甲) 08년 함남 정평 출생. 일본 와세다대 교외생과정 수료. 약제사 시험합격. 45년 건국동맹 준비위원. 조선인민당 중앙위원.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58년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무죄 석방. 60년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위원장. 60년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위원장. 5·16후 피검. 징역 10년 선고. 장건상 선생 동상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2004년 별세.

∙ 김병로(金丙魯) 1887년 전북 순창출생. 15년 명치대학 법학부졸. 경성법학교수, 보성전문 강사. 19년 밀양지법 판사. 20년 변호사 개업. 허헌, 이인과 함께 광주학생사건 무료변론. 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45년 조선민주당 감찰위원장. 46년 미군정청 사법부장. 48년 초대 대법원장. 49년 반민특위 위원장. 57년 대법원장 정년퇴임. 60년 혁신연맹준비위원. 61년 남북통일촉성총연맹 발기인. 63년 민정당,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 64년 별세.

∙ 김병휘(金炳輝) 21년 평북 용천 출생, 일본대학 법학과 중퇴. 해방 후 북한에서 백의청년동맹 조직. 46년 독립신문사(임정계)사회부장. 홍익대 국제법 교수. 56년 진보당 교양부 간사. 57년 통일문제 연구위원회 부위원장(중앙정치 편집위원) 60년 한국사회당 국제부장, 사회대중당 정책위원장. 61년 징역 5년 선고.

∙ 김배영(    ) 사회당 청년부장. 통민청 간사. 민자통 조직부 차장. 인혁당 발기인. 62년 월북, 67년 남파 후 피검, 사형.

∙ 김선적(金善積) 60년 혁신동지협의회 참가.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발기 주비위원. 87년 일체민주당 대통령후보 출마(중도 사퇴) 95년 남북한 종교 교류차 북한 입국, 구속. 대종교 전교. 통일광복민족회의 의장.

∙ 김성립(金性立) 서울 중동중학 졸업. 45년 대동청년단 마산지구 단장. 민주국민당 마산시당 부위원장. 6·25후 조선일보 마산지국장. 마산언론인협회회장. 7·29 총선 낙선. 60년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부위원장. 5·16후 피검.

∙ 김성숙(金成璹) 00년 경남 밀양 출생. 3·1운동 참가, 중국망명. 22년 중국 의열단 가입. 25년 황포군관학교 졸업. 중국 19로군 가담. 37년 일본 경찰에 체포, 18년형 언도. 해방후 출옥. 60 한국사회당 발기인. 5대 민의원(남제주)

∙ 김성숙(金星淑) 1898년 평북 철산 출생. 독립학교, 북경 민국대학, 중산대학 졸업. 3·1 운동 참가, 2년 투옥. 중국 망명, 조선의열단, 유오한국청년회 조직, 항일운동. 김구, 김규식과 임정조직. 중경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 47년 여운영, 장건상과 함께 근로인민당 창당, 정치위원 겸 조직국장. 55년 민주혁신당 총무위원. 근로인민당 재건혐의로 피검, 대법원에서 무죄선고. 60년 사회대중당 총무위원. 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 겸 선거대책위원장. 61년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주비위원. 5·16후 징역 3년 선고, 62년 출옥. 64년 신한당(新韓黨) 정무위원. 68년 신민당 지도위원. 69년 별세.

∙ 김안국(金安國) 함북 명천 출생. 56년 진보당기획위원장. 57년 진보당 통일문제 연구위원.

∙ 김영광(金永光) 통민청 중앙간사장. 61년 민족일보 기자. 64년 인혁당 사건으로 피검, 징역 1년 선고.

∙ 김영옥(金英玉) 35년 생. 건국대 졸업. 최백근 선거운동. 60년 11월 사회당 당무부장 및 2대 악법공동투쟁위 섭외부 차장. 5·16후 피검.

∙ 김용중(金龍中) 1898년 충남 금산 출생. 16년 상해 망명, 17년 도미. 41년 해외한국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43년 영자 월간지 ‘더 보이스 오브 코리아’창간, 조선문제연구소 설립. 61년 김일성과 장면에게 중립화 통일방안 공개서한 보냄. 61년 조용수 처형에 대한 비난성명 발표. 70년 3선 개헌 운동 반대. 75년 별세.

∙ 김진철(金鎭徹) 서울대 문리대 4년 중퇴. 6·25 당시 북한 의용군 포로. 60년 조국통일 민족전선 기획국장.

∙ 김창숙(金昌淑) 1879년 경북 성주 출생. 19년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대표로 독립청원서 제출 시도. 25년 상해 임시정부 국내 자금조달책. 26년 상해임정 의정원 부의장. 44년 건국동맹 참여. 45년 유도회 회장. 46년 성균관대 학장. 60년 혁신동지협의회발기인. 61년 민자통 의장단. 61년 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 지도위원. 62년 별세.

∙ 김  철(金  哲) 26년 함북 경성출생. 49년 재일 거류민단 신문부장. 51년 재일신세계신문 논설위원. 55년 민단사무총장. 57년 민주혁신당 선전부장. 건국대 교수. 60년 학국사회당 선전부장. 7·29선거 사회대중당 출마(성동을) 낙선. 61년 통일사회당 국제부장. 70년 통일사회당 위원장. 71년 대통령입후보. 74년 민주회복 국민회의 대표위원. 80년 입법회의 의원. 81년 사회당 위원장. 84년 사회민주문화 위원장. 85년 사회민주당 위원장. 94년 별세.

∙ 김학규(金學奎) 1900년 평남 평원 출생. 중국 신흥무관학교 졸업. 조선 혁명군 참모장. 상해에서 김구 김규식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건. 7·7사변 항일전 참전. 광복군 제3지대장. 47년 귀국, 한독당 대표위원. 60년 혁신동지협의회 발기인. 67년 별세.

∙ 김형대(金炯大) 서울대 의예과 졸업. 산부인과 의사. 60년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부위원장. 5·16후 피검.

∙ 도예종(都醴鍾) 대구대 경제학과 졸. 60년 민민청 경북간사장. 61년 민자통 사무집행위원회 조직차장. 2대 악법 반대운동. 62년 인혁당 발기인. 64년 인혁당 사건으로 피검, 3년 복역. 영남일보 영천지사장. 삼화건설 전무. 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피검, 사형.

∙ 문용채(文容採) 34년 일본 오사카 기계학교 2년 중퇴. 귀국 후 조선재생피혁 공장 운영. 45년 조선신화당(新化黨)위원장. 46년 민주주의독립전선 연합체 재정부장. 46년 미소공동위원회 정당사회단체협의회 정치부장. 47년 민족자주연맹 중앙 집행위원. 47년 통일독립촉진회 중앙감찰위원(좌우합작, 남북협상, 평화통일 주장) 47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 피검(징역 2년 집유3년) 59년 서울시장 민선후보 입후보 도중포기. 60년 삼민당 재건, 당수 취임. 60년 민자통 중앙집행위원.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 발기 주비위원. 61년 반민주악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 지도 위원.

∙ 문한영(文韓榮) 46년 대한독립운동 총연맹 선전부 차장. 47년 대동청년단원. 48년 청운사 출판사 운영. 60년 민자통 중앙협의회 총무부 조직위원장. 5·16후 징역 10년 선고.

∙ 문희중(文熹中) 부산 제2상업학교 졸업.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근로인민당 부산시당 부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재정부장. 민자통 중앙상무위원 겸 통일방안 심의위원. 2대 악법 반대 공동투쟁위 총무차장.

∙ 박권희(朴權熙) 26년 경남 밀양 출생. 재일 거류민단 한국학생동맹 위원장. 의사. 60년 통사당 조직국장. 5대 민의원(통사당, 밀양갑) 61년 중립화 조국통일총연맹 주비위원. 5·16후 도일. 95년 조국을 빚낸 해외동포에 선정(의학계)

∙ 박기출(朴己出) 09년 부산출생. 42년 의학박사. 47년 민족자주연맹 경남위원장. 민중주보 사장. 55년 진보당 부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61년 통일사회당 간부. 63년 6대 국회의원 낙선. 67년 7대 신민당 의원. 68년 신민당 정무위원. 73년 일본에서 의사개업. 77년 별세.

∙ 박래원(朴來源) 서울 중동중학 중퇴. 26년 천도교 대표로 6·10 만세운동 주동, 3년 복역. 천도교 중앙교회 감사위원 겸 청년동맹 대표. 해방 후 천도교 보국당 중앙조직부장. 60년 민자통 중앙협의회 총무위원장, 상임부의장. 5·16후 징역 5년 선고.

∙ 박완일(朴完一) 고려대 졸업. 60년 2대 악법 반대 운동 청년투위 대표. 불교 신도회 회장. 80년 민자당 은평을 지구당 위원장. 90년 신한국당 지구당 위원장. 2001년 한국학생운동자협의회장.

∙ 박중기(     ) 민족자주 청년동맹 간사장. 민자통 청년부장. 인혁당 서울시 당원. 65년 징역 1년 선고.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피검.

∙ 박지수(朴智帥) 24년 대구 출생. 44년 경도문리학원 2년 수료. 56년 진보당 교양부 부간사. 60년 혁신당, 사회대중당 통합위원회 간사장. 61년 2대 악법 반대 대구 데모사건으로 투옥.

∙ 박  진(朴  震) 1898년 전남 장흥 출생. 목포 영흥중학 졸업. 서울기독교 청년회관 1년 수료, 중국 상해 윌리암스대 영문과 졸업. 상해 윗스 주식회사 사원. 상해 임정원 의원. 상해 청년단원. 중공군에 체포돼 8개월 구금. 46년 미군정청 물가영단 부산지부장. 6·25 직후 이태리에서 열린 세계자유노동자대회 참가. 52년 동진흥업주식회사 경영. 60년 민자통 사무총장. 68년 별세.

∙ 박형필(朴灐弼) 북경 성동명 의숙 졸업,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법과 2년 수료. 청진여자 상업학교 교사. 49년 육사 8기, 정훈 1기 특과과정 수료, 소위 임관. 3사단, 2군단, 국방부 정훈국 근무. 사회당 선전위원회 차장. 5·16후 징역 10년 선고.

∙ 배일성(裵一誠) 13년 강원 철원 출생. 38년 만주 길림성 교하현 공서서기. 47년 민자주연맹 간부. 56년 진보당 경남도당 당무부장. 60년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결성준비위 당무부장. 61년 통일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 조직국장. 5·16후 징역 5년 선고.

∙ 서도원(徐道源) 50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60년 민민청 준비위 위원장. 영남대학생주임. 5·16후 징역 7년 선고, 63년 출옥. 69년 반공법 위반으로 피검. 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 서상일(徐相日) 보성전문 법과 졸업. 9인 결사동맹, 대동청년단 등 비밀결사 조직 항일운동. 3·1 운동 및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투옥. 45년 한국민주당 총무위원. 46년 비상국민회위원, 입법의원, 헌법기초위원장. 52년 정치파동 당시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대회사건으로 피검. 61년 사회대중당 대표총무위원. 제 5대 민의원. 61년 통일사회당 정치 위원, 민족일보 회장.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 발기주비위원. 5·16후 징역 3년 선고.

∙ 송  건(宋  建) 28년 전북 익산 출생. 성균관대 동양철학연구원 수료. 전북연합대 강사. 56년 진보당 사회부 간사.

∙ 송남헌(宋南憲) 36년 대구사범학교 졸. 전북 군산, 서울 재동 국민학교 교사. 43년 치안유지법 위반 2년 복역. 45년 한국민주당 중앙위원. 46년 민주의원 비서처 국문비서, 조선문필가 협회 문학분과위원. 민족자주연맹 비서처장으로 남북협상에 참여. 49년 서울지방법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60년 사회대중당 총무위원 겸 당무위원장. 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 61년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주비위원. 5·16후 징역 3년 선고. 75년 민족통일촉진회 운영위원장. 77년 독립동지회 이사. 89년 통일원 고문, 민족정기회 명예회장. 2002년 별세.

∙ 송지영(宋志英) 16년 평북 박천 출생. 43년 중국 남경 중앙대 수료. 35년 동아일보, 상해시보 기자. 46년 한성일보 편집국장. 48-50년 국제신문, 태양일보 주 필 겸 편집국장. 59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61년 한국전통사장. 민족일보사건으로 사형선고. 77년 번역가 협회장. 79-84년 문예진흥원장. 80년 통일원 고문. 8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 85년 문화재위원. 89년 별세.

∙ 신  숙(申  肅) 1885년 경기 가평 출생. 한성 사립대 동 전문학교 법과졸업. 천도교 대교구장. 3·1운동 참가. 북경 군사통일회의장.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중국정부에 파견. 전 만주 조선인회 위원장. 천도교 도사. 민주혁신당 중앙정치위원장. 광복 동지회부회장.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 발기주비위원. 남북통일촉성 총연맹 발기인. 67년 별세.

∙ 신인철(申仁澈) 보성고등 보통학교 3년 수료, 경성치과대학 졸업. 개업의. 대한 치과의사협회 부회장. 48년 서울대 치과대학 강사. 49년 해사 특교대 입교, 해군 군의관. 52년 중앙일보 섭외부장. 60년 사회혁신당 준비위원회 정강정책 기초위원. 60년 민자통 사무차장. 61년 민자통 재정부장. 5·16후 징역 10년 선고.

∙ 신창균(申昌均) 10년 충북 영동 출생. 충주 사범졸. 46년 한독당 재정부장, 최고위원. 48년 남북협상참가. 56년 진보당 재정위원장. 57년 진보당 사건으로 투옥.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 주비위원. 구속. 90년 전민련 공동의장. 2002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쪽 본부 명예회장. 백범정신실천 겨레연합 수석대표. 2002년 늦봄 통일상 수상.

∙ 안정용(安晸鏞) 60년 혁신연합체 10인 위원.

∙ 양호민(梁好民) 19년 평양출생. 49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 54년-63년 대구대교수. 61년 사상계주간. 통일사회당 정책심의회부의장. 5대 민의원 출마(통사당,대구)낙선. 63년 서울대 법대교수. 65-84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72-76년 중앙대 대학원 교수. 72-82년 조선일보 통한문제 연구소장. 88년 방송공사 이사장.

∙ 우홍선(      ) 31년 출생. 60년 통민청 중앙위원장. 민자통 조직위 간사. 인혁당 발기인, 중앙상무위원장 대리. 65년 반공법 위반으로 집행유예 2년. 74년 한국골드스탬프 상무이사. 75년 인혁당 재건위사건으로 사형.

∙ 유  림(柳  林) 1894년 경북 안동 출생. 19년 만주로 망명. 22년 중국 국립성도 사범대학 입학. 29년 재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31년 피검. 42년 출옥, 임정 노동위원장. 46년 아나키스트 전국대회 개최, 독립노동당 창당. 50년 5·30 선거출마(안동) 낙선. 60년 혁신연맹 준비위원. 60년 7·29선거 출마(안동) 낙선. 61년 별세.

∙ 유병묵(劉秉黙)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 참여. 60년 사회대중당 발기인, 총무위원. 사회당, 통민청 지도.

∙ 유한종(劉漢鍾) 민혁당 참여. 60년 사회대중당 발기인.

∙ 윤길중(尹吉重) 16년 함남 출생. 37년 경성대 법정학부 졸업. 38년 조선변호사 시험합격. 39년 일본대학 전문부 법학과 졸업. 41년 전남 당진 군수. 46년 입법의원 법률기초 과장. 47년 제헌의회 헌법기초 전문위원. 46-50년 국민대 교수 겸 학장. 50년 2대 국회의원. 52년 진보당 조봉암 대통령후보 선거 사무장. 55년 진보당 간사장. 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 60년 사회대중당 간사장. 60년 5대 민의원. 민족일보 취체역. 61년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주비위원. 5·16후 피소. 68년 출감. 69년 신민당 당무위원. 71년 8대 국회의원. 72년 변호사 개업. 80년 입법회의 의원, 민정당 발기인. 81년 11대 국회의원. 83-84 국회부의장. 12-13대 의원. 88년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고문. 2001년 별세.

∙ 윤성식(尹成植) 건국대 정치학과 졸. 사회당 학생부장. 61년 민자통 통일방안심의위원. 61년 반민주악법 반대 공동투쟁위 학생부장. 5.16후 징역 6년 선고. 4월 혁명연구회 회장. 임수경 후원사업회 상임위원장.

∙ 이  강(李  剛) 1878년 평남 용강 출생. 02년 하와이로 이주,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 창설. 07년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 창설. 09년 대동공보사 주필. 19년 일제 구금. 출옥 후 상해 임정 의정원 부의장, 의장. 28년 재차 옥고. 46년 대만 교포 선무단장. 광복동지회 결성. 61년 남북통일촉성총연맹 발기인. 64년 별세.

∙ 이강훈(李康勳) 03년 강원도 금화 출생. 3·1 운동 참가. 상해 독립운동, 구속. 일본 압송 13년간 투옥. 일본 신조선건국동맹 부위원장(위원장 박열) 조봉암 구명 운동. 4·19후 혁신통합 운동. 61년 통일사회당 국민대중운동 위원장. 5·16후 3년 복역. 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 88년 민화위 위원. 89년 광복회장. 2003년 별세.

∙ 이광진(李光鎭) 60년 혁신동지협의회 발기인.

∙ 이동화(李東華) 07년 평남 강동 출생. 37년 동경제대 졸. 41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복역. 44년 여운형 등과 건국동맹 조직. 45년 건준 서기국 위원. 45년 평양민보 주필. 46년 김일성대 교수. 52년 경북대 교수. 54년 성균관대 교수. 55년 진보당 강령기초. 56년 민주혁신당 정치위원. 60년 사회대중당 기획위원장. 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장. 5·16후 징역 5년 선고. 66년 통일사회당 위원장,대중당 당수. 76년 민주회복 선언에 참여. 81년 민주사회당 창당준비 위원장. 95년 별세.

∙ 이명하(李明河) 13년 함남 북청 출생. 동아 조선 함흥지국장. 45년 조선청년동맹위원장. 기독교 청년 전국연합회 문화선전 부장. 46년 반탁 투쟁위원회 조직부 차장. 47년 민족자주연맹 조사부장. 56년 진보당 부간사장 겸 조직부 간사. 60년 사회대중당 통제위원장. 61년 통일사회당 통제위원장. 61년 통일사회당 당무부위원장.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 발기주비위원. 5·16후 징역 3년 선고. 60년대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 66년 신한당 전당대회 부위원장.

∙ 이병일(      ) 노동인민당 당원. 사회대중당 전북도당 위원장. 조국통일 민족전선 조직국장. 민통련 중앙조직위원. 민자통 참여.

∙ 이석준(李錫俊) 육군 상사제대. 28세 청구대학 건축과 2년 중퇴. 60년 사회대중당 경북도당 통제위원 및 선전부장. 61년 사회당 경북도당 준비위원장.

∙ 이성재(李星載) 46년 서울 중동중학 재학 중 민주학생 연맹 가입. 46년 서울대정치학과 재학 중 건설학생 총연맹 부위원장. 부산시 동래구 장전동 대한청년단장. 60년 사회당 중앙집행위원. 5·16후 징역 5년 선고.

∙ 이수병(李銖秉) 36년 경남 의령 출생. 56년 부산사범 졸업, 부산대 입학. 57-58년 의령 갑을 국민학교 교사. 59년 경희대 경제학과 편입학. 60년 ‘암장’활동, 민민청 가입. 61년 민족일보 공채 입사. 민통련 경희대 대표. 5·16후 징역 15년 선고. 68년 출소.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선고. 75년 사형집행.

∙ 이영옥(李榮玉) 대구 고등보통학교 중퇴. 19년 기미 만세사건으로 3년 복역. 28세 일본대학 상학부 졸업. 46년 미군정청 신한공사총무이사. 49년 농림부 귀속 농지관리국장. 52년 국방부 영관급 근무. 61년 혁신당 가입. 민자통 중앙협의회 총무위원장. 5·16후 징역 5년 선고.

∙ 이  인(李  仁) 1896년 대구출생. 17년 일본대 법문학부 졸업. 23년 변호사. 27년 조선변호사협회회장. 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4년 복역. 45년 대법관. 46년 검찰총장. 48년 법무장관, 제헌의원, 반민특위의원. 54년 3대 민의원. 60년 혁신연맹 준비위원. 참의원. 72년 민족통일촉진회 회장. 통일원고문. 79년 별세.

∙ 이재문(      ) 경북대 정치학과졸. 57년 영남일보 기자. 61년 민족일보 기자. 65년 인혁당 중앙상무위원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선고. 71년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경북지구 운영위원 겸 대변인. 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사형선고. 80년 서대문 구치소에서 단식중 옥사.

∙ 이종률(李鍾律) 05년 경북 영일 출생. 28년 와세다대 재학 중 우리말 연구회 사건으로 퇴학. 29년 학생운동 성진회 사건으로 구속. 36년 형평사 운동으로 2년 6개월 복역. 45년 조선학술원 창립 46년 민족건양회 조직. 50년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 61년 민자통 통일방안 심의위원회 정치분과 위원. 민족일보 편집국장. 5·16후 민족일보 사건으로 구속, 무죄. 민족자주통일 방안 심의위원회 사건으로 구속. 89년 별세.

∙ 이종신(李鍾信) 평남공업 기술원 양성소 졸업. 46년 전남 장수국민학교 교사. 46년 전북민청 선전부 차장. 47년 전북민전 상무위원, 조사부 차장. 포고령 위반으로 피검 48년 월북, 월남. 50년 구속, 51년 삼척공업고등학교 교사. 57년 월간지 ‘해양공론’발행. 60년 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 61년 민자통 중앙상임위원, 통일방안 심의위원.

∙ 이재춘(李載春) 보성고등 중퇴. 서북청년단 가입, 독립운동.일제하 징역 6월 복역. 해방 후 북청군 신창읍 자치위원회 총무위원. 60년 사회대중당 가입. 7·29 총선 출마, 낙선. 61년 민자통 선전부장.

∙ 이훈구(李勳求) 1896년 충남 서천 출생. 24년 동경제대 농학과 졸업. 27년 미 캔자스주립대 농대대학원 수료. 철학박사(미 위스콘신대) 30년 일본 금릉대 교수. 31년 숭실전문농과 학장. 38년 조선일보 주필 겸 부사장. 48년 제헌의원. 성균관대 총장. 60년 민주사회당 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발기인. 5대 참의원(충남을) 61년 중립화조국통일 총연맹 주비위원. 61년 별세.

∙ 이희승(李熙昇) 경기도 출생. 경성제대 조선어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 수료. 이화, 연희전문 교수. 서울대 문리과대 학장. 60년 4·19혁명 교수시위 주도. 61년 민자통 통일방안심의위원. 63년 동아일보 사장. 89년 별세.

∙ 임기봉(林基奉) 03년 전남 목포 출생, 일본 동지사 대학 중퇴, 평양 신학교 졸업(목사) 신사참배 거부. 49년 대한노총 철도연맹 위원장, 대한노총 부위원장. 50년 민의원(전남 목포). 56년 진보당 전남도당 부위원장, 진보당 노동부 간사. 60년 사회대중당 창당 준비위원.

∙ 임갑수(林甲守) 20년 부산 출생. 39년 선린상고 졸업. 한성고 학생회 사건으로 피검. 44년 건국동맹 참여, 인천노동조합 원호회 재정부장. 47년 민자통 중앙집행위원. 56년 진보당 농민부 간사 겸 경남도당 준비위부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준비위상임의장. 61년 통일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 총무위원. 5·16후 징역 5년 선고. 69년 신민당 당기위부위원장. 7대 의원(부산 동래) 69년 신민당 탈당. 71년 공화당 입당. 동국기업 대표이사.

∙ 임창순(任昌諄) 19년 충북 옥천 출생. 한학공부. 45년 대구사범 등에서 한학 강의. 55년 성균관대 교수. 61년 민자통 통일방안심의위원. 60년 7·29 선거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 63년 태동고전연구소장. 65년 인혁당 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선고. 85년 한림대 교수. 89년 문화재위원장. 98년 통일시론 창간. 99년 별세.

∙ 장건상(張建相) 1882년 부산 출생. 03년 경성공립영어학교 졸업. 05년 일본 유학중 한인무관학교 설립. 08년 미국 유학, 시카코 대학에서 정치학 연구. 인디아나대 법률학과 졸업. 17년 상해 동제사 가입. 19년 상해임정 외교 총장 대리. 27년 북경감옥에서 2년 복역. 30년 북경대학 교수. 36년 5월 상해에서 체포, 1년 복역. 39년 중경 임정 국무위원 학무부장. 46년 인민당 의장단, 동 9월 근로인민당 부당수. 47년 근민당 수석 부위원장. 58년 이승만 정권에서 구속. 61년 혁신당 위원장, 중앙집행위원장. 61년 민주악법 반대 투쟁위원회 지도위원. 74년 별세.

∙ 장일순(張壹淳) 28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미학과 중퇴. 원주 대성학원설립. 56년 통일사회당 출마, 낙선. 5·16후 3년간 복역. 서예가. 94년 별세.

∙ 장홍염(張洪琰) 10년 전남 목포 출생. 28년 조선총독부 비난 격문 배포. 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퇴학. 32년 독립운동 중 북경에서 체포, 투옥. 60년 혁신당 대변인. 61년 중립화 조국통일총연맹 발기주비위원. 90년 별세. 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전세룡(全世龍) 18년 함북 명천 출생. 35년 보성고등 보통학교 졸업. 50년 명천고급인문중학 교원. 52년 상공일보 업무국장. 조봉암 개인비서. 56년 진보당 조직부 부간사.

∙ 전인봉(全麟鳳) 중국 북경 보인대학부설 정치학과 1년 중퇴. 새인민보 마산지국장. 동래주둔 UN군 제31포로수용소 중국어 통역 겸 마산중국어 학습원 원장. 60년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준비위원회 통제위원장. 60년 한국중립화통일 촉진위원회 재정부장. 5·16후 피검.

∙ 전진한(錢鎭漢) 07년 경북 문경 출생. 28년 와세다대 경제학과졸. 45년 독립촉성회 전국청년연맹 위원장. 46년 민족통일본부노동부장. 48년 제헌의원. 사회부장관. 2,3대 민의원. 55년 농림위원장. 60년 혁신연맹 준비위원. 한국사회당 발기인. 5대 민의원. 63년 민정당 최고위원. 6대 의원. 65년 민정당 부총재. 66년 한독당 대통령후보. 72년 별세.

∙ 정구호(鄭九鎬) 36년 대구 출생. 59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 61년 민자통 중앙준비위원. 61년 사회당 중앙상무위원. 63년 시사영어사 편집국장. 76년 서울신문 편집국장. 80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81-86년 경향신문사장. 86년 청와대 대변인. 86년방송공사 사장. 88년 국제방송협회장.

∙ 정상구(鄭相九) 25년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 졸. 53년 혜화여고 교장. 재단이사장. 57년 문총 부산시 위원장. 혁신연맹 관여. 60년 통사당 정책심의회의장. 5대 참의원(혁신당). 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 7대 국회의원. 73년 통일당 총재. 12, 13대 국회의원. 94년 신민당 고문. 99년 자민련 의원.

∙ 정순종(鄭淳鍾) 보성고등학교 졸업. 49년 반일운동구호회 서기장, 포고령 위반징역 1년 복역. 61년 경남민자통 결성 준비위원장, 민자통 중앙협의회 의장단. 5·16후 징역 5년 선고.

∙ 정순학(鄭順學) 일본 고등공업학교 졸업,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회원, 대동청년단원. 56년 2월 민주당 서대문을 지구당 선전부장. 57년 민주혁신당 입당. 58년 민의원 낙선. 60년 7·29총선 낙선. 61년 조국통일민족전선 위원장. 5·16후 피검.

∙ 정예근(鄭禮根) 28세에 만주 하얼빈 YMCA 전문학교 졸업. 하얼빈 제5중학 영어강사. 56년 진보당 통제위원 60년 사회대중당 통제위원, 혁신당 중앙위원, 통일문제 연구위원회 부위원장.

∙ 정화암(丁華岩) 1896년 전북 김제 출생. 21년 상해로 망명. 23년 중국에서 농촌자치운동 전개. 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정의공보 발행. 28년 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 편집위원. 29년 상해노동대학 노동문제 연구. 30년 한중대연합항일구국연맹 결성, 일경에 체포. 34-39년 노동자, 농민운동자 양성. 45년 상해거류민 단장. 인성학교 이사장. 48년 귀국 후 재차 중국행, 54년 귀국. 56년 민주사회당 발기위원, 최고위원. 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 61년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주비위원. 5·16후 투옥. 64년 한국민주사회주의 연구회의장. 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고문. 81년 별세.

∙ 정형모(鄭亨模) 대구농림학교 졸업. 일본 관서대학 법과 졸업.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행정관. 56년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1년. 57년 진보당 중앙통제위원 및 서울시당 기획위원장. 60년 12월 조국통일민족전선 지도위원. 민자통 통일방안 심의회위원. 5·16후 피검.

∙ 조경한(趙擎韓) 00년 전남 승주 출생. 3·1운동 참가. 24년 중국망명. 청년운동 전개. 29년 한국독립당 참가. 31년 이청천과 만주사변 참전. 임정 의정원 의원. 광복군 군사훈련처장. 국민위원. 한독당 비서부장. 60년 혁신연맹 준비위 지도위원. 61년 혁신동지협의회 발기인. 6대 국회의원. 독립유공자협회장. 93년 별세.

∙ 조규택(曺圭澤) 55년 진보당 발기추진위 기획상임위원. 56년 진보당 재정부 부간사. 60년 혁신동지 총연맹 간부. 61년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 주비위원. 66년 민주사회당 간부.

∙ 조규희(曺圭熙) 14년 함남 북청 출생. 36년 일본 중앙대법과 중퇴. 45년 건준 선전위원, 신조선보 기자. 46-50년 한성일보, 한국매일신문편집 국장. 56년 진보당 선전부 간사. 60년 사회대중당 창당위원. 5·16후 징역 10년 선고.

∙ 조기하(趙棋賀) 61년 민자통 의장단. 61년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 총무부장.

∙ 조윤제(趙潤濟) 04년 경북 예천 출생. 29년 경성제대 조선문학과 졸업. 52년 문학박사(서울대) 45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장. 49년 서울대 문리대 교수, 학장. 54년 성균관대 교수, 대학원장, 부총장. 60년 한국교수협의회 의장으로 4·19 교수데모주도. 61년 민자통 통일방안 심의위원. 5·16후 피검. 65-74년 영남대 교수. 69년 학술원회원. 76년 별세.

∙ 조중찬(趙中燦) 09년 서울 출생, 보성고등 보통학교 졸업. 56년 진보당 재정부 간사 중앙상무위원. 60년 사회대중당 조직위원장. 관념철학서 ‘시공론’저술. 5·16후 징역 12년 선고.

∙ 조헌식(趙憲植) 경성법학 전문학교 졸.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변호사. 27년 신간회 서울지부장. 45년 국민당 기획부차장,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 민주독립당, 민주혁신당 중앙상무위원. 60년 사회대중당 총무위원 겸 선거대책위원장. 7·29 총선 낙선. 통일사회당 통제위원회 위원장. 5·16후 징역 3년 선고.

∙ 진병호(陳炳昊) 대전사범 졸업. 중앙대 영문과, 대학원 석사과정수료. 남북애육원 교육·총무부장. 60년 사회대중당 준비위원. 학생부장.

∙ 최근우(崔槿愚) 서울 출생. 2·8 독립선언 10인 서명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원. 프랑스·독일에서 정치경제학 연구. 건국준비위원회 총무부장. 60년 사회당 창당 준비위원장. 61년 5·16후 피검 옥사.

∙ 최백근(崔百根) 하동보통학교 졸업. 32년 출판법위반으로 금고 6개월 선고. 서울외국어 전문학원 졸업. 45년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겸 총무부차장, 성동구당 부위원장.  48년 남북협상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 49년 재북 근로인민당 당무부장. 52년 징역 2년 선고. 60년 혁신동지총연맹 중앙조직부장. 7·29선거 전남 광양 출마, 낙선. 60년 혁신당 조직부장. 민자통 중앙상무위원 겸 서울시 사무국 부국장. 5·16후 피검 61년 사형 집행.

∙ 최석채(崔錫采) 17년 경북 금릉 출생. 42년 일본 중앙대 법학부 졸업. 54년 대구매일신문 주필. 59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60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60년 사회대중당 상무위원. 60년 7·29선거 출마(사회대중당) 낙선. 61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65-71년조선일보 주필. 66-71년 신문협회회장. 71년 경북전문대 이사장. 72년 한국문화방송회장. 74-80년 문화방송 경향신문 회장. 74년 통일원 고문. 81-87년 대구매일신문 명예회장. 88년 조선일보 상임이사. 91년 별세.

∙ 최성만(崔成萬) 전주 고등보통학교 졸업. 이리 공업중학 교사. 60년 사회대중당 정읍군 대의원. 60년 조국통일민족전선 조직국장, 부위원장. 5·16후 피검.

∙ 최희규(崔熙奎) 20년 함북 학성 출생. 경성농업학교 졸업(재학중 치안유지법 위반) 일본 북해도대 농학부 수학. 53년 서울시 부흥건설단 단장. 54년 3월 정신선양회 청년부장. 56년 진보당 당무간사. 미국이민.

∙ 하태환(河泰煥) 서울 감리교 신학교 졸업. 교육계 종사. 56년 진보당 경남도당 교양부장. 60년 사회대중당 준비위원. 61년 조국통일민족전선 선전부장. 2.8 한미경제협정 반대공동투쟁위원회 선전부장 겸 기획위원. 민자통 상임위원. 2대 악법 반대투쟁 공동위원회 선전부 차장. 통일행진곡 작사. 61년 사회당 선전부장. 5·16후 조국통일민족전선 사건으로 피검.

∙ 한왕균(韓旺均) 사리원 농업학교, 서울대 정치학과 졸. 육본 전사편찬위원회 편집관. 60년 사회혁신당 조직부장. 7·29 총선 서울 서대문에서 민의원 출마, 낙선. 통일사회당 청년부장. 5·16후 징역 3년 선고.

황구성(黃龜性) 광주고, 정치대 법률학과 졸. 56년 진보당 선전부차장, 경기도 부위원장, 60년 사회대중당 상무위원, 파주출마 낙선, 혁신당 중앙집행위원.

∙ 황  빈(黃  貧)동경 중앙음악학교 중퇴. 교사. 50년 육군 정훈부대 지도계장. 독립노동당 입당. 60년 사회대중당 중앙상임위원 겸 정보부장. 통일사회당 의회국장. 5·16후 징역 3년 선고.

∙ 허영무(許永茂) 평남 강서중학 졸업. 52년 서울법대 졸업. 사회당 중앙위원. 혁신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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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용수 연보


  1930.4.24      경남 함안 출생

                 봉래국민학교 졸업

  1943          경남 진주중학교 입학

  1948                  -       자퇴

  1949.4         대구 대륜중학 편입학, 졸업

  1950          연희전문 정경학부 입학

  1950          하만복의원 보좌관(경남 경찰국 경사)

  1951.9.25      일본으로 건너감. 명치대 정경학부 2학년 편입학

  1953.5.30      재일본 한국학생동맹(한학동) 문화위원으로 선출

    54-          한국거류민단중앙총본부차장, 민주신문 상임논설위원

  1959.4.18      죽산조봉암구명운동. ‘조봉암씨 구명청원서명운동위원회’ 가입

   59.12.        민단 도치키현 부단장

                 유태하 공사 추방운동 도치키현 위원장

                 재일 한국인 북송반대 도치키현 위원장

  1960.3.        일본 도치키현에서 파친코를 경영하는 강호씨 딸과 결혼

      6.15       귀국

      7.29       사회 대중당 후보 청송출마, 낙선

      11.4       재차 도일

      12.1       귀국

  1961.1.15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준비위원회 중앙준비 위원

      1.25       주식회사 민족일보 설립, 사장취임

      2.13       민족일보 창간

      2.28       민자통 탈퇴

      3.20       반민주 악법반대 대 강연회 연사로 참석

      3.27       산업은행 서병수(徐丙秀) 총재 등으로부터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피소

      5.18       경찰에 연행

      7.13       혁명검찰부에 송치

      7.28       혁명재판소 재판 시작

      8.12       사형구형

      8.31       일본에서 조용수 구명운동 위원회 조직

      9.1        국제펜클럽 집행부회의에서 항의전문

      9.20       국제신문인 협회 항의문 발표

      10.21      국제신문인 협회 재차 항의문 발표

      10.29      국제펜클럽 재차 항의 전문

      10.31      상고심 상고 기각

      12.20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사형 확인

      12.21      교수형 집행(망우리에 안장)

  62.  1.13      국제저널리스트 협회 61년도 국제기자상 추서 결정

      4.30       동경에서 조용수 추도회 개최

  63.            조용수 묘소 이장(경기도 광주)

  90. 9.13       민족일보 영인본 간행

  92.            조용수 가족, 대통령에게 진정서 제출

  95.1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간행

  98.12.20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발족, 첫 공식 추도식 거행

  2001.          조용수 40주기를 맞아 관련 학술대회 개최

  2002.2.19      국회 본회의에서 민족일보와 조용수 관련 논란, 본회의 파행.



2. 참고문헌

<1차 자료>

1.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1961년 회의록

2. 대중일보사 사업계획서(4293년도)

3. 민족일보 편집국 기자명부

4. 민족일보 주주명단

5. 민족일보사 정관

6. 민족일보사 기자인선 계획 초안

7. 민족일보사 지사, 지국 약정서

8. 민족일보사 법인 등기부 등본

9. 민족일보와 산업경제신문과의 인쇄계약서

10. 민족일보와 합동통신과의 통신전재계약서

11. 민족일보와 전업시보사와의 조판계약서

12. 민족일보 사령장(15명)

13. 민족일보 창간기념 휘호

14. 민족일보 주주포기 위임장

15. 민족일보 압수물품 목록

16. 민족일보사 주식회사 해산 신청서

17. 민족일보 판결문(혁명재판소, 1961)

18.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사형집행 전말 보고의 건’ 조용수외 4인(서울형무소 1961.12.21)

19.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조용수 사형집행 종료 보고서(혁명검찰부 1961.12.21)

20. 사회대중당 선거 공약안

21. 상고이유서(4294.9.23)

22. 조용수가 청송지역주민에게 보낸 원고 원본

23. 조용수 선거 운동원 명단

24. 조용수 선거운동 전단(1)(2)

25. 조용수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서신(4294.5.5)

26. 조용수 건강진단서(서울형무소, 1961.12.20)

27. 조용수 사형집행 확인서(국가재건 최고회의, 1961.12.21)

28. 조용수가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집

   (이 자료집에는 조용수가 잡지 신태양에 쓴 기고문, 민족일보 사건 선고 당시 국내외 보도의 논평과 외신보도, 판결내용에 지적된 민족일보의 사설, 논단기사와 타지의 보도와의 비교, 민족일보에 게재된 기사와 집필진 등이 명시돼 있다)

29. 조용수 변론 관계 서류

30. 조용수 부친 조판상의 진정서(4294.7)

31. 조용수 사형집행 명령 기안서(법무부, 1961.12.21)

32. 조용수 사형집행 명령 조서(서울형무소, 1961.12.21)

33. 조용수 사체 검안서 (서울형무소, 1961.12.21)

34. 주일대사관 정무보고,(외무부, 1959)

35. 진정서 처리 경과 통보(중앙정보부, 63.2.21)

36. 형사사건부, 형사상고 사건부(혁명검찰부, 1961)

37. 민의원 회의록(민의원 사무처)

38. 참의원 회의록(참의원 사무처)

39. Journalism in Korea after the may 16th revolution(한국신문편집인 협회, 1961)

40. IPI가 박정희 장군에게 보낸 전문(IPI Report Nov.1961)

41. P.E.N. INTERNATIONAL EXEUTIVE  COMMITEE MEETING IN THE PALAZZETTO  VENEZA ROME (Nov.1/1961)

42. 국제펜클럽 David Carver가 대한민국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보낸 전문(Oct.29-1961)

43. 국제펜클럽 로마회의가 박정희 장군에게 보낸 전문(Nov.2-1961)


<2차 자료>

  - 단행본

1. 관훈클럽 30년사(1957-1987) 관훈클럽, 1986.

2. 고정훈 등 ‘명인옥중기’ 원휘출판사 1968.

3.   -    ‘부르지 못한 노래’ 홍익출판사, 1966.

4. 권대복, ‘진보당’ 지양사, 1985.

5. 김동조, ‘회상 30년 한일회담’ 중앙일보사, 1986.

6. 김세원, ‘어느 통일운동가의 육필수기-비트’ 일과놀이, 1994.

7. 김영수, ‘옥중기-붉은 담안의 4년 7개월’ 자유시대사, 1993.

8. 김진배, ‘가인 김병로’ 가인 기념회, 1983.

9. 김학준, ‘이동화 평전’ 민음사, 1987.

10. 노중선, ‘민족과 통일’ 사계절, 1985.

11. 남재희, ‘양파와 연꽃’ 민음사, 1992.

12. 동아일보 색인 10 ‘1960-62’ 동아일보사, 1982.

13. 리용필, ‘조선신문 100년사’ 해제 정진석, 도서출판 나남, 1993.

14. 민단 40년사, 재일거류민단, 1987.

15. 박권상. ‘자유언론의 명제’ 전예원.

16. 박진목, ‘내조국 내산하’ 창진사, 1976.

17. ‘발굴 현대사인물 1,2,3권’ 한겨레신문사, 1991-1992.

18, 4월 혁명 연구소, ‘한국사회 변혁운동과 4월 혁명’ 한길사, 1990.

19. 송건호, ‘한국 현대언론사’ 삼민사, 1990.

20. 송남헌, ‘송남헌 회고록’ 우사연구회 엮음, 한울, 2000

21. 송남헌 이정식, ‘한국현대 정치사3’, 한국사료연구소, 성문각 1986.

22. 송원영, ‘제 2공화국’ - 장면총리 공보비서관 송원영 정치체험, 샘터, 1990.

23. 양수정,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휘문출판사, 1965.

24. 역대 국회의원 선거상황,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1.

25. 윤길중, ‘이 시대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윤길중 회고록, 호암출판사, 1991.

26.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이강훈 회고록, 제삼기획, 1994.

27. 이병주, ‘그를 버린 女人, 서당, 1990

28. 이상두, ‘옥창너머 푸른 하늘이’ 범우사, 1972.

29. 이수병 선생 기념사업회 편 ‘암장-인혁당 사형수 이수병 평전’ 지리산, 1992.

30. 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31. 전  준, ‘조총련 연구, 1.2,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32. 정진석, ‘한국현대 언론사론’, 전예원, 1985.

33.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1991.

34.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자유문고, 1982.

35. 한국군사혁명사, 한국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 1963.

36. 한국혁명재판사, 한국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1962.

37. 한국인명사전, 연합연감 1990, 연합통신사.

38. 한국신문윤리 30년사, 한국신문윤리 위원회, 1994.

39. 상훈기록 명부, 행정자치부


  - 정기간행물

1. 京鄕新聞

2. 民國日報

3. 民族日報

4. 東亞日報

5. 韓國日報

6. 新聞評論

7.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

8. 民主新聞 (日本 東京)

9. 東洋經濟新聞 (日本 東京)

10. 統一朝鮮新聞(日本 東京)

11. 로동신문(평양)

12. 합동연감 62, 합동통신사

13. 統一朝鮮年鑑 64. 統一日報社(日本 東京)

14. 발굴 한국 현대사인물 ‘조용수’ 한겨레신문 (1990.2.2)

15. IPI REPORT(Monthly 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Press Institute)

16. 강원룡, ‘정일권 이후락은 미국의 박정희 좌경화 방지용이었다’ 신동아 93.11.

17. 고종석, 오늘 ‘조용수’한국일보 2002.12.21

18. 권재현, ‘부활하는 민족언론인 조용수’ 민족일보 진상위 학술회의 재조명작업, 경향신문 2001.12.12

19. 김삼웅, 민족일보와 조용수, 대한매일 98.12.22

20. 박윤석 ‘현대사 인물 재조명’ 사후 37년만에 진상규명위 발족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신동아 1999.2월호

21. 박  찬, 씨줄날줄 ‘조용수’ 서울신문 2001.2.17

22. 손석춘, 여론읽기, ‘이회창 후보의 언론관’ 한겨레신문 2002.9.14

23. 송지영, ‘그리운 얼굴들’ 신세계 63.8.

24. 양수정, ‘옥중기-옥창살을 부여잡고’ 다리 72.6.

25. 양  평, 그해 오늘은 ‘하늘보고 땅을 보고’ 세계일보 2000.8.28

26.   -    그해 오늘은 ‘조용수’ 세계일보, 2001.12.21

27. 원희복,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인물계 90.2.

28.   -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과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누구도 민족일보 앞에 떳떳할 수 없다. 기자협회보 1997.8.16자

29.  -   정동탑, ‘이회창 판사의 오판’ 경향신문 2002.5.23

30. 이광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경향신문 2001.7.5

31. 이근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송지영의 우수의 일월’ 중앙일보 2003.2.11

32. 이덕일, 우리 시회의 주류와 시대정신, 서울신문 2001.2.24

33. 이상두, ‘옥중기-역사의 단애에 서서’ 다리 72.7.

34. 이상우, ‘민족일보, 황태성, 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 85.6.

35. 이성렬, ‘혁신정당의 전모’ 새벽 1960.4

36. 이용원 외언내언 ‘조용수와 역사의 순리’ 서울신문 2000.10.16

37. 이종한, 정준영 ‘한국전쟁중 재일 학도의용군의 뭍혀졌던 이야기’ 월간조선 1999 2월호

38. ‘민족일보는 왜 용공으로 몰렸나’ 말 88.6.

39. 조덕송, ‘대하실록 언론의 외길 45년-민족드라마의 증언’, 주간조선 92.1.19.

40. 장호순, 조용수의 죽음과 언론개혁, 경향신문 2001.2.19

41. 주종환, 진짜 대쪽이 될려면  한겨레신문 2001.2.23

42. 한상범, 매카시즘 시대의 사법살인, 한겨레신문 2001.12.13

43. 홍세화, ‘인간의 얼굴을 찾아서’ 한겨레신문 2002.4.15


<논문>

1. 정진석, ‘민족일보와 혁신계언론 필화사건’, 신문연구 1990년 여름호.

2. 유완하, ‘민족일보의 성격에 관한 연구’ 1991.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3. 오세윤, ‘민족일보에 관한 연구’-통일관련 사설을 중심으로-1992.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기타>

1. MBC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27편 민족일보와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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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부록

 

제 9 장

부  록





<자료집 목차>


1. 일본외교의 특질과 한일회담(조용수 기고논문)

-난중난사인 한일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신태양 4291.9.1)

2. 민족의 자주적 세력으로서 남북협상의 단계까지 정세를 발전시키자

-통일운동자들의 올바른 목표와 자세를 위하여 (민족일보 61.5.16)

3. 상고이유서 (4294.9.23)

4. IPI 항의문

5. 재일 조선 언론·출판인 협회 성명(61.8)

6. 조국평화통일 남북문화 교류 촉진 재일문화회의 성명(61.8.28)

7. 민족일보 판결에 대하여/일본 펜클럽사무국장 항의문(61.8.28)

8. 일본 펜클럽 항의문(61.9.4)

9. 오사카 지방 일본인 유지들 항의문 요지(61.9.6)

10. 조용수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 발기인 취지서(61.9.5)

11. 메이지대 한국유학생 일동 항의 성명문(61.9.6)

12. 조용수 구명에 관한 메이지대 교수 기고문 (61.9)

13.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 기고문(61.9)

14. 조용수 구명위원회 항의문(61.9.7)

15.     -      -       박정희에게 보낸 항의문(61.9.8)

16.     -      -       본국동포에게 보낸 메시지(61.9.8)

17.     -      -       일본국민에게 보낸 메시지(61.9.8)

18. 조명탄원이 아닌 규탄 항의를/통일조선신문 사설(61.9.8)

19. 일본 신극인회의 의장 항의문(61.9)

20. 일본 게이오대 한국인 학생 성명(61.9.14)

21. 민족일보 사건의 판결 (日本, 東洋經濟新聞, 61.9.15)

22. 한국의 언론인 구명을 호소하는 모임 발족 성명문(61.11.7)

23. 일본 문화회의 성명요지

24. 구출투쟁을 한층 강화하자/통일조선신문 사설(61.11.9)

25. IPI Report. Oct. 1961.

26. 용서할 수 없는 범죄/맨체스터 가디언(61.12.22)

27. 백엽동인회 성명서 (61.12.21)

28. 용서할 수 없는 이 포악을/통일조선신문 사설(61.12.21)

29. 조 사장의 죽음에 보답하자/통일조선신문 사설(62.1.4)

30. 재미 한국문제 연구소장 김용중 성명(61.12.28)

31. 조용수 추도사 (다카미준)

32.    -      -    (일본 사회당 위원장)

33.    -      -    (일본 전국방송노동조합협의회 의장)

34. 조용수 동지를 애도한다/통일조선신문

35. 민족일보 진상규명위위원회가 각 정당에 보낸 탄원서(1998.2.8)

36.     -        -           발족 취지문(1998.12.20)

37.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판결 이회창 후보 규탄 및 국가보안법철폐 촉구 전국 법과대학생 선언(2002.12.4)

38.  이회창 후보에게 보내는 공개 질의서(2002.12.4)

39.  학술발표대회 자료집-민족일보사장 조용수 사건의 법적 조명(2001.12.8)

  - 민족 언론인 조용수 선생(원희복·경향신문기자)

  - 민족일보 사건 재판의 법률적 조명(한상범·동국대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 4월 혁명 정국과 민족일보(홍석률·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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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조용수 죽음 이후





1. 복권된 민족일보 관련자들


  5·16 쿠데타가 나고 조용수가 구속되면서 신문은 19일자를 끝으로 나오지 못했다. 공보처 장관은 5월 27일 민족일보의 정식 폐간을 통보했다. 신문사 간부는 모두 구속됐고, 기자를 비롯한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민족일보 간부의 구속이후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 도피해야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전무배 전 민족일보 기자 증언>

  조용수의 사형 집행과 함께 민족일보는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조용수 가족은 당시 모두 감옥에 있는 주식회사 민족일보사 이사들의 도장을 일일이 받아 62년 2월 12일 주식회사 해산신청서를 냈다. 이것으로 민족일보는 법적으로도 완전히 사라졌다.

  신문사의 모든 자산은 압수됐다. 사실 민족일보의 자산이라야 지프 두 대, 책걸상 몇 개와 전화기, 그리고 얼마의 현금과 통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가족의 전 재산까지 몰수했다. 물론 이것은 판결에도 없는 불법이었다.

  당시 조용수의 가족은 각계에 진정을 벌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자체 감사를 벌여 이런 내용의 회신을 했다.

  “동 사건에 압수되었던 증거품은 몰수판결이 없다는 이유로 대검찰청에서는 62년 8월10일자 치안국에 압수품 인도지시한 바 있고 당부에서는 그 증거품의 출처를 구명한 결과, 일본 동경도 이하 불상지에 도피중인 이영근이가 전시 민족일보사에 제공한 범증을 포착, 이를 확인 입건 수사하였으나 피의자 이영근은 해외 도피중인자로 검거치 못하고 별첨목록의 물품을 입수하여 62년 10월 24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 압수품 첨부사건을 송치하였던바 동 군법회의는 62년 12월11일자 피의자 이영근 체포까지 기소중지 처분하고 압수금품중 제 2호 내지 제 28호는 피의자가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국가보안법 제 12조 제 2항에 의거 국고귀속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여기서 압수금품목록 제2호에서 제28호는 사무실 집기와 현금, 예금통장 등이다)

  이에 가족은 재산반환을 위해 눈물나는 싸움을 했다. 당시 가족이 낸 청원 일부를 보면 중앙정보부의 불법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 귀하

  본인은 5·16 군사혁명 후 소위 민족일보사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을 당한 조용수의 부친이오며 현재 민족일보사의 청산에 대한 법정 대리인입니다.그 당시에 자식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잃어버리고 겹쳐서 전 재산을 치안국에 압수당하였던바 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범죄자는 처형하였더라도 그 재산만은 환부하라는 발표도 있었고, 또 1962년 2월 중순경에 검찰청장으로부터 재산은 몰수치 않으며 법정대리인을 선정하여 동 재산 압수 환부신청을 제출하라는 통고에 의하여 변호사 조병진씨를 법정 대리인으로 선정하여 신청서를 제출하였던 바, 동년 8월 10일부로 대검찰청에서 별지첨부서류 사진과 같이 치안국장에게 그 재산의 환부하라는 지시명령서를 발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산을 5·16 혁명 직후부터 사실상 중앙정보부 유순하(劉淳夏)대위가 강압 몰수하여 그 재산 중 2대의 승용 짚차를 비롯하여 압수물 일체를 사용해 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치안국은 부득이 검찰청 지시 명령서의 뜻을 중앙정보부에 통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 중앙정보부에서는 치안국에 대하여 그 지시명령서를 자기들에게 넘기면 자기들이 즉시 환부하겠다는 회답이 있기에 치안국에서는 그에 응하여 해당서류 일체를 중앙정보부에게 이첩한 모양입니다.

그 후 동년 8월 24일에 중앙정보부 경리계장인 이 대위라는 분이 법정대리인 이병진씨를 즉각 방문하여 구구한 말을 하면서 동년 9월말까지 시간적 여유를 주면 꼭 환부하겠다고 하여 부득이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동 기간이 경과하도록 그 약속을 이행치 않기에 다시 독촉통고를 한 즉, 그 이 대위가 다시 방문하여 동년 10월말까지 한번 더 연기하여주길 간청하기에 부득이 다시 수락하였더니 뜻밖에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재산을 압수, 처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혁명검찰청에서 이미 원판결에 의하여 당 피난자인 조용수는 이미 범형 당하였고 기타 피난자들도 중형을 받게 되었으나 그 재산은 별지첨부 대검찰청의 환부지시명령서와 같이 그 재산을 압수할 법적 조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에서는 그 재산을 여하한 사유 없이 압수해 소모하였으므로 이에 환부가 불가능한 국면을 호도하려는 불법적 처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이 재산이 과연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압수되었던 것이며 또는 지금까지 국고에 보관되어 있는지 혹은 개인이 사용, 착복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하여 4년간 갖은 고통을 인내하며 중앙정보부에 서면진정도 수차 하였고, 간접교섭도 하였으나 금일까지 여하한 선처가 없기에 부득이 본의가 아닌지 알면서 1965년 3월 10일경 법무부를 상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던 바 재판진행상 중앙정보부의 압수이유서 기록을 등본하여 첨부 제출할 필요가 있으므로 검찰청에 등본신청을 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언사를 좌우하면서 당 기록을 제시하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재판이 진행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법치국가인 이 나라의 사법기관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을 이다지도 사정없이 짓밟으매…(이하 중략)

  서기 1966년   진정인 조판상

  별지 첨부서류

  1. 재산목록서

  2. 검찰청 재산환부 지시명령서

  3. 법정청산 대리인증

  4. 유순하의 발부 영수증


  그러나 이런 가족의 주장은 군사정부 중앙정보부의 개인 비리로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정식으로 압수한 것이 아니라 정보부 직원 개인이 중간에서 착복해 버린 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 없고, 중앙정보부 직원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했다. 아무튼 나중에 재산반환소송을 했는데 정보부의 회유와 협박이 심했다. 어떤 때는 나보고 사업을 하면 후견인으로 봐주겠다고까지 했다. 결국 1심에서 이겼는데 2심 과정에서 일부만 돌려받고 재판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조용수 동생 조용준 증언>

  조용수의 처 강씨는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국제 저널리스트상 수상상금 처리여부로 한번 편지를 보내고 소식이 끊겨졌다. 그 후 강씨는 재가해 일본에 살았다.

  망우리에 있던 조용수의 무덤은 1963년, 박진목에 의해 경기도로 옮겨졌고 조용수와 민족일보는 뭇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조용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 받았던 송지영은 67년 국제사면위(엠네스티)에 의해 동북아권 인사로는 처음으로 사면후원자로 선정됐다. 그리고 네 차례의 감형을 받아 69년 출감했다.

  그 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문예진흥원장과 통일원 고문,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광복회부회장을 거쳐 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고(82년) 이로 인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역시 사형을 선고받은 안신규는 그 후 민족통일촉진 중앙회 최고위원 등 민간 통일운동을 하다가 91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민족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양수정은 출감 후 야인으로 묻혀 흙과 술과 더불어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이민간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수 죽음의 고리역할을 했던 이영근은 그 후,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물론 오랜 낭인생활 끝에 서울에 오기도 했다. 이영근은 특히 김종필과 손을 잡고 북한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주는 등 박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통일일보 서울지사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영근은 1990년 5월 14일 동경 국립 암센터에서 별세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5월 24일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국민훈장 5단계 품격 중 최고 권위로 일반 국민에게 주는 훈장 중 최고의 훈장이다.

이영근의 상훈기록명부에 기재된 공적 요지는 다음과 같다.

“훈기번호 0000447 소속 통일일보, 훈종/훈격 국민훈장 무궁과장, 수여일자 1990년 5월24일 공적요지 민족지 통일일보를 창간, 대 조총련 투쟁과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향상에 기여(사망)

<행정자치부, 상훈기록 명부>


북한 간첩으로 조용수에게 돈을 지원해 민족일보를 만들었다고 사형을 선고한 우리 정부는 바로 그 간첩에게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을 추서한 것이다. 조총련 신문이라던 통일일보(통일조선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이후 제호)는 오히려 조총련 투쟁지로, 또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공헌한 신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똑같은 사건, 아니 실제적 주범격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았고, 종범격인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단지 29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한 나라에서, 그것도 국가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다음은 조용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인간 조용수를 평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김 철(전 사회민주당 위원장)

  “그의 일본에서 활동은 탁월했다”

  박진목(통일운동가)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나라걱정을 했다. 미국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친소주의자도 아니다. 단지 그는 조국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갈망했던 청년이다”

  송남헌(김규식 박사 비서,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 민족통일촉진회 대표최고위원)

  “임화수와 이정재는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 쳐가며 맹수처럼 울부짖어 처절한 느낌마저 주었다. 이들과 반대로 조용수는 아무런 반항도, 한마디의 말도 없이 조용히 교도관을 따라 형장으로 들어갔다.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처럼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평안해 보였다. 그의 걸음, 한 발짝 한 발짝에 무게가 실려 삶에 대한 경외감마저 자아내게 하는 숙연한 순간이었다. 나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신규(전 민족일보 상임감사)

  “훌륭한 구국의 이념을 가지고 명석한 머리를 가진 유능한 청년이다”

  안준표(통사당 사건관련으로 조용수와 같이 수감)

  “조용수는 1심 사형언도를 받고 나오는 데 나는 막 법정에 입정할 때 였다. 자신은 사형을 받았다고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이런 정치재판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방에 송지영씨가 있었는데 무척 초조한 표정이었다. 송지영씨는 밀수범과 잡범과 같이 지내면서 애써 초조함을 피하기 위해 책을 많이 봤다. 조용수와 평소에 알고 지냈는데 그는 그릇이 크고 보스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살아 있었으면 큰 역할을 했을 사람이다.

  오소백(전 민족일보 부국장. 전 중부일보 주필)

  “조용수는 순결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살아서 한국의 사회적 풍토는 잘 몰랐지만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다. 노래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사람으로서 그만큼 좋은 사람도 드물다”

  윤길중(민족일보 취체역, 국회부의장)

  “아까운 사람이다. 사람이 똑똑하고 신언서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또 패기도 있었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젊은이였다. 박정희가 그런 인재를 죽인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이강훈(전 광복회회장)

  “민단 도치키현 지부장이었다. 죽산 조봉암 구명운동으로 재일교포 22만명의 서명을 받는 데 앞장서서 일했고, 서명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조총련 돈을 받았다고 박정희가 죽였지만 원래는 나를 죽이려다가 조용수를 죽인 것이다. 부지런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불쌍한 사람이었다”

  이만섭(대구 대륜고 동기동창, 전 국회의장)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친구였다. 그의 죽음은 박정희 장군이 본인의 사상적 문제를 의식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아까운 인재였다”

  이회창(혁명재판소 심판관, 대법관, 국무총리, 대통령후보)

  “법정에서 그의 태도는 분명하고 차분했다. 용모도 준수하고 사형을 선고받기에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무배(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민족의 평화통일주의자였다. 개인적 성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싸우다 간 것이다”



2. 사라진 재판관계 기록


  조용수가 죽은 후  민족일보에 근무했던 사람과 민족일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일년에 한번 12월 그의 기일 남한산성 조용수 묘소에 모여 조용수를 추모하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들은 1987년쯤 민족일보에 대한 조그만 기록이라도 남기자며 소사(少史)를 만들고, 민족일보에 대한 연구모임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88년 언론에 대한 재갈이 풀어지자 점차 민족일보 복간문제까지 논의하는 수준이 됐다. 복간을 위한 구체적인 자금문제까지 거론됐지만 신문제작과 경영을 모르는 상태에서 의욕만 앞선 채 무산되고 말았다. <전무배 증언>

  이들은 우선 민족일보 영인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령 92호에 불과한 민족일보가 한곳에 온전히 보관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 민족일보 영인간행위원회가 만들어져 여러 해 동안 노력 끝에 민족일보의 ‘잔해’를 추스렸다. 당시 영인간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강만길(고려대 교수) 고 은(시인) 김금수(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 김낙중(민족통일촉진회 정책의장)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 김진균(서울대 교수·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 박태순(작가·민족문학 작가회의 이사) 박현채(조선대 교수) 송건호(한겨레신문사 사장) 양수정(전 민족일보 편집국장) 이상희(서울대 교수) 전무배(전 민족일보 기자) 전원중(전 민족일보 조사부장) 정동익(민주언론운동 협의회 의장) 조용준(전 민족일보 기획실장) 하일민(부산대 교수·4월혁명연구소 소장) 황 건(4월혁명연구소 연구위원)

  그리고 90년 9월13일, 여러 도서관에 나뉘어 보관 중이던 민족일보 지령 92호를 모은 영인본이 만들어졌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 선 후, 조용수의 가족은 민족일보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다시 가리기 위해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진정서를 보냈다

  신한국 창조에 매진하고 있는 대통령 각하.

  본인은 지난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단죄됐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의 친동생 조용준(趙鏞俊)이라고 합니다.

  1961년 2월 창간된 민족일보는 장면 정권에서 인쇄중지라는 결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으로 계셨던 각하께서는 “이승만 정권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언론탄압이다. 민족일보가 장 총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인쇄중지 결정을 내린 것은 이승만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폐간했던 경향신문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민주적 언론관의 의지를 보여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민족일보 관계자는 5·16 쿠데타 후에 만들어진 혁명검찰부에 구속돼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민족일보 관계자중 유일하게 저의 형 조용수만 61년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때 같이 관계됐던 일부 인사는 그 후 고위직을 하는 등 정부로부터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미 30여년이 지난 지금, 저의 형에 대하여 새로운 주장을 한다고 해도 죽은 형이 살아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가문은 30여년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왔고, 또 연로하신 아버님은 가장 기대했던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아직까지 고생하고 계십니다.

  저희 집안은 경남 함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저희 외삼촌이 2, 3, 4대 민의원을 지냈던 하만복(河萬僕)씨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문민시대를 맞아, 동생인 저를 비롯한 집안에서는 형 조용수의 삶을 정리해 우리 가문의 명예를 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중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관계 서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정부기록보존소를 비롯한 각종 기관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재판관련 자료를 수소문해 본 결과, 그 서류는 영구보관 문서로 분류되어 서울지방 검찰청 자료관리실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혁명검찰부 보존기록내역: 순위1, 형호 1,권수 9 별1,보전질호 11 1-2)

  그러나 서울지방 검찰청 자료관리과에서는 이미 30년이 지난 재판관계 서류이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당사자는 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에 없는 상태이고, 그 가족이 그 자료의 열람 및 등사를 요청해도 불가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30여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그 민족일보 사건은  저희 가족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이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저희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진정서를 올립니다. 부디 서울지방 검찰청 자료관리과에서 그 당시의 기록을 열람, 등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진정인: 조용준 올림


  이 진정은 대통령과 서울지검장에 각각 보냈다. 그러나 청와대로부터는 민원을 서울지검에 보냈다는 회신만 왔을 뿐이고, 서울지검에서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나중에 서울지검은 민족일보 재판 관련 자료를 서고에서 확인한 결과, 당시 혁명재판소에서 판결한 모든 기록이 보관돼 있지만 유독 민족일보 사건 기록만 없다고 확인했다.

서울지검은 외부로 대출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출관계 서류가 없어 어디로 대출됐는지, 아니면 폐기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문서 담당자는 원래 규정대로라면 영구보관문서로 보관되어야 했을 문서라고 밝혔다.

민족일보사건 기록만 사라진 것이다. 누가 언제, 또 무엇 때문문에 민족일보 기록만 빼돌린 것인가.

  1995년 민족일보와 조용수 관련 자료를 발굴해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이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간행됐다. 이 책은 조용수에 관한 최초의 종합 연구서로 조용수가 언론사(言論史) 혹은 정치사에 재평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3. 국내 첫 공식 추도식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한 것으로 평가됐던 이회창 후보가 낙선하고 야당인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이것은 우리 헌정사상 투표에 의해 이뤄진 첫 정권교체였다. 그동안 반정부 운동 혹은 소위 혁신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에겐 정말 꿈이 이뤄진 것이다.

  특히 새 정부는 과거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재검토, 명예회복과 보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민족일보와 관련된 인사들은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보다 적극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관계자들은 우선 공식 추도식을 갖는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공식 추도식은 조 사장 사후 62년 일본에서 열렸을 뿐 정작 국내에선 한번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추도식은 한국기자협회, 한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후원하도록 해 적어도 언론분야만큼은 그의 복권을 알렸다.

  그해 ‘한국기자협회보’와 언론노동조합연맹 기관지인 ‘미디어오늘’에 민족일보 사건 조용수 사장 추도식 및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식 알림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1961년 5·16이후 소위 혁명재판소에서 처리된 민족일보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언론 필화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불법. 탈법적 재판을 통해 사실이 조작된 만큼 이 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위원회 준비위를 구성했습니다. 아울러 이 사건으로 희생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추도식이 열립니다. 진상규명위 발족은 추도식 장소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준비위원장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민족화합운동연합 상임공동의장) 준비위원 강신옥(변호사) 김금수(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병걸(한국지도자육성재단 이사장) 김봉우(민족문제연구소장) 김삼웅(대한매일신보 주필) 심재택(전 말지 사장) 전무배(전 민족일보기자) 전창일(민화련 상임공동위원장) 조용준(유족 대표) 최자웅(성공회 신촌성당 주임신부). 후원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기자협회보’ 및 ‘미디어 오늘’ 1998.12.21>


  1998년 12월 20일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중턱에 있는 조용수 묘소에선 공식 추도식이 처음으로 열렸다.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마련한 이 추도식은 그동안 숨다시피 하며 가져왔던 조 사장의 추도식이 비로소 공개되는 자리였다. 또 이 자리는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본격 출범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조 사장에 대한 약력 발표 이후 김자동 위원장은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조 사장의 묘소에 모인 것은 조 사장에 대한 역사적 존재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며 “하지만 민주화명예회복 대상을 1969년 3선 개헌 이후 것만 다루기로 했는데 이것은 연립정부라는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또 “사실 8·15이후 것을 다뤄야 하지만 최소한 4·19이후부터 지금까지 재심이 이뤄지는 특별법이 통과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12월 의문사규명 특별법과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에 관한 특별법을 각각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 제정 당시 국무총리가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5·16쿠데타세력의 핵심일 뿐 아니라 바로 민족일보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조용수 사장을 죽음으로 이끈 핵심 인사였다. 당초 이 법은 5·16쿠데타 이후 사건부터 적용하도록 돼 있었지만 총리직에 있던 김종필은 이 특별법 시한을 자신이 총리에서 물러난 1969년 8월7일 소위 3선 개헌 발의일 이후 사건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법안은 김종필씨의 의도대로 만들어져 1961년 5·16이후 1969년까지 9년간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예회복의 공백기가 됐다. 원희복, 몰(沒)역사적 시대구분, 정동탑, 경향신문 2002년 12월19일자 참조>


  나이가 가장 많아 제일 먼저 추도사를 하게 됐다는 신창균 선생(범민련 상임고문)은 차분한 어조로 추도의 말을 이어 나갔다.

  “조 선생은 통일을 위해 민주, 자주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 불행히도 군사 쿠데타 무리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남북분열과 민족분단의 이승만이 학생 4·19혁명에 축출된 후 4·19세력이 기필코 집권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과거 돈 많은 기득권 세력이 집권했다. 내 걱정은 현 자민련과 국민회의 연정은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연정으로 민주개혁과 자주통일을 완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장면 정권에서 데모규제법은 저지했지만 그 사람들이 집권하자 오히려 더 탄압했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자주민주통일 세력을 간첩이라는 멍에로 몽땅 잡아갔다.

  조용수 동지가 민족일보를 창간할 때 유명 인사는 물론, 훌륭한 기자도 많아 민족일보는 민주 자주 통일세력의 공동의 신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박정희가 조용수를 때려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미국 사람 성미에 맞추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인사를 체포했고, 최백근씨와 조용수 동지는 나라를 위해 통일을 위해 제물로 바쳐졌다.

  조 동지가 무엇을 원했나. 민주, 자주, 통일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 7천만이 원하는 자주, 민주, 통일을 제단에 받쳐진 것이다. 바라 건데 추모하고 공적을 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용수 동지의 영혼이 가장 기뻐하는 것, 이 자리에서 새롭게 민주 통일 자주를 위해 실천을 결심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하면 조용수 동지는 껄껄 웃을 것이다. 그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조 사장과 일본에서 같이 활동하던 윤수길은 37년 만에 조용수를 만났다. 그는 차디찬 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흐느끼며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저 영광스런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였습니다. 조 사장께서는 민족일보를 창간하시어 민족통일의 기치를 놀이 치켜들었습니다. 한국의 반민주, 반민족세력이 궁지에 몰리자 박정희 일파는 5·16쿠데타를 감행하였으며 조 사장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의 가당치도 않는 누명을 씌워 국내의 민주유지와 IPI, 국제 PEN 등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조 사장을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조 사장의 영전에 굳게 맹세 드립니다. 첫째 조 사장에게 씌워진 부당한 누명을 말끔히 씻어 버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둘째 조 사장이 못다 이룬 민족통일의 과업을 위하여 굳건한 바탕을 마련하도록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광범위한 민주시민세력과 연대를 모색하여 나가겠습니다. 조용수 사장의 고위한 영혼이시어 그러면 고이 잠드소서. 1998.12. 20. 친구를 대표하여 윤수길 올림”


  강신옥 변호사도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했다.

  “쿠데타 이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판결문, 특히 조 사장의 판결문을 검토해 봤지만 증거 없이 사법살인 했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큰 분노를 느낀다. 이 사건은 조작됐고 재심절차를 밟아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문제는 당시 수사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조 사장이 애국자이며 나라와 통일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정사에 남기기 위해 노력하자”

  공식 추도식을 마친 참석자는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식을 가졌다. 진상규명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표위원장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민화련 공동의장) 공동위원장 전무배(전 민족일보 기자·새누리 출판사장) 공동위원장 이완덕(민화련 이사) 공동위원장 진병호(민화련 공동의장) 대외협력위원장 도광호(4·19 혁명회 상임의장) 법률위원장 강신옥(변호사) 홍보위원장 원희복(경향신문 기자) 사무·재무위원장 조용준(유족 대표)

  <고문> 김병걸(한국지도자육성재단 이사장) 김삼웅(대한매일신보 주필) 김병태(중앙대 교수) 김상근(민주개혁국민연합 상임대표) 민숙례(이종률 교수 미망인) 박진목(통일운동가) 박용길(통일운동가) 리영희(언론인·한양대 명예교수) 서인석(전 국회의원) 신창균(범민련 명예회장) 오소백(서울언론인클럽 회장·전 민족일보 사회부장) 오정수(전 언론인) 윤길중(전 국회부의장) 윤수길(재일교포 출신 자유업) 이기형(시인·민족운동가) 이만섭(전 국회의장) 이건호(전 고려대 교수·전 민족일보 논설위원) 이종린(범민련 상임부의장) 이해동(한우리교회 목사) 전창일(민화련 상임공동의장) 정규근(전 민족일보 전무) 조규진(전 민족일보기획실 근무) 조동필(전 민족일보 논설위원) 조만재(삼균학회 회장)

  <지도위원> 강만길(고려대 교수) 곽태영(사회운동가) 김금수(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봉우(민족문제연구소장) 김정태(중국문제연구소장) 김재성(대한매일 부장) 김한길(국회의원) 박현서(한양대 교수) 서경원(전 국회의원) 서준식(인권운동가)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석규관(사회운동가) 안용수(고 안신규 장남) 연현배(민화련 사무총장) 이만열(숙명여대 교수) 이창복(민화련 감사) 이흥록(변호사) 장석진(전 민족일보 기자) 장영달(국회의원) 전기호(경희대 교수) 정운현(대한매일 기자) 최자웅(성공회 신부) 추영현(전 언론인·민화련 공동의장)

  진상규명위원회는 1999년 2월5일 재심청구를 위해 강신옥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위임하는 등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재판관계 서류가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당초 판결을 뒤집을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2001년 12월 8일 진상규명위원회는 조용수 40주기를 맞아 관련 학술대회를 마련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원희복 경향신문 기자의 조용수에 대한 약력 발표에 이어 홍석률 박사는 “당시 민족일보가 주도한 통일논의나 2대 악법투쟁은 당시로선 일반민 중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중적 주제로 이를 용공으로 몬 것은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홍 박사는 또 조용수가 용공혐의를 받게 된 빌미가 됐던 ‘혁신세력’이란 용어와 관련, “수구 보수 세력과 대칭된 개념이었을 뿐 다양한 세력이 망라된 집단이었다”며 “쿠데타 세력이 조 사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미국의 눈치를 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상범 동국대 교수는 “민족일보사건은 쿠데타 세력이 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소위 사법살인”이라고 규정하고 “재심청구를 통해 명예를 회복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 교수는 “조 사장 처형은 전형적인 빨갱이몰이의 결과”라며 “당시 민족일보사건 재판에 심판관으로 참석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촉구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철호 교수(여수공대·법학)는 “당시 조용수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판결이 뚜렷한 증거 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재심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사학)도 “현대사 교육이 크게 부족해 현재 젊은 세대들은 민족일보는 물론 조용수 사장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언론이 이런 문제를 여론화하긴커녕 묵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성유보 신문개혁국민행동 본부장은 “현역 언론인들이 참석하지 않아 유감”이라며 “바로 이런 상황이기에 독자와 시청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언론개혁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학술대회는 권재현, ‘부활하는 민족언론인 조용수’ 민족일보 진상위학술회의 재조명작업, 경향신문 2001.12.12자에 자세히 보도됐다>

제7장 총에 꺾인 펜

 

제 7 장

총에 꺾인 펜





1. 5·16 1호 구속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령 1호를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포고령 2호 금융동결, 포고령 3호 공항 항만봉쇄···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졸지에 일어난 쿠데타 소식은 뜨겁던 초여름을 단번에 냉각시켰다. 각 신문 편집국은 쿠데타 주역이 누구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육군본부 출입기자의 전화가 날아 온 것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다.

  “쿠데타의 주동인물은 박정희 소장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7시40분 박정희 소장과 김동하 해병대 예비역 소장, 김윤근 해병대 제1여단장, 채명신 5사단장 등이 육군본부를 접수했답니다”

  즉각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오후에 들어 박정희에 관한 인물정보가 속속 들어왔다.

“경북 성주 출생으로 대구사범을 나와 만주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비교적 키가 작고 매서운 얼굴이다. 비교적 정직한 인물이다···한 때 좌익을 했다”

  조용수는 ‘한 때 좌익을 했다’는 대목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여순반란 사건 때 좌익을 했다. 그때는 좌익을 만들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이 인물은 혁신적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용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그리고 박진목에게 전화를 걸어 충무로 조희다방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이유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박진목은 대구출신으로 한때 남로당 등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충무로로 향했다. 다방에는 박진목이 먼저 나와 기다렸다.

  “선생님, 박정희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민족일보도 잘될 것 아닙니까. 이젠 해결됐습니다. 그간 고생이 헛되지 않은 것 갔습니다”

  조용수는 조금 흥분했다. 조용수는 박진목도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박진목은 신중했다.

  “나도 이야기를 들었네.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는 조금 알지. 그 형 박상희와 나는 잘 아는 사이였지. 내가 남로당에서 활동할 때 박상희는 구미 군책이었어. 내가 주동인물로 몰렸던 대구폭동 와중에서 그의 형은 경찰에 사살됐지”

  “그 박상희의 딸과 결혼한 김종필이라는 사람도 이번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데요. 김종필은 얼마전 군 하극상 사건으로 예편한 인물 아닙니까. 아무튼 이번 쿠데타는 우리 입장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성급히 결정을 내리기는 곤란해. 그동안 박정희가 어떻게 변해있을 줄도 모르고. 신중히 행동해야 할거야”

  조용수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인 송남헌을 통해 박정희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군에 안면이 많은 고정훈도 쿠데타의 주역들에 대하여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다. 조용수의 들뜬 감정은 신문 사설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끝으로 우방제국에게 일언을 부치노니, 이 군사혁명이 발생된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우호를 베풀어 주기를 진심으로 희구해 마지 않는다···우리들은 거듭 내치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민족일보 1961.5.17 사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검거소식이 들려 온 것이다. 사전 검열로 신문 납판이 군데군데 허옇게 깎이긴 했지만 신문은 예정대로 제작됐다.

  5월 18일 이른 아침. 신문사 숙직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님, 헌병 네다섯 명이 회사에 와서 편집국장을 찾고 난리를 치고 돌아갔어요. 무슨 이유냐고 물었지만 꼭 편집국장을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조금 있다가 다시 온다면서 갔습니다. 양 국장님에게도 이 사실을 막 알려드렸습니다”

  조용수는 양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 국장, 아침에 숙직직원의 전화 받았습니까. 지프차를 보낼테니 종로 희다방에서 만나 같이 출근합시다”

  조용수는 안신규 감사에게도 같은 전화를 하고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다. 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군인들이 회사에 왔느냐는 문제를 놓고 한참을 상의했다. 양 국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편집국장을 찾는다면 기사 내용 때문 아니겠어요. 어제 민국일보 조동건 국장이 기사가 문제돼 불려갔다 왔다는데···우리야 문제된 기사도 없습니다”

  “민국일보에서 군인들이 육사를 접수했다는 기사를 썼기 때문이지요”

  조용수도 민국일보 기사가 큰 문제가 될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안신규 감사는 조금 우려에 섞인 말을 했다.

  “편집국장은 조사를 받고 풀려났지만 이혜복 사회부장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데요”

  “그러나 무슨 일이 있겠어요. 군인들이 육사교장의 허락도 없이 육사생도를 지지데모에 끌어들이려 한 것이나 접수했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조그만 어투의 차이뿐인데”

  양수정 국장은 크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 했다. 조용수는 자리에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것은 민국일보 문제이고 우리야 문제될 소지가 전혀 없지 않아요. 일단 출근하고 봅시다”

  세 사람은 나란히 출근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군인 소령이 온 것은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그것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신문제작에 들어갔다.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 박진목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잠깐 만나자는 거였다. 조용수는 박진목을 알파성다방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조용수가 느긋한 표정이고 오히려 박진목이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조 사장, 곧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거라구먼. 나는 전력이 있어서 일단 피하기로 했네. 가족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는데 나도 곧 따라갈 걸세”

  박진목의 갑작스런 피신 소식에 조용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선생님이 왜 피합니까. 오히려 좋은 시기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군인이 왔는데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아닐세. 나는 지금 이 군사정부가 심상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야. 나는 문제가 생기면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용의주도 한거야. 내 생각에는 조 사장도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가요?”

  “그래. 지금까지 쿠데타 주동자들이 거사 성공에 신경을 썼지만, 분명 조만간 군인들이 정치 사회적인 면에 손을 댈거야. 잠시 피해서 그 상황을 보자는 거야”

  “아니 신문사를 그냥 놔두고 제가 어디로 피합니까. 또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요”

  “조 사장, 어느 나라도 쿠데타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죄를 따져가면서 잡아들이나.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도 일부러 죄를 만들어 내는 게 쿠데타의 생리 아닌가”

  조용수는 박진목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잠시 회사를 비웠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가시면 어디로 가게요. 제 생각에는 마산쯤이 좋을 것 같아요. 만약 선생님의 경우 문제가 된다면 마산에서 일본가는 배를 구할 수 있어요”

  “나는 지금 곧장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아니 지금 당장이요?”

  “그래 이런 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아”

  “아 그래도 명색이 신문사 사장인데 회사도 모르게 혼자 도망칠 수 있어요? 잠시 어디를 다녀온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 1시간 후 충무로 수다방에서 보세. 빨리 하던 회사일 정리하고 그곳에서 만나세”

  박진목과 헤어진 조용수는 회사로 올라오면서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피신을 해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편집국에는 권총을 찬 수사관들이 몰려들었다. 마침 자리에는 이상두 논설위원이 글을 쓰던 중이었다. 한 수사관이 구석진 한쪽 책상에 있는 이 논설위원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요”

  “나는 논설위원입니다”

  “논설위원? 이름이 뭐요”

  “이상두요”

  수사관은 체포자 명단을 들여다보며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마 원래 체포지시 명단에는 없던 모양이다. 그러나 ‘꿩대신 닭’격이었다.

  “아무튼 채우시오”

  이상두 논설위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바로 그 순간, 조용수 사장이 막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용수는 사무실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고 속으로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사무실로 들어 왔다. 한 수사관이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32세밖에 안된 그가 사장인줄은 수사관도 몰랐다.

  “사장이오”

  조용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사관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조용수의 손에도 수갑이 채워졌고, 얼마 후 들어 온 안신규 감사, 정규근 상무, 김영달 업무국장에게도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 하나로 두 사람씩 채웠다. 양수정 편집국장도 수갑을 찼다. 다른 직원들이나 기자들은 이 모습을 보며, 감히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상두, ‘옥중기-역사의 단애에 서서’ 월간 다리, 72년 7월호>


  바로 그 시간. 약속장소에서 한 시간 넘게 조용수를 기다리던 박진목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이명하의 딸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왔다.

  “선생님, 듣기만하세요. 지금 군인들이 몰려와 모두 끌어가고 있어요”

  박진목은 더 전화를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길로 박진목은 피신했다.

  민족일보 간부 9명은 지프에 태워졌다. 지프는 클랙션을 울리며 시내를 질주했다. 후덥지근한 지프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프는 그대로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유치장에는 윤길중 이명하 조규희 김기철 등 낮 익은 혁신계인사가 줄줄이 끌려들어 왔다. 그리고 대학교수, 변호사, 전직 국회의원까지 끌려 들어와 유치장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곳으로 끌려와야 하는지 몰랐다. 유치장안에 변호사까지 잡혀왔으니 자연히 즉석 법률자문이 이어졌다.

  “대관절 우리를 무슨 법으로 처벌할 것 같소?”

  영문도 모르고 끌려 온 사람의 계속된 질문에 변호사는 태연히 누워 말했다.

  “아무 법에도 저촉될게 없으니까 예비 검속으로 당분간 가두었다가 내보낼 것 아니겠소”

  당시 민자통 충남협의회 의장 김영수 증언.

  “내가 5·18 일체 검거 후 대전형무소에 들어 온 이튿날, 누가 출감을 정확하게 맞추는가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멀리 잡은 사람이 3주였고, 대개는 1주일쯤으로 생각했다”

  <김영수, ‘옥중기-붉은 담 안의 4년 7개월’ 자유시대사, 1993>


  대부분은 그런 생각으로 유치장에서 며칠을 보냈다. 조용수를 비롯한 혁신계 사람은 박정희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 큰 우려를 하지 않았다. 굳이 조용수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구분한다면 혁신계중에서도 약간 우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원룡 목사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나타난다.

  “···그해 여름 박정희에 대한 내 긍정적인 관심을 뒤집어 놓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것은 그의 전력과 공산주의와의 깊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상쩍은 눈초리로 봐서 그런지 의심 가는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내 주위만 둘러봐도 그랬다. 나와 친한 중간진영의 사람들 가운데서 이상하게 우파사람들이 주로 잡혀가는 것이었다. 중간우파이던 윤길중, 이명하, 조규희, 김기철 등은 이북은 적이라는 분명한 노선 하에 우익 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통일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잡혀갔는데 민자통을 결성해 따로 나간 좌파 사람들은 훨씬 친북적인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사한 것이었다” <강원룡, ‘정일권 이후락은 미국의 박정희 좌경화 방지용이었다’ 신동아 1993년 11월호>


  그러나 밖의 사정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5월 22일, 치안국은 ‘민족일보와 동사 사장 조용수 일당들의 죄상 및 그 배후관계’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조용수외 일당은 지난 91년(1958년)1월에 간첩 사건으로 병 보석 중 일본으로 도피한 바 있던 전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47,본적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동리)의 지령 하에 평화통일 방안을 주창하면서 혁신 지도자와 혁신계 정당 및 기관지 발간에 열중해 왔다. 전기 이영근은 일본 조총련계로부터 소위 정치자금 약 2억환을 국내에 도입하여 혁신계 지도자인 장건상 등에게 자금을 공급하여 괴뢰 집단에서 주창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밟도록 국내 혁신세력을 규합해 왔다. 특히 혁신정당 기관지인 민족일보사를 94년 2월 13일 발간하고 약 1억환의 불법 도입자금으로 전기 조용수와 안신규 등이 주동이 되어 국내 혁신계정당의 기관지 발간을 계획하고 민족일보사의 논설위원 000외 수명과 야합하여 괴뢰집단이 지향하는 목적수행에 적극 활약해왔다. 이들 일당 중 장건상과 조용수, 안신규 및 해성물산 사장 윤규성, 남방물산 전무 마영호 등은 이미 체포하고 나머지 미 체포된 자는 계속 체포에 노력할 것이다”


  치안국의 발표는 많은 사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계엄당국의 검열로 그 내용은 확인하기 불가능했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민족일보 관련자는 이런 사실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다. 한달 정도 경찰서 유치장 생활이 계속됐다.

  6월 23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굴러다니는 신문을 한 장 집어든 혁신계 인사 한 사람이 소리를 쳤다.

  “이것 봐. 군인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소급 입법을 했어. 뭐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고. 이 군인들이 정말 피를 보려고 하는 구나”

  “3년까지 소급 적용한다고?”

  혁신계 인사가 가장 우려한 조항은 이 법의 6조였다. 이 법의 6조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처벌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로서 국가보안법 제 1조에 규정된 반국가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선동 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 한다”

  이 신문 조각 하나는 온 유치장의 혁신계 인사의 여유 있던 표정을 일시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의식 있고 혁신적 성향인 군인들이 설마 우리를…”

  “아니야, 쿠데타는 할 때보다 성공하고 나서 피를 더 많이 보는 게 생리야”

  “한 2~3년 썩을 각오하지 뭐. 우리가 언제 한두 번 당합니까”

서로 위안을 건냈지만 내심 모두 긴장했다. 민족일보 관련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독 조용수는 여유 있어 보였다. 양수정 국장이 무슨 배경이라도 있나 싶어 물었다.

  “조 사장, 다들 걱정이 태산 같은데 조 사장만 왜 그리 여유요?”

  조용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군인들이 만든 특별법에는 분명히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고 되어 있잖아요. 공보부에 언론기관으로 등록된 신문사는 정당도, 사회단체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해당사항 없는 법이예요”

  설명을 들은 민족일보 관계자는 일단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말의 불안감은 숨기지 못했다.

  유치장 같은 방에 있던 민족통일당 최달희가 탈장인가 하는 병으로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자주 일으켰다. 그때면 항상 조용수는 최달희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사를 맞고 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최달희를 업고 근처에 있는 병원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호송경관도 없었다. 그래도 조용수는 꼬박 경찰서 유치장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은 곧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후 민족일보 관계자들은 중부경찰서로 이송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민족일보, 교수협의회 관련자는 중부경찰서, 통사당 관련자는 종로경찰서, 교원노조 관련자는 용산경찰서 식으로 유사한 사건 관련자를 한데 모아놓았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조용수는 거의 매일 불려나가 취조를 받으면서 고문도 당했다. 그렇게 한 두달이 지나 7월이 됐다. 조용수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양 국장, 고생이 심하죠. 아무래도 경찰의 분위기로 보아 금방 나가긴 틀린 것 같습니다. 이건 도대체 말이 통해야지. 빨리 검찰에 송치하면 말하기도 나으련만”

  양 국장도 여러 요로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낌새를 잡으려 했지만 도무지 군인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유치장 밖에 있는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요직을 지낸 조용수 주변 사람들도 쿠데타 핵심부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용수의 삼촌 조경규는 마침 박정희가 좌익 경력으로 장군 진급을 하지 못할 때 당시 자유당 의원으로 박정희의 장군 진급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인연이 있었다. 따라서 조경규는 박정희가 자신의 조카 조용수를 겁만 주고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지 차마 처형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조용수가 사형에 처해지자 조경규는 이를 한탄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오길석 증언>

  또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 교수로 있던 조용수의 사촌형 조용삼이 조용수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귀국해 당시 쿠데타 주체세력과 가까운 김덕송 마사회회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친구로 지내던 사이였다.

  “이보게 덕송이, 내 조카 용수를 정말 죽일 작정인가. 사형이라니. 내 조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김덕송도 조용수를 친구의 똑똑한 조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염려 말아. 죽이기야 하겠나. 혁명이라는 게 그런 엄포가 있게 마련 아닌가. 감형으로 나올 거야. 최선을 다해 보겠네”

  <조용삼씨는 그 후 박정희 정권에서 상공장관까지 제의를 받았으나, 귀국을 앞두고 갑작스런 사고로 사망했다. 조용준씨 증언>


  7월 14일. 가슴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여름, 조용수와 민족일보 관계자는 1차로 혁명검찰부에 송치됐다. (혁명검찰부 형사사건부에는 7월 13일 형 제1호로 조용수가 혁명검찰부의 첫 번째, 안신규가 두 번째로 올라있다. 형사사건부, 혁명검찰부, 1961)

  “혁검 대기실에는 많은 사람이 와 있고, 우리 뒤에도 계속 들어와 백명 가까이 되었다. 줄을 풀고 수갑만 채운 채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아는 동지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민족일보의 조용수씨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지에게 손바닥으로 헛글씨를 써서 보이며 소식을 알리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도 자주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태도로 보아 걱정 말라는 내용의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김영수 옥중기)


  조용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리고 지루한 한여름의 서울형무소 생활을 시작했다.

  민족일보 관련자의 구속에 대해 국제 신문편집인협회(IPI), 국제펜클럽, 일본 등 해외에서 활발한 항의와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조용수에 대한 구명을 호소하는 곳은 없었다.

  조용수의 부친인 조상규는 관계기관에 아들 조용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보냈다. 일부 대목은 조용수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정서

  본  적  경상북도 대구시 동인동 409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120번지의 40

  피의자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단기 4263년 4월 20일생

  상기자는 좌익분자의 혐의를 받아 목하 신체구속을 받고 있는 바, 동 피의자 사실의 내용에 대하여 전연 아는 바 없으며 또 피의자의 아버지인 본인으로서 감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있어서 상기자의 행장으로 보아 상기자가 좌익분자라고 생각되지 아니하고, 만일 좌익분자들과 어떠한 관련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동 분자들의 유혹에 빠져 일시적으로 범한 죄과라고 생각됩니다.

  현명하신 사직당국에 참고하시라고 감히 몇 자로 본인 아들의 행장을 기록하여 올립니다.

  상기자는 4279년경 진주중학교 3학년 재학당시에는 학연간부로 활동을 하다가 동교 좌익학생들로부터 흉악한 협박을 받아 신변에 위험을 느껴 부득이 자퇴를 하고 대구 대륜중학에 입학을 하여 동교를 졸업한 후, 일시 연희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가 도일한 후 재일본 민주신문사, 국제타임스사 논설위원, 재일본 동경도 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총무부원으로서 소위 조련계열 등과 다년간 열렬한 투쟁을 하여왔으며 재일 교포권익옹호 위원장으로서 유태하의 추방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했습니다. 이 정권 당시 교포투쟁반대 투쟁 선두에 서서 일본 신주쿠(新瀉)에서 북송저지운동에 직접 행동으로 투쟁을 한 것이 현재 중앙공보부에 보관중인 뉴스사진에 의하여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행장을 가진 사람이 좌익분자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본인으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우니 상세히 심사하여 관대히 처분하여 주시길 앙망하면서 이에 진정합니다.

  단기 4294년 7월 진정인 피의자의 부  조상규(趙祥奎)


그러나 결과적으로 집안차원에서 이런 구명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2. 한여름의 혁명재판


  이른바 쿠데타 정권의 혁명재판은 7월 28일 혁명재판소 5개 법정에서 일제히 열렸다. 재판부와 검찰관은 법복을 입었지만 재판 절차는 군법회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7월 28일 9시, 혁재 2호 법정. 법정입구에는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해병 2명이 분위기를 압도했고, 법정 안에는 정복 경찰관이 자리를 지켰다. 좁은 법정은 가족과 내외신기자로 들끓었다. 기자에게 발부된 증만 1백32매, 일본 기자도 10여명에 달했다. 변호인도 법복에 노란색 출입증을 달고 입장했다.

  재판장은 김홍규 육군대령, 검찰관은 오재옥 중령이 맡았다.

  여기서 바로 이회창 심판관(후에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대통령후보)이 등장한다. 이 심판관은 민간인 판사 신분으로 차출된 2명중 한 명으로 1심 판결에 참여했다.

  “당시 나는 인천지방법원에 갓 임관한 상태였다. 그런데 혁재에서 판사 차출 지시가 내려왔다. 모두 가지 않으려 하니까 나이가 어린 순서대로 보내다 보니 내가 차출된 것이다” <1997년 이회창 회고>


  변호인단은 재판에 앞서 ‘변론준비를 위한 공판연기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사실심리에 들어 가기 앞서 이것을 받아들였다. 다음 공판을 8월 1일로 정한 후 10시 50분 폐정함으로써 1차 공판은 끝났다.

  8월 1일, 2회 공판. 오재옥 검찰관은 장문의 공소장을 읽어 나갔다.

  “피고인 조용수는 일본국 동경에서 조봉암의 구명 탄원서 서명위원회 대표자로 활약하고 있을 당시인 서기 1958년 8월 중순경… 일본에 밀항 도피한 공소 외 이영근과 수시 접촉하여 당시 국내정계의 혼란 무질서에 틈타… 혁신계 정당의 단합과 아울러 단합된 혁신계 대변지로서 일간신문사 민족일보를 창설키로 합의를 보고… 정치적 평화통일에 앞선 남북협상, 경제 서신 문화교류…”

  검찰관의 공소장 낭독이 끝나자 변호인단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재판관할에 관한 이의를 신청했다.

  “민족일보는 공보처에 등록된 것으로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므로 정당이 아님은 명백한 것이고, ‘사회단체’라 함은 광의로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 모든 인적 조직체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사회단체로 등록된 단체만을 의미하며… 때문에 특별법 제 6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검찰관측은 민족일보도 사회단체의 개념 속에 포함되며 변호인의 주장은 유죄무죄의 판정에 관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제출한 재판관할에 관한 이의신청을 검토하기 위해 10분간 휴정한 후 10시 40분 재판을 속개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결정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관할위반의 이의는 공소의 부적법을 다루는 것이나 이것은 심리결과 재판부가 판결로써 판단할 사항이다. 따라서 변호인측이 제출한 이의 신청을 각하한다”

  이미 재판이 시작되기 전인 7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별법 운용에 대한 최고회의 지침’을 재판부에 내려 보냈다. 이 지침은 특별법이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인 중대범죄를 엄중 처벌하는 데 취지가 있다면서, 특별법 6조에 규정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라는 점은 형식상의 지위에만 구애될 것이 아니라 그 사상, 직무, 행적에 비추어 실질적인 간부와 이와 공범관계에 있는 자로 반공 국시에 입각하여 용납할 수 없는 용공분자만 처벌하고 기타 용공분자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으로 입건,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한국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2권>


  두 번째 재판은 검찰의 공소장 낭독과 재판관할에 대한 공방으로 끝났다. 하지만 민족일보를 사회단체로 보아 특별법 6조의 적용을 받느냐 마느냐는 재판권 관할권 문제는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이 대목은 상고심에서 기각됐다.

교도소로 돌아오면서 조용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군인들이 민족일보를 문제 삼아 자신을 비롯한 간부를 처벌할 것인가. 법도 소급해서 만든 것이고, 게다가 주식회사인 신문사를 정당이나 사회단체로 보는 어이없는 재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처벌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동생 조용준이 면회를 왔다. 일본에 있는 아내가 무슨 문제인가 궁금해 한국에 나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 온 것이다. 조용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조금 있으면 나갈텐데 뭐하러 여기까지 오는가. 그냥 일본에 있으라고 해”

  그만큼 조용수는 자신의 구속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신문사를 만든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에 모아졌다. 또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조총련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조용수의 대답은 뻔했다.

  “이영근은 재일교포의 돈을 모금하는 데 중간역할을 했다. 일본에 있는 재일거류민단 고문인 배기호(裵基鎬) 이희원(李禧元) 박용구(朴容九) 정동필(鄭東弼) 등 다른 많은 인사가 도왔다. 한국에서는 친척, 동문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또 이영근은 민단계통의 통일조선신문을 운영했고, 한국에서 진보당 조봉암씨 비서를 지낸 혁신계 정치인 정도로만 알았다”

  재판에서 조용수가 민족일보 자금에 관해 해명한 내용은 정확히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이 조총련을 통해 자금을 댔다는 검찰의 공소장 내용만 일반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조용수가 민족일보의 설립자금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진술한 한 문서가 있다.

  설립자금의 관계

  조용수가 귀국직전에 일본 동경거주의 환일(丸一) 무역사 조 사장을 통하여 교환한 것임. 현재 조 사장은 시내 충정로 2가에 자택이 있고, 사업관계로 일본 본사와 왕래가 빈번함. 현 조선일보사 송지영씨의 소개로 희망사 사장 김종완(金宗完)씨에게 안신규가 약 2천만환으로 조판, 인쇄, 차가의 대금으로 계약이 성립되어 2월 11일자로 창간을 보게 됨.

기(記)

  가. 조 사장(丸一무역회사)으로부터 인수된 총 금액은 약 3천4백만환으로 추산되며, 이것의 전부가 신문사의 운영자금으로 충당되었음.

  나. 창간 이후로는 재정문제는 일절 안신규 감사가 관여함에 있어 일본과의 연락은 그때부터 조용수는 관여하지 않았음.

  다. 자금의 성질에 있어서는 부득이 본인(조용수)에게 물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에서 자금제공자의 수사를 의뢰, 판명되어야 하겠음.

  라. 이외 조용수의 개인적인 금액이 신문사에 다량 투입되어 있음.

  <이 서류는 조용수의 유품 중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마 변론관계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작성된 문건으로 보인다)


  그 후(98년 12월) 안신규는 민족일보의 자금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민족일보의 자금은 혁신계 인사들의 자금으로도 충당했다. 그 성금은 지국설치 보증금 형식을 통해 받았다. 당시 신문사 지국보증금은 많아야 1-2백만환 정도였다. 우리 신문은 부산지국에서만 근 1천만 환을 받았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중에 운영자금이 모자라 편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던 적은 있었다. 일명 ‘환 잡는다’는 방식인데, 일본과 국내 화폐의 환차익을 이용해 돈을 늘리는 방법이다. 당시 이런 방법은 한일간 국교가 없기 때문에 불법이었지만 웬만한 사업가는 이런 방법을 많이 썼다. 우리도 이런 방법으로 1천만 환을 만들려고 했는데 시도과정에서 5·16을 만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일관된 조용수의 진술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의 법정 분위기는 같이 재판을 받은 이상두의 회고록에서 나타난다.

  “경찰이나 검찰에서도 그러했으나 법정에서조차 분명한 사리와 합리적인 이야기가 거의 통하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발간된 신문에 글 쓴 일을 꼭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충분히 알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아랑곳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증거를 대라는 것이었다. 거증 책임은 피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고 측에 있는데도 증거를 내보이라니, 땅 팔 노릇 아닌가. 나아가 설사 그 정을 모르고 했다손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 논리의 비약과 견강부회가 너무 지나쳤다. (이상두, ‘옥창너머 푸른 하늘이’ 범우사, 1972)


  모든 수사와 재판이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법정에서나마 기대를 걸었던 조용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다음날 재판정에 나가는데 양 국장이 보였다. 조용수는 간수의 눈을 피해 양 국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 징역 살릴 작정인가요? 아니면 한 번 혼을 내려고 그러는가요? 어느 편인지 분간을 못하겠군요”

이런 질문에 양 국장의 입장도 난감했다. 그는 고개를 머뭇거리며 “글쎄요”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양 국장이야 곧 나갈 테지만 그까짓 징역을 주더라도 최하가 10년이라 했으니까 10년 이상 더 주겠소, 뭐”

  조용수는 차에 오르면서 애써 자위를 했다. 사실 조용수로서 징역 10년은 최대한으로 잡은 거였다.

  제3회 공판(8월 2일 9시)부터 사실심리가 진행됐다. 그러나 이 재판은 피고 전원이 함께 피고석에 앉아 진행하던 관례를 깨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한 사람씩 심문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다른 동료가 어떻게 진술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피고인끼리 서로 말을 맞출 기회도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 재판에 관한 기록은 모두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정확한 법정 진술을 밝히기는 어렵다. 다음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법정 진술을 요약한 것이다. 단 보도된 이 진술은 검열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진술내용을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종률 피고의 증언.

  “편집국장 하루 만에 그만 둔 것은 민족일보가 정치과다증에 걸려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일보 운영자금이 조용수의 장인에게서 나왔다고 들은 바 있다”

  이상두, 이건호, 조규철 3인 피고의 증인 심문.

  “우리들이 쓴 논설이나 사설을 사장인 조용수가 멋대로 삭제, 가필하여 때로는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했다”

  모든 실제적 책임은 조용수 앞으로 돌려졌다. 조용수는 동료들이 그렇게 진술하는 것도 몰랐다. 재판도중 면회도 일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언은 계속됐다. 상임 감사역 안신규의 증언.

  “지난(61년) 1월부터 3월까지 일본에 가 이영근과 만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업관계 때문에 만난 것이다”

  장윤근(일본에 있는 이영근의 처)의 증언.

  “남편으로부터 도합 2천6백80만환을 송금 받아 조용수와 안신규에게 각각 1백만환을 꾸어준 일이 있으나 조용수로부터 1할 이자를 끼워 원금까지 받았으며 안신규에게는 사무실을 낸다기에 빌려주었을 뿐이다”

  정규근의 증언.

  “민족일보에 1천9백만환을 투자한 것은 사장 조용수와 어릴 적부터 학교 친구였기 때문이며 다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중역으로 취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5회 공판(8월 4일 9시)에서 검찰관측 증인으로 윤길중, 조재천, 고정훈, 박진(민자통 사무총장) 이재춘(동 선전 위원장), 문용채(삼민당 당수) 윤식(서울대 민통련 중앙위의장)등 7명이 선정됐다.

  그러나 증인으로 채택되어 법정에서 보였어야 할 최근우 선생이 안보인 것이다. 조용수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의 하나인 최근우 선생이 바로 전날인 3일 오후 7시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근우에 대한 증인은 자연히 취소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재판정에서 윤길중 증언.

  “7·29 선거 전후, 1천7백만환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돈이 이영근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전혀 몰랐고, 민족일보 취체역으로 있었지만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윤식 증언.

  “조용수로부터 돈 10만환을 받았으나 그것은 소위 악법반대 자금이 아니라 ‘서울대 민족통일 연맹’ 연구자금이었다”

  고정훈 증언.

  “민족일보 자금은 조소수(趙小壽)씨가 ‘재일 경제협의회’로부터 받아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정에서 사람들이 진술을 하는 동안, 조용수는 대기실 벽에 기대어 온통 최근우 선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대한 관심은 없었다.

  “…일제하에서 3·1 운동의 불을 당긴 2·8 독립선언 10인 서명자의 한사람이었던 최근우 선생. 김구 선생보다 앞서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원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9년간이나 정치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해방된 조국에서 큰일을 꿈꾸던 그분이 죽다니. 그것도 해방된 조국에서, 죄인으로 몰려 돌아가시다니. 아 아.나를 친자식 이상 아껴주면서 나에게 중매까지 서려고 했던 그분이…”

  재판을 끝내고 형무소로 돌아 온 조용수는 밤새 울었다.

  6차 공판 (61.8.10)에서는 증인으로 이재항(李載沆 전 주일대표부 총영사, 청와대 비서실장)이 나왔다. 그는 일본에서 조용수와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 것으로 보도됐다.

  “조 피고를 공무관계로 알았으나 직접 만나 북송반대 관계협의를 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지방에서 올라온 민단 간부들과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시인한다. 조용수에 대한 사상관계를 대표부 사무실에서 논의한 사실이 있으며, 조봉암 구명운동에 서명 날인한 사람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가 북송반대운동의 선봉에 나섰더라도 ‘케스천 마크’를 붙이고 있었다”

  이재항 증인과 조용수와 대질심문이 있었다. 조용수는 분명한 어조로 이재항의 애매한 증언을 따졌다.

  “내가 북송반대 민중대회를 위해 대표부를 방문했을 때 구체적(물질적)으로 협조한 사실이 있는데 그걸 모르십니까”

분명 북송반대운동 과정에서 잘 알던 사이였지만, 이재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뺏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재항이 분명히 자신의 일본에서 행적을 밝혀주면 재판은 상당히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자주 만나 이야기했던 사람이 지금은 어렴풋이 알고만 있을 뿐이라는 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튼 이재항은 일본에서 북송반대 운동을 한 사실이 있다는 점만 확인했다.

  8월 10일, 논설위원 이건호 변호인은 유진오(兪鎭午) 고대총장 외 25명의 교수 진정서와 송지영 피고에 대한 조선일보의 만물상, 팔면봉 등 송지영의 글을 모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 재판부는 이건호 피고가 특별증인으로 신청한 이항녕(李恒寧)고대법대학장을 허가했다.

  7차 공판 (61.8.11)도 매한가지였다.  송지영 피고인 변호사 김병완(金炳琓)변호사는 송피고가 이영근을 안 것은 과거 그가 태양신문사 업무부장으로 있을 때부터였으며, 그로부터 정치자금이나 혁신계 통합의 지령을 받은 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변호했다.

  변호인단의 변론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족일보라는 법률상 주식회사는 상사법인으로 개인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이지 어떻게 사회단체인가. 사회단체는 분명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에 규정돼있다.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일본으로 도피한 이영근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돈을 받은 증거도 없고, 또 이영근이 간첩이라는 증거도 없다. 민족일보의 자금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일본교포로부터 나온 것이다.

  민족일보가 무정견한 중립화 안이나 평화통일, 남북협상 남북교류 및 학생회담을 선전함으로 반국가 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고무 선동했다고 하지만, 민족일보에는 분명 북한을 비난하는 기사나 논설도 많고, 다른 신문들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나 논설도 많다. 정부를 비판한 것이 북한을 이롭게 했다면 신문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변호인단은 문제의 이영근이 61년 4월 28일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아사히저널’이 주최한 남북통일의 모색이라는 좌담회에 참석, 대한민국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 조용수가 ‘신태양’ 58년 5월호에 게재한 ‘일본외교의 특질과 한일회담’이라는 논문, 또 조용수가 재일거류민단에서 교포북송을 반대하기 위해 니이가다까지 가서 머리띠를 두르고 결사적으로 북한의 태도를 비난하는 데모를 하는 화보사진 등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송지영, 이건호 등은 언론계나 학계에서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를 죽음으로 모는 시나리오는 착착 진행됐다. 혁명검찰부는 일본에 있는 이영근의 자금을 조용수에게 전달했다고 증언한 조소수를 불구속으로 석방했다. 그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 검찰측 주장대로라면 그는 상당히 중요한 증인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시 재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용수측에서는 수사당국이 일부러 조씨를 일본으로 도피시킨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드디어 8월 12일, 제 8차 공판에서 구형이 있었다. 당시 언론은 법정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날 처음 나온 장순영(張厚永) 변호사만 사복 차림이고 그 밖의 사람은 모두 법복을 입었다. 심판관과 검찰관도 모두 땀에 젖은 소매 자락을 자주 만졌고 손등과 목덜미에서 땀이 쉴새 없이 흘러 내렸다. 복중에 법복은 아무래도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변호인은 법복의 단추를 열어 셔츠가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2층 대기실에는 조재천 전 법무장관이 앉았고 그 옆에는 기자시절 견원지간으로 통했던 고정훈이 앉았다.  2호 법정은 한동안 증거채택을 두고 변호인단과 검찰측의 입씨름이 계속됐다.

  드디어 오후 1시30분, 땀에 젖은 목소리로 이재오 검찰관이 구형을 읽어 내려갔다.

  “민족일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용공사상을 부식시켜 국내를 교란했다. 신문사가 창간동기와 인적구성으로 보아 반국가적 혁신정당의 대변지임에 틀림이 없다. 민족일보 간부들이 괴뢰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 선동하여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

  조용수 사형, 안신규(상임감사) 사형, 송지영(전 한국통신사장) 사형, 양실근(유양호 선원) 사형, 이상두(논설위원) 징역 15년, 이종률(전 편집국장) 징역 5년, 정규근(상무) 징역 5년, 양수정(편집국장) 징역 5년, 김영달(업무국장)징역 5년, 전승택(총무부국장)징역 5년, 이건호(논설위원)징역 5년, 조규진(기획부 사원)징역 5년, 장윤근(이영근의 처)징역 5년. 민족일보 관계 전 재산은 몰수···”


  구형이 있은 후 60여명의 가족은 일제히 ‘엄마…’ ‘아버지’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며 취재기자 몇 사람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조용수는 냉냉한 표정을 지었다. 송지영은 쓴웃음을 지었고 이건호는 얼굴과 눈시울을 붉히며 “차라리 사기 절도죄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빨갱이란 웬말인가”며 안절부절했다.

조용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최후진술을 했다.

“저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극형을 받게되어···”

조용수는 자신이 사형을 구형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사형까지 받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8월 28일, 선고공판이 있은 날이다.

  오전 10시, 혁재 2심판부 김홍규 대령은 제1호 법정에서 개정된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민족일보가 평화통일, 남북협상 등 반국가 단체인 북한괴뢰에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주장에 고무, 동조했다. 민족일보는 정당, 사회단체가 아니나 특별법 제6조의 입법취지에 부합하는 광의의 사회단체라고 볼 수 있다. 조용수 사형, 안신규 사형, 송지영 사형…”

  약 40분간에 걸친 판결이유 낭독 끝에 연거푸 사형이 떨어지자 방청객은 일제히 웅성거렸고 몇몇 사람은 통곡을 하기도 했다. 법정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서 재판장의 형량낭독이 맨 앞자리인 기자석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사형을 선고받은 조용수 안신규는 태연했다. 오히려 송지영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재판장이 폐정을 선언하고 난 후 어떤 여인은 심판부석으로 뛰어 올라가려다 제지당했다.

  1심 선고에서 이종률 전승택 김영달 조규진 장윤근은 특별법 6조의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죄 선고를 받고, 양실근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양수정 국장, 이건호 논설위원은 구형보다 많은 10년형이 선고됐다.

  재판결과가 알려지자 국내외 여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송지영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국내 문인과 언론계 인사 104명의 진정서가 제출됐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신문편집인협회, 펜클럽 등에서 충격과 항의표시가 잇달았다.

  조용수는 자신에게 사형에 선고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말 불안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형무소 이발관에서 양수정 국장을 우연히 만났다.

  “양 국장, 암만해도 이 사람들 하는 일이 이상한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중부서 유치장에서 최달희씨를 업고 병원에 나갔을 때 어떻게 하는 건데. 사실 그때 도망치려면 넉넉히 그럴 수 있었거든요”

  양국장도 조 사장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보, 설마 세계 여론이 그렇게 비등한데 상소심에서 잘 안되겠소”

  “잘 되길 바라지만, 이거 참…”

  조용수는 찌는 듯한 8월의 더위 속에 감방생활을 한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조용수 변호인단은 문제가 된 민족일보의 기사와 다른 신문의 기사내용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유독 민족일보만 정부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는 점, 민족일보의 집필진이 혁신세력만 아니고 당시 저명한 학자였다는 점,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국내외 반응 등을 정리해 거의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재판부에 제출했지만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재일거류민단장 등 일본에서 조용수의 활동에 대해 증언 해줄 수 있는 증인신청도 모두 거부됐다.

  조용수는 9월 23일 변호사를 통해 장문의 상고이유서를 냈다.

  “원 판결은 본건 민족일보사가 정치활동에 관한 법률 제3조에 의하여 공보처에 등록된 것으로서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므로 정당이 아님은 명백한 것이고···이영근은 간첩이 아니다. 피고인이 북괴괴뢰집단과 내통하지 아니하였다. 민족일보에도 반공기사가 있고 타 신문에도 북괴와 동일논조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는 등…” <조용수 상고이유서>


  10월 31일, 상고심에서는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선고를 해버렸다. 전우영 재판장을 비롯, 문석해 선우주 정기순 양회경 이존웅 계철순 재판관이 배석했다. 전우영 재판장은 선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조용수 동 송지영 동 안신규 동 양실근의 상고와 피고인 조규진 동 양실근에 대한 상고는 이를 기각한다”


  조용수 포함 다섯 피고에게 상고 기각, 1심에서 무죄선고 받은 이종률은 2심에서 징역 10년의 유죄, 이상두는 15년에서 10년으로, 이건호와 양수정은 10년에서 5년으로 감형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민족일보를 사회단체로 인정한 원심을 파기했다. 즉 민족일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고 조직에 있어서 개방성이 없는 상사 법인이므로 이를 사회단체로 본 것은 착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의 주요간부로 혁신정당의 대변지인 민족일보를 설립했고 송지영 등 다른 피고인은 조용수와 공동정범으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사회대중당의 공천으로 청송에서 한번 출마한 것 밖에 없고, 그 후 공식적으로 아무런 정당 상 직책이 없던 조용수가 졸지에 사회대중당 주요간부가 된 것이다.

  조용수는 생각했다.

  “주식회사인 신문사가 사회단체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고, 그러나 내가 사회대중당 주요 간부라고? 지난 총선 때 공천을 받아 한번 출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 나는 어느 정당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당원도 아닌 내가 주요간부라니. 또 현재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여러 혁신정당의 당수나 고위 간부 중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내가 정당 고위간부라고 사형을 선고 받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정에서 시종 웃음을 보였다. 사형을 선고받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숨김없이 말해 나는 최고로 구형되고 언도되는 자리에서 눈물은커녕, 마음의 평정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낮 익은 사진반 기자들이 카메라를 내게로 돌렸을 때 웃어준 기억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나도 돌아와 맨 먼저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식을 잘 아는 어버이로서는 도저히 진실을 수긍할 수 없는 일로 최고형이 언도됐을 때 6순을 훨씬 넘으신 어버이를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솟더군요”

  <송지영, ‘그리운 얼굴들’, 월간 신세계 63년 8월호>


  재판은 이것으로 끝났다.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일단락 된 것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조용수의 진주중학교 은사였다. 이병주는 조용수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을 소설 형태로 많이 남겼다.

두 사람은 서울형무소 면회 대기실에서 같은 죄수신분으로 만났다. 수갑을 찬 조용수는 이병주를 만나자 “이 선생님도 이곳에 와 있었습니까”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생님 마음 단단히 가지시고 몸조심 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면회실을 나갔다.

  이병주는 훗날 ‘어느 황제의 회상’이라는 소설에서 그때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썼다.

  “그래도 나는 한마디 말도 못했다. 시형을 선고받은 제자로부터 15년을 선고받은 사람이 도리어 위로의 말을 듣고 이른바 은사라는 입장의 인간이 떳떳이 말 한마디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조용수의 눈이 얼어붙은 듯한 눈을 잊지 못한다. 준수한 얼굴을 물들인 그 깊은 우수를 잊지 못한다. 설혹 어떤 죄를 지었기로서니 그 청년, 그 얼굴, 그 눈빛으로선 사형을 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광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경향신문  2001년 7월5일자>



3. 차가운 외면, 그리고 침묵


  5·16 다음날인 5월 1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임원회의가 열렸다. 고재욱 천관우 박용구 부완혁 박홍서 김영상 최석채 원경수 김창문 강영수 박연대 소한준 등의 인사가 참석했다. 이들은 당시 언론계의 중진이었으며 그 후 언론계의 큰 인물로 평가받는 인사들이다.

  참석자들은 현 시국의 움직임에 대해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혁명의 주체는 누구요?”

  “장도영은 아니고 박정희라는 젊은 장군이라는 데…”

  “그 박정희라는 사람의 전력에 대해 항간에 말이 많은데…”

저마다 처음 겪는 쿠데타의 향후 움직임에 논란이 분분했다.

  이날의 토의 결과는 “비상계엄선포에 따라 보도관제로 신문제작에 애로가 있어 각 사의 회장 및 위원장이 방문 요청키로 했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5월 29일, 역시 신문편집인협회 2차 임원회의가 열렸다. 이날도 고재욱 부완혁 김용구 박홍서 고흥상 조동훈 최석채 강영수 원경수 김영상 박연대 김창문 정현준 등의 인사가 참석했다. 모두 표정이 굳어 보였다. 계엄으로 인한 신문제작의 어려움은 둘째 치고 언론계 인사를 비롯한 각계의 많은 인사가 속속 구속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인의 연이은 구속사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발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작 이날 토의된 내용은 “정부 각 부처에 출입이 억제되고 있어 이에 대한 타개책과 이력서를 출입처에 제출치 않도록 공보당국과 최고회의에 요청하며 언론계가 자율적 정화를 하도록 신문윤리위원회의 조속한 구성을 추진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민족일보 관련자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연행된 상태였다. 그러나 어떤지 모르지만 공식적인 회의록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의록 61년 4월5일부터 62년 3월19일까지. 신문편집인협회보 62년 4월4일자)에는 이런 내용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다.

  마침 61년 6월 1일. 인도 텔아비브에서는 국제신문인협회(IPI) 10차 총회가 열렸다. 한국이 IPI에 가입하고 처음으로 참석하는 국제회의였다. 홍종인 박권상 김성곤 우승규 등이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그때 IPI 임원들은 김성곤 당시 동양통신 사장에게 “군사혁명이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한국언론 현실을 주목한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IPI의 이런 우려는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 후 열렸던 신문편집인협회의 7월 3일 운영위원회에서도 민족일보를 비롯한 언론계 인사의 대량 구속사태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은 없다. 7월 13일 운영자유보도위에서는 임검 나온 남대문서 경찰과의 시비로 개회만 하고 산회해버렸다. 한창 민족일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이지만 이때까지 신문편집인협회의 회의록에는 민족일보 문제가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처음 민족일보 문제가 거론된 것은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 등 세 사람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은 후인 9월4일 제5차 운영자유위원회에서 조심스럽게 민족일보 문제가 거론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민족일보 사건 송지영 피고에 대한 진정서를 최고회의 의장 및 혁재 당국에 제출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회의록에는 송지영만 거론되고, 정작 발행인인 조용수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언론은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이름을 외면했다. 유일하게  한국일보만 사설에서 민족일보 관련자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일보사건의 준엄한 판결과 우리의 소신

  세칭 민족일보사건에 대한 혁재 제2부의 판결이 작 28일 선고되었다. 최고형으로 사형 3명을 위시하여… 이 판결은 여러 점으로 주목을 끄는 바이다.

  첫째는 5·16혁명 후 제정된 특별법 제6조의 ‘반국가단체의 정을 알면서 동조한 자에게 적용한 그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으로 국민에게 특이한 인상을 주는 것이요, 둘째는 판결된 피고들이 대부분 언론에 종사하던 이들이란 점에서 이 나라 신문사상으로 보아 주목을 끄는 바이다. 신문사상으로 보아도 통탄할  일이다. 최근 반세기동안 일제하에서도 다른 정치활동으로 투옥이 되었다가 그 빌미로 옥사한 이도 있고 또 일군에게 남모르게 피살된 이는 있었지만 신문종사자로서 법에 의한 사형선고를 받은 일은 없었으니 명목상으로 신문인이 극형 또는 중형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혁재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이번에 준엄한 판결을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공산당이 아닌 것은 추단할 수 있고 또 그들의 소시민적 성격을 참작하여 금후의 개전으로써 조국을 위하여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없는 것인가. 이리하여 신문계로서도 한 개인의 경각(警覺)으로 더욱 진력할 길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인가.

  남은 길은 극형은 상고의 기회가 있고 중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최고회의의장의 확인의 단계에서 신중한 배려가 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한국일보 61년 8월 28일자 조간 사설. IPI는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한국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그 후 한국 신문편집인협회는 10월 11일, 상고심 선고(10월 31일)를 앞두고 민족일보 사건으로 1심에서 극형을 선고받은 송지영 피고에 대한 진정서를 혁명재판소장 및 상고심판부에 내기로 결정했다. 역시 여기서도 조용수의 이름은 회의록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진정서에 조용수의 구명도 거론됐는지, 안됐는지는 진정서의 내용을 알 수 없어 입증할 수 없다 (재판관계 기록도 없고, 현재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 당시 기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외에서는 민족일보 사태에 대해 조용수를 비롯한 안신규, 송지영이 같은 비중으로 다뤄졌으며, 특히 국제신문편집인협회에서는 발행인 조용수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국제신문인협회(IPI)는 9월 20일 한국 정부에 보낸 1차 항의문에서 다음과 같이 ‘민족일보 간부 3명(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이라고 명시했다.

  IPI 항의문

  신문의 자유가 있는 48개국 신문편집자 대표로 구성된 국제신문인협회(IPI)는 한국 민족일보 간부 3명(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이 선고는 현재 상고중인데 우리는 그 판결에 어떠한 영향을 줄 생각은 없지만 IPI로서 신문 편집관계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에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서울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나 사형선고는 형사사건 결과가 아닌 언론활동에 대해 내려졌다는 인상을 전 세계에 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IPI는 일주일 전 한국정부에 대해 확인을 의뢰하는 전문을 보냈지만 아직 회답이 없다. 때문에 IPI는 법적 절차에 간섭할 의사는 없지만 회원을 대표해 한국에 있어서 언론의 자유원칙이 보장되고 또한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되기를 갈망한다.


  그 후 IPI의 2차 항의 전문에서도 ‘민족일보 사건에서 사형을 받은 세 사람’이라고 돼있다. 다음 전문은 스위스 쥬리히에 있는 IPI가 10월 21일, 한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에게 보낸 것이다.

  “48개 국가 신문편집자를 대표하는 국제신문인협회는 민족일보를 대신해 관용을 베풀 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민족일보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세 사람은 현재 상고 중에 있습니다. 국제신문인협회는 한국 정부와 언론 간에 건전하고 솔직한 바탕 위에 서려는 진실한 노력에 계속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세계 여론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이 특별한 경우는 관용과 인도적으로 처리되기를 기대합니다. <IPI Report. nov.1961>


  이런 IPI의 항의성명은 전 세계에 그대로 타전됐다. 그러나 해외의 이런 분위기는 국내에서 조용수와 안신규는 배제된 채 송지영의 이름만 거론됐다.

  그해 겨우 국제신문인협회에 가입한 한국으로서, 국제신문인협회의 계속된 항의문 발표에 정작 당사자인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 누구도 이런 언론탄압에 항의하거나 조용수의 구명을 요청하는 용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국제신문인협회에 이런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를 보면 당시 왜 조용수와 안신규는 진정대상에서 제외됐는가를 간접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고도 슬픈 사건이 이 기간동안 일어났다.

  그것은 1961. 8. 28 법정은 민족일보의 발행인과 폅집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 사형선고를 들은 국제신문인협회는 11월 21일, 사형이 선고된 사람들에게 관용을 호소하는 전문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한편, IPI 한국위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A.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북괴의 지령을 받는 조총련으로부터 신문의 운영자금을 전달받았다는 많은 증거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조용수의 행위는 언론인의 참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또 이 사형선고로 인해 한국에서 민주원칙이 세계여론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IPI의 우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B. 그러나 IPI 한국위원회는 IPI와 또 다른 곳에서 제기하는 관용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우리정부가 완전히 무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형이 선고된 세 사람 중 12월 20일, 박정희 의장은 조용수만 사형을 확인하고 송지영, 안신규는 무기로 감형했기 때문이다. 특히 송지영의 경우, 언론인으로서의 전력이 고려된 결과이며 전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이렇듯 민족일보 문제는 혁명정부의 언론정책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제신문인협회 한국위원회. ‘Journalism in Korea after the may 16th Revolution.’ 이 문건은 IPI한국위원회가 62년 5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IPI 총회 (한국대표 김성곤 당시 동양통신사장)에 보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총회에 참석한 김성곤 대표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가 간첩이라고 발언해, 한국의 언론 상황에 큰 관심을 가졌던 세계 언론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統一朝鮮新聞 62.5 東京>


  이 보고서대로라면 조용수는 응당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어서 마땅하고, 그런 사람을 죽인 것인데 IPI 본부에서는 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야단인가. 송지영은 무기로 감형됐으니 그 정도면 만족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제펜클럽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일보 사건을 보고 받은 국제펜클럽은 10월 29일 다음과 같은 사무국장 명의의 항의전문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냈다.

  “세계적으로 7천여명의 작가를 대표하는 국제펜클럽은 회원인 작가 송지영에게 10월 28일 내려진 사형선고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보여줄 것을 요구 합니다”

(Telegram Sent On Behalf of International P.E.N. by David Carver to Chung Hi Park, 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for Reconstruction, Seoul, Korea-On October 29-1961)


  한국펜클럽이 아닌 일본펜클럽으로부터 민족일보사태를 보고 받은 국제펜클럽은 61년 9월1일, 베네치아에서 국제펜클럽 집행부회의를 열었다. 그때 투옥작가 위원회에선 한국의 민족일보 사태에 대해 이렇게 논의됐다.


  “국제펜 사무총장 카버씨는 한국에서의 민족일보 사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신문의 발행인과 두 명의 그의 동료는 남북한의 문화 회복, 학생의 교류와 남북한 간의 다른 변화를 꾀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중 사형이 선고된 한 명 송지영은 한국 펜클럽의 중요인물로 한국을 대표해 도쿄 펜회의에 참석한 바 있는 본회 회원이다. 이 사건은 펜클럽 일본지부를 통해 처음 본부에 보고 됐다. 이 사형선고에 대한 구명을 위한 위원회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오사카에서 조직됐다.”

(P.E.N. INTERNATIONAL EXECUTVE COMMITTEE MEETING IN THE PALAZZETTO VENEZIA, ROME. WRITER IN PRISON COMMITTEE. NOV. 1/1961)


  그리고 회의결과 국제펜 본부는 박정희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25개국 작가 대표가 참석한 국제펜 집행부는 귀하에게 민족일보사건에서 송지영과 그의 동료들에게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를 요구합니다”

(Telegram Sent From Rome Conference to General Chung Hi Park -Nov.2-1961)

  일본펜클럽과 국제펜 본부에서 이렇게 항의성명이 나오고 있을 때, 당사자인 한국펜클럽은 민족일보 사태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1년 10월 13일, 한국펜클럽 9회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참석인사는 주요한 조경희 양원달 양명문 조병화 정한숙 백철 이하윤 정비석 정인섭 김광용 등 열한명으로 이들 역시 당대의 꼽히는 문인으로 통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자 장원달이 송지영씨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펜본부로부터의 전문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송지영에 대해서만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진정서를 내기로 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정작 같은 사건에 연루돼 같이 사형이 선고됐지만, 국내에선 이제 서른한 살밖에 안된 조용수의 구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제출된 진정서에도 조용수의 이름은 외면했다. 오랜 언론계 생활을 했고 펜클럽회원으로 작가인 송지영 마저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민족일보에 관한 어떠한 진정도 없었을지 모른다.

  민족일보가 서울신문의 인쇄거부로 장면정권과 대결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언론은 민족일보와 조용수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비겁한 외면과 침묵은 한 젊은 언론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무도 그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안타까와하지 않았다.



4. 불붙은 해외의 구명운동


  국제신문인협회(IPI), 국제펜클럽, 언커크 한국위원회, 일본 등 외국인들과 해외에서의 활발한 항의와 구명운동이 있어났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조용수의 가족만 구명을 호소했다.

  조용수의 구명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일본이다. 그것은 조용수가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일본의 많은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해왔기 때문이다. 또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영근이 일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고 통일조선신문을 통해 교포사회와 일본여론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역시 조용수가 있던 도치키현 민단지부다. 그들은 이런 심정으로 구명운동에 임했다.

  “우리 동네에서 부단장, 사무총장을 했고 한국에서 민족일보 사장까지 지낸 사람이 쿠데타의 희생양이 됐다. 아직 서른두살밖에 안됐는데 이데올로기를 떠나 구명에 나서야 한다”

  초기 구명운동은 도지키현 본부를 중심으로 주일대표부나 본국정부에 대한 데모, 진정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용수 출신학교인 메이지대 학생의 항의성명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국학생은 조용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특히 한국학생모임인 한국학생동맹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은 ‘민족일보 언론인사 구명운동 전 재일한국학생위원회’를 조직했다. 조용수는 이 단체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학생들은 본국 쿠데타 정권에 항의전문을 보내고 연일 한국대표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이 학생위원회는 “구명운동은 동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전국적으로 전개할 계획이고 혁명재판에 의한 재심의 결과여하에 따라 전국학생에 의한 대표부 단식농성도 결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이 위원회는 항의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의 학생단체에 협력을 호소하는 구명운동에 돌입했다.

  민단 본부는 한국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어 조용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구명운동을 방해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61년 12월 11일 민단은 한학동 집행부 전원을 정권조치하고 민단의 의사에 의한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에 반발한 집행부원들은 ‘재일한국동맹’이라는 명칭으로 조직을 구성, 민단집행부와 대립했다” <전 준, 조총련 연구 1, 2, 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 1972>

  그러나 민단본부의 이 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민단 각 지부는 조용수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조용수에 대한 판결이 있은 8월 28일 이후, 구명운동은 보다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사설에서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감형을 요구했다.

  8월 31일 일본 전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한국인은 ‘조용수 구명운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신주쿠 고세넨킨가이가(厚生年金) 회관에서 첫 회합을 가졌다. 이 구명위원회 대표는 도지키현 민단 단장 배기호가 맡았다.

  ‘조용수 구명운동위원회‘는 이날 다음과 같은 운동방침을 발표했다.

  1. 전국적 항의 민중대회를 개최한다.

  2. 구명 서명운동을 전개한다.

  3. 일본 및 자유주의 각국, 국제연합 기타 국제적 각 기관에 로비활동을 편다.

  4. 최악의 경우에는 대표부에서 단식투쟁을 결행한다.


  이 구명위원회는 9월 8일 민족일보사건 피고 전원을 즉시 석방하라는 박정희 의장에 대한 항의문, 본국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각각 발표했다.

일본에 있는 언론출판계 인사도 조용수의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언론기관이 민족의 단결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민족적 의무이다. 민족일보의 논조는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왔다. 민족일보 간부 및 강제 투옥된 모든 언론인을 즉시 석방하라”  <61년 8월. 재일조선인 언론출판인협회 성명>


  이들 재일 한국인기자단은 8월 8일, 조용수 등에 대한 사형선고에 유감의 뜻을 나타내고, 선처를 요구하는 요지의 요청서를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백엽(白葉)동인회 (1957년 민단 중앙총무국장 최선(崔鮮)이 주도로 만든 동인지로 한국의 국가보안법 반대, 평화통일 남북교류를 주장했다)에서도 8월 28일 한국 쿠데타 정권의 “민족일보 사건의 날조는 민주주의를 그 근본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이라는 항의문을 발표했다.

  또 일본에 체류하는 좌우익 문화인사의 공동조직체인 ‘조국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 촉진 재일문화회의’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 언론·출판인에 대한 사형은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죄악”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용수를 비롯한 민족일보 관계자에 대한 사형선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인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곳은 일본펜클럽이다.

  61년 8월28일, 일본 펜클럽 사무국장 마츠오카요오코(松岡洋子) 여사는 “신문인과 언론인에게 언론의 문제로 사형을 선고 한 것은 일본 역사상은 물론,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규정하고 “가능한 방법으로 구명운동을 벌일 생각이며, 현재의 서명운동을 각층의 대표, 전 일본 국민의 서명을 받는 것으로 추진할 작정이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일본펜클럽 회장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명의로 항의전문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고 국제펜본부에 긴급 보고했다.

  영국 런던에서 한국의 민족일보 사태에 대한 보고를 받은 국제펜클럽 타버드카버 사무총장도 박정희 의장에게 전문을 보내, 민족일보 관계자의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고 전 세계 회원국에게 구명운동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일본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전국적 서명운동 전개됐다.

  ‘한국언론인 구명을 호소하는 모임’이 결성됐다. 동경대 신문연구소장인 기도마다이치(城戶又一)는 이 모임을 만들면서 “일본에서도 일찍이 언론 탄압의 어두운 시기가 있었지만 사형이란 일은 없었다,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로서 좌시할 수 없기에 세계적으로 구명 운동을 외쳐 나가기로 했다”고 구명운동의 취지를 밝히고 구명운동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한국 쿠데타 정권의 박정희 의장 앞으로 구명 요청서를 보낸다.

  2. 쥬리히에 있는 국제신문협회(IPI), 미국에 있는 자유인권협회, 각국의 신문 협회, 9월에 개최되는 유엔총회에 도움을 요청한다.

  3. 일본에서 구명 서명 운동을 전개한다.

  이 모임은 서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며칠만인 9월 5일 3시까지 서명자 수가 각계의 대표적 인사만 5백명이 넘었다. 주로 일본의 대표적 작가, 언론인, 문화인사가 서명했다. 마츠오카요오코(松罔洋子) 일본펜클럽 사무국장은 9월 6일, 일차적으로 이 서명서를 주일 한국대표부에 전달했다. 또 서명운동을 계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동경도 센다이다구 1-4번지에 임시 사무소를 설치했다. 이 단체는 이후에도 계속 서명을 받고 항의전문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동경대 교직원조합 집행부, 교수 일동 등 일본대학 관계자도 항의성명을 박 의장에게 보냈다. 또 9월 11일, 일본 정론저널리스트협회가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이외 일본저널리스트회의, 국민문화회의, 오사카지방 일본인 유지들, 일본 총평, 전국 청년대표자회의 등의 단체가 연이어 항의문을 발표했다.

  구명운동과 항의집회는 일본 전역으로 계속 확산됐다.

  고베에서는 ‘민족일보사건 진정위원회’(대표 전해건·全海建)가 조직돼 2천3백명의 서명이 담긴 구명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윤보선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진정서에는 고베의 신문인, 실업가, 미술가, 예술인, 종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외국인도 참여했다.

  당시 조용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전 동경대 총장으로 일본의 대표적 지성 남바라시게루(南原繁), 작가 다카미준(高見順)과 평론가 가메이가츠이치로(龜井勝一郞),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 일본 펜클럽 회장, 유명한 일본 여류작가 겸 평론가 마츠오카요오코(松岡洋子 마츠오카요오코는 일본펜클럽이 한국의 유신체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펜을 탈퇴할 정도로 대가 곳은 여류작가다), 동경대 신문연구소장 기도마다이치(城戶又一), 평론가 겸 아사히신문 논설고문 시라이시봉(白石凡), 역시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모리교죠(森恭三), 메이지대 교수를 지낸 작가로 신일본 문학회회장인 아베도모치(阿部知二), 역시 작가 이시카와다드즈오(石川達三), 대표적 인권변호사 마사키도죠(正木亨), 이와나미(岩波)서점 상무 요사노겐조오(吉野源三) 등이다. 이들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들이었다.

  왜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들이 한국의 한 언론인에게 그런 관심을 보였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에서 군부정권의 대두와 그로 인한 언론인 조용수의 사형판결에 대해 일본 지성인은 공통적으로 과거 군국주의 악몽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바라시게루(南原繁) 전 동경대 총장은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를 거부하다 동경대 교수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그는 야인생활을 하면서 지조를 지키다 후에 동경대 총장이 된 대표적인 일본의 지성인이다. 또 작가 다카미준(高見順)과 평론가 가메이가츠이치로(龜井勝一郞)는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한 자신의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치욕이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던 양심가였다 (조용수 추도사에서 이런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위해, 사실 얼굴도 모르는 한 한국인 청년 조용수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었고, 박정희 의장에게 항의성명을 보냈다. 아마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 이렇게까지 한 목소리를 낸 것은 드문 일이다.

  사실 조용수 구명움직임은 이념적 정파를 떠나 일어났다.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는 ‘조용수는 우리와 입장을 달리한 사람’이라고 전제하면서, 조용수의 사형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남한의 군사 파시스트들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남북경제, 문화의 교류 주장에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그들이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지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폭로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범죄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히틀러, 무솔리니, 이승만 보다도 극악무도한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화의 적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나타냈다.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씨는 조선총련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민단간부였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적 입장에서 조씨에 대한 사형판결에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61년 8월 2일 조총련 중앙상임위 성명 요지>


  북한의 로동신문도 “이것은 진정 언론에 대한 유례없는 야만적이고 파쇼적인 공격일 뿐 아니라, 평화통일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남조선 인민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고 용서하기 어려운 민족적 배신행위이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1961년 8월 31일자>


  민족일보 관계자들에 대한 사형판결에 대한 항의는 비단 일본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IPI 본부는 9월 20일, 10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항의전보를 보내고 항의문을 발표했다. 또 미얀마작가협회, 소련작가동맹도 사형선고의 재고를 촉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9월 28일 국제 펜클럽본부도 항의성명을 발표했고, 10월 27일 재차 구명호소문을 발표했다. 10월 27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도 만장일치로 항의문을 채택, 한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의 즉각 석방과 민주적 권리회복을 요구했다.

  국제민주법률가 협회도 민족일보사 사장, 언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군사적 탄압에 항의,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조선인민의 평화통일, 독립의 염원을 난폭하게 짓밟은 한국 군사정권의 불법적인 폭거에 분노와 불안을 표시했다. 또 언론인들에게 선고한 판결을 취소하고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한국의 법무부장관에게 이와 관련된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 성명문은 국제연합의 출판물과, 국제연합 인권옹호위원회, 국제인권동맹 등 각 단체에 보냈다.

  당시 언커크 알레그라도 의장은 은밀히 박정희 의장을 만나 민족일보 사건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고 박 의장도 그것을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 조용수라는 이름은 어느 곳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물론 쿠데타 후 계엄이라는 것도 한 이유였지만 누구도 조용수라는 한 젊은이의 이름을 거론하길 꺼렸다.

 

제 6 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1. 갈등과 발전


  민족일보는 가판에서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장면 정부의 탄압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다 다시 발행한 이후 많은 국민은 민족일보를 신문다운 신문으로 평가했다. 당시 언론계는 민족일보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민족일보가 펜대만 들고 나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차림으로 발족했지만 불과 반개월 동안에 5만부의 부수를 발행하게 된 것은 어용지, 보수지의 민의봉쇄 장난에 증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국민(독자)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럼으로 혁신계 신문의 발간을 기성지들도 집권당이나 보수정파와 똑같은 이해타산에서 백안시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자기무능과 부패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건곤일요의 결의가 없고 기성언론계가 낡고 썪은 ‘보수’에 도취하여 장단 맞추고 있는 한 혁신계의 신문은 국민의 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 갈 것이다. 민족일보는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新聞評論 61년 3월 6일자>


  지방에 있는 한 독자가 조용수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민족일보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존경하는 조 선생님

  표현이 조잡한대로 또 붓을 들었습니다.

  못되먹은 기성 정치인들의 꼬락서니와 진부한 정치악의 악취 등에 골탕 먹은 이 민족을 하늘은 살피었는가- 서광이 트는 것 같습니다.

  4·19 1주 기념일에 말씀입니다. 지성의 본산이요 민족혼의 심장인 서울대학교, 그중에도 문리대학생의 힘찬 절규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통쾌했습니다. 괘호 만세를 부르고 싶도록 기뻤습니다. 그들은 현명했습니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의 재동들이었습니다.

  ‘이북 쌀 이남 전기’, ‘오고가도 못하는 내 땅’의 민족비원을 통감했고 기성정치인을 타기하고 민족혼에 호소한 현실적 감각이 예리한 청명아들이었습니다. 통일의 싹을 이들은 멋지게 시위했습니다. 이들의 선언은 통일의 전주곡이었고 민족의 소득 아님이 없었습니다.

  통일 없이 지나온 설움의 시위였고 졸렬히도 겁 많은 보수정객들의 중압을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새싹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겪어온 민족수난이 낳은 총아요 무수한 희생의 결정이며 역사의 산물입니다.

  민족일보여!

  이들을 환영하소서. 슬기로움이 태동하는 이 통일의 서곡을!

  풀리지 않은 이들의 울분과 어쩌지 못해 주저하는 이들의 대열에 감격적인 무대와 빈틈없는 진로의 제시가 있어야 했고, 작열하는 이들의 애국적 정열에 폭발적인 점화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이들 젊은이의 거룩한 용기를 보아야 습니다.

  의혹의 성이요, 금단의 세계였던 반쪽학문의 철창을 선명히 터놓고 이들 지성인 앞에 그 정체를 내놓아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의혹과 공포를 청산하고 온 민족의 새 이념을 똑바로 찾아야겠습니다.

  분단의 민족이요, 이념 없는 족속임을 탈출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요원한 것 같습니다. 험난한 과업임이 분명하매 파란난만일 것이요, 이 속에 성업 수행키에는 의로운 피와 용기가 기대되는 터입니다.

  이 혼란한 민족의 수난과 운명을 같이할 민족일보의 전도, 축복만을 바라겠습니다. 난시(亂時)에 영웅의 칼이 위객을 자랑한다면 민족혼란의 와중에서 쾌도난마, 이세의 풍진에 시비를 가리는 무관의 제왕, 평필의 공이 장하기 어찌 이만 못하리요. 귀하의 뜻하시는 바 날로 번창하와 민족의 영광 되옵기 비옵니다....

  4월 25일  서상모(徐祥模) 백

<이 편지는 지방의 한 젊은이가 조용수 개인에게 보낸 것이다>


  민족일보는 2월 23일, 그동안 지사지국이 완비되지 않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에 지사를 설치했다. 이제야 비로소 전국지로서 모습을 갖추고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설치된 민족일보의 지사지국장들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춘천지사장 길용남, 광주지사장 이양섭, 청주지사장 이웅희, 대전지사장 이목의, 논산지국장 오희창, 연무대지국장 손영진, 안동지국장 김근연, 논산지국장 김석환, 당진지국장 최영호, 경남지사장 김용출, 군산지국장 서동호 등이다.


  당시 언론은 등록만 하면 누구든지 신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명함만 세기면 신문사 사장이 될 수 있어 2천환짜리 사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거리에는 기자 명함, 신분증을 갖고 기자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의 무권력시대. 아무도 제한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중에는 민족일보 같은 건실한 신문사도 있었다. <한국 신문윤리 30년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1994>


  그러나 문제는 여러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경북대 정치학 강사인 이상두를 논설위원으로 기용했다. 이상두는 서상일 회장의 추천으로 민족일보에서 일했다. (이상두는 나중에 윤길중의 사위가 된다) 이렇게 논설위원을 보강했지만 여전히 사설과 논설 등은 조용수를 비롯한 일부 경영진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됐다. 아니 주장이 반영된 정도를 넘어 실제적으로 경영진에 의해 씌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부적으로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신문을 제작하는 사람은 조용수를 비롯한 혁신계 인사가 편집에 너무 간섭한다는 것이고, 경영진을 비롯한 혁신계 인사는 신문편집자들이 기능만 있고, 신념이 없다는 식의 불만을 나타냈다. 내부적으로 거의 매일 이런 갈등이 계속됐다.

대표적인 예가 오소백 부국장의 사임문제였다. 신문이 창간되고 얼마되지 않은 3월 17일 오소백 취재담당 부국장이 회의석상에서 사의를 나타냈다.

  “혁신관계의 신문이 필요하다는 소신에서 민족일보로 왔소. 그러나 신문에는 전혀 문회한 사람들. 특히 정당관계자가 신문의 편집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고, 또 일부인사의 글에도 문제가 있다고 계속 지적하지 않았소.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일할 수 없소”

  조용수 사장, 안신규 감사, 그리고 혁신계 임원진은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신문제작에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안신규 감사가 만류를 했다.

  “오 부국장.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데 왜 그러시오. 경영도 일단 안정이 되면 자연스레 신문 전문가들이 계속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조금만 참고 지켜봅시다”

  오 부국장은 이미 결심을 한 듯 말을 받았다.

  “조 사장은 일본에서 생활해서 국내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나가다가는 분명 좌절될 수밖에 없어요. 또 내가 지적하는 것은 경영과 편집의 구분이라는 신문의 근본문제도 중요하지만 실제 매일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요”

아침 편집회의에서 이렇게 말하고 오 부국장은 사표를 냈다. 기자 분위기도 이와 비슷했다. 장석구(정치부) 이호일(경제부) 정공채(사회부) 김영광(사회부) 하승주(편집부) 이종배(문화부) 이재섭(교정부) 등 8명의 기자가 민족일보를 떠났다. 민족일보의 내부 인사문제에 대해 외부에선 이런 시각으로 비쳐졌다.

  “···한때 오소백씨 등도 퇴임한다는 설이 유포된 바 있었다. 최근 서울신문과의 쟁송사건이 벌어지기 얼마전부터 한국일보 논설위원 임방현씨의 편집국장 취임설과 더불어 불원 인사 개편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유포되고 있던 터인데 급기야는 부국장 겸 사회부장이던 오소백씨가 사퇴하고 각부에서 8명의 기자들이 집단적으로 퇴임함에 이르렀다.

  민족일보는 혁신세력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자처하고 있는 터이고 동지가 비록 시설 재정 등은 확보되어있지 않다 하더라도 제작태도 하나로써 전도에 기대하는 바가 큰 것이다···”<新聞評論 1961년 3월 20일자>


  그러나 젊은 기자 중에는 민족일보의 편집방향이 옳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비록 신문사 편집국에는 각자 출신과 배경은 달랐지만 동지적 결속감이 팽배했다.

  이종률 주필 겸 편집국장은 민족일보가 ‘민족적 혁신’이 아니라 ‘정치적 혁신’쪽으로 나가고 있다는 이유로 신문제작에서 손을 떼, 거의 공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판국에 취재담당 부국장과 기자 8명이 민족일보를 떠나자, 신문제작에 어려움이 뒤따랐다. 더구나 세상은 온통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이라는 이른바 2대 악법투쟁의 회오리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조용수는 이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시간이 쫓겼다. 무엇보다 새로운 편집국장을 물색하는 것이 시급했다. 조용수는 여러 사람을 물색했다. 한국일보 임방현 논설위원(후에 청와대 대변인을 지냄)도 거명됐다.

  남재희씨(전 노동부장관)의 증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딱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조용수 사장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해서 당시 유명한 한식집 ‘향진’에서 저녁을 같이했다. 편집국장으로 임방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오기로 했고, 나보고 정치부 차장으로 와 국회, 정당캡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나는 신문경력이 3년밖에 되지 않았고, 더구나 민국일보로 간지 6개월밖에 안됐을 때였다. 민국일보로 간 것도 정치부 기자를 시켜준다고 해서 간 건데, 1년도 안돼 옮긴다는 것은 너무 사람이 ‘경(硬)’해지는 것이 아니냐며 거절했다”

  조용수는 또 한 인물에 주목했다. 조선일보 조덕송 문화부장이다. 조용수는 조덕송 같은 인물이면 민족일보와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덕송 부장도 사실 혁신 쪽과 인연이 많았다. 그러나 조용수 사장을 만난 조덕송 부장은 완강히 민족일보 행을 거절했다.

  “조 사장의 뜻은 내가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내가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오”

  “아니 조 부장님. 부장님 평소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일보는 선생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제가 빨갱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러십니까. 송지영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사진을 보십시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북송반대 운동에 앞장 선 사람입니다. 일부에서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모함입니다. 그건 조 부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지금 조선일보로 옮긴지도 얼마 안되고···내가 좋은 사람 추천해 드리리다. 지금 자유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는 양수정 선배가 있는 데 언론계 선배로 추천해 드리고 싶소”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조덕송(후에 전남일보 논설고문)부장은 자신이 민족일보로 가지 않은 이유는 그 전까지 감옥을 드나들면서 가족을 고생시켰기 때문에 조선일보라는 회사에 온지가 얼마 안돼 당분간 조용히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조덕송, ‘대하실록 언론의 외길 45년-민족드라마의 증언’, 주간조선 92.1.19일자)

  양수정 국장은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내고 자유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가 곳은 언론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조용수는 자유신문 양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선린동 다방에서 만났다. 조용수는 양수정을 만나자마자 민족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해 달라고 했다.

  “양 선생님은 전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신문에 편집국장이 필요합니다. 같이 일해 봅시다”

  양수정은 민족일보가 어떤 신문이고, 또 사장 조용수도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았지만 이렇게 젊은 사장이라는 데 속으로 놀랐다. 또 만나자마자 편집국장으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는 것도 놀라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민족일보의 성격에 맞는 혁신계와 별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 국장은 오히려 자유당의 원흉인 이기붕이 사주인 자유신문 편집국장을 했다. 조용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살길은 오직 통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 없이 우리가 잘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양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할 줄 모르지만 나는 전혀 바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분단은 순전히 강대국의 강압에 의한 것입니다만, 그것을 언제까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3천만 민족의 비원인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난관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통일의욕만은 꾸준히 고취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남북한 서신교한이라든지, 문화인 교류를 실현시켜 남과 북의 감정완화를 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민족일보가 지향하는 것은 신문본연의 사명인 사회의 목탁적 역할에 타 신문보다는 좀더 강렬한 통일의욕을 고취 대변하자는 것입니다”

  양수정은 조용수가 분명하고 대단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좀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하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조용수는 이틀 후, 다시 양수정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을 같이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무교동 함경도 할머니집으로 갔다. 조금 후 고정훈이 합류했다. 고정훈을 합석시킨 것은 양수정과 조선일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같이 이야기하면 양 국장의 영입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신문에 대해서는 ‘신’자도 꺼내지 않고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양  수정도 술 실력이 대단해 세 사람은 무척 많은 술을 마셨다. 조용수는 의례 술이 취하면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애창곡인 ‘서귀포 파도소리···’를 또 불렀다.

  양수정이 거나하게 취해 말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요. 친하지 못한 사람과 만나 술을 마신다는 것은 도데체가 난 싫소. 그런데 오늘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이렇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오”

  양수정은 이기붕이 사주로 있던 자유신문 편집국장을 했지만 자유당 인사들과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양수정은 고위인사와 요리집에 가는 것보다, 빈대떡집에서 후배와 동태를 맛을 즐기던 부류였다.

  조용수는 바로 양수정의 이런 청렴성에 매력을 느꼈다. 양수정에게는 뇌물이 통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날 세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많은 말을 했고, 어느 정도 서로의 공통점을 찾았다.

  양수정은 내심 민족일보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며칠 후 조선일보 뒤 한 일식집에서 민족일보를 그만 둔 오소백을 만났다. 오소백과 양수정은 이미 잘 알던 사이였다.

  “오 국장 민족일보 어때요. 그만 둔 이유가 뭡니까”

  오소백은 자신의 체험을 솔직히 말해줬다.

  “사장 조용수도 괜찮은 사람이고, 개인적으로 그런 신문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런데 정치인이 신문편집에 너무 간섭이 심해요”

  양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점은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어느 신문이나 경영권과 편집권이 완전히 분리된 곳은 없었다.

  “보아하니 잘 설득하면 통할 사람 같던데요”

  오소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설득을 한했나요. 그런데 도저히 안되요. 이해시킬 수가 없더군요. 무조건 정부를 까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논조가 너무 앞서간다는 겁니다. 만약 양 국장이 거기 가서 일을 한다면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두 사람은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가 아닌 신문장이로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양수정은 내심 민족일보 행으로 마음을 굳혔다.

  양수정은 조용수 사장에게 논설, 사설을 제외한 신문편집의 전권을 달라는 것 등 다섯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조용수는 그 조건을 받아들었다. 양수정은 3월 18일 민족일보 편집국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양수정 국장의 취임으로 일단 외형적인 신문사 모양은 다시 갖췄지만, 문제는 그밖에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운영자금이 딸렸다. 또 중요한 문제는 자체 인쇄시설이 없어 항상 마감시간에 쫓겼다. 온통 2대 악법반대 투쟁으로 시시각각 정국과 사회의 움직임이 급변했지만 정오에 원고를 마감해도 밤 9시쯤에야 겨우 신문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할 정도였다. 자체 인쇄시설을 갖춘 다른 신문사와 속보경쟁이 되지 않았다. 자연히 기자의 사기가 떨어졌다.

  신문의 속보성과 타 신문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또 기자들의 사기를 살펴야하는 편집국장으로서는 조용수 사장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조 사장, 이래서 어디 신문을 만들겠소. 원고 마감하고 인쇄하는 데 하루 종일 걸리니”

  사실 양 국장도 조용수 사장이 매일 신문을 찍을 종이가 없어 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쫒아 다닌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 양 국장. 조금만 기다리시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서 윤전기를 구입하려고 알아보고 있는 중이오.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실제로 민족일보는 창간 전부터 인쇄시설 도입에 대한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즉 이언진(李彦鎭) 당시 동아일보 공무국장과 자모기 제작과 활자제조의 권위자인 김청남(金靑男)으로부터 자문을 받아 미국 독일 일제 윤전기를 발주하는 문제와 당시 운영난에 봉착한 평화신문사 시설을 인수하는 방안, 이기붕이 운영하다 부정축재로 몰려 몰수된 자유신문사 시설을 비밀리에 인수하는 방안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 외국에서 인쇄시설을 도입할 경우 1기 공사에 5천6백만환, 2기 개수시설비 3천만환의 예산을 세웠으며 개수 후 남은 시설을 부산이나 대구에 분공장 시설용으로 활용할 계획도 세웠다. <1961년도 민중일보(민족일보의 전 등록 제호)사업계획서>


  이런 민족일보의 운영은 전적으로 조용수, 안신규 등 일부 인사만 알았다. 그러나 역시 돈이 문제였다. 조용수는 일가친척은 물론 동창을 찾아다니며 돈을 구했고, 안신규는 일본의 이영근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 혁신계 정치인은 처음약속과 달리 재정적으로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더구나 일본에서 돈을 마련하더라도, 정부의 감시가 심해 함부로 반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면 정부는 계속 ‘민족일보의 운영자금에 조련계 유입설’에 대해 내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 일부에서는 여전히 민족일보의 성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민족일보는 점점 그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3월 25일, 독일 DPA 통신은 동경발로 민족일보의 움직임을 이렇게 알렸다.

  “혁신계에서 발행하는 일간신문 민족일보는 가일층 같은 노선에 있는 야당계와 더불어 한국은 이승만 치하 때보다 더 제한되고 또 반민주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견해를 주장해 점차 여론의 지지를 받아가고 있다”


  이런 해외에서 반응은 민족일보를 만드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3월 22일 양수정 국장 취임을 계기로 문화부장에 유정(柳呈, 전 한국경제신문 문화부장)을 영입하고 대한일보 사회부차장 이재형을 보강했다. 또 공채를 실시해 조직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민족일보의 공채에는 의식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다. 조용수 사장은 면접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한 질문을 하세요. 그 교서를 읽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기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민족일보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채에는 경희대 민통련의장인 이수병을 비롯해, 3월 23일 견습기자로는 손성조(정치부 견습) 강석근(사회부 견습) 이수재(조사부 견습) 홍선표(교정부 견습) 박선엽(교정부 견습)을 임용했다.

  당시 이수병은 이종률의 지도를 받았고 출중한 이론과 행동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도 해보지 못한 채 5·16 쿠데타를 맞았다. 게다가 이수병은 그 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인혁당 사건 주모자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용수는 혁신계 인사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과 친분을 넓혔다. 당시 소설가 박화성 여사는 4월 15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조용수에게 보내기도 했다. 특히 조용수는 문인 구상과 자주 만났다. 그리고 구상의 소개로 시인 고은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고은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 경향신문 93년 8월 15일자>

  장면정부는 민족일보의 일본수출, 즉 일본지사 설치 신청을 계속 거부했다. 사실 거의 도각 공세를 펴는 민족일보에게 장면 정부가 해외 지사 설치를 들어줄리 만무했다.

  조용수는 4월 13일 민족일보의 일본지사 신청서를 국무원 사무처에 제출했지만 정부는 4월 21일 불허 통보를 보내왔다. 민족일보는 아예 25일 동경지사장에 김영희를 임명한다고 사고를 내고 동경지사의 설립을 추진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불허였다. 이 민족일보의 일본지사 설치 불허는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4월 26일 통사당 박권희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거류민단원이 민족일보 구독을 열망하고 있다. 유독 민족일보만 수출을 불허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면은 동경지사의 승인을 끝까지 거부했다. 할 수 없이 민족일보는 당시 일본에서 개최되는 한일예비회담을 취재하기 위하여 양수정 편집국장을 특파원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5월5일 조용수는 ‘해외특파기자 파견 및 재정보증서’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외무부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금번 동경에서 개최중인 한일예비회담을 취재하기 위하여 본사 편집국장 양수정을 파견코저 함에 이에 대한 재정일체를 보증하겠으니 여행에 대한 제반 편의를 잘 보아 주시기 바라나이다” <단기 4294년 5월 5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


  그러나 양수정 국장의 일본 특파원 파견은 허가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일보에 대한 장면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은 계속됐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높아질수록 민족일보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아갔다.

  5월 초,민족일보 편집국으로 한 육군 장교가 양수정 편집국장을 찾아왔다. 자신을 김동복(金東馥) 대령이라고 소개한 이 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호남형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큰 보따리를 들었다.

  “양수정 국장이십니까”

  “그런데요”

  “학생혁명으로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하는데 군은 그대로 입니다. 아니 더 썩어가고 있어요. 저는 군의 부패장성을 추방하기 위해 부패장성의 명단과 그들이 저지른 죄과를 낱낱이 적었습니다. 신문에 연재 해 주십시오”

   김동복 대령이 내놓은 자료는 원고지 1천5백매쯤 되는 방대한 양으로 내용은 ○○ 소장- 이 사람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휘발유 ○○드럼을 횡령, 매각 착복했으며, 어디 일선 지휘관 시절에는 무단 벌채로 ○○만원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 양 국장이 물었다.

  “이런 것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하죠?”

  “틀림없습니다. 내가 책임집니다. 그리고 군 수사기관에 가면 은밀히 작성한 조서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줄까요”

  “안보여주면 보도록 해야죠. 무엇 때문에 4.19 민주혁명을 했습니까”

  “부패장성을 사회에 고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검토한 후에 게재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양수정, ‘옥중기-옥창살을 부여잡고’ 월간 다리 1972년 6월호>

  이 내용은 기사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민족일보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예다. <김동복 대령은 5·16 쿠데타가 나고 반혁명으로 구속됐다. 그는 출감후인 64년 남산약수터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정부는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2. 민족일보의 사업-혁명유족 구호운동


  민족일보에 대한 탄압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국민적 기대도 점점 커갔다. 게다가 민족일보는 진보적 지식인과 학생층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일단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일보는 편집회의 연구주제를 ‘보도 분야에 있어서 보수혁신의 영토할애, 기사 가치에 대한 연구검토’로 정했다. 또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태를 쓴 작품을 공모했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이 연구주제와 사업내용, 그리고 독자를 대상으로 한 원고 공모는 민족일보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조용수는 시간만 나면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과 인생을 모두 바친 독립원로의 비참한 생활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한번은 안신규와 원로 독립운동가 이강 선생을 찾았다.(안신규의 누이는 여성독립운동가 안마리아이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약병 몇 개 뒹구는 방에서 노혁명가는 쓸쓸히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장을 지낸 꼿꼿한 정신은 그대로였다.

  “당신과 같은 젊은 사람들에겐 남북통일이 분명히 있겠지만, 나와 같은 늙은이에겐 통일이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몇 날 더 살면서 통일되는 날을 보는 것이 소원의 전부이지만 민족적인 주체세력이 이렇게도 약한 마당에 통일은 무슨 통일···그래도 요즘 학생들이 기특한 점이 있어. 자주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서 민족의식이 공백상태에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이야. 그러나 학생들의 숭고하고 열정적인 정의가 얼마나 주효할 것인지···”

  이강 선생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태였지만 오히려 조용수를 위로했다.

  조용수는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스스로 물었다.

  “이분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활까지도. 이분의 노력으로 조국은 찾았지만 조국은 이분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

  조용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61년 민족일보 올해의 사업으로 ‘혁명유족 구호운동’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 61년 4월 5일자>

  또 조용수는 시간만 나면 동생 용준을 불렀다. 동생 용준은 민족일보 기획부장이라는 직책을 가졌다. 사실 동생은 신문사 경험이 없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여러가지 일을 시키기에는 동생만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 저녁에 회사차를 가지고 정릉 장건상 선생 댁에 좀 다녀와라. 요즘 건강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조용준은 형님이 무엇을 시키는 것인지 뻔히 알았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사용하는 지프가 단 두 대로 취재차량으로 이용하기도 바빴다.

  “형님, 신문 만들기도 벅차 돈 빌리러 다니기도 힘든데,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합니까”

  조용준은 자신이 쌀가마를 싣고, 재야 독립운동 원로를 찾아  다닌다는 일이 신문사에 근무하는 자신으로서 영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회사 내에서 취재차량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공식적인 대외사업은 혁명유가족을 돕는 것으로 돼 있었다. 사실 사업이라는 것은 순전히 조용수의 개인적 생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한 회사의 사업에 내부에서 불만도 많았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용준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회사 내에서 껄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형님, 회사 내 직원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이 신문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을 도와주는 구호소라고 해요. 당장 우리 형편도 어려운 판에···”

  조용수는 동생의 투정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그런 분위기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조용수는 동생의 그런 투정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정말 내 뜻을 모르겠어. 이런 일이니까 너에게 시키는 거야. 아무 소리 말고 쌀 한가마 전해주고 와. 내가 신문을 만드는 일 말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하다 지금은 어렵게 사는 사람을 돕는 거야. 민족일보의 대외사업이 혁명 유가족자를 돕는 것이라는 것을 너는 모르니”

  벌써 한두번 하는 일이 아니고, 게다가 자금사정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생으로서 형의 심부름이 영 마땅치 않았다.

  “신문 찍을 종이가 없어 이쪽저쪽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것 모를 줄 알고. 또 부산의 아버지 집을 저당잡고 돈을 마련했잖아. 가뜩이나 어려운 회사 살림인데”

  조용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회사살림을 걱정하는 것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신문사의 운영자금은 너무 빠듯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까지 힘들 줄 몰랐다. 어제도 명동 르네상스 음악실 주인에게 사정사정해 4부 이자로 약간의 돈을 마련했던 터였다.

  “너는 아무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회사는 다 알아서 하는 것이니까 네가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조용준은 사장실을 나오면서도 영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던 오소백 부국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회사의 제임스딘 또 저녁일 가시나”

  오 부국장은 조용준이 무엇을 하러 가는 지 뻔히 알았다. 오 부국장은 이 회사에서 사장 조용수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조용준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조용수의 동생 조용준에게 반항아 상징으로 영화 주인공의 이름인 ‘제임스 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러나 조용수는 자신의 이런 일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원로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웠다. 지금처럼 원호사업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과거 대단히 훌륭한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중에는 많은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지조와 절개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수는 독립운동 선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까와했다. 현재 광복회의 전신격인 애국동지 원호회를 찾아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취재차량을 동원해 독립운동의 원로를 몰래 찾아다니며 도와주었다. 나도 같이 그 일을 했다” <안신규 증언>



3. 조용수의 고민과 선택


  그러나 각계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했다. 창간호를 내고 임원진과 간부는 무교동 함경도 할머니집으로 갔다. 혁신계 인사는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이종률 주필과 이건호 논설위원은 영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술 몇 잔이 돌자 이종률이 먼저 말을 열었다.

  “조 사장, 계속 이런 식이면 더 이상 주간 노릇 할 수없어”

  가장 열성적으로 민족일보의 창간을 주도했던 이종률이었다. 그가 창간호를 내고 얼마 안돼 민족일보를 떠나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창간 전부터 신문의 논설을 조용수가 간섭해 글을 쓰지 않겠다고 몇 번 말해 온 이종률이다. 그러나 그 실제적 이유는 민족일보가 정치 지향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술자리가 싸늘해 졌다. 조용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선생님 아직 화가 안풀리셨군요. 비록 제가 배운 것은 없지만 민족을 위하는 글이라는 생각 때문에 선생님 글에 손을 댄 것입니다. 사실 저는 민족을 위하는 글에 내 글 네 글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종률은 고개를 가로 저였다.

  “내가 이 신문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것은, 이 신문이 민족을 위하는 방법이 나의 평소 생각과 달라서 하는 것이네. 나는 이 신문은 대중적인 민족을 위한 신문이 되길 원했네. 그러나 지금 이 신문은 전체 민족, 아니 최소한 혁신계를 생각하는 신문이 아니라 혁신 정치인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신문이 되려는 거라고 생각하네. 난 지금 날뛰는 일부 혁신정치인은 혁신의 혁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네. 그런 정치인과 가까워선 이 신문이 안되네”

  조용수는 아무 말 없이 술을 계속 마셨다. 그리고 이종률 주필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민족, 좋은 말이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가장 큰 주제이지. 그러나 그것은 반제국, 반봉건, 반매판이라는 민족혁명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보네. 왜냐하면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우리나라는 사유재산을 민주민족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자본주의의 수정, 또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하는 지금 사회주의 운운의 혁신계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야. 그러나 민족일보는 지금 민주사회적 혁신 정치인들의 대변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네”

  조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조용수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민족자본을 민족결집체로 모아 방황하는 대중을 구출해야한다는 선생님의 평소 주장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혁명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 중간목표는 분명 통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헐벗고 굶주린 것도, 또 정치체계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분단 상황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선생님의 민족혁명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족일보는 분단 상황을 극복하자는 것을 사시로 내세운 것입니다. 선생님의 평소 주장에 통일이라는 목표를 삽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술자리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윤길중 의원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 주필, 학자적 관점과 실제 정치의 움직임은 차이가 많이 있어요. 정치는 대중들에게 어떤 실제적 이상을 심어주고 그 이상을 향해 통합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더할 수 없는 큰 이상이지요. 또 실제가 그렇구요. 다른 문제는 정말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요”

  이종률은 윤길중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아무튼 계속 이런 식이면 난 민족일보에서 손 뗄 것이네”

  조용수는 맥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조금 더 지켜보세요. 창간하자마자 주필이 바뀐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도 좋지 안습니다”

  이종률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는 계속됐지만 창간자축연이라기 보다는 무슨 정치 토론장이 되어버린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종률은 나중 법정에서 자신은 하루만 민족일보에서 근무하고 그만두었다고 증언했는데, 박진목은 상당기간 민족일보에서 계속 일한 것으로 증언했다>


  여전히 정국은 국가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의 2대 악법의 제정 강행과 결사반대 공방이 계속됐다. 김달호 사대당 당수의 강제 구인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2대 악법 반대투쟁위 가두방송투쟁반원이던 이영일(서울대 정치학과) 허남경(서울대 정치학과) 등 학생이 계속 연행됐다.

  그러나 2대 악법 반대 시위는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확산되는 기미를 보이며 끊이질 않고 계속됐다.

  3월 17일. 민족일보 사회면에는 ‘유흥비로 흘러 들어간 부도수표 제재금’이라는 기사가 머리기사로 실렸다. 기사 내용은 부도수표 방지를 위해 벌금조로 거두어들인 수천만환의 돈을 시중은행장 집회비용이나 유흥비로 써버렸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것은 민족일보 차태용 기자가 은행관계자의 증언과 확인을 통해 보도한 것이다.

  이 기사가 나가자, 지방 및 시중은행은 그야말로 벌집 쑤셔놓은 꼴이 됐다. 그러나 산업은행 서병수 총재를 비롯한 은행장 7명은 조용수 사장과 차태용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사실 신문사 발행인으로서 이런 것은 별것 아니었지만, 장면 정권의 태도로 보아 만만하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3월 27일, 이 사건이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에게 배정이 됐다는 통보가 왔다.

  게다가 3월 31일, 부산진역에서 취재를 하던 민족일보 경남지사 강 기자가 “빨갱이 신문사 기자”라며 공무원으로부터 욕설과 강제 추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용수는 착찹했다. 마침 일본에 있는 아내로부터 편지가 와서 더욱 울적했다. 편지 내용은 아기를 사산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온지 몇 달 지났지만 일본에 있는 아내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결혼한 지 몇 달 안돼 서둘러 한국에 온 후,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용수는 아기가 사산됐다는 소식에 커다란 죄책감이 자신을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조용수는 복잡한 세상을 잠시 잊고 싶었다. 그럴 때 회사 내에서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양수정 국장이었다.

  조용수는 그날 양수정 국장과 무교동 할마니집에 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같이 술을 들이켰다.

  양수정 국장은 요즘, 조 사장이 회사 내외문제로 고민이 많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양 국장도 능숙하게 상대의 마음을 위로할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잠자코 술을 마셨다. 한잠 침묵 속에 술을 마시던 조용수는 안주머니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내 양 국장에게 건냈다.

  “일본에 있는 아내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어떻하면 좋겠습니까”

  편지를 건네주는 조용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좀처럼 일본에 있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조 사장이 갑자기 지극히 개인적인 말을 하는 것에 양 국장은 자못 놀랐다.

  양 국장은 무표정하게 편지를 받아들었다. 일본어로 가지런히 쓴 편지에는 일본에 있는 아내가 첫딸을 사산했다는 내용을 너무나 슬프게 적었다. 편지를 다 읽은 양 국장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편지를 조용수에게 돌려주며 술을 한잔 부어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일본으로 가서 위안을 해주고 오든지, 그렇지 못하면 서울로 불러내 살림을 차리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

  양 국장은 탁 무언가를 내뱉듯이 말하고 또 한번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조용수는 가만히 술잔을 내려봤다.

  그는 가만히 며칠 전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 교수로 있는 사촌형의 말을 생각했다. 조용수의 사촌형 조용삼은 여려서부터 똑똑한 조용수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 사촌형을 조용수도 존경했다. 그 형이 얼마 전 잠깐 귀국해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한국의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아직 네 나이도 젊으니 미국에 와서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해라. 지금 잠시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갖는 것도 너에겐 좋은 일이다”

  조용수는 사촌형의 말대로 일본에 있는 아내와 미국으로 건너가 조금 시간을 가질까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낙심해 있는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도 생각해 보았다. 사실 서울의 하숙집을 전전하면서(조용수는 안신규 감사의 주소에 동거인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신문을 창간하고 두어 달 정신없이 신문을 만들고, 또 정치의 현장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뛰어다녔는가. 이젠 지쳤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4월 들어 조용수는 결심했다. 그리고 은밀히 미국유학을 준비했다. 신문사는 최근우 선생에게 맡기기로 했다.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치안국 외사과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4월이 들어서면서 통일론의 열기는 점점 달아오르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조용수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다.

 

제 5 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1. 민족일보 창간


  국회에서 한바탕 논란을 거듭한 후, 민족일보에 대한 논란은 표면적으로 나마 잠잠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창간자금의 출처에 대한 의혹의 눈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시각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 신문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창간자금에 대해 책임질 만한 입장이 아니고 신문창간의 자금은 조용수를 비롯한 몇몇 경영진에 의해 마련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창간 예정일인 2월 8일은 지키지 못했지만 창간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주필 겸 편집국장은 이종률이 담당했고, 취재담당 부국장 겸 사회부장에 경향신문 사회부장 출신의 오소백, 편집책임부국장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출신 권일하 등을 영입했다.

  조용수는 기자 구성을 국장 1명 부국장 2명 편집부(도안포함) 부장포함 4-5명, 정치부 부장포함 4-5명, 경제부 부장포함 3명, 사회부 부장포함 7-8명, 문화부 부장포함 4명, 교정부 4명 등 30명에서 32명 선으로 잡았다. (이 정도 규모의 편집국 규모는 당시 다른 일간 신문사와 비슷했다)

  기자는 기존 신문사에 있는 경력기자로 일단 충원하고 빠른 시일 내에 공채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미 신문의 성격을 밝혔기 때문에 신문의 사시에 마음이 들어 자진해서 입사하려는 젊은 기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우는 기존 신문사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당시 민족일보 기자는 다음과 같다.

  ∙ 편집부장 공석하(전 경향신문 편집부장, 후에 한국경제일보 편집국장, 논설위원 역임)

  ∙기     자 이상용 이진형 김지회 백인수(후에 동아일보 편집위원 역임) 하승주

  ∙정치부장 김명구(전 경향신문 정치부기자, 재무부 공보관, 천안공업전문대학장 역임)

  ∙기    자 전무배(전 서울신문 기자, 후에 인혁당 사건으로 피소) 한병걸 이재문(후에 남민전 사건으로 옥사) 정현순 김종하(전 서울신문 기자, 후에 신아일보 편집국장, 국회의장 비서실장, 10,11대 국회의원 지냄) 장석구(전 평화신문 기자, 후에 대구매일신문 기자, 인혁당사건으로 피검, 옥사)

  ∙경제부 기자 최상순 이호일

  ∙사회부장 양기수

  ∙차    장 김재형(평화 경향 세계 동양통신 기자 역임)

  ∙기    자 문계준(전 경향신문, 조선일보 기자, 후에 국정교과서 근무) 정의석 규성일 이원종 권재열 김영광(전 통민청 중앙간사장, 후에 인혁당 관련 피검)

  ∙문화부장 유성(자유·중앙일보 문화부장 역임)

  ∙기    자 이종석 차 철 이 호 이종배

  ∙조사부장 전원중

  ∙기    자 정삼성 김혜숙 신현복(준사원)

  ∙교정부장 김기웅

  ∙기    자 신동백 김유동

  ∙사진부장 최희연(조선·한국·경향신문 사진부장 역임)

  ∙기    자 이락선 유창열 김종옥

  후에 정치부장으로 경향신문의 이창기 부장, 세계일보, 자유신문 출신 윤익섭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이는 민족일보 편집국 기자명부에 의한 것으로 그 후 변동사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일선 기자의 진용은 일반 신문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2월 10일, 합동통신과 통신전제 계약을 맺고, 가장 어려운 문제인 인쇄문제도 이날 서울신문사와 인쇄용역 계약을 체결해 해결했다.

  인쇄소 문제가 해결되자 조용수는 모처럼 차분하게 책상위에 앉았다. 민족일보의 2백자 원고지 한쪽에는 이런 문구를 넣어 인쇄했다.

  “이 고지(稿紙)엔 계도성 높은 민족일보의 논설만을 쓴다”

  조용수는 머리에서 글이 쉴새 없이 나오는 것들을 원고지에 옮겼다. 민족, 동포, 분단, 통일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자신도 느끼면서 글을 써 내려 갔다. 그러나 이젠 한 신문의 발행인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튿날 조용수는 자신의 취임사를 이종률 주필과 이건호 논설위원에게 보여줬다. 천천히 취임사를 읽어 본 이 주필과 이 위원의 안색이 교차했다.

  “조 사장, 이건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오”

  일일이 조용수의 취임사에 붉은색 줄을 그은 이건호 위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부분이 앞서간다는 겁니까”

  조용수는 그래도 자신의 원래 생각을 충실히 쓰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 미진한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앞서간다는 말에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 사장의 글은 우선 용어선택에서 문제가 있어요. 인민이니 하는 용어는 지금 우리가 함부로 써서는 안 될 용어예요. 또 우리 신문의 성격을 알리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너무 일부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는 듯한 신문은 위험부담이 많아요”

  옆에 있던 오소백 부국장도 거들었다.

  “맞아요. 지금 이 신문은 일반적 민족지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투쟁적입니다. 또 창간호 사설도 조 사장이 가필했는데 그런 식으로 나가면 곤란 합니다”

  그러나 이종률 편집국장은 잠자코 좌중의 이야기만 들었다. 조용수는 자신의 취임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 예, 인민이라는 단어는 원래 그 뜻이 좋은 뜻 아닙니까. 그런데 이북이 그 용어를 쓴다고 거부감이 있으면 선생님 말씀대로 국민이라는 용어가 좋겠군요,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 합니다”

  잠자코 듣던 이 주필이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신문은 분단을 절규하면서 통일을 생각하자는 근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있는 사람이 아닌 없는 사람을 위하는 신문을 만들자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운동은 정치적이어서는 안되고 대중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조용수는 실망과 용기가 교차했다. 그것은 이미 신문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한 사람이 이 신문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 사장은 일본에서 생활해서 국내사정을 잘 모르는 점이 있어. 또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 이론이 부족한 점도 있고, 그 이유는 조 사장이 너무 정치적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이 주필의 말을 듣고 있던 조용수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물을 한잔 들이켰다.

  “물론 선생님이 진보적 학문을 한 학계의 권위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제가 일천한 지식밖에 없다는 것도요. 장기판에서 수는 못해도 훈수는 둘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분명하게 말하지만 저는 지금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고, 신문을 만드는 목적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달라진 세상, 그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중요한 임무가 우리 신문에 있는 것입니다”

  논쟁은 큰 목소리까지 나오게 됐다. 그러나 조용수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2월 13일 창간호가 나왔다. 1면에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가 실렸고, 시인 김수영의 시를 실었다. 또 신문의 2면 한쪽 구석에 조용수 사장의 다음과 같은 취임사가 실렸다.


  <취임사>

  여기 창간되는 민족일보의 대표직을 제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관계자 전체가 민족의 공지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동포들의 위대한 기대를 받고 있는 대표취체역의 직을 연소한 이 사람이 담당하게 되었다는 데 대하여 오직 책무의 진중함을 통감하는 동시에 한편, 영광스러운 감 금할 길 없습니다. 밖으로는 동포 여러분의 지도와 편달에 힘입고 안으로는 주주 취체역 제위와 사원 동지들의 협력 밑에서 성과 열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일보가 명실이 상부한 민족의 신문으로써 우리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같이 걷고, 민족의 융성과 같이 발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면 저에게 있어서 더 큰 다행이 없다 하겠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이 민족일보가 ‘대중일보’라는 이름으로 창간 준비사무를 시작한 지는 피의 3, 4월 혁명이 있고서 그리 멀지 아니한 시기였습니다. 저희들은 그 4월 혁명에서 민족의 주체적 투쟁을 통하여 찾은 우리의 주권을 다름아닌 바로 그 방향에서 발전시키고 민족의 소리를 참되게 반영시킬 수 있는 신문을 하나 내어보려고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고심해 오다, 오늘 비로소 이렇게 산성(産聲)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임무의 큼에 따르는 결심과 포부가 가슴을 설레게 할 뿐입니다.

  신문으로서의 형태와 규모는 작습니다만 장래를 전망한다면 현재의 단간을 시급한 시간 내에 복간제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인위적인 장벽에 의하여 분열된 우리 민족은 상호간의 적시와 골육상쟁에 뒤이어 심각한 빈곤만을 경험해 왔습니다. 또한 민족의 긍지를 저버리고 외세에 의존하여 15년간의 세월을 헛되게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우리 민족일보는 이러한 민족의 분열과 비원을 영속화 시키는 일부의 작용에 대하여 온갖 정력을 기울여 싸울 것이며 특히 적극적으로 남북간의 민족의식의 추진과 생활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하는데 있는 지면을 과감하게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민족일보의 대표로서 복무하게 된 저는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투쟁의 선두에 섰다는 것을 자못 자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보수진영 인사들은 저를 ‘조련계’ 운운의 낭설로써 모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련계’ 와는 계열을 달리하는 ‘거류민단’에서 일해오던 과정에서 조국의 분단을 영구화 시키고 거기서 전쟁위기를 빙자하여 갖은 수법으로써 대중박해를 일삼고 특권을 보수하려는 이승만 도당은 발제하여야 한다고 지각하고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날의 이승만 도당들은 오늘에 와서 ‘무력북진론’ 대신에 ‘선건설 후통일’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것을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 현실방법의 예시는 없이 대중을 다시금 기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를 조련계 운운하여 모함하는 수법은 탈을 바꾼 ‘북진통일론’과 유관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규명될 것이오니 과히 걱정들 마시고 민족일보의 발전을 위해서는 물론, 대표취체역으로서의 저의 직책수행에도 성과가 있도록 동포여러분의 변함없는 교도(敎導)가 있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대표 취체역  조용수


  창간 첫 호의 감격은 무척 컸다. 혁신계는 물론 학생층에서 격려가 쇄도했다. 창간 인사차 민족일보를 방문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다음은 그 명단으로 괄호 안은 당시 직책이다.

  이동화(통일사회당 정치위원장) 송남헌(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 정화암(통일사회당 정치위원) 최석채(조선일보 편집국장) 구익균(통일사회당 재정위원장) 윤식(서울대 민통련의장)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 박용구(작가) 김수한(한국노동조합 총연맹 지도위원) 조헌식(통일사회당 통제위원장) 양호민(사상계 주간) 주홍모(서울대 교수) 임기봉(전 민의원) 유승범(한국일보 논설위원) 김병용(경영과학연구소 대표) 박완일(민주학연 대표) 하태완(조국통일민족전선 선전부장) 장수경(우국노인회 최고위원) 이강훈(전 재일거류민단 중앙총본부 고문) 윤희경(변호사) 신현정(세계연방협회 한국연맹 사무국장) 이영선(재일귀환교포 원호대책위원장)



2. 첫 도전, 한미경제협정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쟁점이 된 사안이 바로 한미경제협정 문제였다.

  61년 새해 들어 장면정부는 본격적인 경제 활성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을 원조 받아 쌀값을 억제하고 여기서 남는 돈으로 국토개발사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또 일본에 대해서 이승만 정권 때부터 추진하던 국교정상화를 꾸준히 진행시켰다. 특히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 이전이라도 민간차관과 교포재산의 반입을 허용키로 여당과 합의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계속했다.

  장면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야당인 신민당의 반대에 부딪쳤다. 야당은 장면정부의 대일완화정책은 범국민적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신민당은 자체 창당일정에 쫓겨 외부 문제에 신경 쓰지 못했다.

  민족일보는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해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오히려 장면정부가 한일국교 정상화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미경제협정은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장면정부는 2월 8일 한미경제원조협정에 조인하고 국회의 비준을 기다렸다. 대학내 민통련 중심의 한 학생세력과, 혁신정치 세력은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 이슈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2월 12일 통일사회당은 한미경제협정의 굴욕적 성격에 대해 비난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 한국정부는 ‘원조사업의 계획실황 및 관계서류 일체를 미국원조기관의 대표에게 제약 없이 수시로 감시 재검토 할 수 있게 허용하도록 규정한 제3항은 호혜적이고 쌍무적이어야 할 국제조약체결상의 상궤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민족적 자긍심 없는 장 내각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규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동 협정 제 6항은 실질적으로 한국에 상주하는 모든 미국인에게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부여하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한국에 도입되는 원조자금을 최고의 실세 환율에따라 원화와 교환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원화가치의 계속적인 하락을 추구할 우려가 있는 바, 환율인상에 따르는 각종 물가의 앙등은 이미 도탄에 빠진 근로대중의 생활조건을 한층 더 악화시킬 것이 분명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이때까지 원조를 제공했거나 현재 주고 있는 나라들과 미국사이에서 맺어진 어느 원조협정에도 찾아볼 수 없는 비 호혜적이고 굴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2. 이번 신 협정에서 양측이 확인한 바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상호 방위원조협정, 대한민국과 유엔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등은 모두 한국이 가장 어렵고 남의 힘이 아쉬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6·25 동란을 전후하여 채결되었던 탓으로 주권국가로서의 위신과 이익에 상반되는 제 조건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전 국민이 이점을 유감으로 여겨왔거늘 이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개악하는 방향으로 단일화한 장면 내각의 반민족적 처사는 전체 국민의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3. 국회는 원조가 보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정될 때까지 신협정의 비준을 거부하는 한편, 이것을 계기로 신분협정 및 행정협정의 체결을 서두를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4. 미국은 신협정과 같은 비 호혜적인 조약을 우리에게 강요함으로써 한미양국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균열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서는 무능부패한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울분의 궁극적인 대상이 되어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선전 자료를 제공하는 과오를 제공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통일사회당의 성명에 이어 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 혁신당, 사회대중당 그리고 민자통도 유사한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 문제는 모처럼 혁신세력이 단결된 모습을 보일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야당인 신민당과 혁신정당은 이 협정을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에 비유했다. 2월 13일 민의원 본회의장에서 신민당 강승구(姜昇求)의원은 정부가 추진 중인 한미경제협정에 대해 이렇게 비난했다.

  “이번 한미간에 체결된 경제원조 단일화 협정은 그 내용과 협상경위에 있어 한일합병을 전후하여 맺어진 을사조약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번 조약의 비준이 거부될 경우 장 총리는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물러설 용의가 있는가”

  이에 대해 장 총리는 전례 없이 강한 어조로 답변을 했다.

  “이번 협정이 을사조약과 비슷하고 경제적인 예속을 초래하는 우려가 있다는 발언은 한미간의 상호입장을 볼 때 정치적 식견이나 미국의 입장을 몰이해한데서 온 것이다. 이렇게 미국을 음해하는 발언을 의정단상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가. 미국측의 침략적인 의도가 있다면 증거를 대라”

  신민당의 박준규(14대 국회 국회의장 역임)의원은 정치학자답게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째, 초당파외교를 지향하겠다는 정부가 일체의 사전협의도 없이 이번 협정을 체결하고 사후결제에 야당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용에 있어 이러한 협정을 맺고 있는 어느 나라의 것보다 굴욕적이고 비 외교적인 것이다. 둘째, 국회의 동의를 얻는 이유가 무엇인가. 셋째, 미국의 경제기술원조 목적을 국방상 이유로 국한한 제1조는 미측 원안에 없는 것을 우리 측에서 삽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넷째, 자주외교를 지향한다는 장 정부가 이번 협정에 미국어만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섯째, 합동경제위원회 구성에 있어서 한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을 주장한 적이 있는가. 1945년 중국에서는 중국인 3명에 대해 미국인 2명의 비율로 되어있는 데 이번 협정에서는 1대1의 비율로 되어있다. 여섯째, 제3조 정보제공에 대한 유사규정은 …다른 나라의 규정과 비교할 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이 문구가 자손만대에 남을 것을 생각한다면, 정부는 이 조항만 수정내지 해석에 못을 박아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곱째, 원조기관원과 계약상사 구성원들에 대한 외교관 특권부여는 부대해석조항을 붙여서라도 좀더 자주성을 주장할 수 없는 가. 여덟째, 이 협정의 폐기조항을 넣지 않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국회에서의 논쟁 못지않게 학생청년단체는 이 협정의 비준을 거부하기 위한 반대투쟁에 들어갔다. 각 대학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국학생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정부와 국회에 대한 건의문을 발송하고 미국정부에 대해 메시지를 보내 ‘예속적 식민지적 불평등 협정에 결연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또 국회의원에게 비준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공개장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일보는 단연 이 협정의 비준에 반대하고 나섰다. 창간 다음호인 2월 14일자 사설에 ‘장 정권은 미국에의 굴욕적인 태도를 수정하지 못하면 물러나라’를 싣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왜 이 꼴인가-우리의 빈곤은 누구 때문인가’라는 중앙대 김병태 교수의 연재논단을 실었다. 15일자에는 ‘매국론과 불가피론-단기적인 안목의 원조에 만족하여 민족건국의 원칙에 맞설 수는 없다’는 사설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2월 16일, 미국은 국무부 매카나기 대사를 통해 ‘미국이 대한민국 또는 다른 어떠한 나라의 주권도 이를 침해할 이유와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한다’는 해명각서를 발표하자, 17일자 사설에서는 이 성명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매카나가 미대사 성명을 보고 - 선의적이나 초점을 찌르지 않았다’는 사설을, 18일자 사설에서는 ‘경제안정의 길은 딴 데 있다’를 게재했다.

  학생들은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대한민국은 미국의 조차지가 아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적 예속정책을 버리고 한국민의 감정을 다치지 말라’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대구에서는 혁신정당 사회단체 주최로 한미경제협정 반대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성토대회와 시국강연회가 연이어 열려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정부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2월 15일 장면 총리는 주례 공식기자회견에서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이 북한괴뢰의 지령에 의한 것이며 그 구체적 증거를 잡았다”고 발언했다. 그 구체적 증거란 지령문을 입수했다는 구체적인 언급까지 곁들였다. 이 발언에 대해 국회에서도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장면 정부가 내놓은 구체적 증거라는 것은 북한의 평양방송에서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북한의 지령이 구체적으로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가에 대해서 장면 총리는 ‘상상에 맞기겠다’는 애매한 대답만 반복했다.

  장 총리의 이런 발언에 대해 민족일보는 16일자 사설에 ‘망언’, ‘노망’, ‘무지’라는 단어를 써가며 ‘장 총리의 망언은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면이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북한지령, 그것도 조총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무언중에 민족일보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장면은 자신의 정치적 제1의 적은 민족일보라고 생각했다. 민족일보를 대상으로 한 감시는 물론, 테러까지 은밀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민족일보에서 나오는 데 건장한 청년 서너 명이 날 둘러쌌다. 그때만 해도 나도 혈기가 왕성한 때인지라 ‘이놈들’하며 큰 소리를 쳤다. 그 청년들은 조금 주춤했다. 나는 한 청년들의 어깨를 잡고 ‘술 한잔 사겠다’고 했다. 인근 중국집에서 배갈을 시켜 안주도 없이 한 대접씩 나누어 주고 나도 한 대접 들이키니 그 청년들은 기가 죽어 버렸다. 당시 민족일보와 혁신계 인사들에게 미행과 테러가 많이 일어났다” <윤길중 증언>


  민족일보의 이러한 논조에 대해 물론 내부에서도 반발이 존재했다. 그러나 조용수를 비롯한 경영진은 이런 위상을 계속 밀고 나갔다. 아예 조용수는 자신이 직접 연사로 나가 한미경제협정의 부당성을 따지기도 했다.

  “조 사장은 당시 외부의 연사로 나가 지방까지 돌아다니며 많은 강연을 하기도 했다”<안신규 증언>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은 창당이 임박해서 내부적으로 한미경제협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따지던 박준규 의원도 ‘정부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건부비준’으로 돌아버렸다.

  결국 2월 28일 오후 한미경제협정은 박준규 의원이 제안한 세 가지 양해조건, 즉 대한민국 주권의 완전존중 정신에 배치된 적용을 할 수 없다, 외교특권부여를 요청할 관리의 수는 양측 정부 협의 하에 제한한다, 면세조항의 적용범위와 대상자의 국적 등 세부항목을 양국정부의 합의사항으로 한다는 세 가지를 조건부로 민의원에서 찬성 1백33표, 반대 1표로 비준안이 가결됐다.

  혁신정당 의원은 퇴장함으로써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참의원에서는 제적 34명 가운데 찬성 32표, 반대 1표로 통과돼 이 문제는 일단락 됐다 .

  이 한미경제협정 파동은 비록 조건부 비준으로 마무리됐지만, 갓 창간된 민족일보의 성격과 진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첫 번째 시험대였다. 그것은 분열된 혁신세력에게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고, 또 진보적 지식인, 학생의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호적인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미국에 대해 재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녔다.

  이 사건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는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혁신정계와 민통련을 비롯한 학생세력, 민자통 등의 사회단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것은 곧 장면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그것에 대한 대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쳤다.



3. 2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


  1961년 3월. 그러니까 한미경제협정을 마무리한 바로 직후였다. 정국은 3·1절을 맞아 다시금 술렁거렸다. 더구나 장면 정부는 은밀히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과 ‘반공 특별법’ 두 개의 법안을 준비했다.

  3월2일 오후 5시쯤, 서울신문 공무국. 민족일보 편집부 기자가 3일자 편집을 마치고 4면 지형을 막 뜨려는 순간, 갑자기 서울신문 공무국장이 공장안으로 들어와 소리를 쳤다.

  “민족일보 작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중지한다”

  한창 작업을 하던 서울신문 공무국 직원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 놀란 사람은 민족일보 편집부 기자였다. 서울신문 공무국장에게 무슨 영문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 소리 없이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가 버렸다.

  2면 조판을 하고 있던 민족일보 편집기자는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민족일보 업무, 총무 두 국장이 달려 온 것은 그 후 얼마되지 않았다.

  민족일보 업무 총무국장은 서울신문 공무국장을 만났다.

  “왜 갑자기 신문 인쇄를 거부하는 것인가”

  서울신문 공무국장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사장으로부터 민족일보 인쇄를 중지하라는 지시만 받았다. 사장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그대로 실행할 뿐이다.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편집이 완료된 것은 인쇄를 해줘야  할 것 아닌가”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민족일보에 대해서 활자하나 만져서 안된다”

  한창 고성이 오가고 논쟁을 하고 있을 때 3층 공장에는 이미 편집이 완료된 민족일보 3일자 조판이 허물어졌다. 두 사람은 다시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을 만났다.

  “이건 계약 위반이다. 계약서에는 분명 인쇄를 못할 경우에는 5일전에 통고하기로 되어있지 않는가”

  서울신문 오 사장은 곤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완고하게 인쇄를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우리도 위에서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인쇄를 해줄 수 없다. 다른데 가서 인쇄를 하면 될 거 아닌가”

  “아니 지금 이 시간에 원고를 다 넘기고 편집이 완료된 상태에서 인쇄를 못하겠다면 오늘 신문을 내지 말라는 것 아닌가”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인쇄를 해줄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봐라”

  “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이유라도 말해 달라. 우리 신문이 장 정권을 비판해서 인가. 우리 신문의 논조를 바꾸면 인쇄를 해주겠다는 것인가”

  오 사장도 분명한 계약위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본인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한 것은 국무원 사무처장의 인쇄허가 각서를 가져오기 전에 나는 민족일보를 찍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조용수 사장에게도 통보가 된 것이다”

  비슷한 시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서울신문에서 온 장 상무를 만났다.

  “자 이 계약서를 보세요. 이런 계약위반이 어디 있습니까. 서울신문사는 오늘 아침 3월분 인쇄대금을 미리 받아가지 않았습니까. 아니 오늘 인쇄대금을 미리 받아가고 인쇄를 못하겠다는 것은 무슨 행위입니까. 또 계약서상에는 분명히 계약을 취소할 때에는 5일전에 통보하기로 되어 있어요”

  조용수 사장은 무척 흥분했다. 같이 있던 안신규 감사는 “이것은 사기행위나 마찬가지야. 우리도 법적으로 가만히 있지 않겠어”라며 소리를 쳤다.

  서울신문 장 상무는 곤욕스런 표정으로 사정을 했다.

  “저희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서울신문이 누구의 것이라는 것을. 오 사장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다 오늘 갑작스럽게 지시가 내려와서···아무튼 저희 신문사에서는 국무원의 지시가 없으면 인쇄가 불가능합니다. 계약에 대한 문제는 차후 정리하도록 합시다”

  마냥 이렇게 싸우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조용수 사장은 장면 정권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 했지만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오후 6시를 넘었다. 벌써 인쇄가 끝났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에 단시간에 4만 여부의 신문을 인쇄할 새로운 인쇄소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다른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들이 몰려왔다. 신문사가 취재대상이 된 것이다. 조용수 사장은 기자들에게 회사의 입장을 밝혔다.

  “권력으로 언론을 억압하는 현 정권의 태도에 크게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민족일보는 다른 인쇄처를 찾아 계속 발행할 것이며, 부득이 하루 이틀 신문을 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족일보는 이날 신문발행을 포기하고 각 신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성명서를 게재함은 물론, 성명서 8만장을 인쇄해 신문 대신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조용수는 분노에 차 성명서를 써내려갔다.


  성명서

  본지의 인쇄방해 조치에 항거하며

  독자 및 동포여러분들의 절대한 지원 밑에서 창간되어 그동안 일취발전의 길을 걷고 있는 본 민족일보는 통한막심하게도 지령 18호라는 짧은 시일에 발행저지 당하게 되는 비통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본지는 맡은바 임무의 중대함에 비하여 재정력이 빈약한 사정상 우리들의 공장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서울신문사 인쇄공장을 이용해 왔다. 계약에 의하면 해약은 쌍방 어디에서든지 5일 이전에 그것을 상대방에 통고하기로 되어있다. 이러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편집을 마감하여 바로 인쇄에 걸려는 직전인 금일 하오 5시 서울신문사 사장 오종식씨는 정부의 지시임을 언명하면서 인쇄의 중지를 강집(强執)하였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와 상업적 계약의 준수가 있어야 하는 법치국가의 일이라면 언론탄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사는 독자 및 동포 여러분과 함께 분격해 마지않으며 1, 2일 안에 무슨 방법으로든 속간을 하고 나아가서는 불원한 시일에 본사의 설계에 의한 고급 자기공장을 설비하여 보수 세력과 그들의 모든 무리한 처사들에 항거하는 명실상부한 민족의 신문으로서의 위용을 갖출 것이다.

독자 및 동포여러분은 오늘을 참고 내일을 기다리시기 바란다.

  1961.3.2

  민족일보사  대표취체역  조용수


  신문사에는 독자의 문의와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민족일보 인쇄중지의 배경은 쉽게 밝혀졌다. 국무원 정헌주 사무처장은 민족일보가 창간된 지 일주일도 안돼, 사무처 공보국 보도과장을 서울신문사에 보내 민족일보 인쇄를 중지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그 후 2월 28일 정 사무처장은 서울신문에 직접 공문을 보내 민족일보 인쇄를 즉각 중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쇄중지를 명령하게 된 계기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족일보가 장면 정권에 대해 호되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실 장 정권은 창간 전부터 은밀히 신문자금에 대한 내사를 벌여왔지만 특이한 혐의를 잡지 못했다. 결국 민족일보는 창간됐고 우려했던 대로 민족일보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더구나 혁신세력의 발호를 좌시할 수 없던 보수진영의 위기의식은 점점 높아갔다.

  특히 2월 26일 실린 김철의 ‘장내각의 중대책임’이라는 논단은 장면 내각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장 정권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이 논단은 두 번에 걸쳐 연재됐다. 이 논단은 장면정권의 그동안 실정을 하나하나 지적한 것으로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래 없는 창녕선거난동 사건도 묵인하고, 민주당과 대결했던 입후보자들의 선거사범은 준엄하게 다루고, 집단 월북기도사건을 미연에 알지 못하고, 부정선거 원흉이 해외로 망명하는 것도 모르면서 혁신세력의 정치활동이며, 교원들의 단결, 학생들의 사회참여를 억압하고, 황폐한 농촌을 살리기 위한 대책은 하나도 세우지 아니하면서 농협협동조합에 관권으로 압력을 가하고, 헌법규정의 군 통수권에 관련된 사항 해석을 멋대로 해 임기제 참모총장의 경질을 마음대로 하고, 경찰중립화를 좀처럼 추진할 생각을 안하는 것은 독재화의 위기를 충분히 시사한다.

  부패에 관해서 장 내각은 거의 변호할 여지가 없다. 부정축재자의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는 점, 환율을 올리기 전에 정부보유 외화 수만불을 불하하여 소수 재벌에게 막대한 이득을 준 것, 관공서의 결재나 취직에 뇌물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 특히 장 내각이 권력에 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부패를 일소하지 못한 것이다.

  학원을 민주화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실제는 학원 노리배를 동원하여 학원 개혁운동을 저지하기에 급급하고, 한국 경제는 언제나 미국 또는 일본에게 의존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남한의 역량이 충분히 성숙한 후에 통일문제를 논하자는 것인데 언제고 세계정세가 한국만을 위하여 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바에 통일이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 혁명 첫 내각이 가져야 하는 책임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장 내각은 물러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장면정권은 민족일보를 ‘적’으로 규정했다. 장면은 민족일보가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장면총리 공보비서였던 송원영은 회고록에서 ‘민족일보는 창간직후부터 계속 도각(倒閣)공세를 폈다’고 말했다>

  장면정권으로서 민족일보는 너무나 골치 아픈 존재였다. 내심 민족일보를 조사하면서 겉으로는 회유도 했다.

  “하도 장면정부를 비난하는 논설을 써대니까 장면총리의 공보비서 송원영씨는 기사를 빼기위해 민족일보 사무실로 달려와 사정을 하는 것도 여러번이었다” <김 철 증언>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면 정부는 한미경제협정 체결에서 민족일보가 보였던 태도로 보아 앞으로 제정할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에서는 정권이 더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튿날인 3월 3일. 마침 장면 총리의 주례 기자회견이 있는 날이었다. 장면 총리는 민족일보의 인쇄중지가 언론탄압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탄압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면서 정부는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통고한 것이고 다른 곳에서 인쇄를 하면 될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국무원 사무처장은 민족일보의 인쇄를 중지하도록 명령한 것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서울신문사의 업무계획은 보고하여 승인을 얻어야 할 것임에도 승인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취소시킨 것이고, 서울신문과 민족일보간의 계약은 사전에 보고를 받지 못해 아는 바가 없다”

  계약의 당사자였던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의 입지가 난처해 진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이런 말만 반복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말고 국무원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조용수 사장은 바로 이날 정오 일본 마이니찌 신문 한국특파원 미하시(三橋史郞)기자와 인터뷰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미하시: 이번 사태의 경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미 각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정부의 압력으로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중지됐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과 같은 언론탄압이며 방법이 더 교활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볼 때 수법이 치졸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각 정당, 특히 같은 보수당인 신민당까지 반발하고 언론기관이 성원해 주고 있다”

  미하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국제신문인협회(IPI)에 제의하고 서울신문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겠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금명간 속간할 것이다”

  미하시: 민족일보의 자금에 대하여 말이 많은데 어떻게 운영하는가.

  “국내에서 조달하고 있다. 항간에 조련계 자금 운운하는 데 낭설이다. 일본 한국거류민단계의 유지 12인이 이사회를 만들어 한일국교가 정상화되면 다대한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인쇄중지 사태로 신문이 못나온 그날, 청와대 윤보선 대통령은 민족일보 사태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받지 못하고 “왜 민족일보는 안가져 왔느냐”며 비서진을 독촉했다고 한다. 비서진이 당혹스러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결정에 대한 내외의 반응은 한마디로 ‘장면정권도 이승만 정권 못지 않다는 것’이다.

  양일동 신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은 “장면정권에서 내려진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조치는 헌법에 보장된 자유언론을 기술적으로 억압하는 졸렬한 짓이다”고 성토했으며 김영삼(후에 14대 대통령) 의원은 “자유언론 탄압이 이승만 정권 때와 다를 바가 없다. 민족일보가 장 총리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했다면 장 총리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경향신문이 폐간됐던 때를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윤재근 민의원 운영위원장은 “언론자유 보장을 앞세운 장 내각의 중요한 정치적 실책이다. 인쇄중지를 내린 것은 사실상의 발간중지나 다름이 없으므로 간접적인 탄압이다. 조속히 속간되기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보수정당이 이럴 정도인데 혁신계의 반발은 더 심했다.

  통일사회당은 “헌법상 보장되어있는 언론자유를 실질적으로 말살시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처사이다. 악독한 일본놈들이 신문을 폐간시킬 때에는 폐간사를 쓸 시간적 여유를 주었는데 인쇄 작업을 중단시킨 처사는 더 악랄한 방법이다. 장면 정권의 이와 같은 이승만적 수법을 답습한다면 4·19와 같이 민중의 정당한 울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이밖에 중립화통일연맹, 민족혁신청년연맹, 민족성개조연맹, 통일청년단(가칭)도 민족일보의 인쇄중지조치는 “보수 세력의 부패근성에서 비롯된 것, 혁명을 가장한 한국적 매카시즘 타도에 국민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한국신문인협회도 3일 오후 임시회의를 열고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조치를 논의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내린 결론은 “이번 정부당국의 조치가 탄압을 하여 신문발행을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고, 다만 정부관리재산인 서울신문사로 하여금 외간물을 못하게 한 것으로 음성적인 방해같은 인상을 준다. 정부가 서울신문사에 대해 외간물을 일체 중지시킨 것은 정부와 서울신문사간의 내부 문제이고, 서울신문사와 민족일보의 문제는 계약위반에 따른 법적인 문제이다”라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관구 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은 민족일보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을 했다.

  “정부가 자기관할 기업체에 대해 민족일보 인쇄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또 그것을 4-5차에 걸쳐 요청했다는 사실을 볼 것 같으면 국무원사무처 관할 기업체에 대한 내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민족일보를 일시적이나마 발간불능 상태에 빠지게 했다는 것에 대하여 유감이라고 아니할 수없다. 물론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데서 발간할 수 있을 줄 알고, 또 정부가 자기관할 이외 인쇄공장에 대하여 간섭 못할 것을 알지만 그러나 민족일보의 비판적 태도에 대해 정부로서 재미없게 생각하는, 그리고 이것을 간접적으로 일시적이나마 발간불능의 상태로 빠트렸다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민족일보의 보급을 더욱 자극시키는 우려도 없지 않다”

  사실 민족일보는 기존 신문사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당시 유력지인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발행부수가 4만5천부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일보는 처음부터 4만부 이상 인쇄했다. 인쇄를 맡고 있던 서울신문이 2만 4천부 정도 인쇄할 때였으니 서울신문 입장에서는 외간 신문이 훨씬 발행부수가 많았던 것이다.

  더욱이 민족일보는 가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다른 신문의 입장에서 강력한 경쟁상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민족일보 사태를 놓고 ‘유감이지만 보급이 늘어날 것을 우려한다’는 어정쩡한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시 언론계는 편집인협회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고 있다.

  “…민족일보의 인쇄중지 사건 등 언론계에 대한 외부의 압력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언론인의 권익옹호를 위한 유일무이의 기관인 ‘편집인협회’가 전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해서 언론계의 비난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 따라서 점점 어용화해 간다는 비난성과 아울러 회원의 자격문제 등으로 인한 소장 층의 반발기세는 편집인협회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심각한 논의까지 자아내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어찌보면 민족일보는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용수는 산업경제신문사로 인쇄처를 옮겨 5일부터 신문을 복간했다. 그리고 6일 아침 조용수 사장은 오종식 서울신문사장을 사기혐의로 서울지방 검찰청에 고소했다. 우리나라 초유의 언론사간 고소사건이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한국신문사의 오점’ ‘2공화국 신문가의 비보’라고 평했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고소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고소장(형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정동 1의 48 주식회사 민족일보사내 고소인 조용수

  우 대리인 변호사 김춘봉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의 3 주식회사 서울신문사내 피고소인 오종식

  사기 고소 사건

  고소취지

  피고소인의 행위는 사기죄를 구성하오니 엄중 조사하신 후 공소제기를 바람.

  고소이유

  1. 피고인과 피고소인은 신문발행업을 경영하고 있는 처지인바 고소인은 아직 창립시일이 일천한 까닭에 여러 가지 사정상 인쇄시설의 기준미달로 서기 1961년 2월 10일자 피고소인과의 간에 단간(석간)제 푸랑켓판 4면 신문 조판인쇄계약을 함에 있어

  계약기간은 1개월 단위로 하되 쌍방간 만료 5일전에 해약통고를 하지 않을 시에 는 계약은 자동적으로 갱신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인쇄료는 매월 2회에 분하여 선불하기로 한바, 그 내역은 조판료 면당 1만8천환 정(지형 연판포함) 인쇄료 연당 2천5백환 정 사진제판료 연평당 80환정으로 정하되 인쇄부수에 증감이 있을 때에는 별도로 협의하기로 약정하고 서기 1961년 2월분 인쇄료로(동년 2월 10일부터 2월 28일까지)계약과 동시에 금 3백만환을 고소인은 피고소인에게 선불하였던 것임.

  2. 그 계약만료 1일전인 서기 1961년 2월 27일이 되어 고소인과 피고소인은 하등의 이의 없이 계약갱신에 합의하여 피고인은 피고소인에게 동년 3월분 인쇄료로 동 2월 27일에 금 30만환정(현금) 동 2월 28일에 금 70만환 정(현금) 동 2월 28일에 금 2백만환 정(서기 1961년 3월 5일자 연수표액면 금 1백만환권 3매) 계 금 3백만환을 지불한바 피고소인은 동년 3월 2일자 오전 12시경에 이르러 각 금1백만환 액면의 연수표를 액면 금 십만환정 10매와 액면 60만환정 1매로 서환하여 줄 것을 요청함으로 고소인은 피고소인의 요청대로 분할 환서하여 준 사실이 있음.

  3. 동년 3월 2일 오후 2시경 피고소인은 돌연 고소인사에 내도하여 동년 2월 28일에 고소외 대한민국 국무원 사무처장으로부터 받았다는 동처장 정헌주 명의의 통고서라는 것을 고소인에게 보이면서 인쇄를 못하게 되었으니 귀사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도록 수배하라는 말 한마디 남겼을 뿐 동일부터 일방적으로 인쇄를 중지하여 금일에 이르렀을 뿐더러 기 수령한 3개월분 인쇄료 선불금도 고소인에게 반환하지 않고 있음.

  피고소인의 이러한 행위는 서기 1961년 2월 10일자 쌍방간에 체결된 계약의 명백한 배신행위임은 물론, 계획적인 사기행위에 해당되는 것임. 만약 피고소인이 고소인과의 계속 계약을 원하지 아니하였다면 계약서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계약만료 5일전에 통고하여야 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서기 1961년 2월 28일에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로부터 민족일보사의 인쇄를 중지하라는 서면통보를 정식으로 받고 그보다 10여일 전에 구두로 인쇄중지연락을 받은 사실이 있다면 고소인에게 여유를 두고 통지를 하거나 계약갱신을 하지 아니함이 정통인즉 피고소인은 여하한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피고소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하거나 재산상의 이득을 보기 위하여 전기한 바와 같이 2월 28일 양일에 걸쳐 3월분 인쇄료 선금으로 고소인으로부터 금3백만환 정을 편취하고 횡안무통하게도 3월 2일에 이르러서는 피고인이 인쇄료로 지불한 수표액면 금 1백만환짜리 1매와 금 10만환짜리 10매와 금 60만환짜리 1매 금 40만환짜리 1매로 각 분할 서환하여 가는 등의 행위는 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2월 28일전에 충분히 주지하고 있는 피고소인으로서는 완전한 범법행위인 것임.

  피고소인의 이와 같은 행위는 대부분이 귀속주가 되어있는 서울신문사로서는 정부의 정치적 압력에 대항할 능력은 없으나 일방 신문사경영상의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범법행위를 무릅쓰고 고소인을 이용한 것으로 사료됨.

  증거방법

  1. 필요에 응하여 제출하겠음

  서기 1961년 고소인 대리인 변호사 김춘봉 서울지방 검찰청 귀중


  그리고 ‘인쇄료 반환 및 계약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 2천5백67만8천 3백35환을 청구했다.

  조용수는 자신이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을 고소하게 된 감정을 이렇게 나타냈다.

  “정부에서 누차 통보했다지만 언젠가 한번 서울신문 장 상무가 우리 회사의 안 감사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귓결에 슬쩍 스쳐지나가는 말이고 정식 통고라곤 도저히 간주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통고’라고 간주할만 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사전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고소를 취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니와 이미 국외로 NHK(일본) 등을 통하여 널리 퍼졌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오 사장은 같은 언론인으로서 선배입장에 있는 분이고, 인격 면에서도 개인적으로 퍽 존경해왔던 분인데 이번 처사로 미루어 그저 한심스럽기만 하다”  <新聞評論 61년 3월 13일자>


  그러나 이 소송은 5·16 쿠데타가 나고 모두 없던 일이 돼 버리고 말았다.

  장면정권의 언론탄압 1호로 평가될 이 사건은 언론사(言論史)에 있어 의미 있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같은 한국 신문편집인협회 회원이면서, 또 IPI(국제신문인 협회) 회원이지만 정작 국내 언론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단신 기사로 처리해 버리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당시 민족일보 사태에 대한 각 언론사의 입장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의 언론탄압인 민족일보 인쇄사건에 대한 각지의 보도 논평태도는 그대로 그들의 생리를 표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그 보다도 이처럼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 이토록 눈을 감아버리려는 신문들의 고의적인 회피에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지경이다. 동업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온 이럴 수 있나 싶다. 이제 각지의 동기사 취급태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 사건이 일제히 보도된 것은 3월 3일자 조간지면이다. ‘경향’ ‘서울’이 일단 단신으로 지극히 간단히 치워 버린 건 순여당지로서 그럴 만도 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른바 중립지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이 2단 소기사로 취급했고 석간에서도 2단으로 냉정하게 보도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재미있는 일은 ‘한국’은 바로 동일한 지면에 ‘이 박사 입원’이라는 외신기사를 2단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석간에서는 ‘민족일보’사건의 속보를 1단 단신으로 하단에 깔아놓은 대신 ‘이 박사 입원’ 속보를 물경 특호활자 4단 제목으로써 최상단에 모셔놓은 것이다. 탄생순간에 4-5만부의 발행부수를 발행하기 이르렀다는 ‘민족’에 대하여 ‘한국’이 동업자적인 질시에서 이렇게 냉정했다고 본다면 이는 실로 가공할 상혼이랄 수밖에 없다.

  ‘동아’는 어떠한가. 조간 제1면에 특호고딕 3단 제목에 초상사진을 곁들여 ‘이 박사 입원’을 보도한 것이 크게 눈에 띄이는 반면에 2단 제목으로 한 귀퉁이에 밀어 넣은 ‘민족일보’사건 기사는 너무 대조적이다.

  ‘동아’는 일제 시와 이 정권시대를 통하여 그 자신이 겪어 온 휴간 정간 폐간의 쓰라린 경험으로서나(비록 이제 와서는 순수 야당지의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다 할지라도) 대 신문으로서의 긍지로 보아서나 극히 가(可)석할 보도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서울일일’이 톱기사로서 컷 주제 밑에 특호활자 5단 제목으로 상세히 동 사건을 취급한 것은 괄목할 일이며 ‘조선’이 4단 제목으로 톱 다음가는 큰 기사로 보도한 것도 수긍된다.

  이번 민족일보 사건을 언론창달의 공복으로서의 절실한 공감성과 사명감을 지니고 보도 논평한 것은 유독 ‘민국일보’이고 지방지로서도 ‘부산일보’등은 특이할 만한 성실성을 보여 싣고 있다.

  ‘민국’은 제1면 톱기사로 7촌 횡서컷 밑에 5단 제목으로 거의 반면의 지면을 할애하였는데 사건 당사자인 ‘민족일보’사측과 국무원 사무처 측 및 ‘서울신문’사측의 해명은 물론이요, 나아가서 민주당, 신민당, 민정구락부, 사대당, 그리고 신문편집인협회측의 견해까지 보도하였고 이에 밑받침하여 석간에서 다시 ‘긁어 부스럼격의 장 정권 언론정책’이란 논평기사로서 여론을 환기시키기에 유루가 없기를 기한 열의가 역역이 보인다.

  무릇 언론사에 종사하는 자가 권력에 굴복 내지 아부하여 곡필할 때 스스로의 수명을 짧게하고 마는 것임은 멀리 그 전철을 찾지 않아도 4·19 전후의 언론계를 상기하면 곧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나마 모처럼 찾아오던 언론의 자유마저도 제거되려는 이 흉조 앞에서 경향을 막론한 각 동업지의 일대 각성을 바라마지 않는다. <민족일보 인쇄소동과 동업계 각 신문의 표정, 新聞評論 61년 3월 16일자>


  당시 한국 언론계는 국제신문인협회(IPI)에 겨우 가입이 허락된 상태였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IPI에 가입하려 했지만 IPI에서 우리나라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개별자격으로 참여만 인정했을 뿐, 국가단위 회원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 4월 동경총회에서 IPI는 한국의 언론자유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서 특별조사단까지 파견했다. 그러나 이 조사단은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인정하지만 군정법령 88호에 의한 신문허가제와 경향신문의 정·폐간 등으로 보아 언론자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4·19후인 1960년 4월 혁명으로 한국에서의 언론자유가 확보됨에따라, 60년 11월 스위스 주리히에서 개최된 IPI이사회에서 겨우 한국에 IPI지부 설립이 승인됐다. <한국신문인협회보 61년 4월 5일자>

  이렇게 어렵사리 얻은 한국 신문의 국제적 지위였지만, 한국 언론계는 그 지위에 걸 맞는 역할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다.

  이것은 민족일보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운명에 처해지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 후 닥친 5·16 쿠데타 이후 여타 언론의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4. 통일적이고 애족적인 통일세력


  조용수는 언론인이지만 정치적 색채가 강한, 정치 지향적인 젊은이였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적 관점은 앞서 언급된 편지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통일적이며 민주애족적인 당 하나를 쟁취적으로 건설해 낼 수 있으며, 그 당의 힘을 중핵세력으로 한 애족적이며 투쟁적인 민족전선적 전체조직을 세력적으로 강화 또는 창건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여전히 걱정해마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가 갈망했던 통일적이고 민주적, 애족적인 하나의 당은 요원한 것만 같았다. 혁신세력은 계속 분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당계만 남은 사회대중당은 윤길중계와 김달호계의 내부 불화로 김달호계만 사회대중당으로 창당했다. 또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 탈당파, 윤길중을 비롯한 사회대중당 잔류파, 김성숙 중심의 한국사회당, 정상구계의 혁신연맹, 고정훈의 사회혁신당은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기 위해 1월 21일 창당준비위원회를 발기했다. 이로써 61년 들어 혁신계는 장건상의 혁신당, 김달호의 사회대중당, 최근우 중심의 사회당과 통일사회당의 4개 정파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16개 정당 사회단체가 참가하는 민간운동기구로 민자통이 결성을 앞둔 상태였다.

  4월 혁명 주역인 학생은 여름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새로운 세력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문리대 신진회, 서울대 법대의 신조회, 고려대의 협진회, 이수병을 비롯한 부산지역의 암장 등, 처음에는 과거부터 있던 서클중심의 움직임이지만 학생들은 4·19혁명의 완성은 통일운동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60년 10월 15일 서울대 민족통일전선(11월18일 연맹으로 개칭)을 시작으로 12월까지 경희대, 건국대, 고려대, 국학대, 단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에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민통련)이 조직됐으며, 부산대, 수산대, 경북대, 대구대, 청구대, 전남대, 조선대 등 지방대학까지 확산됐다. 이들은 민통전학련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했다.

  청년운동단체로는 이종률이 지도하는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는 김상찬, 이영석, 하상연, 최종국,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 등이 활동했다.

  또 사회당 외각조직격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사회당 조직부장인 최백근과 최근우, 유병묵의 영향을 받았다. 이 단체에서는 우홍선, 진병호, 김영옥, 김영광, 이구영, 이재문, 배근식, 양춘우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주학생연맹에는 박완일(위원장) 박명수, 신영순(부위원장) 조창도, 김용철, 이진형, 이완수 등이 참여했다.

  이밖에 전국학생혁신연맹, 전국학생자립경제추진회, 전국피살자유족회 청년학생위원회, 민주학생통일연맹 등 많은 단체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활동반경을 넓혔다.

  조용수는 이들 단체들과 긴밀히 연락을 했다. 정치권은 물론, 서울대 민통련 윤식과도 가까웠다. 조용수는 서울대 민통련에 연구자금으로 10만환의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용수가 가장 기대를 걸었던 민자통은 내부적으로 통일방안을 둘러싸고 갈등이 극심했다. 그것은 민족일보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조용수 사장과 이종률 주필의 견해차이가 그 단편적인 예였다. 또 구체적인 통일방안이 문제였지만, 그 내부에는 뿌리 깊은 혁신의 주류논쟁이거나 정치인과 혁신인사의 갈등 때문이기도 했다.

  민자통이 혁신계 통일세력의 결합체가 되지못하고 분열하게 된 것은 민자통내 통사당 세력과 비통사당 세력의 파벌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대북정책에 대한 노선차이도 중요한 혁신계의 분열요소였다.

  “민자통은 남북협상에서 통일정부가 수립되기만 한다면 비록 그 정부가 공산정권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민자통은 극단적으로 흐는 것 같아 도무지 동조하기 어려웠다” <송남헌 증언>

  2월 21일 민자통에 참여하던 회원 270명이 민자통 통일방안에 구체성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탈퇴,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을 발기했다.

  탈퇴자는 안재환, 신숙, 장백산, 이동화, 김성수, 문용채, 이명하, 김기철, 양회채, 조규택, 장홍염, 고정훈, 안준표, 배재훈, 송남헌, 서상일, 김성숙, 윤길중, 김중화, 오광선, 이현익, 조헌식, 이훈구, 김선적 등 혁신계 활동가 상당수였다.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은 “민자통은 단순히 민주, 자주,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연방제를 내세우고 있는 이북의 안에 비해 너무 막연하다. 현재 국제상황으로는 미소의 군사적 완충지로 영세중립국으로 통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사실 중립화 통일론은 해외의 통일운동가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온 사안이다. 일본에 있는 김삼규와 이영근, 미국의 김용중이 특히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중립화 통일론은 60년 10월 22일 “한국의 통일문제를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로 해결하는 것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미국 민주당 맨스필드 상원의원도 건의한 통일방안이다. 그러나 장면정부는 이를 즉각 거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민자통은 이들의 탈퇴에 대하 “상습적 분파주의자의 행동에 실망한다. 민자통은 중립화 통일을 배격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민자통은 극악한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인사가 가담할 수 있는 조직체이며 나간 사람에 대해 문을 열어놓고 기다릴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조용수는 착잡했다. 자신이 민족일보 만큼이나 애정을 가진 민자통이 반쪽이 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족일보의 회장인 서상일, 이사인 윤길중, 고정훈 등 상당수의 민족일보 관련 인물들이 민자통을 떠났다. 아예 고정훈은 민자통은 ‘좌익들의 모임이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2월 25일. 민자통은 예정대로 결성됐다. 조용수는 침통한 마음으로 안신규, 박진목과 함께 천도교 수운회관의 결성식에 참여했다.

  천도교 대강당에는 전국에서 온 1천여명의 대의원들로 열기가 뜨거웠다. 단상 양쪽에는 ‘뭉치자 민족주체세력, 배격하자 외세의존세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조용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통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면, 구체적 통일방안은 만들어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은 한곳으로 모여도 시원치 않을 때인데”

  민자통을 실무적으로 준비해 온 박진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민자통 결성대회는, 장상호 준비위원회 조직부위원장의 대의원 심사보고가 이어졌다. 이어 장건상은 개회사에서 통일을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민족통일의 주체세력이 되는 이 대회는 역사적인 모임이므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열정적인 운동을 하자”

  함석희 준비위 선전위원장의 사회로 임시집행부 구성에 들어갔다.

  “임시집행부는 기존의 준비위원회 5개 상임위원장으로 합시다”

  맨 먼저 경기도 대의원이 동의했다. 그러나 경북대의원인 정세형이 다른 의견을 내 놓았다.

  “임시집행부는 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대표와 청년단체 대표 3인, 주비위원회가 구성된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대표 각 1인씩 4인, 일반참여 대표 4인 등 모두 13인으로 구성해야 전국의 대표성을 띌 수 있습니다”

  양측의 주장은 사실, 혁신의 일부가 이미 탈퇴한 현행 민자통 준비위원회를 그대로 할 것인가와, 이미 탈퇴한 혁신일부세력을 수용하기 위한 여지를 주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섰다. 결국 논란 끝에 표결까지 갔지만 두 개안 모두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 부결되고 말았다.

  민자통 준비위원회 간부들은 별도의 모임을 갖고,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 5인으로 전형위원회를 구성해 임시집행부를 구성했다. 그 임시집행부는 장건상, 최근우, 김달호, 김성달, 박래원, 박진, 함석희, 조문태, 이흥로와 지방 대표 4인이다. 이 안은 양측을 절충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미 이탈한 혁신세력을 재결집 시키는 데 미흡했다.

  조용수는 가만히 이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합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관념론이 아니라 조국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민족의 지상명령이다. 진보와 혁신을 자처하는 일부에서도 짐짓 선의의 혼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통일운동이 2분화 되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공죄반반(功罪半半)이라고 할까. 공은 결국 오고 말  서로의 이견을 피차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고, 죄는 그만큼 통일의 시기가 늦어지는 것이다. 공이건 죄건 모두가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함이 씁쓸하다. 역사의 창문을 열어 제치고 동서고금의 민족통일사를 통감하면 진리는 의외에도 간단한데 있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말하면 통일절대주의라고 할까. 개인적인 아집도 당파적인 주장도 계급적인 갈등도  통일절대 라는 이름의 용광로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갈라져 있던 조국과 민족이 비로소 제구실을 할 게 아닌가”

  민자통 전형위원회는 2월 26일, 의장단을 선출하고 27일 실무비서진을 갖추는 등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민자통에 참가한 사람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의장단:김창숙 장건상 최근우 김달호 노정일 허영백 정순종 안경근 조기하 주옥경 조문태 이원혁 조윤제 함석희 박래원 김성달 오지호

  명예의장단:김삼규(일본) 김용중(미국) 서영해(구주)

  박 진(사무총장) 함석희(사무차장) 박영옥(총무위원장) 조석하(총무부위원장) 문한영(조직위원장) 도예종(조직부위원장) 이제춘(선전위원장) 김철악(선전부위원장) 신인철(재정위원장) 이흥로(외무위원장) 최만리(부녀위원장) 김성달(상임위원회의장) 조문태 박래원(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윤제 이희승 임창순 주홍모 권오돈 함석희 박 진 박희범 정재각 김창선 정순종 유병묵 윤성식 권대복 (이상 통일방안 연구위원)

  여기서 일본의 명예의장단으로 선임된 김삼규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유당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던 사람으로 이승만 독재를 비난하고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이다.

  1994년 2월 공개된 외무부외교문서철을 보면 이런 사실이 나타나 있다. 1958년 10월 29일 아침 10시 1분. 외무부에 일본 공사관으로부터 한 장의 전문이 날아든다.

  “수신:외무부장관 귀하

  소위 귀국문제에 대한 공청회 개최의 건. 지금 조총련의 소위 귀국문제에 대한 운동은 그때그때 보고하고 있는 바이나, 주재국 중의원 외무위원회의 주최로 명 29일 오후 3시부터 동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차 문제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코저 다음인사를 초빙하여 공청회를 개최한다고 하옵기 우선 보고 드리오며 회의 경과는 추후 보고할 것임.

  귀국을 찬성하는 측:김영준. 귀국을 반대하는 측:김삼규.

  본 사본을 내무부장관에게도 전달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주일공사  <일본 영사관의 정무보고 1958년. 외무부>


  일본 공사관에서는 북송을 찬성하는 김영준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내무부 신원조회를 의뢰한 것인데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본으로 회신한 내용에 의하면 김영준은 민단 중앙촌본부 사무총장 서리로 밝혀졌다. 당시 민단은 북송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처지였고, 조용수도 그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다. 한국 외무부와 일본공사관이 온통 난리가 났다.

  하지만 58년 11월 7일 오후 3시 44분 주일참사관은 다시 다음과 같은 전문을 외무부로 보냈다.

  “외무부 정무국장 귀하. 10월 28일자 TS-911051로 보고 드린 전문 중, 귀국을 찬성하는 자로 김영준, 반대하는 자로 김삼규로 된 것은 김영준과 김삼규가 서로 뒤바뀌어 타전된 것이며 김영준은 민단 사무총장서리로 물론 북한귀국 반대자임을 회보하나이다. 주일참사관”


  이것은 당시 주일대표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김삼규. 그는 재일교포의 북송을 지지했던 입장에 섰고 조용수는 결사적으로 북송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그러나 민자통에서 김삼규는 명예의장단으로 한때 조용수와 같은 입장을 가지게 됐다. 묘한 인연인 셈이다.

  이 통일방안을 둘러싼 혁신세력의 분열, 좀더 엄밀히 말하면 혁신세력간의 반목에 조용수도 예외일 수 없었다. 결국 조용수는 2월 28일 민자통을 탈퇴하고 말았다.

  굳이 조용수의 정치적 성향을 따지자면 그는 통사당계에 속했다. 혁신계에서도 우파로 분류될 수 있는 성향이었다. 민족일보의 인맥구성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민자통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사회당 인물이 많았다.

<김세원, 어느 통일운동가의 육필 수기 ‘비트’, 일과놀이, 1994>


  민족일보 내에서 이종률이 민자통의 주요 인사였다. 그는 창간호를 만들고 나서 민족일보와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였다. 법정진술과 달리 이종률은 민족일보의 제작에 있어서 더 진보적 논조를 주장하며, 조용수에게 ‘보수반동’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진목 증언>

  따라서 민족일보는 민자통의 분열 과정에서 민자통보다, 통사당쪽에 기울어지는 듯한 논조를 취했다. 그러나 당시 조용수는 아무런 정당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자신이 청송 유권자에게 보낸 인사장에서도 나타난다.

  조용수의 주장은 민자통 즉, 비 통사당계가 내걸고 있는 민주, 자유, 자주의 3원칙과 통사당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민주자주적 입장에서 중립화론은 원칙상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주장은 일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가면서 ‘통일운동 그 자체의 불통일’에 대한 자성을 일깨우게 된다. 그것은 곧 통일운동 세력의 분열이라는 내외적 자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통일안의 단일화 작업이 본격화 된 것이다.



5. 2대 악법반대 횟불시위


  3월 19일, 민자통 사무실은 바쁘게 움직였다. 18일 대구에서 벌어진 대규모 악법반대시위의 영향을 검토하고 서울에서 시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조용수 사장은 회의에 참석하기 직전, 대구에 특파한 김자동 특파원으로부터 대구의 분위기를 전해 들었다. 김자동 특파원이 본사에 전달한 대구 분위기는 이랬다.

  “대구역전에서 오후 네시부터 행사가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1천5백여 명이 모였습니다. 주도는 경북대, 청구대를 비롯한 대구 3개 대학과 고등학교, 중학교까지 참가했습니다. 학생 15명이 궐기사를 했고 ‘2대 악법 통과되면 4월 혁명 허탕이다’, ‘악법 만드는 반역들을 처단하라’, ‘자유당의 최후 발악 민주당이 벌써한다’, ‘ 피흘려 지킨 권리 피흘려 찾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면서 군중 수는 5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심야 횟불데모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마 작년 4월 혁명이래 최대 시위였습니다”

  조용수 사장은 보고를 받고 민자통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낮 익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김달호 사회대중당 위원장이 조용수 사장에게 물었다.

  “조 사장, 오늘 오전 청조회 김영삼 의원 기자회견 소식 들었소?”

  “아니요. 방금 대구에 특파한 기자로부터 어제의 대구 데모에 대해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 의원이 무슨 발언을 했나요”

  “아니 글쎄 장면이 3·15 마산지역 반정부 데모를 무마하기 위해 1억환을 뿌렸다는 거야. 그것을 김영삼 의원이 폭로했어”

  “그래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용수는 서둘러 전화통을 붙잡았다. 그리고 편집국으로 전화를 했다.

  “김영삼 의원이 폭로했다는 내용 들었소? 아 그래요. 이미 원고를 쓰고 있다구요. 그것은 중요한 문제요”

  조용수는 전화통을 내려놓으며 참석자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정훈 통사당 선전부장이 말문을 열었다.

  “어제 대구에서 대단했다면서요?”

  조용수는 자신이 바로 전 연락받은 대구이 분위기를 설명해 줬다.

  한참 조용수의 이야기를 듣고 난 최근우 사회당 위원장이 말했다.

  “대구에서 민심의 동향을 확인했어요. 이번에는 서울에서 다시 한번 민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제안에 참석자는 모두 이견이 일치했다.

  “맞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대구에서 기운을 서울로,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빨리 서울에서도 궐기대회를 열어야 합니다”

  이날 모임에서 결론은, 3월 22일 2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전 반대세력이 모이는 대규모 성토대회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날 연사로 등단할 인사와 주제도 정했는데 될 수 있으면 혁신세력뿐 아니라 학생, 법조계, 언론계, 보수 야당인 신민당까지 참여해 악법 조문을 하나하나 따지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연사와 연설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장건상(혁신당 위원장) 국민은 궐기하라

  최근우(사회당 위원장) 보수 세력의 반민주성

  김달호(사대당 위원장) 반민주 악법은 망민법(網民法)이다

  윤길중(통사당 정치위원·국회의원) 양선(良選)은 당연히 악법제정 흉계를 봉쇄해야 한다

  고정훈(통사당 선전부장) 악법제정은 이적행위이다

  신태악(변호사·법조계대표) 반민주 악법은 위헌이다

  조용수(민족일보 사장) 반민주 악법은 언론탄압의 독소를 내포하고 있다

  박완일(청년투위 대표) 민권수호 전위로서 청년은 과감하라

  노정훈(학생투위) 4월 혁명 흘린 피에 보답하라

  김면중(4월 부상학생 총연맹 대표) 4월 혁명에 대한 반동은 용서할 수 없다


  이튿날인 20일, 악법반대 공동투쟁위는 다시 민자통 회의실에서 시청앞-광화문-종로-동대문-을지로-시청까지 횟불데모를 벌이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장면정부는 21일 밤 긴급 원내대책회의를 열어 당초 제정하려던 반공법안을 철회하고, 현재 보안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원래 의도인 공산세력을 막는 내용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정부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악법반대 공동투쟁위는 개정하는 국가보안법에 반공법의 문제조항이 그대로 삽입되는 것에 불과하다며 계획대로 시청앞 횟불시위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 22일. 구름이 잔뜩 낀 서울거리는 곳곳에 서있는 경찰들의 차가운 눈초리로 더욱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간혹 용공단체 즉시 해산하라’고 방송하며 지나가는 반공단체의 관제 데모대차가 시청주면을 맴돌았다.

  정부는 궐기대회가 열리는 시청 앞에 기동대 6백여 명, 기마부대 3백여명, 최루탄부대 등 1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등 긴장감이 감돌았다. 더구나 모든 경찰이 군복을 착용하고 곤봉을 휴대해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청 앞 광장에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찼다. 트럭 두개를 이어서 만든 연단을 중심으로 39개 정당, 사회, 학생 단체 3만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피로써 찾은 민권 악법으로 뺏을 쏘냐’, ‘반공이란 이름 밑에 생사람 잡지마라’, ‘4월의 피는 통곡한다’ 등 수십 개의 플랭카드가 걸렸다.

  먼저 노구를 이끌고 장건상 혁신당 위원장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이 땅에 또다시 독재의 씨를 뿌리려 하는 마당에 전 국민은 모두가 민권수호에 총궐기하라”고 외쳤다.

  이어서 최근우 사회당 위원장은 “이승만 독재의 재판이 되어가는 보수세력은 또다시 민권을 앗아버리려는 흉괘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당의 김달호 위원장, 윤길중 의원, 고정훈 통사당 선전부장도 2대 악법의 독소조항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열기는 점차 달아올랐다.

  조용수도 연단에 섰다. 그는 또랑또랑하고 힘센 어조로, 2대 악법이 언론 탄압의 도구로 어떻게 악용될 것인가에 대하여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 우리는 장면 정권이 획책하고 있는 ‘반공임시 특별법’, ‘데모 규제법’은 물론, 이승만 전제정권의 해족적(害族的)인 국가보안법까지도 즉시 폐기할 것을 결의한다.

  2. 우리는 반민악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외세의존으로 남한 특권보수주의를 고수하여 민족통일을 방해하려는 반민족적인 장면 정권은 총사퇴할 것을 결의한다.

  3. 우리는 인류역사상 최초 및 최대의 악법인 ‘반공법’및 ‘데모규제법’을 인민의 의사를 배반하여 만약 현국회가 이를 통과시킬 때는 국회불신임 투쟁까지 전개할 것을 단호히 결의한다.

  4. 우리는 배고파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수백만 피압박대중들의 그 외침에 발맞추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단시일 내에 성취할 것을 결의한다.

  5. 우리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짓밟고 양민을 공포정치 속에 휘몰아 넣으려는 2대악법안을 철회할 때까지 결사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오후 2시20분에 시작된 궐기대회가 5시 40분쯤 일단락됐다. 그러나 시위대는 스피커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구호 선창에 맞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맨 앞에는 정당관계자, 다음은 공동투쟁위 간부, 청년학생, 시민들로 이어지는 대오는 구호를 외쳐가며 준비된 솜방망이에 불을 붙였다.

  “공산주의를 막는 길은 반공법 제정에 있지 않고, 헐벗은 국민에게 빵을 주는 데 있다”

  이때 대기하던 군복 차림의 경찰대는 태평로 국회의사당 방향을 막아섰다. 시위대는 방향을 바꿔 남대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대문 쪽도 경찰이 이미 차단한 상태였다. 잠시 시위대는 우왕좌왕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국회의사당 쪽으로 몰려갔다.

  경찰의 방망이가 높이 솟는가 싶더니, 경찰의 강제진압이 시작됐다. 불붙은 솜방망이와 경찰의 몽둥이가 격렬히 뒤섞였다. 그러나 곧 경찰의 저지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더욱 기세를 올리며 국회의사당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키고 있던 경찰의 2차 저지선은 경찰기마병. 그러나 횟불에 놀라 말이 뛰기 시작하면서 두 번째 기마병 저지선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약 5천명의 시위대는 ‘외세에 의존하는 장 정권은 물러가라’‘배고파 못살겠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종로로 접어들었다. 종로를 거쳐 동대문까지 이르는 길에서 시위대는 다시 늘어났다.

  7시 5분, 시위대는 동대문에서 다시 시청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에서 철야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거리에는 어둠이 깔리고 시위대의 횟불이 종로통을 가득 메웠다.

  돌아가는 길은 혜화동을 통해서였다. 마침 명륜동은 장면 총리의 집이 있는 곳이다. 시위대가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자 장면 총리의 사택을 지키고 있는 5백여 명의 경찰과 맞닥트렸다.

  경찰의 방어와 시위대의 투석전이 이어지고 구호와 함께 애국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탕탕탕. 최루탄을 쏘는 소리와 함께 본격전인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일부 학생이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흥분한 일부 시위대는 경찰차에 방화를 하고 시내버스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

  혜와동 로터리는 온통 전쟁터였다.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일부 학생 시민 중에서 ‘반도호텔로 가자’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일부 시위대는 다시 반도호텔로 향했다. 반도호텔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장 총리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달라”

  한 시위대원이 앞에 나가 경찰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시위대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고 민족반역자를 만나는 데 영광은 무슨 영광이냐”

  시위대의 장 총리 면회요청이 들어질리 만무했다. 그러나 반도호텔의 연좌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경찰은 이날 횟불시위에 1백23명을 검거했으며 23명의 경찰 시민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대규모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날 시청 앞 집회에서 연사로 참석한 사람은 모두 소환대상으로 지목했다.

  바로 횟불시위가 있던 날 새벽 6시, 통사당 선전부장 고정훈이 성북구 안암동 집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시청 앞 집회의 연사이기도 했고, 민족일보 이사격인 취체역이다.

  이튿날 신현돈 내무장관과 조재천 법무장관은 공동 담화를 발표해 “이번 데모는 사회질서와 국민안전을 훼손하는 행위로 주동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공언했다. 게다가 출처가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이날 시위도중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이 일부 보수 신문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악법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회는 학생이 중심이 돼 27일 서울역전에서 2차 투쟁집회를 갖기로 결의했다. 또 한번 정국은 대대적인 시위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경찰의 대대적인 학생 검거작전이 시작됐다.

  24일 세종로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정정훈 악법반대 학생투쟁위원장이 연행됐고, 김달호 사회대중당 당수가 자진출두 형식으로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 하일민(서울 문리대) 이태훈(서울 법대) 황건(서울 법대) 심재택(서울 법대) 김정강(서울 문리대) 이춘희(항공대) 김상문(성균관대) 등의 학생이 속속 구속됐다. 이 전국적인 검거 선풍에 민족일보도 초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시청앞 시위의 연사로 참석한 조용수도 수사대상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3월 25일 국회 민의원 본회의에서는 또 김준섭 의원이 나와 민족일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성토대회에 참석한 연사들은 김일성 만세보다 더 무서운 말을 했어요. 이건 공산당 방식의 선동입니다. 이 시청 앞 시위는 내가 지난번 모 일간지가 창간되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암울해 진다고 한 그 신문을 경영하고 있는 자들이 주동이 된 것입니다”

  김준섭 의원은 지난번처럼 민족일보를 직접 지칭하지 않았지만 그 신문이 민족일보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게다가 그는 무슨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발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민족일보 이사격인 취체역 최근우, 윤길중, 고정훈이 시청 앞 시위의 연사로 나선 것을 겨냥한 것으로 민족일보를 주동자로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민족일보에 혁신인사가 많이 모였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바로 그날 경남도경은 “신원불상의 이모가 혁신계 모 일간신문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연락책으로 일본에 밀항하려고 다대포 부근 해안에서 밀항을 꾀하려 해서 지명수배를 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 신문이 어떤 신문이고 또 어떤 사람을 지명수배 했는가도 밝히지 않은 모호한 발표였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일보를 지칭하고 또 음해하려는 신호탄을 의미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민족일보를 겨냥했다. 또다시 전국적으로 4월 위기설이 떠돌았다.



6. 장면의 음모-혁신을 원초적으로 막아라


  61년 새해 들어 장면 정부는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했다. 장 총리는 현석호 내무부 장관과 조재천 법무장관을 불렀다.

  “민족일보에 내사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조 법무장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게···아직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영근의 일본 행적을 일본정부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시키는 것에 조금 어려움이 있습니다. 계속 내사 하겠습니다”

  장 총리는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는 내무부장관에게 물었다.

  “아니 시골 부녀자가 개회중인 국회에서 데모를 하다니. 그게 있을 법한 일입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데모로 시작해 데모로 끝날 것입니까. 계속 무절제한 행동을 하는 데모대를 방치해야 합니까”

  현석호 내무부장관은 최근 교원노조원의 시위 농성과 국회 앞 부녀자 농성사건에 대해 보고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번 교원들의 데모나 부녀자들의 상경 데모 보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이 학원내의 움직임 입니다. 지금은 조금 잠잠한 편이지만 개학을 하면 학생의 데모는 더욱 격렬해 지면서 요구사항도 정권에 대한 도전양상으로까지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학생혁명의 주역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일반의 지지를 받고 있어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장 총리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나가니까 일부에서 정부에 대해 무능, 무능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무절제한 행동을 방치할 수 없습니다.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현석호 내무부장관은 이미 대책을 마련했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데모의 핵심적인 진원지는 혁신세력입니다. 각 대학에도 이미 상당한 혁신세력이 포진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학생과 연계된 혁신세력을 차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칭 반공특별법이라는 것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 총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우린 할일이 많아요. 더 이상 무능한 소리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강한 소신을 갖고 일을 추진하세요”

  1월 19일, 내무부는 대공사찰을 강화하기 위해 반공특별법을 기초중이라고 언명했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데모를 규제하는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뿐만 아니라 이미 법무부를 통해 현행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대체입법, 즉 반공특별법 등 두개의 법률안을 준비했다. 그 법안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 것인지, 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한참 후에 드러난다.

  3월에 접어들자 내무부장관의 예측대로 학원을 비롯한, 사회전반에 또다시 데모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번의 데모 양상은 과거와 달랐다.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서울시내에는 3월 위기설이 떠돌아 다녔다.

  3·1운동 기념식장은 ‘3·1 절을 통일절로’, ‘통일만이 살길이다’는 구호가 나오면서 빈곤과 부패의 구조적 해결은 통일로만 가능하다는 욕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이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여론을 이끌어 나간 것은 민족일보였다.

  장면 정부는 민족일보의 조총련 자금 유입설 내사, 서울신문과 인쇄계약 파기라는 무기로 민족일보의 예봉을 꺾으려 했지만 민족일보는 끈질기게 사회 전체의 통일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

  정부는 민족일보의 조총련계 자금 유입에 대해 내사를 계속했지만 그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3월 6일, 박래원 치안국장은 1월 31일 자신이 언급한 ‘민족일보의 조련계 자금 유입설’에 대해 “아는 바 없다”면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장면은 계속 민족일보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5·16이 나고 얼마 후 당시 치안국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민족일보에 관계한 사람들은  5·16이 나서 오히려 ‘살았다’는 말을 했다. 왜냐하면 장면 정권은 이미 민족일보와 그 관련자를 제거하기 위해 우익테러를 비롯한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5·16이 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만약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면 박정희보다 더 처참하게 민족일보 관련자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박진목 증언>


  아무튼 한미경제협정 체결과 국회비준과정, 그리고 민족일보 인쇄중지사태에서 오히려 정권의 체면만 구기고, 민족일보와 혁신세력의 위치를 확인한 장면 정부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에 박차를 가했다.

  3월 6일. 장 총리는 서울시대 일원에 가상 폭동훈련인 ‘비둘기 작전’을 실시했다. 정부는 그 이유에 대해 3월 15일을 기해 마산, 창녕, 삼천포 일대에 반정부 봉기가 일어난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야권과 혁신계에서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법안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끈했다.

  그러나 장면 정부가 의욕적의로 추진했던 이 법안이 내무부를 거쳐 국무원사무처 법제국에 이르러서 내부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3월 7일, 이 법안을 심의 중이던 국무원사무국 법제관은 이 법안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모규제법의 위헌성은 그 목적에서부터 비롯됐다. 장면 정부가 만든 데모규제법 제 1조의 목적은 “본 법은 집회와 시위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공공의 복리와 질서를 유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것은 2공화국 헌법 제 28조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는 조항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게다가 현행 국가보안법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마련된 반공특별법안에는 ‘공산주의의 강령과 행동이 국헌을 문란케 하고···’라고 포괄적으로 표현돼 있어 혁신세력에게 가장 강력한 족쇄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이 두 개의 법안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알려지자 혁신계는 물론, 보수당인 신민당, 집권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3월 8일. 민족일보 사장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날도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혁신계 정치인이 많았다. 변호사인 윤길중 의원이 말문을 열었다.

  “이 두 개의 법안 중 특히 반공임시특별법은 우리 혁신계의 입지를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법의 4조 3항, 4항은 반국가단체에 이익이 되는 문서, 도서 기타 표현물에 대한 처벌조항을 명시해 놓고 있어 민족일보를 직접 겨냥할 수 있는 조항입니다”

  순간, 좌중에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서상일 회장이 말을 이었다.

  “이 법은 이승만 정권이 2.4파동을 일으키면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것보다 훨씬 강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민족일보에서 타 언론사의 창구역할을 도맡아 하던 고정훈 통일사회당 선전국장이 현 상황에 대한 의견을 내 놓았다.

  “이 법안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민주당 내부조차 이견이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야당인 신민당도 반대의 뜻을 나타냈고요. 다른 언론사도 이 법안만큼은 반대 의견을 나타내려는 움직임입니다. 법조계에서도 악용의 우려가 있어 반대하는 분위기 입니다”

  장면 정부의 노골적인 인쇄중지 사태로 바로 3일전에 겨우 복간한 민족일보 관계자는 이 법안이 장면의 민족일보를 비롯한 혁신세력에 대한 또 다른 음모라는 점에 공감했다. 조용수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민족일보와 혁신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또 다른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배수진을 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저께 서울신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지난번 한미경제협정 때보다 여론의 향방은 우리 쪽에 있으니 저지투쟁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문제는 잘하면 분열된 혁신세력의 대동단결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민족일보는 그쪽으로 여론을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봅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회의 초반을 감싸던 냉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튿날 민족일보는 1면에 ‘장 내각, 양대 반민주 법안을 추진’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뽑았다. 또다시 장 정권과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이번 싸움은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언론의 일치된 반대가 큰 힘을 발휘했다. 한국일보도 “공산당이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들어 내는 법률”이라고 비판했고, 대구일보는 “헌법위반”을 지적했다. 대부분 언론은 이 법안이 반민주적임을 지적하고 나섰다.

  3월 10일, 정치권에서 청조회 김영삼 의원이 포문을 열었다.

  “반공법을 만들려는 것은 의식적으로 국민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시키려는 것이다. 반국가란 용어가 결과에 있어서 반정부적인 것을 탄압하려는 것으로 본다. 즉 건전한 정당운동과 야당활동을 방해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정부비판의 자유를 억압할 우려가 많다. 장 정권이 선정할 생각은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악의에 찬 짓을 하고 있으므로 국민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혁신계의 반발은 더 강도가 높았다. 고정훈 통사당 선전국장은 ‘범국민적 투쟁에 나설 것’을 경고했다.

  “반공과 반일을 국가의 지상정책으로 삼던 이승만 독재정권이 강행했던 국가보안법보다 더 악질적이고 가혹한 법을 현 민주당 정부가 구상한다는 것은 스스로 묘혈을 파는 짓과 같은 것이다···통사당은 원내투쟁은 물론 범국민적 투쟁을 벌이겠다”

  언론의 집중적인 비난에 김대중 민주당 대변인(15대 대통령)은 “이 반공임시 특별법의 입법취지가 언론탄압이나 혁신세력의 탄압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 강변했지만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민주당내 이철승 의원(신풍회 총무, 후에 신민당 대표) 조차 “이 법안의 필요성을 조금도 못 느끼겠다. 이 법의 제정에 반대할 생각이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이 2대 악법 반대 투쟁은 보다 조직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3월 9일 오후, 사회당 준비위원회에서 먼저 ‘범혁신계 공동투쟁’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사회대중당 선우정 선전위원장은 즉각 원칙적 찬성의 뜻을 밝혔다. 통일사회당을 비롯한 4개의 혁신정당이 한 자리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11일 4·19 혁명의 주역인 학생은 ‘2대 악법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고, 12일 혁신계 각 청년단체는 ‘반민주 악법반대 청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청조회 대변인 김영삼 의원은 ‘학생과 연계해서 저지투쟁에 나설 것’을 언명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민주당은 김대중 대변인을 통해 “만일 야당 측이 현행 보안법의 보강에 찬성한다면 반공특별법안은 철회할 수 있을 것이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대해 일부 야당은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학생과 혁신계에서는 ‘더 불손한 수법’이라며 반대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4일 한국교원노조도 반대투쟁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14일, 통사당, 사회당, 사대당, 혁신당, 삼민당 등의 정당과 중립화 통일운동 총연맹, 민자통 등 혁신계 정당 사회단체가 망라된 ‘반민주악법 반대 공동투쟁위’가 구성됐다. 보수야당인 신민당도 여기에 가입의사를 내비쳤다.

  민족일보도 당연히 이 움직임의 중심에 섰다. 조용수의 예측대로 이 악법반대 투쟁이 혁신세력의 단합의 기회도 제공한 것이다.

  말 그대로 운명을 건 싸움 양상을 보였다. 조용수는 신문을 통해서 이 법안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중 강연에 나서기로 했다.

  “사실 조 사장은 신문사의 전체 윤곽만 따졌고, 세세한 경영 문제는 내가 도맡아서 했다. 조 사장은 신문의 대외적 문제와 외부 강연에 바쁘게 움직였다. 강연으로 지방에 내려가는 일도 많았다” <상임감사 안신규 증언>

  드디어 3월 15일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김창숙, 장건상, 최근우, 이동화, 김달호, 김성숙, 문용채, 채원개 등이 지도위원으로 선임됐다.

  이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동투쟁 강령을 채택했다.

  1. 민주호헌 정신에 입각해 반민주악법의 제정을 반대하는 원내외 투쟁을 효과적으로 단행키 위하여 광범하고 강력한 대중운동을 추진한다.

  1. 원내외 투쟁의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일반대중에 호소하는 원외투쟁을 활발히 전개한다.

  1. 원외에서는 과감하고 거족적인 극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 단체에는 사회당, 사대당, 혁신당, 민자통, 중통련, 삼민당, 광복동지회 일부, 조국통일전선 등이 전당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말 그대로 혁신계의 전 세력이 재집결한 것이다. 이 모임의 기획위원은 각 정당 사회단체에서 3명의 대표로 하고 실무부장은 다음과 같이 선임했다.

  총무 조기하, 조직 유한종, 선전 고정훈, 재정 박권희, 청년 권대복, 부녀 최만리, 학생 윤성식, 의원 윤길중, 섭외 조규택, 동원 한왕균.

  그 다음날인 16일 학생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같은날 청년단체들도 공동투쟁위원회(소집책 박완일)를 결성해 극한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장면 정부는 이 법을 제정해 혁신세력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를 강화할 움직임을 버리지 않았다. 장 총리는 이미 어느 정도의 반발을 예상했다.

  17일 장면은 비장한 어조로 “이 두개법안을 기필코 입법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특별법을 반대하는 학생을 내사하겠다고 공표했다.

  정국은 2대 악법 반대와 관철이라는 마주 달리는 열차와 다름없는 형국이었다. 특히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벌써부터 격렬한 시위가 시작됐다.



7. 통일의 열망으로


  2대 악법을 제정하려 했던 장면 정권은 사실상 강력한 반대투쟁에 밀려 주춤했다. 그러나 장 정권은 반공법은 국가보안법의 강화로 대체해서라도 기필코 관철시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악법반대운동에서 자신을 얻은 세력은 운동의 방향을 통일운동으로 옮아갔다. 학생의 악법반대 시위는 ‘통일 촉진, 악법반대’로 그 주장이 바뀌어 갔다.

  민자통에서 현상 공모한 통일행진곡이 불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3.8선 마의 장벽 가로 막아도

민족의 핏줄은 끊이지 못한다

사대의 노예들이 춤을 추어도

정의에 사는 대중 나라 지킨다

(후렴) 일어나라 동포여 대열에 나서라

       줄기찬 투쟁으로 통일을 하자

<이 통일행진곡은 민자통 상임위원 하태환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일보는 남북교류문제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언론계 모두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가진 문제였다. 특히 학생층에서 주장하는 남북한 기자교류 문제는 언론으로서 명확한 입장을 표명을 강요당했다. 당시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이런 문제를 의식해 몇몇 언론에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민족일보 오소백 부국장은 민족일보를 대표해 이렇게 설문에 답했다.

  1. 귀하는 남북 언론인 교류가 필요하다고 봅니까.

  “절대 필요하다. 녹슨 마음의 교통을 먼저 하기 위해서다. 기자는 어떤 정권의 앞잡이가 아니다.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선다. 그러므로 정치적 편견에서 가장 독자적이다”

  2. 남북언론인 교류가 현 단계에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남북의 집권자들이 정권보다 통일조국을 비원 한다면 문제는 단순하다. 이런 가능성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무 위험성도 없다. 패배주의는 금물이다”

  3. 남북언론인 교류의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입니까.

  “1대1로 보내고 받고 하는데 무슨 다른 방안과 보장이 또 필요한가. 가장 큰 문제는 통일에 대한 성실한 자세만이다”

  <한국신문 편집인협회보 1961년 4월 5일자>


  통일운동의 기운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국내의 통일운동에 촉매역할을 하는 사건이 유엔에서 일어났다.

  4월 10일, 한국참전 13개국은 유엔 정치위원회에 한국통일에 관한 결의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유엔의 제 원칙에 의한 한국의 평화통일을 지지하고, 한국민 스스로 장래를 자유로이 결정하려는 한국민의 열렬한 희망을 존중하고, 한국은 유엔가입자격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것은 기존 유엔 결정에서 별로 진전된 것이 아니지만 곧이어 인도네시아가 유엔에 북한 대표도 참석시키자고 제의했고, 그 다음날 스티븐슨 미국 유엔주재 대사는 인도네시아의 안을 일부 수정, 유엔의 자격과 권한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북한대표 초청을 제기했다.

  이것은 그동안 북한과 협상, 교류가 통일을 위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했던 혁신계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당시 한국은 북한을 괴뢰로 인정했기에 협상이나 교류는 물론, 유엔에 같이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조는 그 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1972년 7·4 남북공동 성명이 발표된 직후까지 계속됐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도 한동안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학문적으로 주장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됐다)

  결국 4월 12일, 유엔 정치위원회는 찬성 49 반대 14 기권 24표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가결했다.

  “제1 위원회가 대한민국으로부터 대표 1명을 한국문제 토의에 투표권 없이 참여하도록 초청한 것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우선 대한민국이 그렇게 한 것처럼 한국문제에 관한 조치를 취할 유엔의 자격과 권한을 수락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들의 대표 1인도 한국문제 토의에 투표권 없이 초청할 것을 결정한다”


  이런 사태에 야당은 한결같이 ‘외교의 자주성을 잃은 실패작’이라고 장면 정부를 비난했고 장면 정부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바로 장면정부는 이런 결정을 ‘오히려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북한이 유엔에 나오지 않고, 유엔의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유엔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연히 정국은 장면 정부의 외교적 실책에 비난이 쏟아졌다. 이때 장면 총리는 국회에서 “용공통일 보다는 분단지속이 낳고, 유엔결의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발언으로 또 한번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이 발언은 야권의 집중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불리하다면 유엔 결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장 총리의 발언은 망언이다. 용공 운운하지만 유엔 감시하 남북 총선거를 국회에서 결의했고, 사실상 유엔에서 현실 그대로 남북한을 인정하고 통일을 하려 하지 않는가. 장기집권을 영속화하는 것이며 망언이다” (양일동 의원)

  “이승만 독재도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단상황 지속 운운은 용서 못할 망언이다, 국내외 정세를 거역하지 말고 공산당을 이겨내는 자체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김영삼 의원)

  “장 총리의 발언은 유엔 결의를 존중하고 유엔에 의해 수립된 우리나라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망말이다. 통일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통일이 안될까를 연구하는 불성실한 태도의 일단이 노출된 것이다. 용공 운운하지만 유엔 감시하 총선거라고 한다면 북한공산당이 자유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 터인데 공산당이 출마하는 것을 용공이라고 한다면 민주방식에 의한 통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윤길중 의원)

  조용수도 이런 장면의 태도에 맹공을 가한 것은 물론이다. 민족일보는 ‘통일외교에 실패한 장 정권은 물러나야 마땅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장면을 노골적으로 질타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두 차례나 대표단을 유엔본부까지 이끌고 갔던 정일형 외무부장관과 장면총리는 처음 남북한 동시 초청안이 나왔을 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서슬이 퍼랬다가, 그 안이 채택되니까 ‘우리들의 일대 승리’라고 대 찬양하더니, 정부를 상대로 시비걸기를 좋아하는 야당정객들이 몇마다 꼬집는 바람에 ‘그것은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포석이며 북괴는 결코 유엔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단한 낙관을 표명하여 마치 잔꾀만 는 성인이 국민을 우롱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측이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는 이상, 대표를 파견치 않을 수 없다’고 나오자 정부는 ‘북괴의 참석을 필사 저지하라’는 훈령을 유엔 대표부에 보내는 한편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구구한 변명을 하기에 바쁘다….”


  장면 정부의 이런 무원칙한 통일정책은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다. 마침내 4·19 학생혁명 1주년 기념식을 통해 새로운 학생 차원의 통일문제가 제기되기 이르렀다.

  4월 19일. 서울 성동공원에서 벌어진 4·19 1주년 기념식에서 학생대표는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학생운동이 새로운 차원의 통일운동으로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죽음으로 관권에 항쟁하여 민권을 쟁취한 오늘, 혁명재판이 끝났어도 부정축재자들까지도 처벌 못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한탄하며 정부가 혁명과업수행에 과감할 것을 촉구하고 국토통일에의 대열로 뭉치자”


  공식적인 4·19 학생혁명 기념식과는 별도로 서울대총학생회는 일체의 기존 정치세력을 불신하는 이른바 4·19 제2 선언문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들은 가시지 않은 1년 전의 용기와 분노를 지낸 채 우리의 선혈로 물들어 지던 4월의 광장에 다시 모였다…. 그 거룩한 3, 4월의 항쟁은 정치 지도자 조직의 허약성과 전환기 정치이론의 빈곤성 등이 그 항쟁을 중지시켰다…. 우리는 3, 4월 항쟁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이 땅의 역사사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봉건, 반외압세력 반매판 자본주의 위에 세워지는 민족혁명을 이룩하는 길 뿐이다. 이 민족혁명 수행의 앞길에는 깨어진 조국의 민족통일이라는 커다란 숙제가 놓여있다···우리들은 이를 위하여 나아간다. 외롭게 가신 3, 4월의 영웅과 전체 선열들의 무덤에 민주승리의 그날을 드릴 그날까지”


  그리고 네 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했는데 그중 통일 관련된 부분이 “우리들 서울대학생은 조국의 자주통일을 방해하는 외압세력과 이에 결탁하는 사대주의 세력을 일절 배격한다”고 선언, 통일운동이 제2의 학생혁명임을 규정했다.

  서울대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민통련)도 기념식을 갖고 선언문을 발표, 적극적으로 통일운동 전면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조국 분단의 전책임은 국제공산주의와 독점자본주의 및 그들의 추종자들인 냉전 추종자들의 반민족적 사대주의자들이 냉전 청부행위에 존재한다. 민족의 조속한 평화통일을 위하여 전 민족 자주세력은 총집결하여 남북한의 문화교류, 서신왕래, 경제교류 및 학생회담을 포함하는 비정치적 인사교류를 위하여 제 1차적 투쟁을 전개하고 외세에 의하여 강제되는 분단 상황의 고정화와 군사가지의 심화를 분쇄하라”

  대부분 대학에서 통일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고가도 못하느냐’, ‘언론인 사회단체 남북교류’, ‘민족자주 통일’, ‘외세는 물러가라’, ‘한국문제는 한국인의 손으로’, ‘남북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속지마라 소련놈, 믿지마라 미국놈’, ‘이북 쌀 이남전기’

  청년단체도 성명서를 내고 민족통일의 시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알렸다.

  “…북진통일론으로 민족통일을 실질적으로 방해하던 반민족 도배들도 3, 4월 혁명으로 인하여 민족친화와 민족번영의 길이 오직 평화통일이라는 대전제를 거부하지 못하게 된 오늘날, 선건설 후통일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결과적으로 통일을 원치 않는 무리들이다. 소위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국토건설을 시도한 장정권의 정책은 무계획과 허위성을 폭로하였다. 통일 없이는 못살겠다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고 민족양심의 명령이며 배고파 헤매는 동포들의 뼈 속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제 국내적으로도 통일세력은 강화되고 국제적으로도 통일기운은 성숙하고 있다. 장면 정부도 유엔 정치위원회에서의 ‘스티븐슨’안의 결의를 외교적 승리라고 수락하였으므로 이제 남북 대표자들의 회동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남북의 서신 인사 경제교류가 촉성되는 면에서 민주민족적인 통일조국건설이 실천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성명>


  이제 학생 청년들은 통일운동이 곧 제2의 학생혁명, 학생혁명의 완성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야당인 신민당의 서민호 국회부의장은 유엔총회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그들 유엔의 관심밖에 있다. 우리가 통일을 하겠다는 열의가 있으면 유엔을 믿고 있을 수만 없다. 유엔이 현재 운영방식으로 한국의 통일은 요원하다. 우리끼리 남북협상을 해서라도 전 국민의 숙원인 통일과업을 이룩해야 한다.”

  또 양일동(신민당)의원도 비정치인의 남북교류 실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혁신계의 주장인 중립화 통일문제까지 언급했다.

  4월 혁명이 절정기를 이룬 것은 4월 25일 교수단의 시위였다. 이 사건은 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크나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교수들이 4월 25일 시위 1주년을 맞아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한국교수협회(회장 조윤제, 부회장 정석해 이상은)는 다음과 같은 대 북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학생들의 영웅적 항쟁과 시민이 궐기로 성취한 4월 민주혁명의 1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수협회는 4월 혁명에 있어 독재자 이승만의 하야를 불가피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4.25 대학교수단 데모를 기념하고 북한의 교수, 학자, 문인, 예술가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는 통일의 기본정신이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니와, 현하 더욱 다급해진 이 통일의 과업에 대하여 우리들의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하고 흔쾌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대들과 만나 통일을 위하여 논의하고 싶었다. 우리가 이승만을 내쫒은 것과 같이 그대들도 김일성을 타도한 다음 민족의 자주통일을 논의하자”


  비록 조건이 있는 메시지였지만 통일의 봄, 아니 통일논의의 봄이 왔다. 더구나 장면 정부는 그토록 극심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킨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의 제정을 사실상 포기해 자연스럽게 통일문제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용수는 이미 이 통일운동세력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했다.

  서울 외국어대는 4월 29일, 대강당에서 ‘조국통일과 학생들의 진로’라는 강연회를 계획했다. 이때 연사로 초청된 사람은 정부측은 정헌주 국무원 사무처장, 조재천 법무장관,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의 신상초 의원, 신민당 김용성 의원, 통사당 고정훈 대변인, 사회당의 유병묵 대변인, 학계는 조일문 교원노조 위원장(후에 건국대 총장)그리고 언론계 대표로 조용수였다.

  그러나 정부측 인사는 참석을 거부했고 다시 학생들은 김재순 외무부 정무차관(후에 국회의장역임)을 교섭했으나 거절당했다.(결국 이 대회는 경찰의 압력으로 무산됐지만 당시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 대회는 허망한 미신을 버리고 우리대로의 살기를 찾기 위해 남북 교류와 협상을 주장하면서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5일 서울대 구내 다방에서 전국 17개 대학 민통련 대표가 모여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결성 준비대회를 열고 취지문과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면서 통일운동 기운은 더욱 더 확산됐다.

  북한은 5월 5일, 서울대 민통련 제의에 환영을 나타내면서 회담을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정식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대해 혁신세력은 찬성했고 정부는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민자통은 ‘남북학생회담 환영 민족통일 촉진 궐기대회’를 열어 학생을 지지하려 했지만 경찰은 이 집회를 계속 허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5월 9일 기어이 이북학생과 만날 것을 다짐하는 성명 ‘정부와 기성세대에 준다’를 발표, 정부는 학생회담을 방해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장면 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교류와 학생회담은 위험하고 비정상”이라며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원로들과 일부 혁신계 인사는 각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협의체를 조직해 학생과 구체적인 논의를 할 것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5월 13일, 민자통은 서울운동장에서 학생회담이 실현되게 지원하라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에서’였다.

  이때 연사는 정치권에서 장건상, 선우정, 조기하, 유병묵, 민자통의 박진, 이재춘, 청년 대표로 김금수, 김영광, 학생대표는 이수병(경희대 민통련의장, 민족일보 견습기자) 유근일(서울대 민통련 대의원회 의장, 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이다.

  그러나 정부의 불가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의 정치활동에 대해 학칙에 따라 엄중 처벌할 것을 공언하고 나섰다. 학생과 정부가 다시 한번 대결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5월 13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위원회는 ‘남북한 학생회담 및 통일축제 개최에 관한 원칙 및 우리의 요구’를 발표했다. 이것은 남북학생회담의 구체적 내용을 밝힌 것이다. 학생회담의 우선 전제는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범주에 속하지 않고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민족적 감정과 정분을 소통할 수 있는 문제로 회담을 하겠다는 내용을 밝힌 것이다. 즉, 남북한 학생의 친선 사절단 교환, 남북학생 기자교환, 학생 체육단 교환, 학생 예술단 교환, 학생 통일 축제를 회담내용으로 정했다.

  또 학생회담은 정치적 문제를 모두 배제하고, 월북 월남행위를 금지하고, 이 행사가 일부학생의 주장이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학생투표로 그 의사를 확인 할 것 등을 제안하면서 정부는 이 주장을 승인하고 편의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덧붙였다.

  조용수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내는 신문 사설을 직접 썼다.

  민족의 자주적 세력으로서 남북협상의 단계까지 정세를 발전시키자

  -통일운동자들의 올바른 목표와 자세를 위하여

  조국의 통일에 관한 국내외 정세는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제 민족은 저마다 수세기동안 그네들이 자유와 생존권을 얽매고 있는 철쇄를 끊고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여 수년전만 하더라도 인류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국제정치무대서 굉장한 발언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힘만 결집시킨다면 어떠한 강압자도 타도할 수 있고 여하한 간섭도 배제할 수 있다는 신념과 위대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용기와 자신, 그리고 신념이 바로 조국통일의 원동력이 안 될 수 있을까!… 이때 조국의 통일운동을 추진하는 자라면 모름지기 이 민족주체역량에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조국 통일은 민족이 자주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아선 안될 것이다. 정치적 사상의 차이를 초월해서 순수한 민족적 감정을 기초로 한 남북의 학생회담을 갖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의 제의는 이러한 이유로써 통일촉진을 위하여 지극한 의의를 갖는다. 공통의 민족감정, 이것이야말로 조국통일의 정신적 근저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민족지상의 과업을 수행하는 통일운동자에게 거듭 부탁하노니 통일전선에 보수와 혁신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공명을 다투는 소아가 있어서 안될 것이요, 배타주의가 게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민족일보 1961년 5월 16일자 사설>


  13일 학생의 요구사항은 16일자 신문광고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누구도 그 대세를 막지 못할 듯 학생들의 통일 열기가 점점 북으로 향했다.

  그해 보릿고개는 유난히 넘기 어려웠다. 서울에서도 하루 1천4백석의 보리가 배급으로 방출될 정도였다. 국민은 배급받은 보리로 채우지 못한 허기를 통일의 열망으로 분출했다.

  그리고 1960년 5월 16일의 새벽이 밝아왔다.

 

제 4 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1.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60년 11월 4일.

  조용수는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낙선의 회한을 달랬다.

  “이번 기회가 나의 뜻을 펼쳐 볼 수 있는 처음의 기회였는데 ···괜찮다고는 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영근 선생에 대한 면목도 안서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혁신은 곧 공산당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혁신계가 단일화 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이번에 추진하는 민간통일 기구 민주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을 통해서 통일을 갈망하는 세력이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데”

  조용수는 공천과정과 선거 전후에 나타난 혁신의 분열, 자신의 목전 이익만 따지는 혁신인사에 적지 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도 독립운동, 통일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던 사람이라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조용수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이영근을 찾았다. 언제나 이영근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조 동지. 좋은 경험한거야. 그래도 득표를 많이 한 것이야. 그리고 일전에 연락 준 민자통은 잘 진행이 되고 있나”

  “예, 일단 민자통 구성을 위한 주비위원회를 9월 3일 구성했습니다. 9월 15일 이미 자주 민주 평화의 3대 통일원칙도 발표했구요. 지금 각계 인사에게 가입 서류를 보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 대부분 혁신계 인사 같습니다”

  “그럴 거야. 보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통일이 안 되길 내심 바라고 있을 거야.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르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흩어진 혁신계의 통합을 민간단체에서 이루기에는. 아무튼 좀 쉬라고. 할 일이 더 많아질 테니까. 자네 부인이 기다리고 있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조용수는 동경에 머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사회대중당 결당식, 김달호계만 3백여명 모여 종로구 진명여고 강당에서’ ‘전 근로인민당계의 최근우, 유병묵, 유한종, 하태환···사회당 결성 선언. 종로구 청진동 임시 시무실에서.’

  통일과 혁신에 대해 정말 사소한 문제로 혁신계는 또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렸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외형적으로나마 민자통 결성을 주도하고 있는 이종률, 박진 선배의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진은 상해 윌리암스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상해 임정의정원의원을 지내고 상해청년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 후배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며칠 후 이영근은 조용수와 이야기 도중, 지나가는 말로 ‘한국에 가서 신문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라는 말을 했다. 당시 이영근은 동경에서 열흘에 한번씩 발행되는 ‘통일조선신문’(統一朝鮮新聞)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들었으나 집으로 돌아 온 조용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조용수도 지난 선거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혁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 가를 체험했다. 때문에 혁신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였다.

이튿날 조용수는 이영근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어제 말씀하신 신문을 만들자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저도 지난번 선거에서 아주 절실히 체험한 것이기도 하구요.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절규하고 혁신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간신문을 하나 만들려면 상당한 자금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 지금 조 동지에게 그런 돈이 없지 않은가”

  “돈이야 만들면 됩니다. 지금 선생님이 만들고 있는 통일조선신문도 돈이 있어서 만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동지의 도움으로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신문을 만들기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혁명 후 혼란스런 사회에서 국민이 혁신과 통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 언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번에 정권을 잡은 장면이 누구입니까. 이광수에 머금 가는 사람 아닙니까. 독립운동을 같이한 이승만이 혁신세력을 그렇게 말살하려 들었는데 장면은 더 혁신계를 탄압할 사람입니다. 이럴수록 우리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문이 절대 필요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번 결심하면 무서운 집념으로 이루고야 마는 조용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영근이다.

  “그래 한번 해보지. 나도 힘껏 도우겠네. 내가 지금 일본에서 하고 있는 일이 조국의 평화적 통일운동 아닌가. 이런 일을 하려면 직접 고국에 들어가서 해야 하는 데 내가 그럴 처지도 아니라서 이렇게 일본에 있는 것이니까. 오히려 조동지의 역할이 더 클 수 있지”

  다음날부터 조용수는 신문의 창간준비를 위해 뛰어다녔다.

  먼저 배기호(裵基鎬)를 만났다. 그도 지난번 한국의 7·29선거에 구미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사람이다.

  “배 선배, 제가 서울에 가서 신문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신문을?”

  “예 지난번 선거에서 혁신은 곧 공산당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문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텐데”

  “자금은 여러 곳에서 모으면 됩니다. 선배님이 좀 도와주세요”

  “알았네. 큰 힘은 못되더라도 조금씩이야 모을 수 있지”

  조용수는 이영근을 통해 박용구(朴容九)를 만났다. 박용구는 당시 재일교포 사회에서 가장 큰 재력가로 통했다. 그는 일본 기업과 정치인을 상대로 대규모 고리대금업을 해 당시 동경 아가사카에 큰 빌딩까지 소유했다. 그는 일본 정재계에도 막강한 인맥을 갖추고 있고 민단 내부에서는 혁신파로 분류됐다. 이영근과 박용구는 같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한국에서 신문을 만들겠다는 얘기는 이영근을 통해 들었네. 그런데 일본에서만 생활해서 한국 실정을 잘 모르지 않는가”

  사실 박용구는 자유당 정권 때 한국에서 사업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일본에서 번 돈을 들여와 국내에 투자했지만, 이승만에게 잘못 보여 투자한 자금을 모두 날리고 교도소까지 갔다. 조용수도 박용구의 그 점을 잘 알았다.

  “선배님.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선배님도 일본에서 돈을 벌어 일본에서 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국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내가 돈을 도와준다고 해도 아직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불법일 수밖에 없어. 지금 일본 세무당국과 경시청의 감시가 심해서 말이야. 아무튼 원칙적으로 자네의 생각에는 찬성하네”

  <박용구는 평소 “일본놈을 잡아먹으며 돈을 벌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일본 교포사회에서 가장 큰 거부로 당시 한국 삼성의 이병철 회장보다 돈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파친코와 고리대금업 이외 일체의 다른 사업을 허용하지 않아 사업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5·16후 박정희는 그에게 인하대학교를 줄 테니 공화당 재정부장을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그 후 한일회담 반대시위(6·3사태)를 보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 후 박용구는 일본에서 장학재단을 만들어 육영사업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와 불편한 관계 때문에 일본 세무당국의 기습적인 세무조사를 받고 무너져 버렸다. 그 세무조사는 박정희가 일본정부에 요청했다는 소문이 재일 교포사회에서 파다하게 돌았다. 당시 롯데 신격호는 재력에서 박용구보다 한참 뒤떨어졌지만, 박정희와 좋은 관계 때문에 한국에서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된다. 그가 조용수에게 돈을 대주었어도 당시 돈을 주었다고 말할 수 없던 것은 일본 세무당국의 집중적인 감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4년 윤수길 증언>


  이밖에 일본에서 파친코 기계를 제작해서 큰 돈을 모은 정동필(鄭東弼), 이희원(李禧元) 등 교포유지에게도 지원을 약속받았다. 조용수는 물론 장인과도 상의했다. 조용수의 장인은 도치키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며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위가 큰일을 한다는 데 내몰라 할 수 없어 어느정도 자금을 지원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용수는 어느 정도의 자금은 쉽게 마련했다.

11월 21일. 조용수는 자금조달에 한창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 이영근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한국에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송지영이 동경에 와 같이 있는데 와서 인사하라는 것이다.

  조용수는 국장(國莊)온천 호텔에서 송지영을 만났다. 이영근은 과거 조봉암 비서로 있을 때 당시 태양신문 기자였던 송지영과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이영근은 조용수를 송지영에게 인사시켰다.

  “내가 가장 아끼는 조용수라는 청년이오. 지난번 7·29 총선에서 낙선하긴 했지만 뛰어난 식견과 조국애를 가지고 있지요. 이 청년이 서울에서 신문사를 운영할 터이니 선배로서 잘 보살펴주세요”

  “물론입니다. 제가 아는 데까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송지영이 일본에 온 것은 한국전통사 사장으로 통신사와 TV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자재교섭을 위해서였다. 또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재일교포 재력가 권일씨를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송지영에게 TV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자금조달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그해 12월 30일, 송지영은 이영근에게 3천만환을 빌려 귀국했다.

  조용수는 일본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다. 이영근은 서울에 있는 윤길중 의원과 자신과 경복중학 동창인 고려대 이건호 교수, 같이 활동했던 박진목 동지, 사업적 감각을 가진 안신규 동지 등을 통해 조용수를 도와 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조용수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12월 초하루였다. 조용수는 서울로 향하며 어떤 신문을 만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얻은 조용수는 계속 자금 마련에 분주했다. 그는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진주중학 동창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또 혁신계를 대표할 신문을 만드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장건상, 최근우, 서상일, 윤길중씨 등을 부지런히 만났다. 일본에서 인사한 송지영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만나 신문사 설립에 따른 기술적인 자문과 실무 인선에 대한 추천을 받았다.

  12월 13일, 조용수는 윤길중 의원과 무교동 ‘형제집’에서 마주 앉았다. 윤길중은 이미 조용수가 신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윤길중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승만이 국민을 우롱했던 무력통일론이 일반인의 의식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지난 선거에서 실감했지 않았나. 지금 세계정세가 변해 한참 변했는데 아직도 무력통일을 믿고 있는 지. 설사 위정자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윤길중은 무력통일은 민족을 모두 멸망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 자신은 당선됐지만 지난 선거에서 혁신세력의 패배도 그에게는 충격인 듯했다. 조용수는 잠자코 술만 마셨다. 어떻든 자신은 지난 선거에서 패자였기 때문이다. 혼자 몇 잔을 들이킨 조용수는 말을 열었다.

  “누구보다 제가 그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국민에게 올바른 민족의식을 일깨워 줄 신문을 만들려고 합니다”

  윤길중도 술을 많이 마셨다.

  “애기는 들었네. 우리 혁신계에서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지. 그러나 모두 어렵게 살아가는데 누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지. 조동지가 큰 결심을 한거야. 나도 전적으로 도우겠네”

  “지금 4월 혁명의 주역들인 학생들은 국민계몽을 한다고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을 비롯한 기성세대는 항상 학생의 뒷북만 치고 있지, 누구 하나 그들을 이끌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요. 아니 학생을 이끌 생각은 고사하고 일반 국민들을 이끌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이번에 만드는 신문에서 윤 의원이 발행인을 맡아 주세요”

  윤길중도 기꺼이 이 제안에 찬성했다.

  “물론 나도 신문창간작업에 노력하겠네. 자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네.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아는 전라도 광주 몇몇 사업가가 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나 돈을 대라고 말해 보겠네”

  윤길중은 이날, 만드는 신문은 시사성도 좋지만 국민계몽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 신문이니까 제호는 ‘대중일보’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조용수도 좋다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윤길중 증언>

  그 다음날 조용수는 자신의 충무로 사무실을 대중일보 창간 준비사무실로 바꿨다. 그리고 정부에 신문발행 신청서를 냈다. 제호는 ‘대중일보’였고 발행인은 국회의원 윤길중으로 했다.

  이어서 조용수는 박진목을 만났다. 박진목과는 어려울 때 아니면 인간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됐다. 사실 조용수의 눈에 박진목이라는 인물은 조금 특이한 존재로 보였다.

  조국을 걱정하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났지만 상당수 선배는 구체적으로 조국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 할 비전을 가지지 못했다. 그 원로 선배는 열정만 앞섰다. 형편도 어려워 자신에게 돈을 얻으러 오기 급급한 선배도 많았다. 그러나 박진목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오히려 고생한다며 돈을 쥐어줄 줄 아는 선배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용수에게 그는 역사를 꽤 뚫는 눈과,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찬 인물로 보였다.

  조용수는 충무로의 한 다방에서 박진목을 만나 이영근이 보낸 편지를 전해주며 신문창간 계획을 털어놨다.

  “이 근처 충무로에 사무실을 하나 냈습니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섭니다. 이미 대중일보라고 등록도 했습니다. 발행인은 윤길중 의원으로 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소식은 들어 알고 있던 박진목은 조용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었다.

  “신문창간의 목적이 뭐냐, 또 자금이 되는가”

  조용수는 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즘의 세계정세를 보아도 그렇고 우리나라는 평화적 통일이 절대적 사명입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은 우리가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공산당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잘못된 인식을 계몽하고 또···지금 분열된 진보적 민주세력을 하나로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참 조용수의 말을 듣고 있던 박진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지적했다.

  “발행인을 윤길중씨로 했다면···윤길중씨가 핵심적 역할을 하는 사회대중당은 지금 분열돼 있지 않은가.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혁신의 특정계파가 발행인을 하면 널리 사람이 모이겠는가”

  조용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지난 7일 혁신계 민의원 참의원은 혁신구락부를 결성했고, 15일에 장건상 선생님이 혁신계의 단합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 이번 26일 범 혁신계 인사들은 물론, 평화적 자주통일을 위한 모임인 민족자주통일 협의회가 결성을 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분위기는 평화적 통일을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아직 혁신인사는 자신의 눈앞의 이익 때문에 통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신문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진목도 조용수의 생각에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그리고 뒤에서나마 열심히 돕겠다는 약속도 했다.

  12월 27일 민자통 준비위원회는 남북한 경제 문화 교류 및 서신교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뜨거웠던 1960년 한해가 저물었다.

  새해 들어 윤길중은 장건상과 추진하던 혁신정당을 파기하고 우파적 입장에서 새로운 혁신정당을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또 사회혁신당의 고정훈도 새로운 혁신정당을 추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월 8일, 장건상은 혁련계와 전 사회대중당 중도파를 모아 혁신당 결당 준비대회를 열어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유엔 협조 하에 통일, 영세중립국으로의 전환이라는 정강까지 채택했다. 바로 그날, 정순학은 민족자결의 원칙에서 조국이 통일되어야 한다며 조국통일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새해 들어 혁신세력의 분열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정치색채가 적은 민자통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각 혁신 정파마다 조금씩 다른 통일방법론에 어떠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1월 15일 민자통 준비위원회는 다음의 통일 선언 및 강령을 발표했다.

  - 통일선언서

  8·15 해방의 감격과 환희는 일장의 춘몽인양 유래 15년 동안 우리는 억압과 빈궁 속에서 허덕였고 겸하여 민족상잔의 일대 참극까지 겪어온 것이다.

  이는 실정의 누적과 민족자주역량의 결여 등에 기인된 바 크다 할 것이나 그 보다도 더 큰 근인은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이 분열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지상명령이며 최대의 염원인 통일성업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앞에는 고난과 민족적 수치만이 더한층 가중될 것이며 또한 6·25와 같은 비극이 다시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도 하나이며 민족도 하나이다. 수많은 동포들이 부모처자의 소식조차 몰라서 애절한 것이 오늘의 현상이며 문물이 상통되지 못하여 모든 사업은 위축일로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속일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우리는 외원에 의존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외원이 충족하다 할지라도 이는 영구한 지속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영구히 외원에 의존하는 민족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경제의 자립이 없는 곳에서 정치적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정치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국가의 독립이 있을 수 없다.

  이승만 독재자는 그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망국적인 북진론을 고창하였고 자신의 안일과 호화만에 급급한 일부 정치인들은 공상적 통일론을 제창하면서 시대의 요청이며 국제상식이 된 평화통일론을 짓밟고 있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국제정세는 평화노선을 지향하고 세계 각 약소국들은 속속 독립을 달성하여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통일독립국가로서 국제무대에 진출하지 못함을 통탄하는 바이다.

  수많은 선열의 흘린 피와 4월의 뿌린 피는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의 발전 민족장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이 정신에 따라 하루속히 통일성업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외세에만 좌우될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고 미·소 양국 및 국제의 공정한 협조를 촉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문제는 우유부단한 정부의 활동에만 맡기고 있을 것이 아니라 범 민족운동을 통하여 정부를 독려하고 유엔에 제청하는 등의 온갖 활동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당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서 민족역량을 총집결하는 민족민주통일 협의회를 구성을 준비하면서 3·1의 독립선언 정신에 입각하여 민족자주통일을 선언하는 바이다.

  전체민족은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깃발 아래로 !


  - 강령

1. 우리는 민족자주적이며 평화적 통일을 기한다

2. 우리는 민족자주역량의 총집결을 기한다

3. 우리는 민족자주의 처지에서 국제우호의 돈독을 기한다


  1차로 선출된 중앙준비위원 1천명의 명단이 함께 발표됐다. 중앙준비위원에는 김성숙, 서상일, 여운홍, 장건상, 최근우, 정화암 등의 혁신원로를 포함해, 고정훈, 김기철, 박래원, 송남헌, 신창균, 문희중, 박진, 이동화, 유병묵, 최백근, 윤길중 등의 혁신계 중진, 도예종(후에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당함) 이수병(역시 같은 사건으로 사형 당함) 김금수(후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자동(민족일보 기자) 정구호(후에 경향신문 사장) 등의 당시 젊은 층도 참가했다. 비단 이 단체는 혁신세력뿐만 아니라 조윤제 등 당시 4·19혁명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교수도 참여했다.

  물론 조용수도 여기에 참여했다. 사실 조용수는 이 민자통을 만드는 데 있어서 상당한 재원을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민자통의 아이디어는 이종률이 낸 것이다. 이종률은 비 정치적 국민운동기구를 구상해, 가입대상을 정부여당인사는 물론, 보수세력까지 포함하는 범 통일운동 단체를 구상했지만, 회원이 가입하는 과정에서 진보계 인사만 가입해 기구의 성격이 자연히 진보적 성격이 됐다. 이종률은 민자통이 이렇게 변질된 것에 아쉬움을 나타내며 그 후 자신도 활동이 소원해 졌다고 재판에서 말했다” <박진목 증언>

  하지만 일부 인사는 민자통이 너무 급진적인 노선을 갖고 있어 탈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고정훈, 이동화, 송남헌 등이 그런 사람이었다.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한 길’, 한울, 2000>



2. 신문 창간 막후


  61년 1월 20일경.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 10여명이 을지로 1가 아서원에 모였다. 서상일, 최근우, 박진목, 윤길중, 고정훈 등의 혁신계 인물과 이종률, 이동화, 주홍모, 이건호 교수, 조동필 교수, 송지영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절친한 안신규, 그리고 조용수 등이다. 이 자리는 신문의 제호와 임원진을 확정짓는 자리였다. 누군가 먼저 말문을 얼었다.

  “혁신하면 빨갱이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혁신계의 정치적 이념을 올바르게 심어주기 위해서 신문을 창간하려고 한 것입니다”

  회의는 부산대 이종률 교수가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이종률 교수가 이 모임에 참여한 것은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인연 때문이다. 이종률은 이영근이 죽산 조봉암이 구속되면서 부산으로 피신했을 때,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일본으로 밀항을 도왔던 인연이 있다.

  이종률은 이미 28년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중 우리말 연구회 사건으로 퇴당당하고, 학생운동회인 성진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36년 형평사운동을 배후에서 조정하다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게다가 4월 혁명 후 부산대 교수로서 청년재야 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을 지도하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조용수가 신문을 만든다고 했을 때, 이영근은 부산대 교수로 있는 이종률에게 창간작업을 도와주라고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또 조용수와 이종률은 이미 민자통을 만드는 데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였다.

  이종률은 신문의 성격을 미리 규정하고 나섰다.

  “이 신문은 민족적 즉 민족이 장래를 지향하는 신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건호 고대 교수는 이 회합에 참여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혁신 인물들인 것에 내심 놀랐다. 자신은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경복중학 동창으로 지난번 일본에 국제회의 참석차 갔을 때, 이영근을 만났다. 그때 이영근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온천에 조용수를 불러 인사를 시킨 적이 있어 이미 조용수와는 구면인 셈이다. 이 교수는 이영근이 도와달라고 해 이 자리에 참석했지만 영 불편했다. 그는 한마디만 하고 서둘러 나왔다.

  “신문은 일반적인 민족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건호는 아무래도 이 자리가 자신의 정서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신문의 제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화제에 올랐다.

  서상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호가 뭐 중요합니까. 대중일보로 등록을 했다니 그대로 가는 게 어떨까요”

  “대중일보라는 제호는 전에 있던 것인 데 아무 상관없는 우리가 다시 쓸 이유가 있을까요”

  “조양일보는 어떨까요”

  이런 저런 이름이 10여가지 거론됐다. 그러나 이거다 하고 딱 맘에 드는 제호는 없었다. 이종률과 서울대 주홍모 교수가 슬그머니 나갔다 들어왔다. 아마 이종률이 주홍모에게 무언가 언질을 주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주홍모는 제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중, 조양일보도 좋지만 민족의 개혁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다는 신문인데 민족일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종률이 거들고 나왔다.

  “좋습니다. 제호에 힘도 들어있고 또 지향하는 바를 뚜렷하고 나타낼 수 있는 제호라고 생각 합니다”

  모두 ‘민족일보’라는 제호에 찬성했다.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가 신문을 만들 것인가였다. 이종률은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신문을 키우려면 인선에서부터 폭을 넓혀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사장에 이인, 편집국장 고재욱, 필진으로 김팔봉, 조윤제, 이건호씨 등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종률은 자신이 주필을 맡겠다고 나섰다.

  박진목이 말문을 열었다.

  “대혁신계의 통합도 이 신문의 중요한 임무인데, 현직 사대당 당수가 발행인이 되면 무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존 혁신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새 인물을 영입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신문을 만드는 데 자신이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많았고, 혁신의 각 계파는 자신의 세력을 신문사에 심으려 치열하게 로비를 했다. 또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신문의 제작에 서로 참여하려고 애썼다.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사회당의 청년외곽단체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등 일부 재야단체는 몇몇 부장에 자신의 세력을 추천, 자신도 신문제작에 참여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여기도 혁신의 통합 못지않게 이견이 많았다. 사회당 최근우가 사장으로 추천되면 통사당 윤길중이 반대하고, 정당 당수가 사장으로 추천되면 민자통 쪽이나 교수들이 반대했다.

  사회대중당 이동화는 사상일을 사장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일본에 있는 이영근은 최근우를 사장으로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신문사를 실제로 만들고 있는 중요한 인물은 조용수였다. 일본에 있는 이영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용수는 자신이 추진하는 신문에 서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툼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렇지만 조용수는 원로 선배를 밀치고 앞으로 나설 처지가 아니였다. 그는 조용히 이 자리에서 논란을 들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누가 경영 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략 사장은 원로인 서상일로 하고, 지금까지 실무를 진행한 조용수가 상무 정도로 하자는 선에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회의가 끝나고 박진목은 안신규를 따로 만났다. 안신규는 박진목과 이영근이 서울에서 고생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안신규는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이영근과 가깝게 지냈다. 안신규는 이번 신문 창간에 있어서 이영근을 대리하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거 서로 사장을 하겠다고 난리인데 사람들 경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또 혁신통합운동을 하자는 데 자신의 계파이익만 생각하고 있으니”

  사업경험이 있는 안신규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이 사람들 지금 자신의 이름 생각만 하고 있어. 돈을 어떻게 만들고, 신문사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말야. 무조건 신문만 찍어내면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박진목은 이렇게 제안했다.

  “차제에 정말 신선한 인물을 사장으로 내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 생각에 조용수가 사장이 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네만. 지금 실제로 자금을 모으고 일을 추진하고 있으니 경영도 책임질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만한 사관과 양식을 가진 젊은이도 흔치 않네”

  안신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협의해 보겠네. 이영근은 내심 최근우를 사장으로 생각하고 있는 눈치던데”

  “내가 최근우와 서상일을 설득할 테니까 그건 염려 말게. 나는 조용수를 사장으로 추천할 테니까. 자네는 이영근에게 그렇게 연락을 해 두라구. 이영근도 반대는 하지 않을 거야”

  일은 이렇게 처리됐다.

  61년 1월 25일, 조용수는 자본금 5천만환으로 정식 주식회사 민족일보사를 등록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주당 5천환인 민족일보의 주식분포는 다음과 같아 실질적으로도 조용수의 회사였다. 서상일 1천주, 최근우 1천주, 윤길중 1천주, 조용수 5천2백주, 고정훈 5백주, 이종률 5백주, 안신규 5백주, 안 훈 3백주 계 1만주. 민족일보 주주·주식명단>


  민족일보 창간당시 조용수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저는 작년 여름 그 7·29 선거투쟁 때 일회 내일의 저의 소신을 피력하여 고교(高敎)와 찬동을 얻는 다행도 가졌거니와 애족선배 및 요우(僚友)일동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게 되었음이 지금 생각해도 황송하온 일이오며, 경제적 통치적 및 사회적으로 너무도 불리한 생활들을 하고 계시는 청송 전체 군민 대중들의 그 박복한 모습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집니다.

  원래 산전(山田)이 많고 약간의 평야가 있다손 치더라도 박토이며, 그리고 거기서 생산하는 양식과 소득을 나누는 모든 관계가 실질적 봉건 유제(遺制)의 속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또 이승만적 악정이 지속되는 조건 이외에 특히 이곳은 궁핍하고 도회지로부터 길이 멀게 되어 있는 등의 사정 때문에 군민대중들은 이제 극도로 가난하고 답답한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전체 조국을 민주적이며 통일적이며 부복(富福)스런 국가로 만들면서, 그 별의 하나로서의 우리 청송도 근대적이며 더 진보적인 지역이 되게 하고 거기서 부조전래의 순풍미속(淳風美俗)들이 새로운 단계에로 계승 발전되게 하고, 지방분권주의적 이익획득에 노력하고 아울러 향토애의 자조력과 분발심등에 의한 복지 청송을 건설해야 할줄 압니다.

  중앙에서의 전체 조국을 위한 활동과 지방에서의 구체적인 청송을 위한 활동이 어찌 상호 관련성이 없겠습니까. 먼 곳 여기 서울에 떨어져 있습니다만 배전의 교애(敎愛)와 협조를 주시옵기 삼가 바라옵니다.

  이 동안의 저의 소식 일말을 여쭈오면 ‘7·29’선거 때 저의 공천단체로 되었던 ‘사회대중당’은 해체되고 신명의의 당이 창립되었으나, 저는 거기에 가담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통일적이며 민주애족적인 당 하나를 쟁취적으로 건설해 낼 수 있으며, 그 당의 힘을 중핵세력으로 한 애족적이며 투쟁적인 민족전선적 전체조직을 세력적으로 강화 또는 창건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은 여전히 걱정해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번 이런 걱정들은 실천적으로 갖고서 수고하는 선배 및 요우(僚友)들의 일부가 중심이 되어 일간신문 ‘민족신문사’를 창립했으며 선배 및 요우들의 교도 밑에서 제가 그 대표취체역으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계도적 이론과 보도의 민족공기’라는 구호 밑에서 저희들 동인 일동은 애족적 성명(誠明)을 갖고서 분투할 것이오며, 저도 그중 한 사람으로서 또 사의 대외책임자로서 성심껏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교애(敎愛)가 계셔주시옵기 거듭 바라옵니다.

  끝으로 고당의 만복을 비옵고 예는 삼가 가추지 못하나이다.

1961년 1월  민족신문사 대표취체역

  <이 원고는 전체 8매인데 맨 앞 1매가 없는 상태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자신이 출마했던 청송 지역구민에게 보냈던 인사말인 듯한데, 신문을 만들게 된 조용수의 의지와 정치적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또 그때까지 민족일보는 가칭 ‘민족신문사’로 불렸던 것 같다>


  당시의 중역진으로 취체역 회장 서상일, 이사격인 취체역에 윤길중, 이종률, 고정훈, 상임감사에 안신규가 선임됐다. 주필 겸 편집국장은 이사인 이종률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민족일보의 주식회사 형태는 일반 주식회사와 조금 다른 정관을 가졌다고 한다.

  “민족일보는 일반 주식회사와 달리 정관에 신문발행의 책임을 상임 감사가 지게 되어 있다. 조용수 사장이 결재해도 감사실의 나에게 별도로 결재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사전에 상임감사의 승인이 없으면 어떤 사업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임감사인 내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안신규 증언. 그러나 민족일보의 정관을 보면 일반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대표취체역이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일단 진용을 갖추자 민족일보의 창간작업은 더욱 빨라졌다. 창간은 2·8 독립선언 기념일에 하기로 결정했고 민족일보가 지향하는 네 가지 사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첫째,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둘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셋째, 민족일보는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넷째, 민족일보는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이 네 가지 사시는 민족일보의 창간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솔직히 나타내고 있다.

  원래 계획했던 2월 8일 창간은 여러 가지 여건상 쉽지 않았다. 이 신문에 참여하려는 사람 대부분은 이름만 앞세운 것이지 실제 돈을 마련하고 일을 꾸려나가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월 29일. 드디어 민족일보라는 이름이 신문지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광고를 통해 신문의 제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4·19후 워낙 많은 신문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지만 부정을 고발하고, 근로대중의 이익과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 성격의 신문이 만들어 지기는 처음이다.


  <민족일보 창간에 즈음하여>

  이미 허다한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일보라 제호하는 또 하나의 일간신문을 세상에 내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는 이 신문이 발행되는 몇 가지 말씀할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흔히 신문은 경세의 목탁이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있으나 필연 이것은 정당한 평가일런지요. 일부분의 신문은 오늘날 그 소유자들과 집필자들에 의하여 부당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자기의 이익으로 생각하는 신문경영자, 집필자가 몇 사람이나 될런지 이것은 하나의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신문을 또 하나 늘릴 생각은 터럭 끝만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국토의 양단, 민족의 상상적 분열, 생활의 도탄, 사회악의 창궐, 이것을 광정(匡正)하는 것이 이 나라 이 백성의 이익이 되는 것이나, 이 점을 망각하거나 고의로 무관심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지려는 또 하나의 언론기관 민족일보는 이와 같은 현실을 자신의 문제로 확신하고 민족의 봉화가 될 것을 자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일보는 결코 어떤 개인, 어떤 정당정파의 이익을 위하여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이 나라와 이 나라 전 인민의 이익과 행복만을 위하여서만 그 활자 하나하나를 참되게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 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열열이 정력을 바치려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하는 민주적 애국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서 하루속히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절실히 염원하면서 선구적 구실을 담당할 것을 사양치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민족일보는 명칭 그대로 우리 민족의 대변자가 될 것만을 기도함으로 민족의 이익에 배치되는 모든 부정과 부패에 대하여는 가장 가열한 고발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할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오도하는 모든 비과학적 신비주의적 주장에 대하여는 예리한 감시자가 될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민족일보는 언제나 비정상적인 것과의 타협을 긍정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즉 민족일보는 혁신적이라고 불리 워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각오와 취지가 어떠한 열매를 열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은 오로지 독자 여러분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신문이 본질적으로 여러분의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일보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마찬가지로 넉넉지 못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지지와 편달을 얻어 앞날의 발전을 기하고자 할 따름 입니다“

<1961.1.29 민국일보 석간>

  이것은 민족일보의 태동을 알리는 일종의 예고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예고문과 함께 전국일원의 지사지국 설치 광고도 함께 실었다. 지사지국 모집 광고에는 민족일보의 필진을 함께 소개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조윤제(홍익대 교수. 4월 교수데모 주동) 송지영(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이동화(성균관대 교수, 사회대중당) 조동필(고려대 교수) 이건호(고려대 교수) 유병묵(중앙대 교수, 사회대중당) 고정훈(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박기준(朴琦俊) 주홍모(서울대 교수) 김철(金哲) 김병태(金炳台) 박창근(朴根昌)

  이들은 당시 진보적인 학자나 교수로 당시 지식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창간작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 광고를 통해,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 민족일보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실 민족일보는 지사지국 모집에 있어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다. 부산지역 지국설치에는 무려 1천만환에 계약이 이뤄졌다. 말이 지국보증금이지 어떻게 보면 혁신운동에 대한 일종의 성금 성격을 띤 것이 사실이다. <안신규 증언>

  그러나 일은 순탄하게만 진행되지 않았다.



3. 장면정권의 음모


  61년 1월. 뜨거웠던 혁명의 기운이 차가운 대지위에 식으면서 짙은 김을 내뿜었다. 장면총리는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조재천 법무장관과 현석호 내무장관을 만났다. 장면총리는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요즘 소문 듣고 있어요?”

조재천 법무장관과 현석호 내무장관은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요즘 일부 혁신세력이 조총련의 자금지원을 받아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말입니다”

  장면의 말이 떨어지자 현석호 내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거요.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쪽 사람이 모여 회합을 가졌는데 무슨 신문을 만들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신문을 만드는 데 드는 돈을 누가 댈 것이고, 또 어떤 신문을 만드느냐가 중요한거요. 일본에서 반한 활동을 하는 이영근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돈을 댄다는 거 아닙니까”

  조재천 법무장관이 말문을 열었다.

  “저도 이영근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데, 그 사람이 북쪽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겠습니다. 검찰에서도 지난번 조봉암 사건 때 조사를 했는데, 그런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어요. 물론 법원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무죄가 됐지요. 아마 지금 그 사람 일본에서 조그만 주간신문을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면은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국내에서 도망가서 일본에서 무슨 돈으로 어떻게 지냈는지. 그런 사람이 조총련에 다리를 놓아 국내 혁신계와 연계해 모종의 음모를 꾸밀 수도 있잖아요. 또 그 사람은 원래 우리와 성향이 달라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만들면 분명, 우리한데 이로울 것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대책을 마련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너무 드러나게 하면 말 많은 혁신세력이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떠들테니 조심스럽게 내사 하세요”

  현석호 내무장관은 청사로 돌아오자마자 김포공항 경비경찰대장을 불렀다.

  “요즘 일부 혁신세력이 일본의 조총련과 연계해 국내에서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오. 특히 재작년 일본으로 밀항했던 이영근이라는 사람을 주목하시오. 일본을 오가는 혁신계 인사의 내사를 강화하고. 꼭 공항뿐만 아니라 부산의 항구도 각별히 체크하도록 하세요”

  법무부 청사로 돌아 온 조재천 법무장관은 이태희 검찰총장을 불렀다.

  “요즘 혁신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서 특별한 게 있습니까”

  이태희 검찰총장은 몇 가지 서류를 챙기면서 말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그래도 잠잠합니다. 혁신세력 내부 갈등문제에 정신이 없고. 그런데 문제는 학원가입니다. 봄이 되면 혁신세력과 일부 학생이 연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건 그때 문제고. 지금 혁신세력이 신문을 만들려고 한다는 데, 그 문제가 우선 급합니다. 벌써 등록까지 마쳤는데”

이태희 검찰총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신문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생기고, 돈이 없어도 신문사를 차릴 수 있는 데, 혁신세력이 신문을 만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자금줄인 바로 이영근이라는 사람이 문제예요. 그리고 이영근이 조총련과 연계되어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나온 신문이 어떤 신문이 될 거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이태희 검찰총장은 그제서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영근이라는 사람은 바로 2년 전,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 때 구속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정치적 구속이었지 별다른 혐의는 검찰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총리의 지시입니다. 특별수사부를 만들어 일본에 있는 이영근의 최근 행적에 대해 조사를 해보세요. 특히 이영근 그 차체가 아니라 이영근과 조총련과 연계를 밝히는 것이 중요 합니다”

  “알겠습니다. 은밀히 수사 하겠습니다”

  “조심할 것은 은밀히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미 국회의원이나 혁신계 인사 상당부분 관계되어 있으니까 섣불리 다뤘다간 말만 많아집니다. 한가지, 이 내사는 치안국에도 별도 공작팀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세요”

  민족일보 관계자에 대한 은밀한 내사가 시작됐다. 김창욱 검사가 그 실무를 맡았다. 동태는 물론 서신까지 감시 대상이 됐다. 특히 일본에 있는 이영근과 접촉은 중요한 체크사항이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이영근이 조용수에게 보낸 편지가 공항에서 압수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창욱 검사와 치안국 공작대는 3회에 걸쳐 일본에 특파됐다. 그들의 수사초점은 이영근과 조총련과의 관계를 캐고, 민족일보의 자금이 조총련에서 유입되는가 여부를 확인하는 것에 모아졌다. 수사팀은 일본의 흥신소와 사설탐정까지 동원해 이영근의 뒷조사를 실시했다.

  5·16후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이용택(전 국회의원)증언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민족일보는 이미 5·16 나기전인 장면 정권부터 특별검찰부 수사국에서 내사를 하던 사건이었다. 우리는 5·16후 그 사건을 그대로 인계받아 수사를 계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특별수사부는 이영근이 조총련과 관련돼 있다는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수사는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오히려 1959년 1월 21일 조총련 중앙위원회가 각 지부에 하달한 ‘민주신문’(통일조선신문 이전 제호) 분쇄 지시공문만 확인했을 뿐이다. 조총련이 이영근을 통해 조용수에게 자금을 전달했다면 왜 조총련이 이영근이 운영하는 ‘민주신문’을 분쇄하라는 통보를 각 지부에 보냈을까.

  이것은 이영근과 조총련과의 무관함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였지만 장면은 어떻든 혁신계 신문이 만들어지는 것을 그냥 좌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무턱대고 신문발행을 중단시킬 수도 없는 것이었다. 민족일보가 창간 작업을 진행시키는 것에 비례해 민족일보 비밀 내사팀은 초조해 졌다.

  이런 가운데 치안국에서 민족일보 내사설이 붉어져 나왔다. 결국 민족일보문제는 국회에서 거론되기 이르렀다.



4. 정치쟁점 된 민족일보


  1월 30일, 국회 민의원 본회의장. 대정부 질문이 막바지에 사회를 보던 이영준(李榮俊) 부의장이 말을 열었다.

  “잠깐 의원 여러분께 양해를 얻고자 하는 것은, 김준섭 의원이 간단히 한마디 물어보려고 하는 특별한 발언청구가 있어서 지금 발언권을 드립니다. 김준섭 의원 나오세요”

  김준섭 의원은 준비한 메모지를 챙겨 단상에 올랐다. 김 의원은 서북청년단 출신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통했다.

  “의장님께서 시간이 없고 여러분께서도 지금 지쳐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발언을 삼가라고 말씀이 있었지만, 제가 말씀하고저 하는 것은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는가, 중대한 위기를 내포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면서 우선 몇 가지 말씀을 올립니다…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을 집행당한 조봉암의 비서로서 다년간 활약했고 6·25 동란 당시에도 부역을 한 이모가 입건 구속되어 2심에서 5년 이라는 실형을 받았습니다. 그이가 병보석으로 가출옥 해가지고… 일본으로 탈출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조총련계가 발간하는 통일조선신문을 운영하고 있고, 그 후 막대한 자금을 정체불명의 단체로부터 받아가지고 한국에 있는 공작원에게 전달했고, 또 그간 각종 선거에 있어서 모모인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했습니다”

  김준섭 의원은 물을 한 컵 마시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작년 11월 15일 그이가 조모라는 사람을 통해서 편지를 한국에 있는 모씨에게다 전달하다 압수되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 편지내역을 본다 할 것 같으면 수억을 보내는 데 있어서 누구를 얼마주고, 또 신문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인사 관계를 어떻게 하라는 등등 기타 불온한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그 후 모정파의 국회의원이 이것을 갖다가, 관계 당국에 가서 그 편지를 내달라 갖은 수단방법을 쓰고 있는 것을 듣고, 내무장관을 만나러 갔더니 마침 없어서 제가 모 차관에게 그 편지의 내역에 대하여 수사가 전개되고 있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또 그이에게 그 편지를 내주면 증거인멸이 될 테이니까 주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했더니 그이가 그다지 신통하게 대답을 하지 않아서 아마 이것이 수사관계상 기밀을 요하는 사안이겠거니 생각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새 듣는 바에 의할 것 같으면, 그 편지를 그 모 국회의원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중대 사건에 있어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그 편지를 갖다가…”

  ‘그 국회의원이 누구요’ ‘이름 공개하시오’하는 소리가 의석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김준섭 의원은 수사기밀상, 또 장관의 답변을 들은 후에 밝히겠다면서 발언을 계속했다.

  “…자 그러면 편지수교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후에 그 편지내역에 대해서 현재 어떠한 수사가 전개되고 있는가, 여기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또 지금 그 계열의 신문사는 현재 어떠어떠한 신문사라고 간판까지 도하 중심지에 붙여, 인선까지 완료해 가지고 일간 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일단 발간할 것 같으면 폐간하기가 어려운 이러한 신문사가 나온다 할 것 같으면 대한민국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통탄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무장관께서는 대공사찰에, 이 치안의 요체인 대공사찰에 대하여 중점적이고 강력한 시책을 해 주시기를 부탁해 마지 않습니다”

  민족일보의 창간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영근, 그리고 실제 신문사를 만들고 있는 조용수, 그리고 현역 국회의원으로 민족일보에 관여해 온 윤길중 의원 등을 거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현돈 내무장관이 답변에 나섰다.

  “…이 문제는 아마 내무 책임자로서 종래에 답변하던 그런 심경보다는 저 자신으로도 중대한 심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방책이 무었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직 제가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기에 내무분과위원회와 더불어 최종 결론을 내린 후에… 이 수사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히 검토한 후에 답변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민의원 속기록>


  국회 본회의 석상에서 있은 이 발언은 이튿날인 31일 각 조간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그 31일자 신문에는 공교롭게도 민족일보의 창간을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나란히 실렸다. 그 신문이 민족일보를 지칭하는 것이고 거기에 관련된 인물들이 누구라는 것은 창간광고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민족일보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발언의 대상인물인 윤길중은 마산에 출장 중이었다. 서울로 올라 온 윤길중은 신문을 보고 조용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오늘 아침 신문 보았는가. 김준섭, 그 사람 미친 사람 아닌가”

  전화상으로 들리는 윤길중의 목소리는 상당히 흥분된 상태였다. 조용수도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봤습니다. 편지를 전했다는 11월 15일이라면,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 그 사람, 무슨 근거로 내가 조총련의 자금을 가지고 신문을 만든다고 국회에서 발언을 합니까. 윤 의원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조건 상대를 빨갱이로 모는 작태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서글픕니다. 지금 해명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네. 보수세력이 순순히 신문을 만들게 놔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하지 않았는가”

  전화를 끊은 윤길중은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역시 본회의에서 신상발언을 신청했다.

  “새로이 발간하려는 민족일보는 혁신유지들의 자금으로 설립된 것일 뿐, 결코 재일 조련계의 자금이 유입되거나, 그들의 조종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일본에 있는 민족적 입장의 교포들 가운데 한국에서도 혁신계를 지지하는 신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조용수는 거류민단에서 활약하던 청년으로 재일교포 북송반대에 압장 섰던 사람이다. 30일 김준섭 의원의 발언은 진보당을 공산당으로 몰았던 자유당 정권의 수법과 같은 것으로, 혁신지를 말살하려는 음모이며 그 진부가 백일하에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날 국회내무위원회에서 신현돈 내무장관은 전날 발언한 김준섭 의원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면서, 문제의 편지는 수사도중에 있어 나중에 발표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 이튿날인 2월 1일, 시경 정보과에서는 ‘조련계의 자금 일부가 민족일보사로 흘러갔다는 단서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에는 치안국에서도 같은 수사를 했기 때문에 수사를 치안국으로 일원화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서서히 민족일보로 사정의 칼날이 향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수사당국이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수는 민족일보와 자신에게 대한 의혹을 해명하는 성명서를 각 신문에 실었다. 해명이 아니라 음해 세력에 대한 반격서였다.


  - 민족일보를 음해함에 반격하여

  재작 1월 30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민주당 소속 김준섭 의원은 현재 서울에서 조련계 정치자금이 들어와 있고, 그 자금의 일부로 일간지의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이 김 의원의 발언이 무엇을 기도함인가. 그것을 여기에서 밝히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항간에서는 그 일간지라는 것이 ‘민족일보’를 가르쳐 말한 것이라고 유언되고 있고, 또 작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통사당의 윤길중 의원의 신상발언을 통하여 ‘민족일보’가 구체적으로 문제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음에 우리는 사실을 밝힐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생이 대표 취체역으로서 2월 8일경,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상에서 그 지위가 빛나기도 한 ‘2.8 민족독립선언’ 기념일을 전후하여 창간호를 내려고 미력이나마 노력을 다하고 있는 ‘민족일보’는 전 민족의 이익과 행복만을 위하고 양단된 조국의 서러움을 하루속히 지양시키는 민족의 공지가 될 것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간이전부터 많은 분들의 기대를 받기도 하며,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지나친 미움과 중상을 받기도 한다.

  만약 전기 김 의원의 발언이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일보’를 지적한 것이라면, 그것은 후자의 소행밖에 더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 ‘민족일보’의 자금은 결코 김 의원이 허무맹랑한 망언을 한 것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