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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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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인 명 록 ∙ 강등인(姜登仁) 황주 공립보통학교 졸업. 46년 북조선 특산기업 황주과실 검사소 소장. 50년 북조선 농업기술협회 창설위원. 1·4 후퇴시 월남. 60년 구국청년단 가입. 60년 민자통 중앙협의회 지도위원. 재정부 차장. 총무위원회 서무. 5·16후 징역 12년 선고. ∙ 강석화(姜石華) 일명 강 훈. 19년 함북 부령 출생. 31년 만주 동흥 중학 졸업. 35년 만주 북만학원 졸업. 48년 한독당 조직부 지도위원. 48년 남북협상 참가. 56년 진보당 가입. 60년 사대당 인천시당 조직위원장. 61년 통일사회당 인천시당 조직 준비위원장. 5·16후 징역 3년 선고. ∙ 강진원(姜振元) 전북 고창 출생. 일본 중앙대학 1년 중퇴. 49년 대한통신사 전북지사 기자. 전북 고창 민주학생동맹 가.. 더보기
제10장 조용수 연보 및 참고문헌 1. 조용수 연보 1930.4.24 경남 함안 출생 봉래국민학교 졸업 1943 경남 진주중학교 입학 1948 - 자퇴 1949.4 대구 대륜중학 편입학, 졸업 1950 연희전문 정경학부 입학 1950 하만복의원 보좌관(경남 경찰국 경사) 1951.9.25 일본으로 건너감. 명치대 정경학부 2학년 편입학 1953.5.30 재일본 한국학생동맹(한학동) 문화위원으로 선출 54- 한국거류민단중앙총본부차장, 민주신문 상임논설위원 1959.4.18 죽산조봉암구명운동. ‘조봉암씨 구명청원서명운동위원회’ 가입 59.12. 민단 도치키현 부단장 유태하 공사 추방운동 도치키현 위원장 재일 한국인 북송반대 도치키현 위원장 1960.3. 일본 도치키현에서 파친코를 경영하는 강호씨 딸과 결혼 6.15 귀국 7.29 사회 대중당.. 더보기
제9장 부록 제 9 장 부 록 1. 일본외교의 특질과 한일회담(조용수 기고논문) -난중난사인 한일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신태양 4291.9.1) 2. 민족의 자주적 세력으로서 남북협상의 단계까지 정세를 발전시키자 -통일운동자들의 올바른 목표와 자세를 위하여 (민족일보 61.5.16) 3. 상고이유서 (4294.9.23) 4. IPI 항의문 5. 재일 조선 언론·출판인 협회 성명(61.8) 6. 조국평화통일 남북문화 교류 촉진 재일문화회의 성명(61.8.28) 7. 민족일보 판결에 대하여/일본 펜클럽사무국장 항의문(61.8.28) 8. 일본 펜클럽 항의문(61.9.4) 9. 오사카 지방 일본인 유지들 항의문 요지(61.9.6) 10. 조용수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 발기인 취지서(61.9.5) 11. 메이지대 한국유학.. 더보기
제8장 조용수 죽음 이후 제 8 장 조용수 죽음 이후 1. 복권된 민족일보 관련자들 5·16 쿠데타가 나고 조용수가 구속되면서 신문은 19일자를 끝으로 나오지 못했다. 공보처 장관은 5월 27일 민족일보의 정식 폐간을 통보했다. 신문사 간부는 모두 구속됐고, 기자를 비롯한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민족일보 간부의 구속이후 직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 도피해야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조용수의 사형 집행과 함께 민족일보는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조용수 가족은 당시 모두 감옥에 있는 주식회사 민족일보사 이사들의 도장을 일일이 받아 62년 2월 12일 주식회사 해산신청서를 냈다. 이것으로 민족일보는 법적으로도 완전히 사라졌다. 신문사의 모든 자산은 압수됐다. 사실 민족일보의 자산이라야 지프 두 대, 책걸상 몇 개와.. 더보기
제7장 총에 꺾인 펜 제 7 장 총에 꺾인 펜 1. 5·16 1호 구속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령 1호를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포고령 2호 금융동결, 포고령 3호 공항 항만봉쇄···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졸지에 일어난 쿠데타 소식은 뜨겁던 초여름을 단번에 냉각시켰다. 각 신문 편집국은 쿠데타 주역이 누구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육군본부 출입기자의 전화가 날아 온 것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다. “쿠데타의 주동인물은 박정희 소장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7시40분 박정희 소장과 김동하 해병대 예비역 소장, 김윤근 해병대 제1여단장, 채명신 5사단장 등이 육군본부를 접수했답니다” 즉각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오후에 들어 박정희에 관한 인물정보가 속속 들어왔다. “경.. 더보기
제6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제 6 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1. 갈등과 발전 민족일보는 가판에서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장면 정부의 탄압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다 다시 발행한 이후 많은 국민은 민족일보를 신문다운 신문으로 평가했다. 당시 언론계는 민족일보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민족일보가 펜대만 들고 나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차림으로 발족했지만 불과 반개월 동안에 5만부의 부수를 발행하게 된 것은 어용지, 보수지의 민의봉쇄 장난에 증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국민(독자)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럼으로 혁신계 신문의 발간을 기성지들도 집권당이나 보수정파와 똑같은 이해타산에서 백안시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자기무능과 부패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건곤일요의 결의가 없고 기성언론계가 낡고 썪.. 더보기
제5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제 5 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1. 민족일보 창간 국회에서 한바탕 논란을 거듭한 후, 민족일보에 대한 논란은 표면적으로 나마 잠잠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창간자금의 출처에 대한 의혹의 눈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시각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 신문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창간자금에 대해 책임질 만한 입장이 아니고 신문창간의 자금은 조용수를 비롯한 몇몇 경영진에 의해 마련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창간 예정일인 2월 8일은 지키지 못했지만 창간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주필 겸 편집국장은 이종률이 담당했고, 취재담당 부국장 겸 사회부장에 경향신문 사회부장 출신의 오소백, 편집책임부국장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출신 권일하 등을 영입했다. 조용수는 기자 구성을 국장 1명 부국장 2명.. 더보기
제4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제 4 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1.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60년 11월 4일. 조용수는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낙선의 회한을 달랬다. “이번 기회가 나의 뜻을 펼쳐 볼 수 있는 처음의 기회였는데 ···괜찮다고는 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영근 선생에 대한 면목도 안서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혁신은 곧 공산당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혁신계가 단일화 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이번에 추진하는 민간통일 기구 민주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을 통해서 통일을 갈망하는 세력이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데” 조용수는 공천과정과 선거 전후에 나타난 혁신의 분열, 자신의 목전 이익만 따지는 혁신인사에 적지 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도 독립운동, 통일운동을 하느.. 더보기
제3장 새로운 꿈을 품고 제 3 장 새로운 꿈을 품고 1. 꿈틀대는 혁신세력 1960년 3월. 일본 도교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도치키현(板木縣) 민단 사무실. 한적한 지방 민단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조용수는 성난 표정으로 신문을 집어던졌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 그 이승만의 노욕은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을 거야. 이것 보라고, 이기붕을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이런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나. 그걸 막을 인물도 없고. 조봉암 선생을 죽였는데도 한국에서는 잠잠했잖아. 이젠 한국에서 이승만과 대적할 더 이상의 지도자도 없어” 같이 민단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윤수길도 거들었다. “조형, 그래 내가 뭐랬나. 이젠 한국에 돌아갈 생각 말고 여기서 터나 잡을 생각을 해” “그래,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아···가봐야.. 더보기